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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시간이 머무는 곳 (저자: 최경화)

클리오56 2023. 4. 15. 13:51

 

교보문고 책소개
포르투갈 문화&아트 투어 전문가
최경화 작가가 들려주는 포르투갈 여행의 거의 모든 것!
요즘 유럽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포르투갈. 예전에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하루쯤 리스보아(리스본)나 들렀다 오는 여행지였으나, 이제는 온전히 포르투갈만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포르투갈의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걸까? 포르투갈의 인기와 더불어 이 책 역시 2015년에 처음 발간된 이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인기에 힘입어 5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그동안 바뀐 여행 정보도 대거 업데이트했다.

처음 책을 출간할 당시만 해도 최경화 작가는 포르투갈인 남편과 결혼해 리스보아에 정착한 뒤 포르투갈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막 워킹 투어 가이드를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사이 한국 관광객들은 눈에 띄게 늘었고. 도시의 낡은 건물은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탈바꿈했다. 덩달아 한국인이 많이 찾는 물건은 가격이 꽤 올랐다. 처음엔 포르투갈의 골목골목을 누비던 워킹 투어도 포르투갈의 문화와 예술에 초점을 맞춘 좀 더 전문적인 가이드 투어로 발전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럼에도 포르투갈을 포르투갈답게 만드는 칼사다(포장길)와 아줄레주(타일 장식)는 여전히 시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그대로라고 전한다. 다행스럽게도 포르투갈의 커피와 와인 역시 여전히 저렴하고 맛있다고…….
 
저자 : 최경화, 미술사학자

그림 보고 글 쓰고 바느질하고 여행하며 포르투갈에 산다. 동물들과 달달한 음식에 약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대학원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다. 쓴 책으로 『스페인 미술관 산책』, 옮긴 책으로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세상에서 가장 큰 중국책』 등이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과 세고비아 알카사르, 바르셀로나 콜로니아 구엘 등의 오디오 가이드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목차

  • 들어가며

    1. 포르투갈 역사 알기
    포르투갈이 포르투갈이 되기 전
    -디아나 신전
    -밀레니엄 BCP 은행 재단
    -무어인의 성벽
    -메르톨라 성당
    포르투갈, 역사에 등장하다
    -알코바사 수도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형제인가, 원수인가
    -바탈랴 수도원
    대항해 시대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탑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대지진을 극복한 사람들
    4월 25일 포르투갈의 봄, 자유의 날

    2. 포르투갈 문화 알기
    도시를 꾸미는 세 가지 방법
    : 아줄레주, 포르투갈 식 포장길, 그래피티
    -국립 아줄레주 박물관
    -프론테이라 저택
    포르투갈인들의 미적 감각
    : 마누엘리노 양식, 탈랴 도라다, 연인들의 손수건
    -그리스도 수도원
    -산타 클라라 성당
    -상 프란시스쿠 성당
    포르투갈 사람처럼 먹고 마시기
    -포르투갈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법
    -포르투갈의 대표 음식
    -아호스 드 마리스쿠 레시피
    -포르투 와인과 비뉴 베르드
    -세르베자(맥주)
    -카페와 샤 프레투(홍차)
    -포르투갈의 과자
    포르투갈의 3F 파티마, 파두, 축구
    -파두 박물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생가/박물관
    4백 년 전에 사라진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

    3. 포르투갈 구석구석 알기
    리스보아와 근교
    -리스보아, 신트라, 카스카이스, 호카 곶, 알마다, 켈루스, 마프라, 세투발 지역
    포르투와 북부
    -포르투, 빌라 노바 드 가이아, 빌라 헤알, 브라가, 기마라엥스, 바르셀루스, 발렌사, 폰테 드 리마
    중부
    -오비두스, 알코바사, 바탈랴, 토마르, 파티마, 산타렝, 코임브라, 아베이루, 피오당, 비제우, 에스트렐라 산맥
    남부와 대서양
    -알렌테주 지방(에보라, 빌라 비소자,메르톨라), 알가르브 지방, 마데이라 제도, 아소레스 제도

