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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간을 걷다, Chapter 4 바로크: 최경철 (2023.1.8)

클리오56 2023. 1. 8. 22:45

Chapter 4 바로크 : 욕망이 화려하게 수를 놓다

- 마녀사냥

* 변화의 발단: 그리스도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이원화되면서 유럽사회의 권력구조도 변화. 스페인은 절대강자로 군림, 프랑스는 가톨릭과 신교를 동시에 인정하면서 권력이 군주에게 수렴, 영국은 기톨릭과 신교를 통합한 국교회를 창립하면서 왕권 강화. 반면 독일은 30년 전쟁의 전쟁터가 되면서 왕권강화의 기회를 상실하고 약소국에 머뭄. 이런 어려움 하에 교황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으로 공포심을 조장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폭력과 만행을 저질렀다. 

 

- 가톨릭과 신교의 차이점*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문제다. 가톨릭은 건축과 조각, 회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성모마리아와 다른 성인들도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신교는 이런 다양한 성상을 우상숭배로 생각하므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성경만이 절대적 가치로 인정. => 교회 건축양식도 달라졌다. 신교는 십자가만 남겨두는 간소화된 건축양식을 추구, 반면 가톨릭은 화려함을 통해 성상들을 더욱 강조하는 건축양식을 발전시킴. 

 

* 둘째, 가톨릭이 옹호했던 천동설을 신교에서는 부정하면서 신앙과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를 강조하면서도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근대적 사고를 추구

 

* 셋째, 신교는 가톨릭의 상징적인 존재인 교황을 또 다른 우상으로 인식하며 교황제도를 부정. 

 

* 초기 순수했던 종교개혁은 개혁운동의 폭력적 전개와 이를 지원하는 권력과의 결탁 등 현실적 한계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유럽사회에서 급속히 성장, 특히 북유럽에서는 신교가 가톨릭 규모를 능가했다.  

 

- 절대권력의 시대

* 교회, 봉건 영주(귀족), 상업가문(르네상스를 이끈 세력)의 종교, 정치, 경제 세력이 절대왕정으로 수렴: 영국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루이 14세(짐은 곧 국가다), 스페인 펠리페 2세

* 영국: 이혼과 재혼 문제로 촉발된 헨리 8세와 교황의 대립은 결국 가톨릭에서 영국의 왕을 수장으로 하는 국교회를 설립, 왕권 주도의 독특한 종교개혁. 가톨릭 신자에 대한 종교재판과 차별, 교회 재산몰수 등 여러 혼란후 엘리자베스 1세때 안정

* 프랑스: 앙리 4세때 가톨릭 국교 및 신교 공인, 루이 14세는 신교를 불인정하면서 박해, 왕권 강화에 가톨릭 유리 판단

* 이탈리아 상업 가문: 유럽 전 지역에 무역거점 확보하며 도시국가 단위로는 막강한 경제력, 하지만 절대군주에게는 역부족. 이에 절대왕정의 군주와는 국가의 경제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설정, 상업가문의 세금과 왕정 군사력으로 재산 보호

* 봉건영주: 귀족의 힘은 왕권에는 필요악같은 존재. 하여 귀족에게 정치적 권력과 직무를 부여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과 여흥거리 풍족히 제공. 프랑스는 베르사이유에 귀족을 모아놓고 지속적으로 파티와 연회를 개최. 독특한 귀족문화 탄생

 

- 욕망의 건축

* 17세기는 재편된 그리스도교의 질서(가톨릭과 신교)와 절대왕정의 질서가 성립

* 가톨릭과 절대왕정의 공통점이 바로크 양식. 바로크는 스페인/포르투갈어를 어원으로 하며 '비뚤어진 진주' 뜻

* 종교개혁 주체인 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교회의 성상과 종교화를 부정. 가톨릭은 종교적 열망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교회, 조각상, 제단 등의 제작에서 전통 유지하거나 극단의 초월적 상태, 즉 화려한 장식성 강조. 이를 위해 르네상스 후반에서 보여준 것과 유사한 기하학과 자유곡선, 장식성이 극대화되는게 바로크 양식.

