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컬쳐, 문화로 쓴 세계사: 저자 마틴 푸크너

클리오56 2024. 5. 6. 22:21

 

이동진 평론가가 소개한 2월의 책은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였지만, 일종의 보너스로 본서를 소개하였다. 이번에도 책 전체를 읽지는 못했지만 나름 몇 챕터를 숙독하였다. 특히 에필로그에서는 우리나라의 한류에 대한 평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문화의 순환과 혼합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긍정적이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 인도 도착, 유럽제품들은 당시 인도인들에게 조악해보임. => 15,16세기 동서방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을 기독교인들로 착각

 

카몽이스: 바스쿠 다 가마의 발자취 따라감. 마카오에서 횡령 혐의로 재판받을 신세, 포르투갈 법정이 있는 고아로 재판 이동중 배가 난파, 메콩강 하류 어부들과 생활, 어린 시절의 끔을 떠올리며 쓰게된 대서사시, 이때 그리스의 호머와 로마의 베르길리우를 떠올리며 차용해 쓴 우스 루지아다스 . 이야기의 중반부터 시작하는 두 시인의 독특한 작법을 사용하여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기를 저술. 출발 부터가 아닌 희망봉 돌아 동부 해안에 도착한 시점부터 시작.  

카몽이스의 잘못된 점도 포함되어 있음. 하여....

맷 데이먼이 은둔하는 곳이 고아이다... 

 

내용과 소감

서문: 문화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 문화를 보는 관점

(1) 저마다 독특한 관숩과 예술을 지닌 문화는 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것이자 외부의 간섭에서 지켜내야 한다.

=> 문화가 일종의 자산이며 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유라고 가정 

(2)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 => 인도에 가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 중국인 현장법사  => 문화란 한 공동체의 자산으로만 만들어진다기보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  

 

- 자산으로서의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서보면 이 인물들이 침입자, 전유자, 심지어는 도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가 순환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았기에 겸손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갔다. 그들은 자산과 소유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한계와 제약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표현 형태가 빈약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들어가며: 기원전 3만5000년경 쇼베동굴에서

- 문화의 저장과 전파를 위해서 인간은 DNA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지식을 저장하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억술, 즉 교육과 외부기억장치를 이용해서 지식을 전파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쇼베동굴이 바로 그런한 장치, 즉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누구도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는 곳이다. ... 인간이 단 하나의 동굴에서 몇 천년동안 같은 양식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힌든 일이다. 그러나 초기인류는 지식의 저장과 보존 그리고 사상 전파의 중요성을 무척 첨예하게 의식했다. 

 

- 쇼베동굴 벽에 기록된 것은 노하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술과 종교의 결합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더욱 가깝다. ... 두개골, 신화적 인물, 추상적 상징은 이 동굴이 의식, 빛의 효과, 이야기, 음악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의 무대였음을 암시한다. ... 이들이 동굴에 간 것은 노하우를 조금 더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다른 동물들과 특정한 관계에 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과 사는 무엇이고 기원과 종말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째서 우주와 자신과 관계를 이해할 능력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노하우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라고 부를만 한 것이었다

 

- <컬쳐>의 목표는 우리가 인류 공동의 유산을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세대로 계속 전달하기 바라면서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숨 막히도록 다양한 문화 작업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1.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왕비와 얼굴 없는 신

- 네페르티티와 아메호테프 4세는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새로운 도시는 과거의 짐에서 해방되어 도시의 이름을 따온 새로운 신(유일신 같은 역할의 아톤신)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아케타톤, 즉 태양(아톤)의 지평선이었다. 아톤 대신전과 소신전을 중심으로 도시를 세우고, 대궁전이 두 신전 사이에 위치했다..... 네페르티티와 아메호테프 4세는 옛 수도를 버렸지만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않았다. 도시 전체를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어느 모로보나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만큼 거대했다. 

 

- 새로운 도시에서는 이 모든 것(조각 등 시각적 재현방식)이 바뀌었다. 투트모세와 동료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조상들과는 다른 통치자임을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었으므로 다른 예술 양식이 필요했다. 새로운 양식은 현대의 눈으로 보면 종종 과장되고 기이해 보인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의 옆얼굴을 보면 턱과 입이 길쭉해서 개의 주둥이를 닮았다. 머리는 앞으로 내밀었고 목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다. 가장 이상한 것은 역시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 보이는 뒤통수이다. 

 

- 고대이집트에서 회화와 조각은 글에 가까운 것으로, 매우 추상적인 시각적 의사소통 체계였다. 상형문자 역시 생각과 소리의 조합을 나타내는 표준화된 이미지였으므로 이집트인은 회화, 부조, 조각상을 상징적으로 읽는 것에 익숙했다. 예를 들어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의 쭉 뻗은 머리와 길쭉한 얼굴은 왕관을 쓸 운명이었던 것처럼 왕관 모양에 딱 맞는다고 볼 수도 있다. 

 

- 태양신 아톤의 빛을 쬐는 아케나톤, 네페르티티, 세 딸. 석회암 부조 (베를린 노이에스박물관 이집트관)

 

- 아케나톤이 죽자 그의 뒤를 이은 두 파라오는 각각 1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금방 세상을 떠났다. 네파르티티가 그중 하나였다는 추측도 있다. 아직 어렸던 아케나톤의 아들 투탕카톤이 고위 서기이자 행정관인 아이의 지도하에 왕좌에 오르자 정세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안정을 위해서는 네파르티티와 아케나톤이 만든 모든 것을 되돌려야 했다.... 투트모세는 혁명적이었던 왕과 왕비를 섬긴 세월을 기리며 모든 조각상을 조심스럽게 창고에 넣고 벽을 세워 봉했다.... 세월이 흘러 나일강이 실어온 진흙이 그 위에 조금씩 쌓였다. 다행스럽게도 진흙은 3천년 동안 흉상을 보존했고, 마침내 에스-세누시가 크지만 섬세한 손으로 진흙을 치우고 흉상을 뒤집어 놀라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를 없애는 일은 쉽지 않다, 때때로 과거는 몇 천년 동안 지하에 묻힌 채 다시 발굴될 날을 기다린다. 

