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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밖: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2023.1.23)

클리오56 2023. 1. 26. 19:57

일자: 2023.1.23
코스: 자문밖
창의문 ~ 백석동천 각자 ~ 백사실 계곡 ~ 현통사 ~ 세검정 ~ 탕춘대 표석 ~ 조지서터 표석 ~
총융청터 표석 ~ 세검정초교 정의사터 당간지주 ~ 홍지문 및 탕춘대성 ~ 석파랑 ~ 부침바위터 ~
서울미술관/석파정 ~ 무계원 ~ 안평대군집터/현진건집터 ~ 반계 윤웅렬 별서터 ~ 윤동주문학관
소요시간: 3시간 48분 ( 휴식시간 13분 포함)
도상거리: 8.52km
고도: 41m ~176m

Track_2023-01-23_자문밖.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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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서울편 2에 수록된 제2편 자문밖을 따라 도보 답사하는데

마침 오늘은 설연휴에 월요일이라 휴관하는 곳이 많으므로 일종의 예비답사 성격이다.

어차피 한두번으로는 깊이 알수없기에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또한 유튜버 검색 중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부암동편이 방송되었던 터라 이 또한 일부 반영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책 따라하기이므로 인용 문구를 일일이 밝히지 않을 것임을 우선 알려드리고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의 별칭이 자하문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다.

자하라는 말은 자줏빛 자(紫), 노을 하(霞)를 써 자하(紫霞)인데

창의문 바깥 울창한 숲과 계곡을 자하동천이라하여 창의문은 자연스레 자하문 별칭을 갖게되었다.

주요 답사처는 부암동, 신영동, 홍지동에 소재하며 8.5km, 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미술관 등 답사처가 휴관이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겠다. 

창의문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움푹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창의문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계속 다니는 길이라 정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창의문은 처음에는 일반 백성들이 다니지 않았고 문루도 없었다고 한다.

주로 군인들이 다녔고 권세있는 안평대군이 드나들 수 있었고

연산군이 탕춘대에서 질탕 놀때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해군 시절(1623년) 인조반정군이 이 문을 출입해서 창덕궁에 쳐들어갔고

영조 때(1741년) 인조반정의 의군이 진입한 곳이라 하여 문루도 세웠다.

문루에는 당시의 공신 명단이 적혀있지만 나중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빠져있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돌아간 성문의 월단 정수리에는
봉황 한쌍이 아름답게 부조
창의문 문루 바깥쪽으로 물을 빼내는 수구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

성문의 월단 정수리에 부조된 봉황은 닭을 변형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는데

인왕산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해 넣은 것이라 한다. 

그레서 문루 부근에서 인왕산 방면으로 올려다보며 사진도 찍었는데 그렇게 보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보았던 다른 속설에서는 성문의 천장 그림이 닭 모양의 봉황인데 세검정의 모습이 지네를 닮아서라고.....

창의문 문루 인근에서 바라본 부암동, 아파트 단지가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짚신, 고무신 신고 지나가던 옛사람의 발길에 길든 문루 아래의 이 박석이 반짝거릴 정도로

윤기를 발하는 모습을 보면 이것은 세월이 만든 작품 아닌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방호자 장시흥의 창의문
겸재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던 장시흥이 청운동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그린 진경산수화

유홍준 교수는 자문밖 답사의 마지막 여정이 백석동천이었는데

나의 답사는 창의문에서 시작했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코스가 백석동천이었다.

 

요즘은 GPX를 다운받아 길을 찾아가니 골목길, 복잡한 길이라도 한결 손쉽게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다.

여러 멋진 카페를 사진만 남기고 스쳐 지나갔고 간혹 한옥이나 길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다.

원각사 가는 길로도 갈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하다. 길이 산뜻하지 못했다. 

바닥에 백사실 표시가 보이면서 곧 별천지 백석동천에 도달한다.

백석동천 각자

인간계의 별천지라는 동천이 바로 이런 곳이라 하며 

이런 곳을 찾아 별서를 세우는 이유는 세상사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함 이외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별서가 기대고 있는 동쪽 벼랑에는 백석동천 글씨가 있고

서쪽을 바라보면 큰 바위 위에 월암이라고 새긴 각자가 보인다고 했지만 난 찾지를 못했다. 

