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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 창신동 + 숭인동 핫플(2023.2.9)

클리오56 2023. 2. 10. 09:54

 

일자: 2023.2.9

코스: 동관왕묘 + 창신동/숭인동 핫플

등로: 동대문역 7번 출구 ~ 박수근집터 ~ 동대문아파트 ~ 동관왕묘 ~ 숭인근린공원(동망정/동망봉) ~

청룡사/정업원터 ~ 자주동샘/비우당터 ~ 창선숭인채석장전망대 ~ 돌산마을전망점 ~

산마루놀이터 ~ 안양암 ~ 대원실마트 ~ 백남준기념관 ~ 동대문역 3번 출구

소요시간: 4시간 05분 ( 휴식시간 40분 포함)

도상거리: 8.05km

Track_2023-02-09_동관왕묘숭인창신동.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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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하기의 일환이고

이번에는 10권의 동관왕묘를 중심으로 숭인동과 창선동의 볼거리를 몇 추가하였다.

특히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과 박수근 화백과 백남준의 집도 함께 한다. 

다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이간수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요즘 뜨는 핫플도 몇 포함했다. 

 

앞서의 답사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제4부 동관왕묘
동관왕묘의 역사 관왕묘의 기구한 역사
동묘 / 남관왕묘 / 동관왕묘 / 숙종·영조·정조의 동관왕묘 참배 / 고종시대 관왕 숭배 /
성주·안동·남원의 관왕묘 / 고금도 충무사

동관왕묘와 그 주변 관왕묘의 부활과 도시 재생을 위하여
동관왕묘 앞 벼룩시장 / 6070 홍대 앞 / 동관왕묘의 건축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이간수문 / 박수근 살던 집 / 백남준 살던 집

동대문역 7번 출구로 나와 동관왕묘로 가기 전 첫번째 답사지는 박수근이 살던 집이다. 

박수근의 고향 강원도 양구에는 박수근미술관이 소재하고 있으며

2019년 양구의 두타연 산소길을 걷는 중 등로에 박수근 작품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수근 화백이 창신동과의 인연은 미군 PX에서 근근이 헐값에 그림을 팔아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작은 집 한칸을 마련했기 때문이고 이 기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박수근 화백이 살던 집은 지금은 정삼품 순댓국집이 되어 있고

골목에 그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처마의 홈통에는 유홍준 교수가 유성 붓펜으로 쓴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 낙서처럼 남아있다.

박수근 집터에서 멀지 않는 곳에 서울의 초창기 아파트인 동대문아파트가 있어 들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는지 무단 출입과 사진 촬영 금지라 한다.

 

1965년에 착공하여 1967년에 완공하였다. 일명 연예인 아파트라고 불렀는데,

완공 초기에는 백일섭이나 이주일 등의 연예인들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연예인들이 당시 개발 중이던 강남 일대로 이주하게 되면서 그 명성을 잃게 되어

현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노인층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50년이 지난 세월에도 아직까지 아파트가 잘 보존되고 있다.

최초로 ㅁ자 (중앙정원)형으로 설계하여 지하 1, 지상 6층 높이로 건축되었다.

무한도전 2009년 여드름 브레이크의 초반부분 촬영지이다.

신비아파트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집인 신비아파트의 모티브가 됐다.

영화 세븐데이즈, 숨바꼭질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SNL 게임즈 레지던트 이불(...)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방탄소년단 I NEED U 뮤직비디오 초반에 등장한다. (출처: 나무위키)

영도교는 폐위된 단종이 영월로 떠날 때 정순왕후가 마지막 이별한 곳이다. 

영도교 - 여인시장터 - 동망정/동망봉 - 청룡사/정업원 터 - 자주동샘으로 이어지는 정순왕후 답사 코스이다.

잡다한 품목들이 가게와 수레를 채운 벼룩시장이 펼쳐진다.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그 가운데서 보물을 찾아내는 기적을 이룰 수 있을지~

또한 이곳은 여인시장 터이기도 한데 정순왕후를 도와주기 위해 동네 부인들이 열었다고 한다.

 

동관왕묘를 줄여서 동묘라 부르는데 이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유 교수의 지적이 있었는데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구속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현실은 지하철역 이름부터 동묘앞역이며,

동관왕묘 바로 곁에 세워진 엄청난 크기의 동묘공원 비석,

심지어 동관왕묘의 입구 문의 현판도 동묘라면 할말이 없다.

 

그래도 크게 다행이라면 예전에 비하여 주변이 많이 정화되었다는 것,

벼룩시장도 규모가 많이 줄었고 주변 가게들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기 때문아닐까?

동관왕묘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니 1601년 건립으로 420여년이 지났고,

중국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친필 현판을 보내주었지만 청나라 군대가 없애버렸다. 

하지만 관우상은 무게 2.4톤, 높이 2.5미터의 거상으로 지금도 온전히 남아있다.

