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애송시 100편 - 제 94편]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 끝 별 문태준·시인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8
(93) 이재무 "감나무" [애송시 100편 - 제 93편] 감나무 이재무 정끝별·시인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8
(92)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애송시 100편 - 제 92편]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문태준·시인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5
(91)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애송시 100편 - 제 91편]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정끝별·시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5
(90)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 [애송시 100편 - 제 90편]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 문태준·시인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4
(89) 김정환 "철길" [애송시 100편 - 제 89편] 철길 김정환 정끝별·시인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4
(88) 이형기 "낙화" [애송시 100편 - 제 88편] 낙화 이형기 문태준·시인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4
(87)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애송시 100편 - 제 87편] 껍데기는 가라 신 동 엽 정끝별·시인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4
(86) 이시영 "서시" [애송시 100편 - 제 86편] 서시 이시영 문태준·시인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1976년> ▲ 일러스트 잠산 이시영(59) 시..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3
(85) 조지훈 "낙화" [애송시 100편 - 제 85편] 낙화 조지훈 정끝별·시인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 지혜/조선일보 현대시 100편 200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