백석동천 별서 터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면 별서 터인데

유 교수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환상적인 폐허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했지만... 

낮은 돌계단 위에 백석동천 별서의 건물이 앉았던 주춧돌이 열지어 있다. 

백사실 계곡으로 불리면서 백사 이항복의 별서 터라고 구전되었지만,

최근의 연구는 추사 김정희의 별서로 밝히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청와대 경호구역이었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이 탄핵시절 무료함을 달래려고 이곳에 들렀던 인연으로

당시의 문화재청 장관인 유 교수에게 전해져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석축을 두른 둥근 연못가에 정자를 잃어버린 긴 돌기둥 초석만이 여전히 발을 담근고 있다.

현통사

사찰 자체는 크지 않지만 멋진 위치에 자리잡았다.

 

백석동천에서 흘러온 개울은 홍제천에 합류한다.

홍제천

세검정

정자는 18세기 영조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맑고 깊은 계곡에는 훨씬 더 오랜 역사가 서려 있다.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한 것은 6세기 중엽 비봉 정상에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을 때이고

그 다음은 7세기 중엽 세검정초교 자리에 장의사 절이 창건되었을 때이다.

현재의 세검정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 김류 등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도모하기로 결의하고는

세검입의(洗劍立義), 즉 칼을 씻으며 정의를 세웠다는데서 세검정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세검정의 자랑은 장대한 계곡과 어우러진 것이라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다산 정약용 조차도 그의 나이 30세에 세검정으로 물구경을 와서 '세검정에서 노닐며'라는 글을 남겼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겸재는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법으로 계곡가의 세검정을 화폭에 담았다. 영조때 세검정을 지으면서 이를 기록하기 위해 그린 듯하다. 현재의 세검정이 바로 이 그림에 근거해 복원했다. 
겸재 정선의 선면 세검정도
겸재가 그린 똑같은 세검정 그림이지만
부채에 그린 선면화는 화폭의 조건 덕에
주변풍광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세검정에서 세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가면 초초, 중초, 정초 세 단계를 거쳐 실록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봉안하고 실록의 초본인 초초와 중초, 그리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제출한 사초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이를 물로 흔적없이 씻어냈다. 이를 세초라고 했다.

태우지 않고 물로 씻어낸 것은 종이를 재생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세초가 세검정 계곡에서 이루어졌다. 조지서가 가까이 있는데다 계곡의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세초를 한다는 것은 곧 실록의 완성을 의미했다.

이 때 왕은 수고한 이들에게 술을 내리고 잔치를 열어주었으니 이를 세초연이라 했다.

세초연은 세초장이 있는 세검정 계곡가 너럭바위에 차일을 치고 벌어졌다. 그래서 이 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한다.

지금도 세검정 정자 바로 아래 있는 넓은 바위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파놓은 구멍이 곳곳에 있고

차일 지붕을 끈으로 고정하기 위해 박아놓은 무쇠고리도 남아있다.  

 

연산군의 탕춘대와 실록의 세초장이 같은 장소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고 평했다. 

탕춘대

놀기를 좋아했던 연산군은 세검정 계곡에 탕춘대를 세워 풍광 수려하던 곳을 유흥지로 만들었는데

월드 캐슬 빌라의 정문 초입 암벽 아래에 표석이 세워져있다. 

훗날 영조는 봄날 질탕하게 논다라는 뜻의 탕춘이라는 이름이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연융대라 고쳐주었다.

북한산 능선

조지서터

조선시대 종이를 제조하던 조지서는 세검정초교 가까이 있었고

바로 이웃해 지장들의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검정초교 담벼락에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벽화가 있고 조지사터 표시가 있다.

 

종이를 만드는 공정이 길고 까다로웠을 뿐만 아니라 닥나무 공급도 어려운 등 종이 부역이 제일 힘들었다.