 

- 히브리 성경에서 정의하는 종교(모세와 요셉은 이집트의 행정관이자 서기)는 유일신을 바탕으로 하며 당시의 그 어떤 종교와도 무척 달랐다. 그로나 네페르티티의 단명한 신 아톤은 유일한 예외다. 무척 밀접하게 연결된 두 문화가 일신교라는 형태로 당시에는 무척 새로웠던 실험을 한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물론 이집트의 기록에는 아톤 숭배실험이 삭제되어 있다. 히브리 성경은 자기 민족이 이집트에서 독립한 사실을 강조하고 깊었을 터이며, 이집트 모델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차용이 발생한 후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왕의 계보에서, 조각상에서, 다른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어 거의 잊혔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을 지운 것이 일신교 실험 때문이었다면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일신교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집트 역사 속 이 짧은 시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이 계속 다신교 안에서 살았다면 아톤 실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나 역사의 각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과거를 본다. 아케타톤을 과거에 저항하는 위대한 반란이자 처음으로 잠깐 들여다본 새로운 세계로 만든 것은 바로 미래, 우리의 미래였다. ... 그 실험의 진정한 의미는 머나먼 미래가 되어야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4. 폼페이의 남아시아 여신

- 그리스 모자이크화와 동양의 사치품을 갖춘 폼페이의 빌라들은 이러한 무역 불균형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이 같은 물건에 화폐를 지불하여 인도를 향신료와 약품, 마법의 나라로 진귀하게 여겼다. 

 

- 인도조각상이 도착했을 때(적어도 79년 가을 전) 폼페이는 활기차고 로마화된 도시였다. 지붕이 달린 아트리움 양식의 중앙 안뜰을 갖춘 집들이 많았다. 가장 붐비는 지역에는 술집과 식당이 있었는데 그 중 한곳에는 우아한 대리석 바가 있었다. 

 

- 폼페이 멸망에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당시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느 목격자가 훗날 위대한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플리니우스였다. 그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화산 폭발을 지켜보았기에 살아남았다. 나중에 플리니우스는 어느 역사가의 요청에 따라 화산분출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편지를 썼다. 

 

- 화산 분출로 도시 자체가 봉인되었고, 모든 것이 재의 보호를 받으며 그대로 남아 로마 제국의 일상의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진, 홍수, 화산은 파괴적이므로 역사적 보존이란 관점에서는 좋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지속적 사용은 그러한 재난 보다 더욱 철저히 파괴한다. .... 시간이 흐르면서 화산재는 조각상을, 폼페이 전체를 자연의 힘과 인간으로부터 보호하는 봉인 역할을 했다. (인도)조각상이 붙어 있던 가구는 불탔지만 상아 여신은 살아남았고 화산재에 파묻혀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녀는 1800년 동안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 

 

-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를 패배시켰다고 해서 그리스 문화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어떤 시민이든 폼페이를 한 바퀴 돌면서 그림만 봐도 그리스 문화 속성 강좌를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그리스 희극작가 메난드로스를 그린 프레스코화. 현재 메난드로스의 집이라고 부르는 폼페이 개인 빌라에서 발견  

 

 

* 폼페이 파우누스 저택에서 발견한 모자이크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다리우스가 맞붙은 이수스 전투의 한 장면. 

 

- 코린토스의 그리스 동맹국은 패배했지만 그리스는 문화적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확대했다. 놀라울 정도로 굳건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한 로마인들은 종교와 예술부터 문학까지 문화의 모든 면에서 옛 숙적을 따르기로 했다. ... 바로 패배한 적의 문화를 자신의 제도와 관습에 적극적, 의도적으로 접목하는 나라다..... 

 

-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을 '사실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두 편을 합쳐 새로운 로마 서사시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갔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도시의 폐허는 베르길리우스가 호메로스의 세상과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 로마를 건국할 이탈리아를 직접적으로 이을 수 있는 완벽한 배경이었다.

 

- 트로이 전쟁의 패자를 선택한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 로마인들은 그저 그리스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를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이용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선조로 설정한 트로이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아이네이스 끝부분에서 트로이인은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에 동화되어야 했다.   

 

-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문화 접목의 영광을, 그 가능성과 미묘한 방법을 보여준다. 문화접목은 패배나 열등감으로 인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 복잡한 프레스코화, 아트리움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폼페이 광장 옆 커다란 건물에 새겨진 베르길리우스의 명문은 로마의 신화적 기원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설명한다. 프레스코화부터 극장에 이르기까지 폼페이 전체가 이러한 문화 실험의 증거다

 

- 오늘날 우리는 국가 통치 기술과 기반시설, 군사조직, 정치적 통찰력 때문에 로마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로마의 가장 놀라운 유산은 접목 기술이다. 

 

 

5. 고대의 흔적을 찾는 불교 순례자

- 현장은 왜 여행길에 나섰을까? 그는 텍스트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권에서 자랐다. 그의 가족은 중국의 독특한 계층인 문인이었다. 조정에 나아가 출세하려면 고대 문헌을 완벽하게 익혀야 했고 문예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 때문에 젊은 남자들은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했다. .... 시험의 중심이 되는 텍스트, 오경이라고 일컫는 유교 경전은 오래된 고전이었고 과거를 이상으로 삼아 칭송했다.... 유교경전은 과거 숭배 문화를 만들었다. 이 책들을 유교 경전이라고 부른 것은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공자가 오경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직접 엮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는 과거, 특히 오경에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진 주나라에 대한 깊은 감동을 제자들에게 주입했다. 공자에 따르면 주나라 초기는 질서와 조화의 시대였고 잘 다스려진 국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와는 정반대였다. 공자에게 과거란 현재에 대한 경멸에서 탄생한 이상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전이 과거제도의 중심이 되었고, 따라서 문화 전체가 과거를 향하며 전통과 연속성이라는 감각을 주입했다.   

 

- 2세기에 불교가 중국에 일으킨 가장 중요한 혁신은 아마도 다르마, 환생, 열반의 교리가 아니라 이 교리를 수행하는 제도, 즉 승려 공동체였을 것이다. 모든 재산을 버리고, 청빈과 독신 서약을 하고, 머리를 밀고, 다른 사람의 자비에 기대어 사는 삶의 방식은 중국에서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불교와 유교의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중국 전역에 불교구도자들의 집단이 생겨 중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심지어는 유교 교육을 가장 철저하게 받은 문인 계급에서 뛰어난 이들까지 몰려들었다. ... 현장은 스무 살에 승려가 되어 머리를 깍고 독신 서약을 했으며 그때부터 불교 경전 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바쳤다. 

