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구석구석 국내여행

인왕산: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권 / 서울 종로 진경산수화길 (2023.1.16 & updated 12.14)

클리오56 2023. 1. 22. 21:06

 

일자: 2023.1.16
코스: 진경산수화길
코스: 창의문 ~ 윤동주문학관 ~ 청운문학도서관 ~ 백운동천바위/김가진 집터 ~ 백세청풍각자 ~
송강정철집터 및 시비 ~ 겸재정선집터 ~ 국립서울맹학교 담장벽화 ~ 우당기념관 ~ 청휘각터 ~
자수궁터/인곡정사터 ~ 송석원터 ~ 통인시장 ~ 윤동주하숙집터 ~ 수성동계곡 ~ 이상범가옥과 화실 ~ 경복궁역
소요시간: 2시간 58분 ( 휴식시간 23분 포함)
도상거리: 6.73km
고도: 115m -> 20m

Track_2023-01-16_진경산수화길_.gpx
0.06MB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권, 서울편 3
인왕산: 인왕산 계곡의 옛 모습을 복원하며
세종마루 정자와 오거리 / 수성동으로 가는 길 / 수성동 / 치마바위 / 병풍바위의 글씨 /옥류동 / 겸재의 〈삼승정도〉 /
옥인동의 여러 궁들 / 인곡정사와 육청헌 / 천수경의 송석원 / 윤덕영의 벽수산장 / 언커크(UNCURK) /
벽수산장과 박노수미술관 / 세종마루 정자에서 / 이상과 구본웅 / 필운대 / 필운대 풍류 / 내 가슴속의 인왕산

 

원래는 진경산수화길을 따라 걸었지만 코스의 많은 부분이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권에 수록된 인왕산 편과 겹쳐지며

인왕산 숲길 등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함께 묶어 새롭게 편집했다.

편집 과정에서 진경산수화길과 인왕산의 각각 독특함이 훼손되었다면

오로지 나의 미흡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마찬가지로 여기 인용글 또한 많은 부분 유홍준 교수의 저서에서 옮아왔다.(2023.12.14)

 

지난주 서촌을 탐방 중 진경산수화길을 알게 되었고
인왕산숲길을 답사 후 창의문에서 수성동계곡까지 진경산수화길을 답사하였으며
이어 경복궁역까지 교통편의상 연장하였다.

진경산수화길 주변의 가볼 만한 곳으로 14곳이 열거되었는데
청송당 바위와 가재우물터는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여 다음 기회에 다시 시도해야겠다.

창의문

<창의문도>
창의문은 한양 도성 4소문(小門) 중 서북문에 해당하는 성문이다.
이 문을 나서면 현재 종로구 신영동 평창동 일대의 장의사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곳을 흐르는 홍제천을 따라가면 서대문구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으로 이어지는 문산대로로 연결된다.
따라서 개성 이북의 황해도나 평안도로 내왕하는 길손들은 이 문을 지름길로 삼았으니 서대문 못지않게 내왕이 빈번했다.
창의문의 별호 자하문(紫霞門)의 줄임말인 ‘자문’으로 애칭되며 서민들의 통행문으로 사랑받아 왔다.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설명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창의문도>
조선후기의 진경풍 실경산수화를 대성시킨 겸재 정선이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은 30대에 그린 금강산 그림으로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50대 중반, 최고의 유명 화가로 중국의 화상들도 높게 평가할 무렵 그는 백악산 밑에서 인왕산 아래로 집을 옮겼다.
그리고 이곳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30년간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수많은 명작을 그렸다.
<창의문도> 역시 이 시기에 즐겨 그린 자신의 주거지 주변 실경도 중 하나이다.


정선은 화제를 “창의문”으로 적었는데, 그림은 성문이 좌측 일부만 남아있어 우측 화면이 몇 cm 잘려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같은 화제로 그린 <창의문도>가 《장동팔경첩》에 첩장 되어 있는데,
그것보다 성문에 조금 더 가까운 왼쪽 언덕에서 바라본 각도로 재현되었다.
근경은 내려보고, 원경은 근경에서 올려본 ‘앙관부찰(仰觀俯察)’의 역상법(易象法)으로 나타냈다.