대동법이 실시되자 농촌에서는 닥나무밭을 갈아엎고 곡식으로 심었는데 이로서 한지 원료조달이 어려워졌고

지방관청에서는 종이 생산을 천민으로 박대받던 절에 떠넘겼다고 한다. 

총융청터

숙종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완료한 뒤

수도권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 사령부를 사직단 인근에서 탕춘대로 옮겼다. 

영조 때 설립된 총융청은 몇 차례 변화를 겪었지만 존속하다가 1884년 폐지되어

지금은 세검정초교 담장 아래에 총융청 터 표석이 서 있다. 

 

총융청이 자문밖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들어선 군영을 신영이라 불렀고 오늘날 신영동의 유래이며,

2만명이 주둔하니 군량미 보관 창고가 어마어마하였고 이 창고를 평창이라 했으니 평창동의 유래이다. 

총융청 터 근처에 수령 300년 느티나무 한 그루가 부군당 신목이라 불리는데

부군당이란 조선시대 각 관아에 모셔진 사당을 뜻하니 신목이 총융청을 증언하는 셈이다. 

장의사 당간지주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보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지금은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의사의 옛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이 당간지주는 마주 보는 기둥의 바깥면 두 모서리를 죽여 약간의 장식을 보이고,
기둥머리는 안쪽 면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약간 평평하다가 이내 원을 그리며 깎여져 있다.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안쪽 면 윗부분 가까이에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개의 경우 당간을 꽂기 위한 장치를 하더라도 기둥머리에 따로 홈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 그 유례를 따르지 않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하여 중후한 편이며, 별다른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세워진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망덕사터의 당간지주와 비교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장의사의 기록이 조선시대에도 언급되는데 태조의 첫 아내 신의왕후 한씨의 기재를,

그리고 연산군의 모친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존한 뒤 초재를 베풀었다.

성종 때는 상사독서처로 지정되어 젊고 글재주가 있는 이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읽기에 전념케 했다.

탕춘대성 및 홍지문

숙종 때(1719년) 쌓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총4km의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한양도성의 인왕산 동북쪽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북한산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는

이 탕춘대성이 완성됨으로써 한양의 북쪽 방어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성곽 아래에 오간수문을 건립하고 그 곁에 성문을 세웠으니 바로 홍지문이다.

오간수문 홍예의 부조

겸재정선의 홍지문-수문천석
홍지문과 주변 경치를 수평 구도 안에 배치하면서 자 모습의 흐름으로
빠르게 변화해 나가도록 속도감을 살려낸 그림이다.

자문밖이 도성 밖 최고의 답사처이자 문화유산 산책지로 각광받는 것은

부암동에 조선시대 왕가와 사대부들이 지은 아름다운 별서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암동은 창의문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었고, 반면 다른 동네들(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등)은

총융청이 주둔하던 군사지역이라 별서와 생활유적이 생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의문을 중심으로 부암동 서쪽 인왕산 자락은 청계동천, 동쪽 북악산 자락은 백석동천으로 불렀다. 

백석동천에는 추사 김정희의 별서가 있었고, 

청계동천에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반계 윤웅렬의 부암정,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그리고 소전 손재형의 석파랑이 있다. 

 

청계동천의 별서 4곳은 설명절, 월요일 이런 이유들로 모두 개방되지 못하여 내부는 보질 못하였다. 

 

석파랑

석파랑은 지금은 한정식집인데 본래 현대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말년에 살던 별서였다. 

초입의 문서루는 순정효황후 윤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온 것으로

중국풍의 호벽을 치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장식했다.

벽돌 구조에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물고 나는 한쌍의 학과 박쥐를 장식하고

기와지붕을 얹은 만세문은 고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것인데

일제가 매각하자 소전이 사들여 이전한 것이다. 

 

석파랑 위의 석파정 별당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에 있던 별당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지은 것이다.

한옥에 양옥의 양식을 접목한 근대건축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석파정 별당

석파정에 딸린 사랑채. 원래 석파정 경내에 같이 있었으나
1958년에 서예가 손재형이 자신의 집 바로 위인 현재 자리로 옮겼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1981년 손재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옥은 타인 소유로 넘어갔다.
1993년에는 한정식당 석파랑(石坡廊)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로 있었다가 2012년 겨울에 완전히 공개되었다. 석파랑은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받았다.