    포르투갈 떠나기 혹은 눌러앉기
출판사 서평

포르투갈의 모든 것을 알게 해주는 특별한 여행서
이 책이 일반적인 여행서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인기 있는 스팟이나 레스토랑 위주의 소개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 한 나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포르투갈의 건국부터 시작해 스페인과 치열하게 싸운 역사, 포르투갈이 역사에 전면에 등장한 대항해 시대와 그동안에 이룬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대지진, 그리고 20세기 포르투갈의 민주주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이 책 한 권으로도 포르투갈의 역사와 속사정이 한눈에 읽힌다.
게다가 미술사를 전공한 작가답게 포르투갈 곳곳의 문화 유적지와 독특한 예술 양식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건물 외벽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아줄레주, 걸어 다니는 도로마저 예술로 승화시킨 칼사다, 도시 곳곳을 수놓은 독창적인 그래피티 등 웬만한 가이드 투어에서는 듣기 힘든 전문적인 포인트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곳에서 벌써 십여 년이 넘게 투어 가이드를 진행한 바 있는 작가의 노련한 설명을 읽고 있자면 마치 함께 포르투갈 골목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다.

포르투갈이 매력적인 이유
포르투갈을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포르투갈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첫 번째는 포르투갈 특유의 복고적인 풍경일 것이다. 좁고 가파른 골목을 오르내리는 노란 전차는 이미 포르투갈의 상징처럼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어디를 가든 향수를 자극하는 편안하고 느긋한 분위기는 유럽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두 번째는 싸고 맛있는 음식이다. 나라의 절반이 대서양에 둘러싸여 해산물이 풍부하고, 온화한 날씨 덕분에 일 년 내내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도 포르투 와인 정도는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가성비 최고인 포르투갈 와인도 빠뜨릴 수 없다. 대부분 내수용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카스테라의 원조 나라인 만큼, 달달한 베이커리의 천국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길게 뻗은 지형 탓에 지방색이 강하다는 점이다. 수도 리스보아와 제2의 도시인 포르투가 마치 경상도와 전라도처럼 아웅다웅하며 견제하는 분위기가 재미있다. 포르투갈다움이 물씬 풍기는 건조한 내륙 지방인 알렌테주 지방이나 온화한 기후로 늘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해안 휴양지인 알가르브 지방, 본토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마데이라 제도와 아소레스 제도의 독특한 자연환경도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보아가 자리 잡은 테주 강변에서 시작해 포르투갈의 북쪽 과 남쪽 끝까지, 그리고 저 멀리 대서양의 섬마을도 두루 돌아보며 포르투갈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씩 풀어준다.

 

내용 및 소감

포르투갈 개요 (나무위키 출처, 간략 정리)

 


포르투갈의 국기는 2:3으로 분할된 초록과 빨강의 직사각형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고 분할선 중앙에는 포르투갈의 문장이 들어 있다. 문장 안쪽에 있는 파란색 도형은 본래 국왕이 쓰던 방패에 장식된 파란색 십자가였으나 십자가의 문양이 훼손되어 5개의 분할된 방패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후 방패 문양에 빨강 가장자리와 노란 성채를 더한 형태로 포르투갈 문장이 완성되었다. 1495년 왕정 시기부터는 문장 위에 왕관이 씌워졌고 1835년 마리아 2세 치하에서는 문장 바깥에 흰색과 파란색 배경을 사용했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이후엔 왕관이 지워졌고 배경이 지금의 초록과 빨강으로 바뀌었으며 포르투갈 문양 바깥에 혼천의가 채워졌다. 초록은 희망을, 빨강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고 혼천의는 새로운 항로의 발견으로 이룩한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면적: 9.2만㎢
인구: 1,014만 (2022년)
인구구성: 포르투갈인 96%, 흑인 1.5%
출산율: 세계은행 자료 1.40명(2020년)
기대수명: 81세(2015년)
종교: 국교 없음, 기독교 84.3%(대부분 가톨릭)
1인당 GDP(2022년): $24,910 / $42,070 (PPP)

경제구조: 관광업과 제조업, 의약산업, 의류산업, 농업 등이 균형있게 분포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은 유럽에서 그리스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불가리아 등과 더불어 산업 구조가 비교적 덜 발달한 구조이다.