창의문을 가까운 위치에서 재현했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비해 백련봉 위의 부암(付巖)이나,
성곽과 전각, 바위의 양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더욱 실감을 준다.
특히 쇄찰법(刷擦法)으로 음양을 바꾼 석법을 비롯해, 소묘풍의 송수법, 미점(米點)과 대혼점(大混點)을 섞어 처리한
산등성이 수법 등에 정선 특유의 필묵미와 함께 만년 개성적인 화풍이 발휘되어 있다.
종이에 그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비하여 필묵의 활력과 생동감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바탕의 깁이 다소 풀어지고 변색되었기 때문이다.


(『소장유물자료집13 - 한양 명품선』, 서울역사박물관, 2022)

북악산

청운문학도서관

북악산을 곁에 둔 청운동 고급빌라 지역의 멋진 골목길

겸재정선,
백악산 1740년경,
자본담채, 25.1cm ;23.7cm,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
백악산

정상 아래 부아암은 지금도 볼 수있다.

자하문로 36길의 공사장 담장에 붙여진 겸재 정선의 작품들
(창의문도, 인왕제색도, 백악산, 인곡정사, 청풍계도 등)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 주차장에서 바라본 북악산


지하문 터널과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

지난번 답사 때는 놓쳤던 백운동천의 흔적을 찾았다.
백운동천 각자와 김가진 소유의 백운장터이다.

안내판을 보면 인왕산 백운동 계곡이라 부르고 있지만
유홍준 교수는 북악산 기슭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건 아닌 듯하다.
아무튼 이곳의 백운천 줄기가 가장 길어 청계천의 본류로 간주된다.

여기 백운동천의 글씨는 조선말기 문신이었고 3.1 운동 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한
동농 김가진이 자신의 집 뒤쪽에 있는 바위에 새긴 글씨다.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홍준 교수)

김가진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싸우다 강화성이 함락되자
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직한 척화파 거두 김상용의 12대손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나이 74세 때 아들 김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며느리 정정화는 이듬해 상해로 합류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를 오갔다.

김가진은 1922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상해 송경령능원에 잠들었고
해방 후 김의한 부부는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의한은 북을 택하였고 평양에 묻혔으며 부인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망국과 분단으로 김가진의 가문은 이렇게 찢어져있으니~~

백운동천 각자

김가진 백운장터

백운동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의 지명이다. 종로구 청운동 8 일대로 자하문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에 해당한다.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동명을 개칭할 때 아래 동네인
청풍계(靑楓溪)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청운동(淸雲洞)은 마땅히 푸를 청(靑)자를 쓰는 청운동(靑雲洞)이 됐어야 하는데
당시 동 서기가 청운동(淸雲洞)으로 잘못 짓고 말았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낙월봉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으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혔다.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0×33.0㎝ 크기의
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명: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자하문로와 자하문로 36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의 이정목이 세워져 있으며
이 삼거리 옆 경기상고 교정에 청송 성수침의 집(청송당)터가 있다.

청송당(聽松堂)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청송 성수침이 공부하던 서당 이름이었다.  겸재가 살고 있던 당시까지도 청송당은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었던 듯 ‘일자(一字)’ 형태의 기와집이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시냇물이 여울져 흐르다 골짜기 입구에서
다시 다른 물줄기와 합쳐지는데 그 뒷산은 북악산 자락입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 부근의 지형이 크게 변하지 않아
청송당 뒤편에 있던 큰 바위에는 청송당 터를 알리는 ‘청송당지’라는 각자가 남아있었고, 물줄기가 합쳐지는 골짜기 입구
바위에도 ‘유란동’이라는 각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겸재는 이처럼 청송당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절벽을 이룬 바위들을 물기 가득한 먹을 사용하여 대담하게 표현했습니다. 방 두간, 마루 한 간인 듯한 조촐한 모습의 청송당은
소나무 숲의 그윽한 정취 속에 고즈넉하기만 합니다.
중후한 풍모의 나이 든 선비 하나가 동자의 안내를 받으며
유란동 개울을 건너 청송당으로 향하는데,
겸재 자신일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청운초등학교 직전 자하문로 33길 골목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서면
우측에 펜스로 보호 중인 백세청풍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곳이 청풍계 옛터이고 이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주희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병자호란 때 장렬하게 순절한 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의 저택이 이 부근이라는데,
그리고 카카오 맵에 표시도 있지만 어떤 표식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이 또한 다음 숙제.

