(28) 오탁번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애송시 100편-제28편]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문태준·시인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2.05
(27) 이육사 "광야" [애송시 100편-제27편] 광야 - 이육사 정끝별·시인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2.04
(26) 조정권 "산정묘지" [애송시 100편-제26편] 산정 묘지 - 조정권 문태준·시인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2.04
(25) 김혜순 "잘 익은 사과" [애송시 100편-제25편]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정끝별·시인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2.01
(24)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애송시 100편-제24편]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문태준·시인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2.01
(23)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애송시 100편-제23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 석 정끝별·시인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1.30
(22) 이문재 "푸른 곰팡이" [애송시 100편-제22편] 푸른 곰팡이-산책시1 이문재 문태준·시인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1.30
(21) 천상병 "귀천" [애송시 100편-제21편] 귀천 천상병 정끝별·시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1.28
(20) 정진규 "삽" [애송시 100편-제20편] 삽 정진규 문태준·시인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1.28
(19) 김남조 "겨울바다" [애송시 100편-제19편] 겨울 바다 정끝별·시인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