* 가톨릭의 바로크 양식은 절대왕정에게도 종교성만 배제하면 군주의 잘대적 권위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라 판단. 이에 바로크는 로마 가톨릭과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다. 바로크 양식도 그리스-로마 고전주의의 핵심인 기둥양식이나 페디먼트, 기본적인 비례와 형식을 근간으로 창출. 그렇다면 바로크 양식의 특징은? 욕망과 비정형성

 

바로크 양식의 특징: 욕망과 비정형
욕망은 무엇을 의미할까?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열망, 절대왕정의 독보적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욕망,
상업가문 또는 귀족들의 축적된 부를 표출하기 위한 욕망
바로 이러한 욕망들이 바로크의 미학적 특징으로 발현되었다.
비정형은 무엇일까?
정형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합리적 조화의 미학, 기하학에서 도출된 형태이다.
반면 비정형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거나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규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정형은 고전주의 기둥이 갖는 안정성과 상징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열과 구성의 다양성을 넘어 형태적 실험을 극단적으로 실현해 선보인다. 
비정형이 바로크의 주요 특징이라는 것은 '비뚤어진 진주'라는 바로크의 뜻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바로크는 사회의 지배세력이 추구한 시대적 욕망이 비정형의 형태 미학으로 표현된 것이다.
로마의 산티보 알라 사피엔차 성당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60년)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각형과 원이
회화, 조각, 건축의 구도를 잡는데 사용되었지만,
바로크 시대는 사각형, 원, 타원, 동심원 등 보다 다양한 기하학 형태들이 겹쳐진 복합적인 작도를 통해 비정형 미학을 추구 

바로크 양식의 복잡한 형태나 조각에도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나름의 규칙이 존재
뮌헨의 장크트 요하네스 네포묵 교회
(아잠 형제, 1733~46년)

어느 한 곳 단순하고 정적인 요소가 없다.
천장,벽면, 기둥, 조각상 등 모든 요소가 현란함을 내뿜고 있다.
동시에 전체 공간은 장중함, 풍요로움, 활력의 모습을 지닌다.
기하학에 기반을 둔 형식의 변주와 기둥의 변화가 통합적으로 드러난 이 모습이 바로크가 추구한 욕망과 비정형의 공간이다 

- 로마의 바로크

잔 로렌초 베르니니 (1598~1680)
뛰어난 조각 실력으로 일곱 교황 동안 대표 예술가 유지
대표작: 대성당 앞의 타원형 광장과 열주, 베드로 성당의 닫집, 조각상 성녀 테레사의 법열 등

'예술작품의 가치는 자연의 실제 모습의 묘사가 아니라 이상적 아름다움을 제시하는데 있다'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규칙을 깨뜨리면서 작업하지는 않는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

타원형 광장 =>
보다 많은 사람이 성당을 가까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베드로 성당의 수평적 단조로움을 타원을 통해 상쇄

베드로 성당은 무대, 광장은 객석으로 이해 =>
장경주의는 바로크 고전주의만의 대표적 기법.
회화, 조각, 건축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무대장치 요소로 본다.
조각상: 성 테레사의 법열 (Ecstasy of Saint Teresa)
이 조각상에서성녀 테레사의 표정, 옷의 주름, 테레사가 앉아 있는 바위표면과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빛의 표현까지 극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조각상의 양쪽에 기둥을 배치함으로써 테레사가 마치 무대 위에 있는 배우처럼 연출, 베르니니가 추구한 장경주의의 면모이다. 

중앙일보 기사 참조(2009.6.6)
이 작품은 16세기에 수도회 개혁 운동을 했고
사후에 성녀로 인정된 아빌라의 수녀 테레사의 신비체험을 다룬 것이다.

성녀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아름다운 천사가 황금 창을 들고 나타나
창의 불타는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환영을 접했다고 한다.
천사가 창을 빼는 순간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나
동시에 신의 사랑에 대한 환희로 불타올랐고
“그 고통의 감미로움이 더 컸기에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신비한 법열의 상태를 절묘하게 시각화한 베르니니의 작품에서, 
성녀의 휘몰아치는 옷자락, 몸을 거의 눕힐 듯 뒤로 젖힌 목, 
눈동자가 넘어간 채 반쯤 감긴 눈, 탄성을 내지르듯 반쯤 벌린 입은 
거칠고 무한한 황홀경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습은 관능적인 쾌락의 절정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 성녀의 성(聖)과 성(性)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표정을 가리키면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정신적인 황홀경과 육체적인 황홀경의 기묘한 공통성을 논하곤 했다. 
사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기 전에는 영적 환희의 절정과 
성적 환희의 절정이 실현된 모습이 비슷하지 않겠는가.
성 베드로 성당 내 닫집

닫집은 설교자가 사용하는 제단 형태의 공간에 얹는 지붕,
실내 공간임에도 닫집을 계획한 이유는
장경주의에 따른 하나의 무대공간을 형성하려는 것

청동으로 제작된 화려한 조각과 회오리 모양의 기둥,
유려한 곡선형을 이루는 지붕 등 건축과 조각이 동시에 보이는데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자 조각 작품으로 자리잡았음
트레비 분수 (1732~37년)

해신 넵투누스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동전을 던져 넣으면 로마에 다시 온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다른 조각가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조각의 원안은 베르니니의 손길에서 나왔다.

그는 로마에 트리토네 분수, 델레 아피 분수, 콰트로 피우미 분수 등
다양한 분수 조각을 남겼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60년)

보로미니는 배르니니의 보조 건축가로 많은 활동, 아마도 그에게는 교황 같은 거물급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인 듯. 