 

- 문화 이동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힘, 즉 수입된 문화의 머나먼 기원에 대한 유혹이 현장을 인도로 이끌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문화에 매료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아는 것이 진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단편적이고 걸러진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따라서 기원에 대한 갈망이, 그 문화적 혁신을 본래 상태 그대로나마 적어도 남은 흔적을 통해 즐길 수 있는 곳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현장은 그저 부처가 남긴 것을 숭배해야 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 즉 순례자가 되었다. 

 

- 불교의 가장 놀하운 흔적은 조각상이었다. 바미얀 계곡(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현장은 산 사면에 새긴 거대한 석조 불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현장이 불상에 매료된 것은 엄청난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로서는 이것이 부처를, 그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 인도에 도착하자 경전을 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학파가 너무나 많고 제각각 성스러운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 대승불교(마하야나)를 선호했던 그는 이른바 소승, 즉 히나야나를 비롯한 다른 학파를 멸시했다.  

 

- 현장은 불교와 관려된 곳을 대부분 방문하고, 유명한 불교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귀중한 필사본과 조각상, 종자 같은 물건들을 수집한 다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 여행기에서 현장은 더욱 정확한 불교경전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욕망을 설명하면서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 그 때 이후로 기본적인 문헌의 더 나은, 더 믿을만한 판본과 더욱 정확한 번역을 추구하는 것은 인문학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고, 그 덕분에 현장은 중국의 인문 지식 전통 형성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 현장은 불교의 기원을 찾는데 삶의 많은 부분을 바쳤지만 불교경전과 휴대할 수 있는 작은 조각상 형태로도 그 기원을 이식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거의 신화 같은 인물, 중국어 불교 정전을 바로 잡고 개선하고 확장해 낸 여행자이자 순례자가 되었다. 

 

- 현장이 대표하는 것은 그가 번역가로서 한 일 보다 중요하다. 그는 수입된  문화를 쫓아서 그 근원을 찾아간 사람을 대표한다. 문화수입은 복잡한 역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수입된 문화가 새로운 현지문화에 이미 오래전부터 동화된 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입 문화의 기원을 찾아가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 현장의 여행은 너무나 중대했으므로 그의 모든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고, 따라서 대당서역기가 나왔다. 이 작품은 중국이 인도를 보는 관점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문화이동의 고전이 되었다. 대당서역기는 또한 문화접촉의 위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6. 베갯머리 서책과 문화외교의 위험

- 베갯머리 서책에서 그리는 헤이안 궁정에는 어디에나 중국의 영향이 존재한다. 중국 의복과 병풍을 흉내 내 비슷하게 만들기도 했지만(특히 멋진 중국 종이와 부채에 감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 시였다. ... 짧은 시로 소통하는 이러한 관습에서는 중국 시가 무척 중요했다.... 이는궁중의 모든 사람이 중국의 문자 체계와 문학 전통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 일본에 중국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두 나라가 몇백년 동안 계획적으로 문화 외교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두 나라의 교역은 1세기에 시작되었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 가속화되어 외교회담이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문화사절단은 보기 드문 문화 전이 전략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로마와 그리스의 관계처럼 정복당하지 않았음에도 대규모로 문화를 수입한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 오히려 일본이 문화재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견당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기꺼이 보냈다. 

 

- 엔닌은 견당사 일행으로 중국 방문, 838~847년. 불교 승려였던 엔닌은 최신 참배 형식을 배우고 종교 예술품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엔닌은 불교 가르침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톈타이산의 절에 가서 중국 불교가 최근에 어떻게 발전했는지 배우고자 했다...하지만 허가를 받지 못함...견당사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귀국 하지 않음.. 두 제자와 함께 남아 우여곡절 끝에 중국 북부 우타이산에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음. ... 불상의 여러 자세들에 감명.... 

 

- 엔닌이 불교연구에 몰두하는 동안 중국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840년 당 황제 무종이 즉위했고 도교를 좋아함. ... 도교와 유교 신봉자들은 불교에 적대적... 당 무종은 842년 최초로 폐불을 단행하여 절들을 폐쇄하고, 사찰 재산을 몰수하고 경전을 불태웠다. ... 엔닌이 직접 보려고 중국까지 찾아온 불교 예술이 그의 눈앞에서 무너져 갔다.... 헤어질 때 그를 불쌍히 여긴 고위 관리가 유감의 말을 남겼다. "이 땅에 불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동쪽으로 흘러가요. 고대이후로 쭉 그랬지요." ... 이 동쪽으로의 흐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현장과 엔닌 같은 여행자들, 불교를 동쪽으로 가져 가기 위해 서쪽으로 찾아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

 

- 엔닌은 마지막 견당사였다. 몇 년 뒤 또 다른 사절단을 파견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항해가 위험한 데다 중국 상황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세이 쇼나곤이 일기를 쓰는 시대가 왔을 무렵엔 시가부터 불교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를 일본으로 수입하고 문화외교를 하던 시절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사이 몇 세기 동안 일본은 점차 문화독립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가나 문자를 새로 만들었다.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일본어에 딱 맞춘 표음문자였다. 가나문자 덕분에 일본에서는 식자율이 높아졌다. 중국에서는 남자만 글을 알았지만 일본에서는 새로운 문자 덕택에 여자들도 대거 글을 배웠다. ... 셰이 쇼나곤 보다 어린 동시대인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걸작 소설 '겐지 이야기'를 썼다.... 일본이 새로 독립성을 찾았지만 중국 문화는 계속 중요한 참조점으로 남았다. (예: 겐지 이야기에는 무려 800편이나 되는 한시가 실렸으며 중국 문학을 자주 언급) 

 

- 일본의 경우는 (로마도 그랬던 것처럼) 다른 문화를 자발적으로 차용하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화차용은 이와 동시에 후발주자라는 느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경쟁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 그가 쓴 일기와 중국에서 가져온 두루마리에서 시작된 영향은 일본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 선불교의 발전 

 

- 기비 두루마리는 무척 독창적인 작품이다. 서예와 수묵화를 결합하여 이야기를 담는 두루마리 그림 에마키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이 정도의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두루마리 그림은 일본의 독특한 예술형태가 되었다. 글과 그림을 능숙하게 교차시키는 두루마리 그림은 무척 동적이다.  ... 이처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의 두루마리 그림은 20세기에 일본이 만들어 세계를 휩쓴 만화를 예견한다. 