역사
868년 포르투갈 백국 성립 (포르투 중심 백작이 지배, 스페인 월세방 신세)
1139년 레온 왕국으로부터 독립, 포르투갈 왕국 성립 (아폰수 1세)
1640년 이베리아 연합으로부터 독립
1910년 포르투갈 제1공화국 성립
1926년 포르투갈 군사 반란 발생, 포르투갈 제2공화국 성립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발생, 포르투갈 공화국 민주화

* 해안선을 따라 걷는 코스인 호타 비센티나(Rota Vicentina)가 서양에서는 아주 유명 => 검색해도 별 자료가 안나옴

 

8~9쪽: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선을 돌아 먼 미지의 땅으로 나아가기까지는 수많은 역경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가 파손됐고 수없이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바다는 '포르투갈의 눈물'이라고 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해안선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뒤 '폭풍의 곶'이라고 부르던 곳은 '희망봉'이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동쪽으로 나아가 중국과 일본에 이르렀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중심이 되는 대신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세상의 끝, 작은 땅에 살던 사람들은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땅을 밟았다. 

 

1. 포르투갈 역사 알기

(1) 포르투갈이 포르투갈이 되기 전

- 비리아투스(Viriatus, ? ~ 기원전 139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했고, 당시 포르투갈 땅에는 루지타니아로 불렸으며 루지타노 혹은 루조라는 부족이 살았다. (오늘날의 포르투갈인들은 루지타니아인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긴다.) 로마의 무거운 세금에 대항하여 루지타노들은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에서 파견된 군대는 이들을 학살했다. 이후 비리아투스가 지도자로 나서 로마와 전쟁을 시작했으며,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로마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다. 몇 년에 걸친 전쟁 후에 로마와 루지타니아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로마는 루지타노 병사 세명을 포섭하여 그들의 지도자 비리아투스를 죽였고, 보상을 요구한 이들에게 로마의 장군은 '로마는 배신자에게 보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후 루지타니아는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놓였고 로마화 과정을 거쳤다.

 

- 로마 제국 이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 수에비족, 반달족을 거쳐 서고트족이 자리를 잡았고 수도를 톨레도에 두었다. 711년 서고트 왕국의 내부분쟁을 틈타 북아프리카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고, 단시간에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역을 점령했다..... 1249년 아폰수 3세에 의해 알가르브 지역이 포르투갈 왕국에 합병될 때까지 5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랍문화는 포르투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포르투갈, 역사에 등장하다

- 아폰수 1세(아폰수 엔히케스, 1109~1185년): 11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의 레온,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6세는 이슬람 왕국과의 싸움에서 위협을 느껴 그리스도 국가의 기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부르고뉴의 젊은 기사 라이문도와 엔히크가 이슬람 왕국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에 두 딸을 이들과 결혼시켰으며, 그중 둘째 사위 엔히크와 테레사가 받은 영토가 포르투갈 백작령이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아폰수 엔히케스이었으며, 나이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 테레사가 섭정하였다. 1128년 아폰수 엔히케스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힘을 합쳐  어머니 테레사와 친카스티야파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백작령의 지도자가 된 아폰수는 1139년 무어인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한 뒤 스스로를 포르투갈의 왕이라고 천명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국왕과 교황은 아폰수를 포르투갈 왕으로 인정했고, 남쪽의 이슬람 왕국과의 싸움에서 리스보아를 점령하였다. 아폰수 1세는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조인 보르고냐 왕조의 입지를 다져놓았다.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무어인에게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여 승리를 도와 준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알코바사 수도원을 지었다. 이는 포르투갈에서 처음 지어진 고딕 건축물이다.