청풍계

겸재가 속한 학파인 백악사단의 본거지이자,
스승 가문의 세거지이며, 자신의 가문과 스승의 가문이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었던 현장이 바로 청풍계이다.
이런 곳이니 청풍계는 겸재에게 그저 경치가 좋은 승경지가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지닌 사회적 위상을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현전하는 여섯 폭의 청풍계 그림은
겸재의 이런 인식과 경험의 산물이다.
그중 여기에 소개하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는
크기도 가장 클 뿐만 아니라, 품격과 수준에 있어서도
단연 압도적이다.



바위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 안에
버드나무,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여
계곡의 맑은 바람이 눈에 잡힐 듯하다.
이곳을 왜 청풍계라 했는지 알 만하다.

김상용의 초상화를 모셨다는 늠연당이
그림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 띠풀로 지붕을 올린 정자는 정조가 잠시 쉬어 갔다는 태고정이며, 담장 안 누각 형태 건물은 청풍지각이다.
함벽지를 비롯해 곳곳에 자리한 연못들은
육중한 인왕산 암벽, 창연한 노거수들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여유롭고 안온한 정취를 자아낸다.



복선 쓴 선비가 막 나귀에서 내려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현존하는 청풍계 그림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어쩌면 겸재 자신이거나 타계한 스승 삼연을 떠올리며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어떤 청풍계 그림보다 현장감과 실재감이 두드러진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인 고원법을 적용하여
경물들을 수직으로 쌓아 놓음으로써 창대한 느낌을 연출했다. 과도하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진경문화를 주도했던
장동 김문의 격조와 기품이 절로 느껴진다.
평소 청풍계에 대한 겸재의 생각과 느낌이 이러했을 것이다.


<淸風溪, 정선, 비단에 담채, 133.0×58.8㎝, 간송미술관>
청풍계

원래 청풍계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리웠으나,
후에는 “푸른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뜻으로도
전해졌습니다.
그 의미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그 곳에는 정선의 스승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선은 소나무,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이 가득한 이 계곡에
대한 감상을
따뜻하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서울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천하으뜸의 명당이다. 삼각산이 조산이고, 백악산이
현무가 되며, 낙산이 청룡, 인왕산이 백호,
남산이 주작이 되어 거대한 비단 주머니꼴을 하고 있다.


거기에 동쪽의 안암산, 서쪽의 안산, 남쪽의 관악산이 한겹
둘러싸서
겹주머니 형태를 하고 있으니 천연의 요새다.


물길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강인 한강이 동북쪽에서 흘러와
서울의 남쪽을 휘감아 돌며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천연의 해자가 동, 남, 서를 에워 싼 형국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을 갖추기도 쉽지 않은데, 삼각산으로
내려온 산맥 전체가
백색 화강암으로 백운산, 인왕산, 낙산이 모두 한 덩이 거대한 흰 빛 바위인듯 솟구쳐 있다.


그러니 그 사이 사이에 펼쳐진 계곡은 기암절벽과 맑고
깨끗한 물
그리고 솔숲 등 수목이 어우러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산줄기와 시냇물들이 3면을 휘감아 나가는 한강과 마주치면서 갖가지 낭떠러지와 산등성이, 모래벌판,
모래섬 등을 만들어 냈다.

이에 한양 서울의 강산풍경은 천하 제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겸재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을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 서울 곳곳을
문화유적과 함께 진경으로 사생해 남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3면으로 둘러싸면서 산과 시내를 만나
절경을 이루고
수많은 문화유적을 담아 낸 한강변의 명승지도양수리 부근에서부터 행주에 이르기까지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진경산수화로 사생해 남겼다.


최완수/겸재의 한양진경

어느 집 담장에서

백세청풍 각자를 본 후 다시 되돌아나와 청운초교 정문을 지나면
정철 시비가 여럿 학교 담을 따라 세워져 있으며 집터 표시석도 도로변에 있다.
그리고 청운초교 삼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송강문화회관이 있고
건물 앞에 송강찬가비가 세워져 있으며
청운초교 앞에서 창의문로까지의 자하문로 28길을 송강길로 명예도로명이 주어졌다.