 

- 엔닌의 일기와 기비 두루마리는 문화수입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지만 일본의 문학, 회화, 조각, 건축, 불교와 불교 예술 형식이 전혀 파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로마의 경우가 그랬듯이 자발적 문화 수입은 새롭고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생겨난 문화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마쿠라노소시 [枕草子]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식을 만드는 지식)

마쿠라노소시 [ 枕草子 저자 세이쇼나곤(淸少納言, 964- )

정순분(배재대학교 일본학과 부교수)

 

마쿠라노소시(枕草子)일본 수필문학의 효시로 대표적인 고전문학 작품이다. 11세기 초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이라는 뇨보(女房: 고위 궁녀로 우리나라 상궁 정도 된다)가 천황비인 데이시(定子) 후궁에 출사하여 경험한 궁중 생활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당시 귀족들의 생활, 연중행사, 자연관 등이 개성적인 문체로 엮어져 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이 책이 쓰인 헤이안(平安) 시대는 도읍지였던 지금의 교토[京都: 당시에는 명칭이 헤이안쿄(平安京)였다]를 중심으로 귀족문화가 꽃피었다. 귀족들이 문화의 주체가 되어 화려한 왕조문화를 형성하였는데, 문화사적으로는 대륙문화를 수용하여 자국화하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假名)가 정립되어 여류문학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일본적 계절감과 미의식이 정립되어 고유문화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 문화의 특징, 이를테면 섬세하고 기교적이며 인공적인 성격은 바로 이 헤이안 시대에 그 원류가 있다.

 

그 헤이안 시대의 미()의 정수를 응축해 놓은 결정체가 마쿠라노소시(枕草子)라고 할 수 있다. 단편의 장단 300여 단으로 이루어진 수필집으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고 있으면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기발한 재치가 있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풍부한 감성이 있다. 자연과 인간의 모습이 이토록 선명하고 생생하게 묘사될 수 있을까. 천 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그 감동은 강렬하고 또 진하다. 일본의 대표적 고전 하면 이외에 겐지 이야기(源氏物語)가 있는데 겐지 이야기는 겹겹이 싸인 양파처럼 심오하고 난해하여 특히 국민적 정서가 다른 우리에게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마쿠라노소시는 밝고 지적인 감흥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감각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해 쉽고 재미있다. 솔직담백한 그 세계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자극하여 우리한테까지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쿠라노소시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마쿠라노소시는 데이시 후궁(여기에서는 중궁을 중심으로 하는 뇨보들의 문예집단을 말한다)의 영화로운 모습만을 그리고 있는데, 사실 집필 시기는 데이시 집안이 몰락한 이후였다. 천황비 데이시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오빠들이 유배를 간 후 중궁의 자리에서 밀려났으며, 불우한 상황에서 아이를 출산하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마쿠라노소시에는 데이시 집안의 전성기 때의 영화로운 모습만 있을 뿐, 몰락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정적(政敵)에 의해서 정권이 교체된 것을 의식한 탓도 있겠지만, 데이시 후궁의 재기 넘치는 분위기를 책으로 엮어서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세이쇼나곤의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책 제목 중 마쿠라()’는 베개란 뜻이고 소시(草子)’는 묶은 책을 말한다. 제목 마쿠라노소시는 몸 가까이에 은밀히 써놓은 비망록이라는 의미로 베갯머리 서책정도가 된다. 당시 남성들의 공적인 기록과는 다른 여성들의 사적인 감상록이라는 뜻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으로, 여성의 사회를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적 감각에 의해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성들은 학문의 기회와 사회 진출이 극히 한정되었던 당시 상황에서도 문학을 통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또 고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특히 마쿠라노소시는 그러한 헤이안 여류문학 중에서도 재기발랄한 개성으로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쿠라노소시는 일본인과 수필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도 본격적인 수필은 16세기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보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11세기 초에 이미 마쿠라노소시가 성립되고 13세기에 호조키(方丈記), 14세기에 쓰레즈레구사(徒然草)로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심오한 사상과 철학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고 일상의 미학으로서 수필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수필의 가벼운 필치와 경묘한 내용, 감각적인 표현 등은 일본인이 추구하는 단순명료함에 합치되었던 것이다. 수필이야말로 일본문학과 일본인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의 주된 경향(세심함, 정교함)을 그대로 나타내는 부분도 있는가 하면, 일본인들의 비주류적인 성향(씩씩함, 직설적인 면모)도 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7.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가 되다

- 지혜의 창고는 지식을 축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정보유형을 분류하는 새로운 체계를 이용하여 그 지식을 정리하는 곳이었다...무엇을 정리하고 싶었을까? 우선 무함마드와 이슬람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기록이었다. 우선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페르시아어로 쓴 모든 글을 뜻했다.,, 예를 들면 재미있고 교훈적인 동물 우화 모음집 '칼릴라와 딤나'... 천일야화라는 세계문학의 고전 탄생... 중국 종이에서 바그다드를 제지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인도의 천문학 소논문 '수리야 싯단타'는 다양한 천체의 궤도 계산법을 설명... 유클리드 원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번역... 

 

- 바그다드에 축적된 지식은 과학, 기술, 공학, 수학과 인문학을 모두 아울렀다. 의학, 천문학, 수학, 문학, 역사서로 확대... 바그다드의 통치자와 학자는 과거에 만들어진 다양한 지식 분야가 현재에도 유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영토가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그리스 세계의 중심은 알렉사드리아 도서관이었는데 이제 그것 역시 아랍세계에 통합되었다. ...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쪽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영토 대부분은 아랍의 손에 넘어갔다.... 동로마 제국의 역할까지 물려받아 고전세계를 보존했다. .... 바그다드는 이런 식으로 지식을 넓혔고, 출처가 어디든 다양한 문화의 가르침을 권력의 중심지에 저장하고 번역했다. 