베르니니가 규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는 장중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보로미니는 규칙에서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의 화려하고 비정형적인 바로크는 독일 지역의 바로크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

보로미니가 처음 독립적으로 맡은 의뢰로 1634~37년까지
성당의
내부 공간과 인접한 건물들을 재건축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성당의 정면부는 이후 보로미니가 노년에 완성했다.

이 작은 성당은 로마 바로크의 상징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보로미니는 선적인 고전주의와 단순한 원 형태를 피해
물결치는 타원 형태를 택했다. (비정형의 미학)

특히 물결처럼 보이는 자유곡선으로 건물의 전면을 형상화한 것은
보로미니의 독특한 시각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의 내부 천장 모습

- 바로크의 확산

* 바로크는 로마에서 출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과 중부유럽에 확산

* 특히 가톨릭 문화권과 절대왕정이 성립된 국가에서 적극적인 확산

* 바로크는 전유럽을 포괄하는 양식으로 보기 어렵지만, 창조적인 양식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이름과 양식의 이름이 동일한 마지막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후는 하나의 양식이나 시대로 유럽사회를 통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빠르게 변화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쥘 망사르, 샤를 르브룅: 1678~84년)

절대왕정의 궁전으로서의 위엄과 장중함뿐만 아니라
세밀하고 화려한 장식성을 보유 => 바로크 양식의 정수

절대왕정을 보조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공공시설도 건립:
교육시설, 병원, 극장, 도서관, 박물관, 성
(로마에서는 교회와 귀족 저택 위주)

프랑스 귀족들은 바로크 양식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화려함과 비정형적인 형태를 선호하기 시작하여,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에서 발전 => 로코코 양식
이를 잘 드러내기 위하여 실내장식과 조각에 더욱 치중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
(벤체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 1763~69년)

로코코 양식은 장중한 화려함을 넘어 복잡하고,
심지어 퇴폐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추구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크리스토퍼 렌, 1675~1719년)

영국은 절대왕정, 공화정, 왕정복고, 입헌군주제로
계속 정치제도가 변화하였고,
이 와중에 런던 대화재(1666년)로
도시 재건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바로크 시대 도래

영국 사회의 지배세력은 다양하게 분화되었기에
영국의 바로크는 각각의 요구 조건에 맞게 설계, 합의한 양식

처음에는 가톨릭, 이후 교황과 왕의 갈등에 따른 국교회설립, 청교도를 통한 신교 대두, 왕정복고로 가톨릭 부활

<크리스토퍼 렌의 아이디어>


* 가톨릭 바로크 양식: 두 개 탑을 활용한 입구와 수직성 강조. 동측과 서측에서 보이는 타원창과 회오리 모양의 장식
* 고전주의 전통: 정면에서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코린트식 기둥과 복합식 기둥, 상부의 페디먼트
* 신교가 추구하는 절제된 건축을 충족:
내부의 화려하지 않은 장식과 구조적 합리성


내부의 크고 화려한 돔이 특징
중부 유럽
바로크가 확산된 다음 지역은 중부유럽(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이다. 
바로크 양식이 확산될 즈음 이 지역은 작은 공화국의 형태로 지방분권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지방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결합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이 등장했다.
주로 로마의 바로크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베르니니의 장경주의와 보로미니의 비정형 기법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1720~24년)
*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새롭고 역동적인 궁전 모습을 실현
* 지붕의 높낮이, 각층의 높이에 변주를 주고
다양한 비례를 갖는 창문을 형성
* 거대한 곡선형 페디먼트로 통합되는 출입구의 모습에서
조화와 균형이 보이는 고전의 장중함 보다는
새롭고 다양한 요소가 통합
독일 성 안나 임 레헬 성당
(요한 미하엘 피셔, 1727~37년)

절대왕정이 없었던 독일에서는 고
전주의에 기반을 둔 공예의 장식성이 두드러짐.

때문에 건축, 조각, 회화가 결합된 종합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부분적 아름다움에 집중
=> 화려한 세공과 장식성이 확연
바로크 양식의 확산은 18세기를 넘어가면서 갑자기 수그러진다.
절대왕정의 몰락, 시민혁명을 통한 시민사회의 출현, 산업혁명, 전세계로 확장된 교역 등 
다양한 가치관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시대를 맞이했다.