건물 평면은 'ㄱ'자 형태로, 원래는 'ㅡ'자 였다는 설도 있다.
지붕
은 맞배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없는 민도리집이다.
건물 측면 끝마다 전돌
로 쌓은 벽을 두었으며 벽 가운데에 창을 두었는데
서쪽 창은 원형, 북쪽 창은 반원형, 동쪽 창은 사각형이다.
전반적으로 청나라
풍이 나며, 조선 후기 상류층들의 별장 양식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가운데에 대청
이 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이 있는 형태이다. 앞으로 돌출된 방은 흥선대원군이 주로 사용했던 방이고,
대청은 그 유명한 난초 그릴 때 쓰던 곳이며, 건너방은 손님을 대접할 때 활용했던 방이라고 한다.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런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출처: 나무위키)

부침바위 터

부암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부침바위라 불리는 부암(付岩)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건재했는데 자하문터널이 뚫리고 새 도로가 생기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메주가마골

부암동 주민센터 부근의 옹기종기 붙은 작은 가겟방과 주택들은 옛 메주가마골의 묵은 분위기를 보여준고 있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관에서는 메주를 납품하는 권리를 주어 마을공동으로 메주를 쑤게했다.

근처에 그 당시 사용하던 메주가마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자하문터널 위에 그 터만 남아있다.

그리고 동네 안쪽 산자락에 치성을 올리던 동제당은 남아있어 제를 올린다. 

 

골목길의 멋진 한옥 대문

이승만 연구원

좌파들의 외눈박이 무대포 압박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는 이승만연구원이 있구나~~

석파정 서울미술관

이곳은 월화요일이 휴무라 이번에는 놓쳤지만 다음 방문시 유의해야겠다. 

 

석파정을 세운 원주인은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이다.

북악산이 훤하게 조망되고 인왕산의 계류가 아름다운 암반 위로 흐르는 이 자리에 별서를 짓고는

집 뒤쪽 바위에 새겨져있던 삼계동이라는 글자에서 이름을 따와 삼계동 정사라 했다. 

 

흥선대원군이 이를 자신의 소유로 삼는 과정에 부친 고종에게 이곳을 다녀오게 했고

고종이 다녀간 후 김홍근이 임금이 와서 놀다간 곳에 감히 신하가 살 수 없다며 결국 흥선대원군이 차지했다.

이 별서를 차지한 후 앞산이 모두 바위 언덕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라 하고 별서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석파의 난초 그림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맛도 있고 유려한 리듬도 있다.

난초 잎이 휘어지는 것은 사마귀 머리 같다고 해서 당두(頭)라고 하고

끝이 뻗어나가는 것은 쥐 꼬리 같다고 해서 서미(鼠尾)라고 하는데

석파는 당두에 예서법, 서미에 초서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긴장감과 서정이 동시에 살아난다.

 

석파가 사용하던 많은 문자도장 중에 난초 그리는 뜻을 강조한 것이 둘 있다. 이 도장에 석파 난의 본색이 담겨 있다.

寫蘭作意  난을 그리면서 뜻을 일으킨다 

  喜氣寫蘭  기뻐하는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讀己見書 如遇故人 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석파는 그 파란만장한 이력이 말해주듯 술도 잘 할 수밖에 없었는데 술에 대해서도 높은 경지의 한 말씀을 남겼다.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이 문구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0권의 타이틀이다~~~

 

Donkey & Bird (이재현 작)

길 모퉁이에 세워진 조각. 가지각색의 도자기를 구워 깨뜨리고 붙이는 작업을 통해 

동행이라는 주제의 당나귀를 만들었습니다. 

도저기의 색감과 당나귀의 감성이 어우러진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웰컴미스테익스 게스트하우스

한옥으로 지어 곁의 무계원과 잘 어울린다.

무계정사길은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까지 이며

그 길에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 현진건 집터, 반계 윤웅렬 집터, 그리고 무계원이 있다. 