* 페드루 1세와 이네스의 사랑이야기: 이네스는 정식 왕비가 아니었음에도 왕관을 쓴 완벽한 왕비의 묘소로 꾸며짐   

 

(3)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형제인가, 원수인가

- 1회전: 알주바호타 전투(1385년), 포르투갈의 두번째 왕조 아비스 왕조(1385∼1580)의 시작

첫 왕조인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왕 페르난두 1세의 배다른 동생이며 아비스 기사단(기사수도회)의 수장인 주앙 1세(1357~1433)를 초대 왕으로 한다. 페르난두 1세가 카스티야의 개입을 허가했기 때문에 주앙이 국민적 지지를 받고 또한 영국의 원조도 얻게 되어 카스티야와 프랑스 연합군을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의 결과 탄생한 왕조라고도 할 수 있다.
주앙 1세의 왕비는 영국왕 헨리 4세의 누이이며 제3왕자는 엔히크 항해(航海)왕자이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를 담당한 왕조로 유명하고, 주앙 2세와 마누엘 1세 때가 최전성기이다. 특히 마누엘 1세 때에는 '마누엘풍(風)'이라는 포르투갈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을 낳았다. 에스파냐 왕 펠리프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두 나라가 같은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아비스왕조는 끝났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정리)

* 주앙 1세가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바탈랴 수도원을 지음

- 2회전: 1578년 포르투갈의 열여섯 번째 왕, 세바스티앙은 북아프리카 원정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사망했다. 이후 1580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군대가 포르투갈을 침략하여 별 어려움 없이 승리하여 포르투갈의 왕위(필리프 1세)에 올랐다. 60년 동안 지속될 포르투갈-스페인 합병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이 유럽 여러나라와 벌이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했고, 흑사병이 돌고 농사는 흉년으로 1600년대 들어서 포르투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윽고 포르투갈 몇몇 귀족들이 독립을 논의하였고, 1640년 결사대가 리스보아의 왕궁으로 진입, 스페인 총독과 군인들을 감금시켰다. 새로운 왕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천명하고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했으며, 스페인은 당시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느라 포르투갈로 대규모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하여튼 이전쟁은 다음 왕 아폰수 6세 시대인 1668년에야 끝났다. 같은 시기에 독립을 도모했던 카탈루냐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지금까지 스페인의 일부로 남아있다.

(4) 대항해 시대

- 엔히크 왕자(1394~1460):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자 두아르트의 동생으로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여 총독이 되었다. 1419년에는 알가르브 총독에 임명되어 유럽 남서쪽 끝 사그르스에 거류지를 건설해 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해 1420년부터 탐험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탐험대의 파견을 통해 마데이라 섬 등을 발견했고 포도를 심도록해 이후부터는 마데이라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1433년에 주앙 1세가 죽고 두아르트가 계승했고 당시에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는 펄펄 끓는 암흑의 녹색 바다가 있고 악마가 살고 있다는 미신이 퍼져 그 곶(당시 세상의 끝으로 인식)을 함부로 탐험하지 못했는데, 엔히크가 보낸 질 이아네스 등의 탐험가가 1434년에 보자도르 곶을 넘어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 것을 보고받아 그 미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리카 탐험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1441년에 원정대가 사금 덩이와 흑인 2명을 잡아오면서 이는 해소되었으며, 1443년부터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 대한 항해와 교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여러 탐험가들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과를 얻으면서 1448915일에 기니 연안에 대한 탐방, 교역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독점권,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왕, 교회, 기사단, 부하, 해상왕국의 후계자 등에게 양도했다.