 

사실 소설 삼국지에 익숙한 우리는 관우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이며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도 삶과 마음 속에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신이다. 

관우(?~219)는 실존인물이며, 사후에 촉나라 시호는 장목후, 관후로 불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존경받고

북송의 휘종황제는 1107년 관우를 무안왕으로 봉하고 무신으로 모시면서, 이때부터 관왕으로 불렀다.

명나라 신종황제는 관우를 황제로 격상해 관제로 불렀으며

1593년 관우의 고향인 해주의 관제묘와 관우의 수급이 묻혔다는 낙양의 관림을 공자의 문묘 수준으로 조영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은 주둔지에 관왕묘를 건립했는데

고금도(선조 30년, 1597년 명장수 진린,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 사당으로 남아있음),

성주(1597년 명장수 모국기), 안동(1598년 명장수 설호신), 남원(1599년, 명장수 남방위) 등에 관왕묘가 있다. 

남관왕묘는 명장수 진인이 1598년 숭례문 밖 주둔지에 설립했으며, 서울역 맞은편 현재 남묘파출소 자리였다.

 

동관왕묘의 정문

남문 또는 외삼문이라 불리는데 규모가 제법 당당하다.

외삼문 양 옆에 협간을 더해 정면이 5칸이며 한쪽에는 쪽문이 달려있다.

협간의 지붕이 낮아서 외삼문이 솟을대문처럼 권위 있어 보인다.

동관왕묘 내삼문

외삼문 들어가면서 바로 마주하는 내삼문은 외삼문에 비해 규모도 크고 지붕도 팔작지붕이어서 화려해 보인다.

이 안쪽이 정전이 있는 성역이다. 오른쪽은 어막대가 보수중이라 칸막이가 세워져있다. 

어막대는 임금이 행차시에 잠시 쉬어가던 곳이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잡인' 비석과 하마석이 있다.

동관왕묘의 정전

정전 건물이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면에서 봤을 때

팔작지붕 삼각형 합각의 긴눈썹지붕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벽체를 벽돌로 쌓은 중국 사당 형식을 취하면서 열주가 둘려있어 사당으로서의 무게감이 있다. 

무묘다운 기상이 있고 관왕묘라는 새로운 형식을 조선식으로 재해석한 건축적으로 성공한 문화유산이다.

정전 정면과 오른쪽에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중앙의 현판은 고종황제가 동관왕묘에 내린 것이고 오른쪽은 북관왕묘에서 옮겨온 것이다.

내부 전실에도 '현령소덕무안왕묘' 현판이 두 개 있는데 영조대왕이 쓴 것이다. (둘 다 혹은 하나만?)

주련은 모두 14벌 28개다. 북관왕묘와 서관왕묘에서 옮겨온 현판도 여기에 달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것이다.

동관왕묘의 현판과 주련은 대개 중국 사신이나 상인이 쓴 것인데 그중에는 우리나라 대신이 쓴 것도 있다.

고종의 측근이자 갑신정변 중에 살해된 사대당의 핵심대신이었던 조영하가

아마도 고종이 행차할 때 수행하며 남긴 듯한 주련이 있다.

깨끗하게 왔다가 떳떳하게 가는구나.
조조 군영에 머물렀으나 흙탕물 속에서도 맑은 연꽃 같음이여.
꽃은 오히려 형양9군에 머물고, 화창한 봄날의 관우 장군이여, 위엄있는 무기로 이곳의 평안을 지켜주도다.

동무

정전에서 내삼문 쪽을 보면 좌우로 다소곳이 시립해 있는 듯한 동무와 서무가 공간을 아늑히 감싸주고 있는 느낌을 준다. 동무에는 고종 때 다시 세운 숙종, 사도세자, 정조의 무안왕묘비가 있다. 맞은 편에 똑같은 규모와 형식의 서무가 있다. 

서무

관우상

높이 2.5미터, 무게 2.4톤에 달하는 거상으로 정면정관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이다.

얼굴엔 비교적 살집이 있고 코는 두툼하며, 굳게 다문 입에 긴 턱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다.

갑옷을 입은 신체는 양감이 두드러지고 다리를 벌린, 저못 당당한 자세이다. 

영조가 쓴 현판
지금도 동관왕묘 정전 안 정면 위쪽에는 영조가 재위 37년(1761) 8월에 써서 내려준 아름다운 현판이 걸려 있다.

 

관우상을 시립하는 부하장수 조각상들
서관왕묘의 조각상은 왕조말기의 민예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아주 귀엽다.
왕보상/주창상/관평상/조루상

위 조각상들이 동관왕묘의 관우상을 시립하는 것으로 사진을 찍은 줄 알았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사진을 보면 서관왕묘의 조각상 모습이란다.  

아래가 서관왕묘의 관우상과 그 옆에 시립하는 사진인데.... 뭔가 착오인가? 다음 기회에 잘 살펴봐야지.