 

-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의 본질 등의 문제가 이슬람 교리와 충돌한다고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근본적 믿음과 지식의 더욱 엄밀한 형태 차이, 즉 노하우(know-how)와 노와이(know-why)의 차이가 전면에 나선다.... 현재 문화는 예전 문화가 만들어낸 것을 배움으로써 다욱 강하고 정교해졌다.... 이슬람 성직자와 통치자들은 번역 프로젝트를 통해 사고 도구를 익혀서 다른 종교 대표자들과 토론 할 수 있었다. 

 

-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는 문화사의 중요한 원칙, 즉 문화 상품 차용은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을 증명했다. 차용은 그 문화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여 문화 자원과 통찰력, 기술을 제공한다. 출처나 소유권, 이념의 순수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잔티움에서 쫒겨나 바그다드로 피난 왔음을, 아랍인이 고대 그리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알렸다.   

 

- 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이것이 합리주의의 핵심이었다. 즉 주장을 살펴보고 필요한 경우 조정하거나 바꾸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한 것은 그가 권위자여서가 아니라 무척 유용한 추론 방법을, 지금 여기서 적용할 수 있고 작용해야 하는 방법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 동시에 지혜의 창고는 서쪽으로 이베리아반도까지 영향을 미쳤고 아랍세력은 그곳에 유럽 최대의 이슬람 지역을 만들었다. 이 경로를 통해서 이븐 시나의 저작과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가 서유럽에 전해졌다. 그 결과 재탄생, 즉 르네상스라는 잘못된 이름의 문화 차용이 발생한다. 

8. 에티오피아 여왕, 계약의 궤 약탈자를 환영하다

- 에티오피아 티그라이 평원에 위치한 도시 악숨에는 마리암 사이온 또는 시온의 성모 성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기독교가 에티오피아에 처음 들어온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이 성당에 타봇(tabot)을 모셨는데, 이는 십계명을 적은 석판 및 계약의 궤, 석판이 든 상자의 모두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신성한 물건이 어떻게 해서 에티오피아 성당까지 오게 되었을까?... 다윗왕은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고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신전을 지어 계약의 궤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궤는 성전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587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는데 히브리 성경은 여기서부터 이 귀중한 상자의 행방을 놓친다. 

 

-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제공하는 것은 고대 에티오피아 언어인 게이즈어로 적은 흥미로운 글이다. 케브라 사가스트라고 부르는 이 글에 따르면 궤는 솔로몬 왕 시대에 도둑맞았다. 그 범인이 바로 전설적 여왕(시바)이 통치하던 에티오피아라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이 낳은 아들, 메넬리크가 훗날 솔로몬 왕을 찾아가고 다시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때 예루살렘 귀족 집안의 아들로 의장단이 동행했다. 이 의장단 젊은이들이 궤를 훔쳐갔다는 이야기. 

 

- 이 특이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는 시온의 기둥이라 불린 암다 세욘(1314~1344) 왕 치하에서 널리 이용되었지만 그 이전의 다른 판본에서 주제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암다 세욘 왕은 선조들과 달리 자신이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케브라 나가스트는 그가 혈통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 에티오피아 고원의 다양한 언어 집단과 부족에게 공동의 역사의식을 제공하며 에티오피아의 영광을 확립하려는 의도. 에티오피아에서 솔로몬 왕조가 성공한 것은 공동의 기원이라는 서사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 에티오피아는 계약의 궤를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유대 왕조의 직계 후손임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와 유대 왕조를 연결짓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텍스트 번역이나 유물수입 보다도 훨씬 단단한 왕조계승에 관한 이야기였다. => 이 이야기를 이용한 것은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로 에티오피아 기독교도들로, 훔친 궤를 토대로 에티오피아 기독교가 세워졌다.   

 

- 케브라 나가스트는 솔로몬의 에티오피아인 아들과 궤의 절도라는 이야기를 통해 계승과 절도라는 문화 차용의 두 작용을 명확한 형태로 보여준다. 이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며 후발 주자가 파생이라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결국 문화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는 후발주자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앞선 문화와 맞서며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 1530년대에 오스만튀르크, 아랍, 아프리카 군대로 구성된 병력에 악숨이 정복되고 에티오피아 황제 덴겔은 지배계층과 함께 산지로 달아났다. 이즈음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동해안에 도착하여 아프리카 동부에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전설을 듣는다. 이것이 프레스터 존이야기이다. 다가마 이후 그의 아들이 에티오피아 궁정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머스킷 총 400정을 도움받아 이슬람 군단을 격퇴하고 기독교를 지켜내었다. 

 

- 자메이카의 흑인지도자 마커스 가비는 정체성을 찾아 아프리카에 시선을 돌렸고, 오랜 역사와 문필 전통을 가진 에티오피아를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에티오피아는 흑인 노예선을 태우던 곳에서 무척 멀었지만,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전통과 흑인 기독교의 역사적 모델이 될 수 있는 전통을 발견했다.... 이러한 에티오피아에 매료되면서 새로운 운동이 생겨났는데, 이를 당시 황제인 라스 타파리의 이름을 따와 라스 타파리라고 부른다. 이들은 멀리서 왕에게 충성했을 뿐만 아니라 채소와 대마초를 재배하며 자연주의 삶에 헌신했다.... 이러한 운동을 고대 에티오피아처럼 문화 전이와 융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로 보아야 한다.  => 자메이카는 독특한 음악과 여타의 전통을 포함하면서 고대 에티오피아 텍스트를 자메이카의 경험과 결합한 무척 독창적인 문화가 탄생했다. 이들은 자메이카 흑인과 그 후손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한 20세기 초의 사상을 고대 전설과 엮어 대서양 노예무역과 식민착취라는 폭력에 대응했다. 