14601113일에 사그르스에서 사망했다.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선 인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는 평생 포르투갈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인도 항로는 1480년대에 들어서 개척된다. 한 마디로 엔히크 왕자 사후 이야기. 하지만 엔히크 왕자가 시작한 아프리카 항로 개척이 인도 항로 개척의 씨앗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수긍하는 사실이다. 이때 기초가 다져진 포르투갈의 항해실력은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쿠 다 가마 때 꽃피워진다.

*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서 돌아온 뒤에 마누엘 1세의 지시로 벨렝에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건축하였다.

 

- 1497년 리스보아 벨렝에서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의 배들은 1498년 인도 서해안 도착, 1499년 리스보아로 복귀했다.  1500년에는 브라질 도착, 1510년 인도의 고아, 1511년 말라카, 1513년 남중국 진출하여 마카오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1543년 일본의 항구에 도달해 교역을 시작했다. 세계 여러 곳에 상업거점을 세우고 군사적으로도 세력을 확장한 포르투갈은 16세기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 서쪽 구석의 작은 나라에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식민지를 둔 제국으로 변모했다. 

 

- 15,16세기의 포르투갈은 인구가 백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다.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상업거점을 마련해 정착했으나 내륙으로 까지 진출할 만한 인구는 부족하였다. 이런 와중에 브라질, 즉 유럽 대륙만한 거대한 땅을 발견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포르투갈의 해담은 노예였다.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남미로 잡아간 아프리카인들은 최소 4백만명이라고 한다. 노예제도와 무역은 18세기 중반부터 부분적으로 금지되기 시작해 19세기엔 완전히 폐지되었다.

 

- 본국의 크기보다 백 배가 훨씬 넘는 넓이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포르투갈 제국은 1822년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9년 마카오가 중국에 귀속되면서 포르투갈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다만 포르투갈어는 세계 아홉나라에서 공식 언어로 지정되었고 사용 인구는 2억5천만명 이상이다. 

 

(5)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대지진을 극복한 사람들

- 1755년 11월1일 토요일 모든 성인의 날: 오전 9시반 9분동안 세번에 걸쳐 강력한 지진 발생. 11시경, 지진 발생 90분 후에 해일이 테주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시를 덮침. 쓰나미의 여파는 핀란드에서도 감지.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목재 건물들은 화재로 잿더미. 모든 성인의 날이라 성당마다 켜놓은 촛불들도 사태를 악화시켰고, 리스보아는 닷새 동안 불탔다. 인구의 삼분의 일이 사망, 건물의 85%가 파괴. 추정하는 지진 강도는 리히터 규모 8.5~9.5 정도

 

- 수상 폼발 후작은 "죽은 자는 묻고 산 자는 보살펴라"하면서 건축가, 엔지니어, 과학자 등을 동원해 수도 재건에 앞장선다. 특히 피해가 심했던 바이샤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 계획하에 건설을 시작. 가이올라(새장의 뜻)라는 방식으로 건축하는데, 지진이 일어나도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내진 설계된 구조. 목조 구조물을 만든 뒤 그 사이를 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지었다. 지진 7년 전에 완공된 수도교는 지진에도 끄떡없었다.  

 

-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유명한 알파마 지역은 기존의 길과 건물이 있던 형태를 유지하며 복구되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리스보아는 부상을 입은 뒤 고통을 이겨내고 새살이 돋아 잘 아문 흉터를 가진 사람 같다. 매끈한 피부는 아름답겠지만 상처의 흔적이 남은 흉터는 그의 이야기를 소리 없이 전해준다. 

(6) 425일 포르투갈의 봄, 자유의 날

- 1933년 개헌과 함께 시작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독재. 일명 신국가 체제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 이 체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가톨릭과 전통을 중요시했다. 신 , 국가, 가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 1974년 4월25일 젊은 장교(마이아 대위)들이 주동하여 민주주의, 자유, 식민지 전쟁 종료, 그리고 포르투갈의 발전을 목표. 시민들은 카네이션으로 지지 표시. 40년이 지난 지금도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 중에 소득이 낮은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이들에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되찾고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는 자부심과 당당함이 있다. 현재 포르투갈인들에게 카네이션 혁명, 4월25일은 민주주의와 완벽하게 동의어다. 