진경산수길의 주인공은 겸재 정선, 그의 출생지 경복고를 찾았으니
코로나 시즌이고 수업 중이라 학교의 출입이 가능할까 염려했지만
관리인께서 흔쾌한 승낙 해주시고 친절히 길을 가르쳐주셨다.

교정의 꾀꼬리 동산에 '겨레와 나라의 별들이 되어'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학생들의 기상을 높여주니 그래서 경기고, 서울고와 더불어 경복고는 예전 명문 중의 명문이었으리라.
북악산 기슭에 자리 잡아 인왕산을 조망하는 명당이니 명문고의 자리로 손색이 없다.

운강대라는 작은 표시석이 있어 살펴보니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조원의 터이며
임진왜란 당시 그의 두 아들이 모친을 해치려 하는 왜군을 몸으로 막아 대항하다가 왜군 칼에 목숨을 잃었고
이 두 아들의 효행을 기려 이곳을 쌍효자거리로 불렀으며 지금 효자동의 기원이다.

경복고 뒤로 북악산

경복고에서 인왕산 조망

겸재 정선의 집터 표시석이 그의 그림과 함께 세워져 있으며
겸재를 畫聖으로 높이 부르고 있다.
뒤로는 북악산 기슭, 앞으로는 인왕산 조망이니 명당에서 畫聖이 탄생하셨다.

경복고를 나와 청운초등으로 되돌아가는데 마주한 특이한 집,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집인데 적산가옥으로 인수되었다.

다시 진경산수길 메인으로 돌아와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있는데 각각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이다.

서울농학교에 선희궁 건물이 있는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이고
선희궁을 지으면서 다리를 새로 놓아 신교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 난간 기둥은 청운초등 교정에 있고
선희궁은 사당으로서의 기능은 칠궁으로 옮겨갔지만 건물 자체는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선희궁의 담장 흔적 역시 서울농학교의 펜스 아래에 석축이 있다.

국립서울농학교 및 담장 벽화

국립서울맹학교와 점자벽화

우당기념관
경술국치로 조선에 대한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는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투쟁에 앞장서셨다.
오늘은 그 건물만 보고 돌아가지만 다음 기회는 내부관람을 하겠다.

필운대로에서 골목길로 올라서는데 아주 가파른 계단,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
청휘각터와 가재우물터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예상을 벗어난 장소에서 청휘각터를 발견

청휘각터

청휘각

정동팔경 중의 하나

청휘각은 김수항의 후원에 있던 정자의 이름이다.
김수항은 청음 김상헌의 손자로 궁정동 집에서 태어나 관직을 얻으면서 이곳 옥류동에 집을 마련하고 후원을 만들었다.
청휘각이란 뜻은 '비 갠 뒤 맑은 햇살이 비취는 집'이다.

숙종 때 활약했던 김수항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워낙 경치가 좋으니까 고종때 민씨 형제들,
일제강점기때는 윤덕영 일파들이 이곳에 살았다.

호천재 카페

 

필운대로 9가길 골목
좁디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한쪽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저런 중장비가 어찌 들어왔을까 의아스럽고
이 부근이 가재우물터인데, 그리고 최근 재발견되었다는 옥류동 각자도 이 부근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정선의 삼승정도

겸재 정선은 삼승정도를 그리면서 이 정자의 위치를 명확히 일러주기 위하여

왼쪽 계곡가에는 옥류동, 오른쪽 바위에는 세심대라는 글씨를 숨은 듯 써 넣었다.

 

유홍준 교수는 프랑스인 파비앙을 대동하여 이 옥류동 바위글씨를 답사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오랫동안 잊혔는데 2019년에 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군인아파트: 자수궁터, 인곡정사터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의 거처로 자수원 혹은 자수궁이라 하며
안내를 보면 태조의 일곱째 아들 방번이 원래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또한 여기부터 자하문로까지를 겸재길로 부르는데
이곳(인곡정사)에서 겸재가 52세부터 돌아가시던 84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도
인곡유거도는 정선이 자신의 집 인곡정사를 그린 그림이다.
정확한 집터를 알 수 없지만 군인아파트 담장을 끼고 난 길 어디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홍준 교수)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유거는 겸재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겸재가 살던 시대에 사대부의 집들은 모두 택호(宅號)를 가지고 있었다.
겸재도 자신이 52세부터 살기 시작해 84세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자기집 이름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仁谷精舍)라고 불렀다.

