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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2023.2.11)

클리오56 2023. 2. 13. 06:39

일자: 2023.2.11

코스: 성균관

등로: 혜화역 4 출구 ~ 하연대 ~ 명륜당 ~ 대성전 ~ 하마비와 탕평비각 ~ 혜화역 4번 출구

소요시간: 1시간 16분 ( 휴식시간 6분 포함)

도상거리: 2.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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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하기는 10권의 성균관이고

유 교수는 매년 11월 첫째 혹은 둘째 일요일에는 성균관을 방문하려는데 은행나무 단풍 때문이란다.  

나의 과거 답사 기록을 체크하니 2017년 1월이라 단풍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나도 매년 11월 일정에 메모를 해두어 그 화려한 절정을 볼 기회를 가져보겠다. 

 

앞서의 답사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제5부 성균관
제5부 성균관
성균관
 장래의 선비를 소홀하게 대접할 수는 없다
은행나무 / 조선시대의 교육 / 성균관의 공간 배치 / 성균관의 부속 건물들 /
명륜당 / 동재와 서재
명륜당 「반중잡영」, 혹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
숭교방 / 「반중잡영」 / 동재와 서재 / 진사식당 /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 풍속도 /
성균관 사람들 이야기
대성전과 탕평비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외삼문 / 대성전 / 동무와 서무 / 동국 18현의 문묘 배향 과정 / 전사청 /
석전대제 / 문묘제례악 / 탕평비

 

오늘은 단단히 마음먹고 일찍 집을 나왔는데

성균관, 덕수궁을 답사하고 이미 다녀온 봉은사와 선정릉의 미흡했던 부분을 보충하려는게다.

모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최근 친구들의 트렌드가 예전 등산에서 둘레길로 다시 문화유적 답사로 바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좀 더 힘이 덜들어가려는 방향을 선호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코스를 개척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문화유적 답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성균관대 방향으로 약 9백미터 거리이며

입구에 '성균관대학교 1398' 큰 표석이 세워져있으니 조선 성균관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게다.

 

조선왕조의 성균관이 한양에 세워진 것은 건국 6년 뒤인 1398년 7월이지만

그 역사의 뿌리는 고구려 태학(372년), 신라 국학(682년), 고려 국자감(992년, 1362년 성균관으로 개칭)으로

이름과 성격은 다르지만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점은 같다. 

 

성균(成均)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있게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다.

성균관의 교장이 대사성인데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가 대사성을 지냈다. 

 

성균관 유생은 개국초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정착되었고

임진왜란 후 재정 부족으로 75명, 영조 때 120명, 말기에는 위상이 낮아지며 100명으로 줄었다.  

 

 

성균관 입구

대성전의 외삼문이 성균관의 정면관이라 할 수 있는데

담장 양 옆에있는 한 쌍의 은행나무가 성균관의 연륜을 말해준다.

 

외삼문

대성전의 정문인 외삼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든다고 해서 신문이라고도 불린다.

대문의 문짝이 비틀려있는 것은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일부러 조금 열어둔 것이다.

하연대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는 곳.

왼쪽의 작은 문은 향문이라고 불리며 그 안쪽에 부속건물들이 있다.

 

동삼문

동무가 끝난 자리에는 지붕이 한단 낮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삼문이 보이는데 이를 동삼문이라고 한다.

이 문이 바로 임금이 성균관에 알성하러 올 때 드나들었던 어삼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었다.

 

동재와 진사식당

향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명륜동의 동재 건물툇마루가 길게 이어져 있다.

오른쪽은 진사식당이라는 긴 건물이 나란히 뻗어 있다. 지금은 포대에 뭔가를 담아 가득 쌓아두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정록청의 대문 역할을 하는 고직사의 문이다.

 

정록청

성균관 관리사무소로 정3품 이하의 관리들이 근무하던 정록청은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단청이 없다. 

 

향대청(봉향청, 향관청)

정면 4칸의 번듯한 팔작지붕 집인데 문묘 향사 때 헌관들이 숙식하고 봉향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봉안하는 곳이었다.

춘추 문묘제례 때만 사용되기 때문에 평소엔 동재 서재에 들어가지 못한 유생들의 기숙사로도 쓰였다.

 

존경각(왼쪽)과 육일각(오른쪽)

존경각은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임금이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그 때 사용한 활과 화살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공간이다.

문묘에 활과 화살이라니? 활쏘기는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지라 이름을 육일각이라 한 것이다. 

 

비천당(丕闡堂)

명륜당은 성균관의 유생들을 교육하던 강당으로 과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제2의 강당인 비천당은 명륜당이 과거 응시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경우 제2의 과장으로 활용하였다.

 

명륜당

명륜당 건물에서 여느 전통 건축과는 다른 품위가 느껴지는 것은 본채와 익실에 명확한 위계를 두었기 때문이다.

명륜당의 정면관은 좌우대칭이면서도 풍부한 시각적 변화가 느껴진다.