 

 

2. 포르투갈 문화 알기

(1) 도시를 꾸미는 세 가지 방법: 아줄레주, 포르투갈식 포장길, 그래피티

- 아줄레주: 아랍어로 '판판하게 갈아놓은 작은 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듯이, 아랍 문명이 이베리아 반도에  전해준 여러 흔적 가운데 하나. 장점으로는 저렴한 재료인 진흙을 사용해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고, 오래 사용이 가능, 위생적, 여름엔 더위를 막아주고 겨울엔 습기 차는 것을 방지하여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  채색의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기법이 계속 발전 한듯.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마졸리카 기법은 타일을 구운 뒤 유약을 바르고, 그 위에 붓으로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식이며 노란색도 사용이 가능하였다. 

 

- 포르투갈식 포장길(칼사다 포르투게자): 19세기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짐.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흰색, 검은색, 회색, 연분홍색 등의 석회석.   

 

- 그래피티: 포르투갈 골목길엔 이게 낙서야, 그림이야라는 의문이 드는 무언가가 넘친다. 놀랍도록 정교한, 예술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벽화도 있고 노력이 좀 필요한 걸, 싶은 그림도 있다. 

 

(2) 포르투갈인들의 미적 감각: 마누엘리노 양식, 탈랴 도라다, 연인들의 손수건

- 마누엘리노 양식: 포르투갈은 16세기 초, 마누엘 1세가 다스리던 시절이 가장 융성했고, 동시기 건축물이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다. 마누엘 1세는 왕위 계승 순위로 보면 밀렸지만 운이 좋아 왕이 되었고, 그의 치세에 인도의 향신료 무역의 길을 열었고, 브라질에 당도하였으니 가히 행운왕이다. 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건축에 투자하여 포르투갈의 권력을 만방에 알리고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 양식의 특징: 포르투갈의 문장, 혼천의,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 밧줄을 꼬아놓은 듯한 모양의 장식, 식물 모티프 등을 활용한 장식 => 리스본의 콘세이샹 벨라 성당, 제로니무스 수도원, 하지만 소박한 시골 교회나 마을이라도 마누엘리노 양식으로 만든 문 하나 쯤은 있다. 

 

- 탈랴 도라다(금박 목조각 장식): 나무로 조각을 한 뒤 표면에 종잇장처럼 얇은 금박을 입혀 성당의 제단을 만들기도 하고, 벽이나 천장 등을 장식하기도 한다. 제단화 액자나 성물을 보관하기 위한 나무 틀에 나무로 조각을 한 뒤 금박을 입히는 경우도 많았다. => 포르투의 산타 클라라 성당이 15세기에 설립되었지만 17, 18세기에 걸쳐 탈랴 도라다가 입혀졌다. 나무로 만든 천장은 금박과 함께 여러 색으로 채색되었다. 성당의 규모는 아담하나, 성당 전체를 탈랴 도라다로 장식한 초기 성당 중 하나다. 

 

- 연인들의 손수건: 17, 18 세기에 전문 자수가들이 옷을 장식하기 위해 놓던 자수에서 시작되어, 혼기가 찬 처녀들이 면이나 리넨 천에 수를 놓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생김. 

 

(3) 포르투갈 사람처럼 먹고 마시기

- 포르투갈에는 냉동식품이나 반조리 식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 냉동 쇠고기가 없어  불고기용 고기를 얇게 썰 수가 없다. 