- 바로크 시대의 미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
바티칸 미술관 다음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예술작품이 많이 소장
* 베르니니의 조각과 루벤스의 회화 => 인물의 동적 묘사에 주력, 특정 상황에 처한 인물의 순간을 생동감있게 표현
=> 바로크 회화와 조각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아폴론과 다프네
(베르니니, 1622~25년)

큐피트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자마자 처음으로 본
다프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쫓아가는 아폴론과 

큐피트가 쏜 사랑을 거절하는 화살을 맞은 다프네가
다급하게 도망가면서도
한쪽은 월계수로 변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

안타까운 구애의 모습과 월계수로 변해가는
다프네의 비극적 상황을 역동적으로 표현
수산나의 목욕 (수산나와 장로들)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07년)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바빌론에 살고 있는 수산나가 혼자 목욕하고 있는데
두 노인이 겁탈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
흠칫 놀라는 수산나와 음욕에 가득 찬 두 노인의
대조되는 표정, 자세를 생동감있게 표현

위키백과: 독일 태생, 1577~1640년, 벨기에 화가.
역동성, 강한 색감,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유명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610년)

카라바조(이탈리아, 1571~1610)는 천재적인 그림 실력 뒤에
어두운 내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때때로 그 성격은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람들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종교화를 그리던 중에도 그의 범죄 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이중성으로 인해 작품의 두 명의 인물이
모두 자신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다윗으로,
폭력성과 천재성이 뒤섞여 자기모순에 빠진 채 살았던
말년의 모습은 골리앗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카라바조가 다윗의 칼을 이용해
현재 모습과 닮은 골리앗의 목을 베었다는 점에서,
그의 자기파괴적인 내면이 보이는 듯하다.
이 작품을 바라보면 우리도 어느 순간
자신의 내밀한 어두움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병든 바쿠스
(카라바조, 1610년)
로마 국립 고전회화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카라바조, 1598~99년)

성경 속 유디트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

유디트가 살고 있는 지역에 홀로페르네스가 점령군으로 오게되었는데,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죽이면서
마을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그린 것이다. 

그림 속 여성은 주체적이고 강인한 모습인데,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보면 매우 혁신적인 주제였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20년)

젠틸레스키는 바로크 시대 여성화가의 선구자 역할,
카라바조의 그림을 본 후 영감을 받아 동일 제목 제작.

그녀의 유디트는 자세와 표정에서
살해를 하려는 의지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었고,
남성이 흘리는 피 등 상황 묘사가 극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펜싱을 하고 있다면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마치 검투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베아트리체 첸치
(엘리자베타 시라니, 1662년)

출처: 위키백과
프란체스코 첸치는 아내와 아들들을 학대하였으며, 딸인 베아트리체를 강간했다. 그는 다른 죄목으로 투옥되었으나, 곧 귀족이라는 이유로 정상참작이 되어 풀려났다. 베아트리체는 당국에 아버지의 상습적인 학대를 신고해 보았다. 비록 모든 로마 사람들이 그녀의 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을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와 루크레치아를 로마에서 내쫓아 지방에 소유하고 있는 성에 가둬 놓았다.

베아트리체 그리고 그녀를 동정했던 계모와 친오빠, 이복남동생은 프란체스코에게 복수를 결심, 그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계획하였다. 1598년 9월 9일, 두 명의 하인(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베아트리체의 비밀 연인이 됨)이 베아트리체 일당을 도와 프란체스코가 성 안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독약을 먹였지만, 죽지 않았다. 그러자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형제, 계모는 망치로 프란체스코를 쳐 죽인 다음, 실족사한 것으로 위장하려고 높은 난간에서 시체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세간에선 아무도 프란체스코가 사고로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아무튼, 프란체스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교황의 경찰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애썼다. 체포된 베아트리체의 연인은 고문을 받아 죽을 때까지 이실직고하지 않았다. 그동안에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프란체스코 일가의 한 친구는 범행이 발각되지 않도록 이 일에 가담했던 또 다른 하인을 죽이라고 권유했다. 그렇지만 결국 음모가 밝혀졌고, 베아트리체를 비롯한 첸치 가문의 가담자 전원이 체포되었으며,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로마의 일반 시민들은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법원의 결정에 항의했으며, 결국 사형 집행은 계속 미루어졌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일말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1599년 9월 11일 새벽녘에 산탄젤로 다리로 끌려나온 그들을 처형할 사형대가 설치되었다.
둔기의 일종인 나무 메로 4등분 된 자코모의 사지는 네거리에 달아맸다. 그 다음에는 루크레치아가 처형되었고 마지막에는 베아트리체가 처형대에 올라가 참수되었다. 어린 남동생 베르나르도는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지만 처형장에 끌려 나가 가족들이 사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황에게 전 재산이 몰수되는 재산 몰수형을 당하고 다시 교도소로 끌려갔다. 베아트리체의 시신은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에 매장되었다. 이 일로 로마 사람들은 베아트리체를 오만한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해마다 베아트리체가 죽기 전날과 같은 날짜가 돌아오면 그 날 밤 잘린 머리를 든 베아트리체의 유령이 산탄젤로 다리에 나타난다는 괴담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