유거라는 것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는 심신을 연마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집이란 뜻이다.
모두 학문 연구를 궁극의 목표로 삼던 사대부들이 붙일 만한 집의 이름이다.

그래서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즐겨 유거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태어난 집도
악록유거(岳麓幽居)였다. 삼연의 증조부 청음 김상헌이 붙인 이름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옥인동 20 부근이다. 지금은 그 터에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곡유거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 댁 주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도(漢都)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 인왕곡(仁王谷). 그러니 인곡은 인왕곡의 준말이었다.
옥인동이라는 현 동명도 1914년 옥류동(玉流洞)과 인왕곡이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겸재 탄생지는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幽蘭洞)이었다.
현재 청운동 89 일대이니 경복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겸재는 이곳에서 나서 52세까지 살다가 이후 인왕곡으로 이사와 인곡유거에서 생을 마감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절정에 이르는 것이 60대 이후이고,
이 그림을 그린 80세 전후해서는 추상세계로 이를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따라서 인곡유거는 겸재가 그 예술혼을 한껏 불태웠던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인곡유거는 지금 신교동과 옥인동을 나눠 놓는 세심대(洗心臺) 산봉우리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을 동쪽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바깥 사랑방 동쪽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 인곡유거인 것을 나타냈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사랑채 앞 정원과 그 남쪽으로 전개되는 필운대(弼雲臺) 일대의
인왕산 자락이 어우러지는 그윽한 자연미의 표출일 것이다.

뜰 안의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지면서 이뤄내는 조화가 바로 이를 말해주는데
이엉을 얹은 초가지붕의 일각대문과 버드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덩굴에 이르면 그 세련된 안목에 기가 질린다.

이렇게 그윽한 자연미를 자랑하던 이곳을 지금 찾아가 보면 옥인파출소와 효자동사무소 뒤로 군인아파트 건물들이
살벌하게 솟아나서 그 큰 인왕산을 간 곳 없이 밀어내고 있을 뿐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인곡정사(仁谷精舍)
조선 영조 22년(1746) 겸재가 71세 때 살던 자택의 모습이다. 현재 종로구 옥인동 20에 해당하는 곳.
당시 이곳의 지명이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仁王谷)이었기 때문에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택호(宅號)를 썼던 모양이다.

이 그림을 그린 내력은 그림이 들어있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발문(跋文·책의 후기)에 밝혀져 있다.
겸재의 둘째 아들인 정만수(鄭萬遂)가 지은 이 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직접 짓고 썼다.
이는 퇴계의 자손을 거치고 거쳐 후에 겸재의 외조부인 박자진(朴自振)에게 전해졌다.
박자진은 스승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게 이를 두 번이나 보여주고 발문을 받아왔다.
겸재의 아들 정만수는 박자진의 증손자 박종상(朴宗祥)을 졸라
우암의 발문이 딸린 퇴계의 친필 주자서절요서를 집으로 가져온다.
이에 겸재가 크게 기뻐해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짓던 곳과 박자진이 우암의 발문을 받던 장면을
각각 ‘계상정거(溪上靜居)’와 ‘무봉산중(舞鳳山中)’이란 이름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청풍계에 있던 자신의 외가를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주자서절요서를 수장할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 등을 모두 한 책으로 묶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 안에 ‘ㄷ’자 모양의 본채를 가진 단출한 구조의 남향집이다.
안채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랑채부터 담을 두르고 중문(中門)을 냈다.
이것이 사대부 집의 기본 구조다. 중문 안에는 헛간채 장독대 등이 구비돼 있다.
안목 있는 선비가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조촐한 집이다.
뒤울 안에는 대나무가 우거지고 담장 밖 뒷동산에는 노송이 숲을 이뤘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잡수 몇 그루가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행랑채 곁에도 고목나무가 서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네모진 좌대석이 놓여있고, 지붕을 씌운 김치막 곁에는 바위더미가 자연스럽게 쌓여있다.
정녕 화성(畵聖)다운 감각으로 운치 있게 꾸민 생활공간이다.
본채는 30여칸, 행랑채는 6칸쯤 돼 보인다.
이 집 곁에서 살았던 조영석이 16칸 집을 은화 150냥에 샀다 했으니 아마 이 집은 300냥쯤은 나갔을 듯하다.
겸재가 어느 부자에게 ‘소문첩(昭文帖)’이라는 화첩을 그려주고 150냥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니
이만한 집을 장만해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영조 22년, 종이에 그린 22×32.3㎝ 크기의 수묵화로 보물 585호로 지정돼 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이 인왕산에 비 안개가 걷힐 때 드러나는 준수한 모습을 그린 인왕제섹도는
그의 대표작이자 진경산수의 명작 중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仁王霽色圖