- 음식 파는 곳: restaurante(헤스타우란트), tasca(작은 규모), 스낵(샌드위치 등 간편식), 카페(커치 등 음료와 간편식)

- 헤스타우란트와 타스카: 12~3시 점심, 7~10시 저녁식사 제공

- 아구아 셍 가스(물), 아구아 콩 가스(탄산수)

- 매콤한 소스: 피리피리

- 팁: 테이블 당 1~2유로, 카페, 스낵바는 팁을 거의 내지 않는다. 

- 포르투갈 대표음식

. 대구(바칼랴우, bacalhau): 국민음식이지만 노르웨이 수입산으로 염장해서 말린 대구 요리를 선호

. 정어리(사르디냐, sardinha): 5~8월 사이가 적기, 숯불에 생선을 석쇠에 구움

. 카타플라나(cataplana): 용기 이름이 음식 이름, 새우, 조개, 오징어, 가리비 등 싱싱한 해산물과 감자, 약간의 채소를 넣어 익힌, 국물이 살짝 자작한 포르투갈식 해물탕  

. 쇼쿠 프리투(Choco frito): 갑오징어를 석쇠에 구워서 먹기도, 익힌 후 먹물과 올리브유, 마늘, 생 파슬리를 섞은 소스에 무쳐먹기도 한다. 튀김으로 먹기도. 

. 레이탕(leitao): 어린 돼지를 통으로 꼬치에 꿰어 구운 음식

- 포르투 와인: 도루 강변에서 나는 포도를 재료로, 빌라 노바 드 가이아에서 만들어지지만 이름은 그 맞은 편의 도시 포르투의 이름을 딴다. 포르투 와인은 포도주가 완성되기 전에 숙성을 중단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리큐르를 추가하므로 포도의 당분이 알코올로 바뀌기 전에 제작 과정이 끝나게 된다. 그러므로 포르투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더 달고, 도수는 19~22도 사이로 일반 와인보다 더 높다. 포르투 와인은 단맛이 강하기 때문에 식사 중에 마시지 않고 식전 혹은 디저트용으로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 알렌테주 와인비뉴 베르드(Vinho Verde): 포르투갈의 가장 보편적인 와인은 알렌테주 와인, 비슷한 수준의 와인을 가장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북부는 가을에 비가 일찍 오기 때문에 포도수확이 이르고 때문에 덜 익은포도로 술을 만들었다. 따라서 알코올 도수가 8~1.5도 사이로 낮은데 이것이 비뉴 베르드이다.

- 세르베자(Cerveja, 맥주): 더운 나라라 맥주가 미지근해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맥주 잔의 기본 크기가 200ml로 작다. 리스본에서는 임페리알, 포르투에서는 피누(fino)로 부른다. 맥주 브랜드로는 수페르 복(Super Bock)과 사그레스(Sagress)   

- 카페: 카페는 에스프레소. 리스본에서는 비카(Bica), 포르투에서는 심발리누(Cimbalino)로 부른다. 포르투갈인 들은 이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신다. 작은 잔 카페 + 약간 우유 = 핑가두, 좀 더 큰잔 => 메이아 드 레이트, 높이가 있는 큰잔에 우유의 양을 늘리면 갈랑(Galao). 아메리카노는 아바타나두,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면 커피와 얼음잔을 따로 주기도 한다.

- 샤 프레투(홍차, cha preto): 16세기 중국 도착후 포르투갈에 전파. 이후 영국에 전파되어 대중화 

- 과자: 빵(pao)은 식사용 빵으로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 설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볼루(bolo). 달걀과 설탕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 에그 타르트(혹은 파스텔 드 나타). 설탕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15세기 마데이라 제도에서 설탕 재배 성공. 지방마다 전통과자가 다르므로 다양하게 먹어보는 재미 

 

(4) 포르투갈의 3F: 파티마, 파두, 축구

- 파티마: 1917년 파티마에서 어린 세 목동에게 성모 마리아 빌현. 마지막 발현때는 수만명이 운집

- 파두(Fado): 포르투갈의 정서가 담긴 노래, 1800년대 초반 정치적 혼란기에 리스본에서 시작.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돌아온 왕실의 영향으로 유입된 브라질과 아프리카 음악적 요소가 포르투갈인의 음악에 합해졌을 것으로 추정. 사우다드의 정서를 노래. 1950년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파두의 여왕)의 활동으로 포르투갈의 대표 음악으로 자리 잡음. 파두 기타는 둥근 몸체에 줄 12개. 