무계원

우선 무계원은 무계정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다만 그 이웃이라는 것뿐이다.

무계원은 유서깊은 한옥 오진암을 옮겨 2014년 개원한 곳이다.

오진암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으며 

이후락 정보부장의 단골집으로 유명했고 북한측과 7.4남북공동성명을 논의했던 곳이다.

 

무계원 역시 휴관이라 바깥에서 사진 몇장 남겼다.

무계원 뒷담장에서 본 풍경

유 교수는 오진암의 옛주인 송은 이병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나이 7세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뒤 내시 유재현의 양자로 들어가 궁내부 내시가 되었다.

이병직은 내시의 적통을 이어받았는데 13세때이던 1908년 내시제도가 폐지되어 궁에서 나왔으니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였다. 

이후 이병직은 학문과 그림, 글씨를 배웠고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 8차례 입선했다. 

그는 그림을 보는 안목이 높은데다 7천석 부자여서 고서화 수집에 전념했다. 

변상벽의 닭 (간송미술관 소장) 김두량의 낮잠

현진건 집터

유홍준 교수가 언급했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는지 사진에서의 집터 표석의 주변 주택 모습이 달라졌다.

어리어리한 대문에서 이어진 담장 한모퉁이에 현진건 집터 표석이 있다.

이 터와 연결된 뒤의 주택이 안평대군의 무계정사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유 교수는 현진건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우선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그리고 아사달이 대표작.

현진건은 단 한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무계정사터

무계동 각자가 있는 사진을 나무위키에서 옮겨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은 30세 때인 1447년 4월, 꿈속에 거닐던 무릉도원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고
자신이 제발을, 박팽년, 김종서, 성삼문 등 21명의 학자 문인에게 찬시를 짓게하여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을 남겼다. 

반계 윤웅렬 별서

윤웅렬은 윤치호의 아버지이고, 윤보선 대통령의 큰 할아버지이다.

무관 출신으로 새로 창설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운영했고, 개화파의 고참인사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윤웅렬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일제의 사주를 받아 오히려 보상금 반환청구서를 제출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로부터 남작작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남작 작위는 큰아들 윤치호에게 승계되었다. 

 

별서는 1905년 착수해 이듬해 3월 이전에 완공되었는데 그때는 서양식 2층 벽돌집 건물만 지었다. 

당호는 부암인데 발음은 이 동네의 부암을 유지하면서 중국고사에 한 선비가 축우부암(築于傅巖)이라는

건물을 짓는 동안 최고통치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있어 부암(傅巖)이라 지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드는게, 윤치호가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마도 당시의 최고통치자라면 일제를 말하는데 그곳에서 큰 벼슬을 얻고 싶었던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위키의 인물평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일제의 통치를 꺼리면서도 일제의 위협에는 어느 정도 굴복하고

서구의 합리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서구를 적대시하며

독립운동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고,

종국에는 이러한 이중적 성향이 심해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버렸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던 지식인이 사회에 굴복하고 현실적 가치관과 도덕,

민족적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대상을 투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별서는 그동안 집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못했는데

현 주인이 고건축물을 복원한다는 마음으로 문화재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에 맡겨 수년에 걸쳐 정비되었다. 

아래 쪽에는 방형 연못이 있고 양옥과 한옥이 어우러진다고 평했다. 

또한 이 집의 돌기와 지붕을 얹은 긴 콩떡 담장에서 우리나라 한옥 담장의 미학을 본다며

중국의 담처럼 바깥과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비탈을 오르는돌담의 기와 지붕이 계속 높이를 달리하는 것도 즐겁다.

돌담도 사괴석으로 권위엤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막돌을 얼기설기 쌓고 흰 강회로 마감한 콩떡 담장인지라 더 정감이 간다.

현재 부암정은 살림집이기 때문에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1년에 한 번 오픈하우스 서울 행사를 통해 공개된다.

예전 즐겨 시청했던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부암동편에 소개되는

원테이블 명란식당, 그리고 간판이 희미해진 동네 수퍼를 볼 수 있었다.

출발지였던 창의문으로 원점회귀하며 자문밖 답사를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