 조선 후기의 화가인 겸재(謙齋) 정선이 1751년(영조 27년)에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으며,국보 제216호, 79.2 × 138.2cm.  

60년지기 친구인 시인 이병연이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그렸지만,
그는 이 그림이 완성된지 4일만에 죽었다.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여러 진경산수화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복 직후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매입한 뒤로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2021년 기증되었다. 1984년 8월 6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겸재는 경복고등학교 자리의 유란동에 살다가 52세때 이곳 인곡정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인곡유거도는 자신의 집을 그린 것이다.
정확한 집터는 알 수 없지만 군인아파트(옛 자수궁 터) 담장을 끼고 난 길에서
인왕산을 보면 그의 대표작 인왕제색도와 똑 같은 구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길에는 겸재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1권)

 

인곡유거 터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송석원 터 지표석이 보인다.
오전에 인왕산숲길을 걸으면서 위항문학의 설명을 보았는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던 중인 출신의 천수경이 옥류동 계곡 옆의 소나무와 바위가 아름다운 곳에
송석원이라는 초가집을 마련하고 서당을 열어 배우는 아이가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천수경을 비롯 위항문학의 동인들이 송석원시사를 결성하였고 시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1권 인왕산편을 보면
추사 김정희가 31세 때 송석원 바위에 송석원이라는 글씨를 남겼지만
현재 이 바위 글씨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송석원
이인문
송석원 시회도

고송 이인문이 천수경의
송석원에서 1791년에 열린 시회의 낮 풍경을 그린 그림. 왼쪽에 송석원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유홍준)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단원 김홍도는 1791년
송석원 시회의 밤 풍경을
그렸는데 시회에 참석한
인원수대로 9명을
점경 인물로 나타냈다.
(유홍준)
김홍도는 밤에 울타리 안에 모인 모습을, 이인문은 낮에 인왕산 계곡 바위에 모인 방면을 그렸는데
그림 속엔 모두 9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인문은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인문의 그림은 점점 멀리 놓고 보게 되고 단원의 그림은 점점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된다.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1권 서울편)

그런데 이 송석원터에 윤덕영이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송석원이라 했다는데 바로 벽수산장이다.
윤덕영이라는 이 놈은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데
강제 합병 때 황후가 옥세를 치마폭에 숨기고 내놓지 않는 것을 알고 강제로 빼앗아 이완용 견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윤 견자는 막대한 하사금을 받아 송석원과 부근 집을 모두 사들여 벽수산장을 지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 산장은 언커크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196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세종마루 정자를 거쳐 수성동계곡 방향으로 향하는 중
스마트폰과 충전기 모두 방전에 가까운 상태라 인근 카페에 들러 충전을 부탁하고
라테 커피 한잔을 들며 잠시 휴식 모드~

답사를 재개하며 우선 종로 구립 박노수미술관을 들렀는데
오늘은 월요일이라 휴관, 바깥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 나올 수밖에.
이 건물은 윤덕영 견자가 시집간 딸을 위해지었다가
한국화가 남정 박노수가 오랫동안 살다가 타계하면서
기증 작품과 컬렉션으로 구립미술관으로 건립되었다.

 

2023.12.13일 동기들과 인왕산 둘레길 답사하면서 들러 외부는 물론 내부도 관람하였다. 

 

윤동주 하숙집터
윤동주가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이 기간 동안 좋은 작품들이 나왔다며
이를 잘 활용하여 하숙집 터라고 명명하는 것도 하나의 재주가 아닐까 생각도 든다.

지금 진경산수화길을 걸으며 골목골목 답사를 누비고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았다지만
정작 겸재정선 박물관은 강서구에 위치한다.
진경산수화의 많은 작품들이 한강변의 경치를 담았다는데 착안하여
강서구가 재빠르게 움직여 정선의 가치를 선점한 것이다.

