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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2023.2.11/1.10)

클리오56 2023. 2. 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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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서울편 4에 수록된 '선정릉' 따라하기,

예전에 서너 차례 방문한 적이 있고 최근에는 지난 1월의 대학동기들과 함께였다.

1월의 방문을 추가 보완하는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https://goclemens.tistory.com/15710834

 

서울 봉은사~선정릉 (2023.1.10)

지난 연말에도 봉은사를 다녀왔었고 선정릉 역시 서너 차례 경험을 갖고지만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의 트레킹 일환으로 이 코스를 택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2권, 서울편4

goclemens.tistory.com

매번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선정릉
선정릉: ‘범릉적’에게 도굴된 비운의 왕릉
선정릉이라는 왕릉 / 조선시대 왕릉의 유형 / 왕릉 호칭의 제안 /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
왕릉의 축조 과정 / 성종대왕 선릉 홍살문과 진입 공간 / 정자각과 제향 공간 / 선릉의 능침 /
왕릉의 문신석과 무신석 / 정현왕후의 능 / 중종대왕 정릉 / 왜적들의 선정릉 도굴 /
범릉적을 잡아 보내라 / 탐적사와 쇄환사 / 조선통신사의 길

 

선정릉을 방문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곳의 능 3기가 모두 임진왜란 때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어 당시 남아있는 재와 뼈를 수습해 새로 짠 재궁에 넣어 묻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굴이 가능했던 것은 선릉과 정릉이 석실분이었기 때문이고
만약에 세조의 유지대로 석실 대신 단단한 강회로 이루어진 회격분이었다면
명종의 강릉과 문정왕후의 태릉처럼 도굴되지 않았을 거라는 유홍준 교수의 아쉬운 코멘트가 있다.

성종대왕 선릉

선릉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과 왕비인 정현왕후의 능르로 두 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이강릉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긴 박석 길(참도)이 뻗어 있고

여기서 성종의 능침과 정현왕후의 능침으로 갈라진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오른쪽 숲 너머 언덕에 있다. 

 

선릉의 무인석과 문인석
국조오례의에는 문신석과 무신석의 크기가 약 2.5미터로 규정되었지만
선릉에 세워진 것은 높이 3미터를 약간 넘기는 장대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선릉의 문신석과 무신석은 조선왕릉의 석인상 중 명작으로 꼽힌다며
정면 정관의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라
왕릉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돈다고 유 교수는 평가를 이어간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무신석이 한 단 아래 위치해 있어 조선왕조의 문신 우대를 그대로 보여주며
그 뒤에는 석마가 조신한 자세로 서있고
사진 우측의 석등은 장명등으로 능침을 밝히는 역할이다.

석양과 석호

곡장을 바라보며 봉분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는 각 네 마리다.

석양은 악귀를 제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적이면서도 데포르마시옹이 강한 예술성이 있다.

석호는 산천의 맹수에게서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귀여운 고양이 처럼 조각되어 표정이 다양하여 조형적으로 아주 매력적이다.

 곡장

곡장은 봉분의 남쪽을 제외한 3면으로 둘러져 있는데 곳곳에 박혀있는 동그란 화강암 돌들은 별을 상징한다.

 

정자각

정자각은 제향 공간이고 능침은 성역인 바 능침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정자각의 위치와 높이가 결정된다.

홍살문과 참도

홍살문은 이곳이 국가기관임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홍살문 앞에는 참도라 불리는 박석길이 정자각 앞까지 곧게 뻗어 있다. 

참도는 혼령이 다니는 넓고 높은 신도와 제향 때 임금이 다니는 좁고 낮은 어로로 이루어져 있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따라가면서 멀리 앞을 바라보면 높직한 석축 위에 정자각 건물이 보인다.

 

정현왕후 능
성종의 능에서 보이던 병풍석이 없어 어딘지 짜임새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준다.
성종에게는 세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며
19세의 젊은 나이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나 파주 삼릉에 있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두번째 왕비가 폐비 윤씨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고
세 번째 왕비가 정현왕후이며 중종의 어머니이며 여기 선릉에 잠들고 있다.

정현황후릉의 문식석과 무신석

정현황후릉의 문신석과 무신석은 얼굴 표정이 독특하여 조형적으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중종대왕 정릉
단릉이라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데, 실제로 중종은 세 명의 왕비중 누구와도 함께 묻히지 못했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로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중종반정 때 반대편에 있어 죽임을 당했던 터라
단경왕후는 역적의 딸이라고 하여 왕비된지 7일만에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폐비는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면서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그 바위가 인왕산 치마바위이다.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아들(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죽었고 고양 서삼릉의 희릉이다.
세번째 왕비가 문정왕후인데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하며 왕권을 강력히 행사하였다.

중종은 사후 두번째 왕비의 희릉 곁에 마련된 정릉에 안치되었지만
문정왕후가 지금의 정릉으로 천장시켰는데 아마도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길 원하는 속셈이 있었고
그녀가 후원했던 봉은사 보우스님은 봉은사를 옮겨 사세를 넓히려는 심산이었다는게 유 교수의 평가이다.

중종대왕 정릉에는 근거리 접근이 불가하여 능은 원거리 사진뿐.

 

 

 

재실

재실은 능참봉이 능을 지키는 곳으로 왕이 제사를 드리러 올 때 잠시 머물기도 한다.

선정릉의 재실은 평범한 미음자 구조로 마당 넓은 한옥 살림집 분위기가 난다. 

 

선정릉역 인근의 논현수구레에서 뜨끈한 수구레 해장국을 들었다.
소주도 한잔 곁들이고 영흥도 아주머니 사장님의 입담을 즐겨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