 

'명륜당' 현판과 정조의 글

정조가 성균관에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지은 시에 붙인 서문인 태학은배시서(太學恩杯詩序)에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임금의 마음이 잘 표현되었다.

 

그런데 왜 술잔을 내려주는지 의문이었기에 그 부분만을 옮겨본다.

'이제 먹을 것과 함께 은술잔을 내린다. 제생들은 술잔 속에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 새겨져 있는 것을 아는가?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다는 이 말은 시경 녹명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빈객과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밤새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갖옷 없이도 추위를 느끼지 않으며 또 피곤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재를 육성하는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새긴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구절이 마음을 움직이는데 시작이 반이라며 건방을 뜨는 우리 마음에 경종을 준다.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명륜당 천장에는 수많은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어 이 건물의 중요성과 연륜을 말해준다.

1000원 화폐에 퇴계 이황과 명륜당이 그려져 있다.

 

동재와 서재

명륜당 앞에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좌우로 길게 서 있다.

명륜당 월대 아래에 낮게 자리하고 있어 마치 공손히 양옆에 늘어서서

명륜당을 향해 읍하는 것 같은 정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재와 서재의 출입문은 마당에서 보자면 등을 돌려 각기 바깥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명륜당 앞은 언제나 숙연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동재의 툇마루

무명자 윤기(尹愭)의 반중잡영(泮中雜詠)
유생들의 학교 생활에 대하여 무명자 윤기(1741~1826)라는 분이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무려 220수로 읊은 반중잡영이라는 장편시가 근래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소상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이 20세 때 80세의 성호 이익을 찾아뵙고 이를 평생의 행운으로 생각하며 성호를 사숙했다.

33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그러나 무려 20년 가까이 지난 52세에야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였으니 20년을 재수한 셈이다.

 

반중잡영의 220수는 성균관의 건물부터 유생들의 방 배정, 식당규칙, 식사 때 음식, 출석 체크, 학생회 구성,

행사 동원, 석전제 행사, 학생들이 올리는 상소, 단식투쟁인 권당, 반촌의 명승지 등

모두 38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마다 여러 수로 읊었다. 

게다가 각 시에는 제반사항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달았다.

이렇게 유생들의 생활을 증언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무명자의 반중잡영은 거의 실록 수준이다.

생각할 수록 무명자가 너무도 고맙고 너무도 위대하다.  

 

명륜당 은행나무

누구든 단 한번이라도 성균관 은행나무 단풍이 절정에 달한 11월 그날 여기에 가본다면

이듬해 다시 찾겠다는 마음이 들거라며 예찬한 성균관의 은행나무이다. 

안내판을 보면 이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라 한다.

여기 은행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은 수나무라고 한다. 유생과 선생 모두가 남자인 것 처럼~

하지만 겨울의 은행나무는 너무나 황량하니

그런 날의 은행나무를 그린 명작으로 도상봉 화백(1902~1977)의 '성균관 풍경'이 있다.

1959년에 그린 이 그림의 주제는 은행나무여서 화면 전체가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은행나무와 명륜당의 품격이 아주 고고하게 그려져 있다.  

 

대성전

대성전은 태조 7년(1398) 창건된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한 것으로

지붕선이 선명하고, 월대도 널찍하다. 건물의 측면 4칸 중 앞쪽 1칸을 툇간으로 개방했다. 

대성전 39명의 위패

공자를 가운데 모시고

좌우로 첫째 줄에 4대 성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둘째 줄에는 공문 10철(공자의 10대 제자)과 송조 6현(송나라 때 성리학을 완성한 6인)

셋째 줄에는 동국 18현(신라, 고려, 조선조의 명현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무

대성전 앞뜰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정면 11칸의 긴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대단히 엄숙한 인상을 준다.

본래는 위패를 모신 공간이었지만 여기에 모셔져 있던 중국 학자의 위패는 매안하고

동국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김으로써 동무와 서무는 비어 있다. 반대편에 똑같은 크기와 형식의 서무가 있다.

 

삼강나무

전사청 대문 앞에 있는 잣나무는 세 줄기로 자라나 삼강나무라는 별칭이 붙었다. 

 

오륜나무

대성전 월대 앞에는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중 오른쪽은 줄기가 5개로 뻗어 올라가서 오륜나무라는 별칭이 붙었다.

 

묘정비와 묘정비각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이 있는데 태종 때 변계량이 비문을 작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고

인조 4년(1626)에 파손된 묘정비를 다시 세웠으며 이정구가 그 내력의 대략을 비석 뒷면에 썼다. 

 

하마비와 탕평비각

입구에 하마비와 탕평비각이 세워져있으니 하마비는 1519년(중종 14년)에 세워졌고

大小人員過此者皆下馬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는 경고문이 있다. 

영조대왕의 탕평비

영조 18년(18=742)에 세운 이 탕평비에는
영조가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을 풀어서 친필로 쓴 글이 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두루 아우르고 치우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
치우치고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 영조는 탕평책을 펴면서
당파에 따라 인물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른 등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영조는 자신의 국정철학을 돌에 새겨
지성의 상징인 성균관 들머리에 세우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