 

11. 포르투갈 선원, 올림포스의 신을 만나다

루이스 드 카몽이스(1524~1580)의 이야기는 이동진 평론가께서 언급하셨기에 추가 부분만 남긴다. 작년 포르투갈-스페인 여행 때 알게된 포르투갈 국민 시인인데, 그의 묘가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 정확하게는 벨렝의 산타마리아 성당이다. 건물이 함께 나란히 있지만, 입장 자체부터 별개로 진행된다. 벨렝 바닷가에서 보면 눈부시게 새하얀 건물이 바로 이들이다. 아마 리스본, 아니 포르투갈에 가서 이 건물을 관람하지 않았다면 포르투갈을 다녀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산타마리아 성당은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엔히크 왕자가 세웠고,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그 후계자 마누엘 왕이 세웠다. 마누엘 양식이라 하여 굵게 꼬인 닻줄, 조개껍데기의 패턴, 산호, 천문과 기상 관측 도구 등 해양과 항해와 관련된 문양들이 조각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석관에는 십자군, 범선 그리고 혼천의, 이렇게 3가지 문양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시인 카몽이스의 석관도 있는데 세가지 문양이 달랐다.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의 석관

시인 카몽이스의 석관

 

나무위키에 언급된 우스 루지아다스의 소개이다.

- 카몽이스가 우스 루지아다스를 저술한 과정 

* 그리스와 로마 예술과 문학이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카몽이스는 코임브라 대학에서 고전 공부(숙부가 총장)

* 바스쿠 다 가마의 첫번째 인도 항해를 주제로 선택. 이후 100년간 포르투갈 민족이 실시한 모든 탐험의 원형 

*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중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기법을 차용. 하여 다 가마가 희망봉을 지나 동부해안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  

* 올림푸스 신을 신중하게 골라 바쿠스를 선택. 가면과 연극, 술의 신. 

* 호메로스의 그림을 길게 설명하는 문학 기법을 차용. 베르길리우스에게서는 비전을 차용, 즉 주인공 아이네이아스에게 로마 건설. 

* 고전문학, 서사시라는 형식을 사용. 포르투갈의 영웅이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의 업적을 넘어섰다고 믿음. 그들은 지중해를 항해했지만, 다 가마는 태평양, 대성양, 인도양을 항해. 위험한 역류가 흐르는 희망봉, 역풍, 태풍 등등.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신 아다마스토르라는 기괴한 거인을 창조. 

* 호메로스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직접 경험이 한정적이고, 베르길리우스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까지 경험뿐이라 이야기 대부분이 꾸며낸 것임. 하지만 카몽이스 자신은 아프리카 서부해안-희망봉-인도-마카오-메콩강 등을 지나면서 태풍, 난파를 직접 경험하며 서사시를 써냈고, 따라서 자신의 작품이 고전보다 우월. 

* 괴혈병 등 긴 항해의 세세한 일상을 언급한 최초의 서사시. 일반 선원과 군인에게도 신경을 썼다. 폭풍, 물기둥 등 경이로운 자연현상도 직접 경험한 것들을 묘사. 다른 문화에서 발견한 요소들도 받아들여 기술.. 

* 인도양은 어떤 인간도 가 본적이 없는 미지의 바다가 아니라, 다만 포르투갈인이 처음으로 인도양에 왔을 뿐이다는 사실을 인식. 하지만 두 해상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중요. 동부 아프리카의 중요성 인식.    

* 카몽이스는 다 가마의 첫 항해의 오류를 수정: 인도가 기독교도가 아닌 힌두교도. 아프리카 동부에 전설 속 가독교 왕이 없다는 사실. 인도를 이슬람이 지배하지만 힌두교 통치를 용인. 

* 다가마의 첫항해에서는 팔 물건이 없었음. 2차 항해에서 더 좋은 상품, 휼륭한 함선(군함), 지도를 가져옴.  

* 출간: 왕의 허락, 종교재판소의 승인, 중국 인쇄술과 종이 제조법 활용하여 종이로 출간. => 세상은 점점 더 연결 중. 

* 젊은 왕 세바스티앙이 귀족 군대를 소집해 북아프리카를 공격, 전멸하고 왕도 사망. 이 재난으로 포르투갈 끝장. => 우스 루지아다스의 역할은 무엇? 의미 만들기가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준다.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와 폭력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학의 힘을 이용해 독자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하다. 

 

14. 일본 예술을 향한 침략과 사랑

- 가쓰시카 호쿠사이 색판화,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1825~1838년, 시카고 미술관)

- 우키요 전문가들은 목판화라는 독특한 예술 형식도 발전시켰다. 중국에서 시작한 판화는 오랜 전통을 가진 기법이었지만 부유하는 세계에서 활동하는 일본 예술가들은 다색 목판화 기법을 완성했다. 색깔별로 별도의 판화를 조각해서 차례대로 맞춰 찍으면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는 수채물감이나 먹을 이용하는 일본 전통 회화의 미학적 이상과는 상당히 다르고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유형의 그림이었다. .... 수채화의 흐릿한 색조 대신 여섯 가지로 제한된 색을 이용해 선을 선명하게 그려야 했다. 이러한 판화는 신비로운 깊이 대신 평면적이지만 생생한 색감을 표현했다. 또 단순한 평온함 대신 뚜렷하고 종종 비대칭적인 형태를 잘 표현했으며 옛 대가들에 대한 존경심 대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제안했다.  

 

- 1854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강요한 가나가와 조약으로 개방. 이때 다색판화는 대표적인 자포네즈리(일본의 모든 것에 대한 매혹) 열풍의 일부였고,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이 그 대표작이었다.... 일본의 정권이 무너지자 외국인들을 초빙하여 서양을 배워야했고, 페놀로사는 그렇게해서 일본으로 왔다.   ... 페놀로사는 일본을 현대화하는 침략세력으로 아시아에 갔지만 그 역사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예술계의 보물들을 구입해서 반출했으나 과거를 다루는 19세기 서구 사상에 따라 일본이 자기네 유산을 보존하는 제도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에필로그: 2114년에도 도서관이 존재할까? 

- 이 모든 사례에서 문화재와 관습은 그것을 보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살아남았다. 이 문화재들은 분명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개념에 도전했다. 문화사는 순수주의자와 청교도야말로, 티 한 점 없는 미덕이라는 사상에 몰입한 사람이야말로 문화 파괴 행위에 가담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계속 반복해서 보여준다. 