현재 동관왕묘 정전 안팎에 22개 현판이 걸려 있다. 모두 조선에 온 중국의 장수나 사신이 쓴 것이다.
천고완인: 천고의 완벽한 사람 건곤정기: 하늘과 땅의 바른 정기
만고표명: 만고에 이름을 남긴 징표 위량병정: 어짐과 바름을 겸비한 위인
 

사도세자의 비문

정조가 세운 비석의 뒷면에는 사도세자의 글이 새겨져있다

정조가 세운 비석

정조는역대 임금의 어필을 세워 놓음으로써 관왕묘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자신이 지은 글도 비로 세워놓았다. 

고종은 흥덕사 터에 북관왕묘(1883년),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왕묘(숭의묘, 1904년)를 세웠지만

1908년 7월 순종황제는 나라의 제례를 간소화하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서관왕묘와 북관왕묘는 폐사되었고

1910년엔 전각내부의 감실과 조각상을 비롯한 각종 의물들을 모두 동관왕묘로 옮겼다.

1913년 북관왕묘는 민간에게 매각되었고, 그보다 앞서 서관왕묘 자리에는 고아원이 들어섰다.

다만, 남관왕묘는 민간단체가 낙찰받아 오랫동안 관리했는데 지금은 사당동으로 옮겨져 존속하고 있다. 

 

동관왕묘 탐방을 마치고 숭인동과 창신동의 역사탐방을 시작하는데

우선 동 이름의 유래를 보면 조선 초 이곳엔 한성부 관할 숭신방과 인창방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숭인동과 창신동이 된 것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많이 시행되는 코스는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15세때 단종비가 된 후 3년만인 18세때 단종과 생이별하고 82세까지 한을 품고 살았다. 

단종이 서인이 되자 관비로 전락했고 비록 노비 신분이 되었지만 백성들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숭인근린공원을 목표로 밀인사 곁을 지나 나무데크를 오르면 동망정 정자가 나오는데

정순왕후가 매일 동쪽 영월을 바라보았다하여 그 봉우리를 동망봉, 그리고 동망정을 건립하였다. 

숭인근린공원에 정순왕후 기념공간을 두고 그 발자취를 지도에 표시했는데

동망정, 청룡사, 정업원 터, 자주동샘이 포함된다. 

창신숭인 마을탐방 관련한 어플이 있다는데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찾지를 못했네....

청룡사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하며 비구니 사찰로 아주 깔끔하다. 새절 승방이라고 한다. 

정업원 터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승방인 정업원에서 평생 단종을 그리며 시녀와 함께 살았다.

정업원 터에는 청룡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비각 현판에 '전봉후암어천만년' (천만년을 이어가는 앞 봉우리와 뒷산)이라는 글이 있는데 영조의 친필이다.

비각에는 영조가 쓴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이 모셔져 있다.

비우당 터와 자주동샘

조선 실학자 지봉 이수광의 집터이고

정순왕후가 여기서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감이 저절로 들었다고 하는 자주동샘이라는 샘터가 있다.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

이 부근에는 채석장 절개지가 산재하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에서 화강암을 채석하여 조선총독부 등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였다.

이 독특한 외관의 전망대에는 2층에 낙타 카페가 있고

3층에는 옥상 전망대가 있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도 올라갈 수있다.

창신쌈지마당: 조그만 공원으로 조각품 몇점

창신소통공작소

돌산마을 조망: 좁은 골목과 계단을 이어가면 채석장 절벽 아래의 마을로 접근 가능

곳곳에 특색있는 카페가 산재한다

산마루 놀이터

특이한 외관, 혹자는 골무 형태인데 창신동이 봉제산업의 메카이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아이들의 놀이터이고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골목과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중 창신 5길 47, 혹자는 가수 김광석이 살던 집이라는데

부근에 아무런 표식이 없어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는 분위기이니~  

안양암

뒷편을 오르면 작은 동굴 2개가 나오고 전망은 탁트여 멀리까지 조망가능하다.

관음전에 관음보살좌상의 마애불이 있다.

구불구불 회오리길을 내려서면 5거리,

대원 실마트가 보이는데 봉제산업 발달한 구역답게 실만 판매하는 마트가 있을 정도이다.

창신골목시장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어서 크고 번듯한 한옥 여러 채가 그의 집이었다며 

그 중 한 집이 백숙집이었다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의 백남준기념관으로 다시 탄생했다.  

김상돈 작가가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로 제작한 작품 '웨이브'

오늘 답사는 국밥집 김수근 화백 집터에서 시작하여 백숙집 백남준이 살던 집에서 마쳤다.

처음 답사하는 지역이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만큼 많이 걸었다 생각하며 좋게 받아들인다. 

동관왕묘, 정순왕후 발자취, 김수근, 백남준 그리고 창신동과 숭인동 핫플로 이어지는 다양한 볼거리~

동대문역 3번 출구에서 종료하고 4호선으로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