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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2023.2.11/1.10/2022.12.28)

클리오56 2023. 2. 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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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서울편 4에 수록된 '봉은사' 따라하기로서

최근 3개월간 매월 방문하였으니 작년 12월 연말 최박사와, 지난 1월의 대학동기들과, 그리고 오늘 등이다.

이 세 차례를 통해 지난 12월 연말 방문을 추가 보완하는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https://goclemens.tistory.com/15710820

 

서울 강남 봉은사 (2022.12.28)

별마당도서관으로 가기 전 우선 인근의 봉은사를 다녀왔는데 최근 추사 김정희 관련 동영상을 보고 추사박물관도 다녀오는 등 관심을 가졌기에 추사의 마지막 작품 '판전' 현판을 보고자함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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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oclemens.tistory.com/15710834

 

서울 봉은사~선정릉 (2023.1.10)

지난 연말에도 봉은사를 다녀왔었고 선정릉 역시 서너 차례 경험을 갖고지만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의 트레킹 일환으로 이 코스를 택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2권, 서울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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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봉은사
봉은사: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
강남의 절집, 봉은사 / 영암 스님의 봉은사 사수 / 봉은사 일주문 / 천왕문 또는 진여문 / 부도밭의 청호 스님 공덕비 /
견성사에서 봉은사로 /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 / 보우 스님의 죽음에 대하여 / 임진왜란 이후 봉은사 /
봉은사 대웅전의 삼존불상 / 선불당 / 상유현의 「추사방현기」 / 절필, 봉은사 〈판전〉 / 법정 스님의 『무소유』

별마당도서관으로 가기 전 우선 인근의 봉은사를 다녀왔는데

최근 추사 김정희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고, 추사박물관도 다녀오는 등 관심을 가졌기에

추사의 마지막 작품 '판전' 현판을 보고자함이었다.

또한 매력적인 부분은 봉은사를 빙둘러 명상길 1.2km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남에 자리잡은 탓으로 부자절로 알려졌고

얼마전 절의 해고종무원이 절 바깥에서 일인 투쟁을 진행하자

승려들이 주먹과 똥물로 폭행한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으니 속과 겉이 상당히 다른 부분도 있다.

 

아무튼 일주문, 천왕문, 법왕문과 석탑을 지나 대웅전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특히 천왕문 사천왕상의 거대한 규모에 놀랍고 문에도 사천왕상이 그려져있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따르면 원래의 목조 사천왕상은 수장고에 옮겨졌고

지금의 높이 4m 거대한 사천왕상은 2020년에 점안식을 갖고 새로 모신것이라 한다. 

 

대웅전 뒷편으로 소로를 따라 영산전, 북극보전, 영각으로 이어지는데

북극보전은 타절의 삼성각에 해당하며 입시 기도빨이 아주 좋아 신도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드디어 판전, 무식한 내가 어찌 판전의 현판을 보고 느낄 수 있는게 무엇이겠는가?

유홍준 교수의 평을 소개하면 추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임에도

현판으로 걸 板殿 두 글자를 크게 쓰고는 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낙관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오는 무심한 경지의 글씨다.

 

봉은사는 중종대왕 정릉에 자리를 내주고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

정릉의 이장은 죽으면 중종과 함께 묻히고 싶었던 문정왕후의 생각과

봉은사를 중창하고 싶어하는 보우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문정왕후는 사실상 와해되었던 선교 양종 체제를 부활시키고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로, 봉선사를 교종 수사찰로 삼았다.

또한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켜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이 합격했다. 

이렇게 배출된 4천여명의 승려들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돌라가신 후 보우스님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장살을 당했다.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 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마침내 보우는 주먹에 맞아 죽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봉은사 일주문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초정 권창륜이 쓴 수도산 봉은사라는 현판을 달고 찰주도 반듯하게 깍아 비스듬히 받쳐두었다.

 

천왕문 또는 진여문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진여문이라는 이름의 천왕문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옳게 사찰 경내다.

천왕문을 뒤에서 보면 진여문 현판을 볼 수 있다.

사천왕상

비탈길 진입로

진여문에서 법왕루까지 뻗어있는 비탈길 왼쪽은

주차장이 드러나지 않게 담장을 쌓게 그 아래로 물길을 내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담장 끝에는 주차장 쪽에서 들어오는 작고 예쁜 쪽문인 하심문이 있다.