 

- 문화는 다양한 표현 형식과 의미 생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번영한다. 문화 접촉으로 선택지가 증가하면 문화 생산과 발전은 자극을 받는다. 반대로 순수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차단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며 문화 융합 실험을 감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편협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를 무시하고 파괴를 용인하거나 장려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다.

 

- 문화 차용과 소유에 대한 오늘날의 불안감은 인간문화를 관통하는 폭력의 역사뿐 아니라 문화의 유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서 생겨나기도 한다. 최근에 이를 잘 보여주는 거센 파도가 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한류가 바로 그것이다. .. 싸이의 강남 스타일 유튜브 최초 10억뷰 돌파... 한류가  이토록 많은 청중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록, 재즈, 레게, 아프로비트 등이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 문화적 공유가 도를 넘은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부분적 이유는 좋은 공유와 나쁜 공유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고립과 순환, 순수와 혼합, 문화의 소유와 공유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대중예술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당대의 문화가 이동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지표 역할도 한다. 강남스타일은 소비문화 및 세계화와 함께 성장한 청중을 대상으로 그러한 현상의 핵심을 포착해 주었고 따라서 그들은 뮤직 비디오 속 이미지들을 이해했다. 모든 형태의 문화이동, 모든 부흥 활동, 모든 인터넷 현상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케이 팝은 문화사가 순환과 혼합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워준 좋은 사례다.  

 

교보문고 책소개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모든 영웅의 원형을 만든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한강과 마거릿 애트우드가 함께할 2114년 미래의 도서관까지, 인류 문화의 15가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먼 곳의 문화에 눈길을 돌렸고, 그것은 문명이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는 동력이 되었다. 편협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세계 곳곳에 도래하는 지금,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재정의하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미래를 제시하는 책.
 

저자(글) 마틴 푸크너 (Martin Puchner)

하버드대학교의 바이런 앤드 애니타 윈 드라마 교수이자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이다. 베스트셀러 시리즈인 《노튼 세계 문학 선집(Norton Anthology of World Literature)》을 편집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온라인 대형 공개 강좌인 HarvardX를 통해 4,000년에 걸친 문학의 역사를 소개해왔다.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 《혁명의 시(Poetry of the Revolution)》, 《도둑의 언어(The Language of Thieves)》, 《변화하는 행성을 위한 문학(Literature for a Changing Planet)》 등의 저서가 있으며 2017년에는 뛰어난 역량의 학자 및 예술가에게 수여되는 구겐하임 펠로십을, 2021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을 쌓은 연구자에게 수여되는 훔볼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목차

  • 서문: 문화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들어가며: 기원전 3만 5000년경 쇼베동굴에서

    1.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왕비와 얼굴 없는 신
    2. 플라톤, 비극을 불태우고 역사를 발명하다
    3. 아소카 왕, 미래에 메시지를 보내다
    4. 폼페이의 남아시아 여신
    5. 고대의 흔적을 찾는 불교 순례자
    6. 《베갯머리 서책》과 문화 외교의 위험
    7.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가 되다
    8. 에티오피아 여왕, 계약의 궤 약탈자를 환영하다
    9. 어느 기독교 신비론자와 세 번의 유럽 부흥
    10. 아즈텍의 수도, 찬사와 함께 파괴되다
    11. 포르투갈 선원, 올림포스의 신을 만나다
    12. 생도맹그와 파리 살롱의 계몽주의
    13. 새로운 과학에서 역사 소설이 탄생하다
    14. 일본 예술을 향한 침략과 사랑
    15. 나이지리아 독립과 셰익스피어

    에필로그: 2114년에도 도서관이 존재할까?
    감사의 말

책 속으로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을 지운 것이 일신교 실험 때문이었다면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일신교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집트 역사 속 이 짧은 시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이 계속 다신교 안에서 살았다면 아톤 실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나 역사의 각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과거를 본다. _55쪽, 〈1.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왕비와 얼굴 없는 신〉 중에서

복잡한 프레스코화, 아트리움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폼페이 광장 옆 커다란 건물에 새겨진 베르길리우스의 명문은 로마의 신화적 기원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설명한다. 프레스코화부터 극장에 이르기까지 폼페이 전체가 이러한 문화 실험의 증거다. _122쪽, 〈4. 폼페이의 남아시아 여신〉 중에서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_143쪽, 〈5. 고대의 흔적을 찾는 불교 순례자〉 중에서

다행히도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_190~191쪽, 〈7.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가 되다〉 중에서

문화는 다양한 표현 형식과 의미 생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번영한다. 문화 접촉으로 선택지가 증가하면 문화 생산과 발전은 자극을 받는다. 반대로 순수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차단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며 문화 융합 실험을 감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편협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를 무시하고 파괴를 용인하거나 장려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다. _424쪽, 〈에필로그: 2114년에도 도서관이 존재할까?〉 중에서

 

출판사 서평

★ 〈뉴욕 타임스〉 에디터스 초이스
★ 〈타임〉 〈월 스트리트 저널〉 〈보스턴 글로브〉 극찬
★ 훔볼트상 수상자 마틴 푸크너의 역작
★ 4천 년 문화가 담긴 45개 도판 수록

학문의 시원 바그다드,
최초의 순례자 현장법사,
모든 영웅의 아버지 호메로스
세계사를 바꾼 4천 년 문화를 집대성하다

《글이 만든 세계》 《노튼 세계 문학 선집》으로 전 세계를 열광시킨 학자,
하버드대 교수 마틴 푸크너가 정리한 인류 문화의 15가지 장면들

우리는 민족 고유의 문화라는 표현을 손쉽게 사용하고, 때로는 자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순수한 문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을까?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그리스의 문화를 향유했다. 당나라는 인도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했으며, 바그다드는 이슬람 이전의 지식을 집대성했다. 강력한 문명을 만든 동력은 결코 ‘순수함’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글이 만든 세계》의 저자이자 《노튼 세계 문학 선집》의 편집자인 하버드대 영문학과 교수 마틴 푸크너는 4천 년에 걸친 인류 문화의 15가지 이야기를 정리한다. 시대와 대륙을 초월한 각기 다른 개성의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문화를 빌려오고 기존 문화와 혼합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최초의 예술가가 작품을 남긴 기원전 쇼베동굴에서 시작하여 세계적 작가 한강과 마거릿 애트우드가 함께할 2114년 미래의 도서관까지, 수십 세기를 횡단하는 인류 문화 오디세이를 따라가며 문화가 열어젖힐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보자.