 

인왕산 병풍바위(혹은 치마바위)

인왕산 주봉에는 병풍바위 또는 치마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벼랑이 있다.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가 쫓겨난 뒤 경복궁이 보이는 이곳에 치마를 걸어

중종이 볼 수 있게 했다는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1939년 일제강점기 전시동원체제에서 조선연합청년단을 대일본연합청년단에 가입시킨 것을 기념하여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쓴 글을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병풍바위에 거대한 크기로 새겼다. 

 

수성동 계곡

호쾌한 경관의 수성동은 도심 속의 절경이다. 안평대군의 별서가 이곳에 있었고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이 절경을 보고 시를 지었다. 

 

겸재 정선의 수성동도

수성동도에는 기린교가 명확히 그려져 있어 이를 근거로 수성동을 옛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세종마루 오거리

유홍준 교수는 인왕산 명승지 답사는 통인시장 뒤편의 세종마루 정자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곳에서 각지로 갈 수 있는 길이 다섯 갈래로 뻗어 있어 오거리라 불려왔다.


세종마루 오거리에서 필운대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화가 청천 이상범의 주택에 표식을 붙여두었다.

이상범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에 관계되어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상당히 변심하여 일본의 선전에 이용당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서울이 북한 치하에 들어갔을 때도 북에 동조 협력한 바가 있었다.

초동(初冬)
(이상범 작, 1926년, 종이에 수묵담채, 153×185㎝, 국립현대미술관)

수확이 끝난 메마른 논밭과 소박한 농가, 푸른 잎을 떨어낸 황량한 나무들, 멀리 운무를 머금은 산들로 구성된 산수화이다.
크기와 명암이 다른 리듬감 있는 독특한 점들을 사용하여 한국적 정감이 나는 화면을 창출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동은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에서 벗어나 근현대로 나아가던 한국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우선 전경은 진하게 후경은 연하게 라는 서양 원근법의 요소가 이 그림에는 적용되어 있다.
또한 전경의 사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개체적 사실에 주목했다는 점이 중요 요소로 꼽힌다.
그리고 화면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고랑의 명암 표현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새로운 표현 기법이 아닌 기존의 한국화 기법인 미점준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청전의 작품의 주요 특징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로 하여금 우리의 습속과 전통과 풍경을 살피게 했고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흡수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은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 초부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화법으로 미점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출처: 나무위키)

 

자하문로 5가길 좁은 골목을 지나며 한옥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큰길로 나와 '이상의 집'을 볼 수 있었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한다.

 

아래 '친구의 초상'은 구본웅이 절친한 단짝 친구였던 시인 이상을 그린 것으로,
하얀색 물감으로 덮혀진 이상의 얼굴과 뒤의 어두운 배경이 대비되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또한 이상이 실제로 폐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과 야수파의 기괴하고 강렬한 느낌이 겹쳐져
묘한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구본웅의 <푸른 머리의 여인>

이상의 애인인 금홍이로 추정되고 있다. 

 

구본웅의 <여인>

그의 강렬한 표현주의적 필치가 구사되어 있다. 

 

화가 이승만의 <이상과 구본웅>

화가 이승만은 삽화가로 유명하였는데 이상과 구본웅이 단짝으로 같이 다니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

구본웅이 그린 이 정물화에는 프랑스 예술잡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구문명을 동경하던 1930년대 예술인의 장서가 그렇게 나타나 있는데

이상이 종로에 연 다방 '제비'에는 구본웅의 이 작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서촌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였지만 예전에는 무슨 시장이었는데.....
북촌마을이 흥하니 재빠른 상술로 서촌마을이라 칭하고 게다가 세종대왕 이름까지 도칭한다.
아무튼 인왕산숲길 그리고 진경산수화길을 오르내리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진경산수화길이니 동네와 겸재 정선의 산수화의 연결을 미흡하나마 시도해 보았고
우리 문화와 유산을 알면 알수록 재미는 더하는데 지식은 한없이 부족하니
이렇게나마 조금씩 익혀가면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해 가겠다.

 

특히 일찍부터 서울의 명소였다는 필운대는 배화여고에 위치한다는데 다음 기회에 답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