하심이란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깊은 뜻이 있는 단어인데 그 글씨 또한 오묘하게 쓰여 있다.

 

영암대종사 사리탑 비

첫 번째 비석이 영암 스님의 사리탑 비다. 조계종의 큰 스님인 영암 스님은

1975년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강남개발로 위기에 처한 봉은사를 살려냈다.

 

청호 스님의 사리탑과 공덕비

일제강점기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스님은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가운데 비석이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다.

 

보우대사 봉은탑

봉은사는 명종 5년(1550)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가 대리청청하면서

보우스님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중흥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이 되었다.

보우 스님은 판선종사 도대선사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실상 봉은사의 중창조가 되었다.

 

법왕루

1997년에 웅장한 규모로 준공되어 아래층에는 종무소가 들어섰고,

위층은 3,333불의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관음신앙의 신행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세루의 대도량 현판
위창 오세창 선생의 글씨로 오른쪽에 전서체로 선종종찰이라는 협서를 붙였다.
이 네글자는 봉은사의 위상과 자랑을 한마디로 말해준다.

 

대웅전

봉은사 대웅전은 높은 석축 위에 올라 앉아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내부에는 화려한 후불탱화를 배경으로 삼불좌상을 모셨고 여러 탱화들이 있어 불교미술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대웅전 현판은 북한산 진관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서체의 조형적 변형으로 강렬한 힘이 느껴져 봉은사 대웅전 앞에 서면 현판부터 눈에 띈다.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서울 奉恩寺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지닌 삼존불상이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어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지고, 단정한 선비 같기도 하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후기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이 수(首)조각승으로 9명의 보조 조각승들을 이끌고 제작한 상이다.
1765년의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을 통해 1689년에 화재로 본존 석가상은 소실되어 새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승일이 제작한 본존 석가상은 좌우협시상에 비해 30cm 정도 크고,
변형식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모습이어서
조형적인 면에서 구별되나 착의와 
수인(手印) 등은 17세기 중엽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존 석가불상은 좌우의 아미타불, 약사불과는 다른 조각가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발원문과 개금문을 통해서 삼세불의 봉안과 개금에 참여했던 시주자들, 조각을 담당했던 조각승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후기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각

봉은사를 중창한 보우대사에서 현대 불교계 큰 스님이었던 석주 스님까지

봉은사의 역대 주지중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

 

북극보전

북극보전은 보통 절집의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이 있는 자리에 위치한 건물이지만

봉은사에서는 나한 중에서도 원력이 뛰어난 독성(나반존자)까지 모두 모시고 있어 제법 규모가 크다.

대중들이 대웅전 다음으로 선호하는 기도처이다.

 

미륵대불

영암스님은 미륵대불 조성을 추진하여 10년간의 대역사 끝에 1996년 점안식을 가졌다.

이 미륵대불은 봉은사의 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봉은사가 도심 속의 사찰이 되면서 수도처에서 기도처로 바뀌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판전

추사가 봉은사에 머물고 있을 때 화엄경 소초본 등 3천여 매의 목판이 완성되어

이를 보관하는 경판고로 지은 것이 판전이다.

유홍준 교수의 평을 소개하면 추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임에도

현판으로 걸 板殿 두 글자를 크게 쓰고는 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낙관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오는 무심한 경지의 글씨다.

백송

판전 옆에는 추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백송 두 그루가 자못 싱싱히 자라고 있다.

어려서 추사는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고,

예산 추사고택의 김흥경(추사의 고조부) 묘소 앞에는 추사가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다 심은 백송나무가 있다.

유 교수가 문화재청장 시절 유적지에서 심기 위해 기르고 있는 백송 두 그루를 보낸 것이 지금 자라고 있다.

 

선불당

선불당은 장대한 규모로 예불과 수행 등 여로ㅓ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 딸려 있던 목조 가건물에서 추사 김정희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선불당의 사천왕

선불당 끝에 붙어 있는 별도 공간으로 드나드는 문에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다래헌

주지 스님의 거처로 한때 법정 스님이 여기에 기거하며 그 유명한 무소유를 썼다.

명상길

곶감과 군고구마로 간식을 즐기는 친구들 (2023.1.10)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했는데,

수령 300년의 라일락 노목 두 그루와 부도밭 정비하면서 훤히 드러났다는 산사나무는

다음 탐방 기회 때 찾아봐야겠다. 숙제가 남아있기에 계속 찾아갈 명분이 있는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