《일리아스》는 어떻게 로마의 기원이 되었는가?
그리스 서사시를 재창조하여 역사의 주체가 된 로마 제국

“그리스가 로마에 끼친 영향은 다른 분야, 특히 교육으로 확대되었다. 로마의 군사적 승리 이후 많은 그리스 교육자들이 로마에 노예로 끌려와 아이들을 가르쳤다. 폼페이 식자층은 주로 그리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작가의 원전을 인용할 수 있었다.”(112쪽)

인류에게는 언제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문화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각 시대의 인류는 최선의 도구를 찾기 위해 먼 과거로 눈길을 돌려왔다. 로마 역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자신들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하여 700년 전 그리스 문학을 활용하였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였으나, 그리스의 문화는 사라지긴커녕 로마에서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로마 어디에서든 그리스 희곡을 묘사한 그림을 만날 수 있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그리스 작가의 이름을 외우는 건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로마의 정체성과 그리스 문화가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해지자 로마인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리스는 이제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원과 그리스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 베르길리우스는 놀랍게도 로마의 기원을 설명하는 새로운 서사시를 쓰기로 결정했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일리아스》의 등장인물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시조로 선택되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가 등장하는 《아이네이스》라는 서사시를 통해 로마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설명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가 패배한 뒤 도망친 인물인데, 베르길리우스는 왜 패자를 로마의 시조로 설정한 것일까?
베르길리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패자를 선택한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었다. 로마인은 그리스를 주체적으로 이용할 뿐, 언제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리스 문화가 로마에 끼치는 영향을 인정하는 동시에 로마 제국이 그 자체로 위대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솔로몬 왕과 흑인 인권 운동의 관계는?
유대교 신앙에서 블랙팬서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문화의 연쇄작용

“에티오피아는 계약의 궤를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유대 왕조의 직계 후손임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와 유대 왕조를 연결 짓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텍스트 번역이나 유물 수입보다도 훨씬 단단한 왕조 계승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러한 문화 접목이나 이전을 추구하는 것이 《케브라 나가스트》만은 아니다.”(200쪽)

문학, 종교, 예술에는 최초의 창시자가 존재하지만, 언제까지나 창시자의 의도에 머물러 있진 않다.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을 만든 이들의 의도를 벗어나고 점점 더 풍성한 의미를 담게 된다.
14세기 에티오피아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가 바로 그러한 역사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케브라 나가스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왕조는 솔로몬 왕을 계승한 유대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히브리 성경의 이야기와 달리 《케브라 나가스트》의 솔로몬 왕은 에티오피아 여왕이 방문했을 때 그녀를 품에 안았고 여왕은 왕의 아이를 임신한다. 솔로몬 왕과 에티오피아 여왕의 아이 메넬리크는 훗날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는데, 고향을 그리워한 그는 모세가 만든 계약의 궤를 훔쳐 에티오피아로 도망친다. 솔로몬 왕의 혈통, 히브리 성경에 등장하는 계약의 궤, 이 두 가지 요소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유대 왕조의 권위를 손에 넣는다.
푸크너는 이러한 문화 혼합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히브리 성경을 구약으로, 기독교 정전을 신약이라고 정의한 오늘날의 성경 역시 이질적인 두 문화가 결합된 사례이다. 후대의 해설자들은 역사적 권위와 함께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의미도 갖고 싶어 한다. 정통성과 독창성을 모두 손에 넣으려면 과거의 텍스트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에티오피아를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솔로몬 왕을 등장시켰지만, 솔로몬 왕을 여왕에게 욕정을 품은 죄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케브라 나가스트》 역시 수 세기가 흐른 뒤에 예상치 못한 미래를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만국흑인진보 연합을 결성한 자메이카 태생의 마커스 가비는 흑인 기독교의 역사적 모델로서 에티오피아에 주목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왕이었던 리즈 타파리 마코넨은 《케브라 나가스트》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했고, 마커스 가비를 포함한 자메이카 흑인들은 《케브라 나가스트》에 매료되었다. 유대 왕조의 권위에 기댔던 《케브라 나가스트》는 백인들의 역사를 반박하고 흑인들의 새로운 역사를 상징하는 텍스트가 되어 블랙팬서 등의 흑인 인권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 성경에서 《케브라 나가스트》 그리고 블랙팬서까지, 이러한 역사의 연쇄는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텍스트의 원작자는 오해라고 말했을 재해석이었지만, 덕분에 인류는 인권과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 큰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서 원작자라는 직함은 그리 큰 힘을 갖지 못한다. 때로는 오해와 재해석이 더욱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발전한 자연권 사상은 백인과 남성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의 노예 혁명을 촉발시켜 독립 국가 아이티를 탄생시켰다. 일본 다색판화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는 서양 기법을 도입한 작품이었고 당시 일본 미술에서 이질적인 화풍이었으나 그 맥락과 상관없이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컬처》는 독창성과 고유성에 대한 신화를 파괴하며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역사의 전환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개방과 변화 속에 인류의 미래가 있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143쪽)

중국의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 16년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오랜 시간 고향을 떠났던 그의 여정은 놀랍게도 부처가 꼭 인도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교훈으로 끝난다. 인도 불교가 아닌 중국 불교를 통해서도 충분히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문화가 변화한 문화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며, 어떤 문화든 지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한 최선의 모습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자기 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고 타지의 문화를 배척하는 국수주의의 시대. 《컬처》는 폐쇄된 세계에서 과연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지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모두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수많은 도전과 모험이 있었기에 탄생했다. 문화가 이동하고 변신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신교 국가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일신교 혁명, 미래를 향한 문구가 가득했던 아소카 왕의 인도, 서양 예술에 파괴적 영향을 준 중국 경극, 《컬처》는 단절과 복원, 권력 투쟁과 무모한 여정을 매개로 전 지구를 움직인 문화적 성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신하고 접합하는 문화의 특성이 인류의 지혜를 미래로 전하는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인류의 기념비적인 순간을 담은 아카이브이자 창조적 종인 인류의 미래를 위한 가이드북이 지금 우리에게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