- 축구: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 모잠비크 출신

 

(5) 4백 년 전에 사라진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

- 1580~1640년 포르투갈-스페인 합병: 포르투갈이 축적했던 외교와 무역의 모든 것이 무너짐. 이전에는 동맹국이었던 잉글랜드가 포르투갈 및 포르투갈령을 침략하기 시작. 1640년 독립을 천명했으나 아시아 무역거점은 네덜란드로 넘어감. 유대인 추방도 경제에 타격. 1506년 리스본의 상 도밍구스 성당에서 광적인 집단 살인이 시작. 유대인과 신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이 사흘 동안 지속. 2008년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념물 설치. '리스보아, 관용의 도시' 문구

- 세바스티앙 왕(1554~1578):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이자 아비스 왕조의 제9대 국왕주앙 3세의 손자로, 아버지인 왕세자 주앙 마누엘의 유복자이며 할아버지 사후에 즉위했다. 즉위 당시 3살이었기 때문에 재위 초기에는 훗날 국왕이 된 숙부 엔히크 추기경이 섭정을 맡았다이후 성년이 된 세바스티앙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모로코 사드 왕조에서 벌어진 내전에 개입하고 직접 출전했다가 크사르엘케비르에서 전사했다. 전사 당시 미혼이었고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엔히크가 환속 후 물려받았다.

전사한 후 세바스티앙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한동안 포르투갈에서는 '세바스티앙이 사실 죽지 않았고 포르투갈 왕위를 되찾으러 돌아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세바스티앙 자체는 후사를 소홀히 한 채 괜히 타국의 내전에 개입했다가 죽은 암군이지만, 어쨌든 손이 귀한 왕실의 적통이었던데다 세바스티앙 사후 포르투갈이 스페인 국왕의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에 들어간 뒤에 스페인에게 시달리자 '어쨌든 구관이 명관이었다'는 동정론이 생긴 것이다. 이 소문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주장이 제5제국론인데, 세바스티앙이 포르투갈의 메시아로 돌아와서 포르투갈을 다니엘서에 예언된 네 제국의 뒤를 이을 다섯 번째 제국으로 만든다는 주장이다포르투갈에서는 세바스티앙 생존설을 주제로 영화 제5제국이 제작됐다.

- 제 포비뉴 캐릭터: 제 포비뉴(흔한 이름인 주제의 애칭 제 + 포비뉴는 백성, 민중을 뜻하는 포보의 축소사 포비뉴)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잊혀진, 그러나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 포르투갈인의 상징. 잘 참고 잘 속으며 복종적, 내성적이고, 순한 성품에 무감각, 무관심하며, 의지박약에 의심 많고 잘 뭉치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잘 투덜거리며, 거만하고 민감하면서 격노할 줄 알지만 자비심이 깊으며, 때때로 위험도 감수하고 활동적이며 서로 연대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도 보여준다. 

 

 

3. 포르투갈 구석구석 알기

- 리스보아: 1147년부터 수도. 로마시대 이후의 모든 역사적 흔적. 테주 강의 폭은 워낙 크다. 바스코 다 가마의 다리 길이 16km, 리스보아 토박이 별명은 알파시뉴스(배추의 뜻). 수호성인 비센트 (상징은 배와 두마리 까마귀). 

- 포르투: 별명 트리페이루스(내장을 먹는 사람들) => 1415년 포르투갈 군대가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로 원정을 떠날 때, 도시의 모든 고기를 군대에 내놓고, 시민들은 한참 동안 가축의 내장만 먹으며 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