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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여행 26일차: 아르헨티나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해안 트레킹, 우수아이아 ->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공이동 (2024.3.9)

클리오56 2024. 3. 25. 19:57

일자: 2024.3.9
코스: 센다 코스테라 트레킹 트레일헤드 ~ 알라쿠쉬 방문자센터
거리: 8.86km
소요시간: 2시간45분(휴식 10분 포함)

Track_2024-03-09_아르헨티나_우수아이아_센다_코스테라.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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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지구의 끝, 해안을 따라 걷는 트레킹이다. 이 해안 지역은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지역이며 지구의 끝의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대자연이 주는 감동을 음미해 볼 수 있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칠레와의 국경선에서 가까운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은 카미 호수 북쪽에서부터 비글 해협 해안에 이르는, 안데스 산맥 남쪽 끝자락 63,000㏊를 보호하고 있다. 역사와 애환이 듬뿍한 길이며 안데스가 해안과 만나 사라지는 안데스의 끝자락이다. 

 

특히 우리가 걷는 길은 Costera Trail 코스이며 우체통에서 인증사진 후 트레킹을 시작하여 해안의 숲과 해안을 따라 약간의 오르내림을 거친다. 안내판에는 여정을 완료하는 데 약 4시간이 걸린다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좀 더 빨리 3시간 정도에 완주하였다. 도착지는  알라쿠쉬 방문자센터이며 이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였고 내부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10,200년전 인간이 처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했다라고 소개하는데, 참으로 감격적이다. 아프리카를 출발한 인류가 아시아를 거쳐 북미를 지나 마침내 남미의 끝자락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1만년전, 그렇게 언급하지 않고 굳이 200년을 추가하여 10,200년전이라고 했을까?  

이정표에 서울이 없어 아쉽지만 북경이 18,323km이다. 이곳에 표시된 지역중 당연히 가장 먼 곳이다. 

드디어 트레킹 출발~~

일가족 5마리~

도착지는 알라쿠쉬 방문자센터, 이곳에서 점심을 들며 휴식. 안데스 산맥이 바다에서 소멸하는 세계의 끝에서 트레킹을 마쳤다는 것은 나름 큰 의미가 있다. 

전시실에는 원주민 야간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트레킹을 마친 후 우수아이아로 되돌아와 비행기 탑승을 대기한다. 공항 출발 대기중 부근 카페에서 팀 일원인 부부와 함께 카푸치노 한잔을 하였다. 일행이 1500불 분실한 사건이 있는데 룸메가 의심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오래 지내다보니 누구는 성형얼굴이라는 이야기도 듣곤했는데 그 이후 그 얼굴을 보곤 아 저게 성형얼굴이구나 인식하게되었다.

 

우수아이아 공항을 오후 7시25분 출발하여 10:50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였다. 같은 나라인데 무려  3시간25분 이동하니 아르헨티나 역시 대단히 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추위는 사라지고 무더운 지역만 다니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처 위키백과
부에노스아이레스(스페인어: Buenos Aires)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남아메리카 동남부 라플라타강의 하구에 자리한 항구 도시이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이다. 수도권인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약 1,300만 명이 사는 지역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인구 밀집지역이다.
 
19세기의 내전 이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연방 특별구(Capital Federal )가 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독립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팽창하였다. 과거에 독립된 도시였던 벨그라노와 플로레스는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리오가 되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사람들을 흔히 포르테뇨(porteños, 항구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지명은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착한 공기’(영어: good air, 라틴어: bonus aër)로, ‘순풍(順風)’이란 뜻이다. "Nostra Signora di Bonaria"(착한 바람의 성모(聖母)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탈리아 사르데냐 칼리아리 지방의 교회에서 따온 것이다. 1994년 헌법에 따라 연방 특별구는 자치권을 획득하였고, 도시의 공식 명칭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Ciudad Autónoma de Buenos Aires)가 되었다.
 
스페인의 이름 아래 항해중이던,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 (Juan Díaz de Solís)가 1516년 라플라타강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그의 원정은 차루아(Charrúa)족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중단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는 최초로 페드로 데 멘도사 (Pedro de Mendoza)가 이끌었던 스페인의 원정대에 의해 1536년 2월 2일 Ciudad de Nuestra Señora Santa María del Buen Ayre 로서 설립됐다. 멘도사에 의해 설립되었던 시는 오늘날 도시 중심의 남쪽,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텔모 지구에 있다.
 
토착민들의 공격은 정착민들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1541년 이 지역은 버려졌다.1580년에 아순시온(현재 파라과이의 수도)에서 파라나강으로 항해해 도착한 후안 데 가라이에 의해 영구적인 정착촌이 두번째로 설립되었다. 그는 그 정착촌을 "Santísima Trinidad"이라 명칭을 붙였으며 그곳의 항구는 Puerto de Santa María de los Buenos Aires"가 되었다.
 
1776년에 브라질에서 침공을 계속하는 포르투갈로부터 반다 오리엔탈을 방어하기 위해서, 페루 부왕령이 분리되어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부왕령의 수도가 되어 정식으로 개항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 무역을 요구하는 크리올인들에게 이 조치는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스페인 정부에 대한 불만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후 유럽 전란 중에 스페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스페인의 적대국이 된 영국은 이 지역의 지배를 용인하지 못하고 180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침공을 시도했다. 라 플라타 부왕은 도피했고, 포르테뇨 민병대는 부왕이 없는 상태에서 영국군을 격퇴했다. 또한 1807년의 재침략도 물리쳤다. 이에 자신을 가진 포르테뇨들의 스페인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게 되었다.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을 포르테뇨(항구의 사람)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민병대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1808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가 스페인에 침공하여,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호세 1세로 임명하자 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왕에게 충성을 거부했다. 1810년 5월 25일에 5월 혁명이 발발하여 라 플라타 부왕은 포르테뇨들에 의해 추방됐고 자치 정부가 발족했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정하고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직후 연방 동맹인 아르티가스파와의 내전이 계속되었지만, 각 주의 타협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연합주의 외교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했다. 1821년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주 내무 장관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825년 브라질 전쟁 중 연합주는 아르헨티나로 개명하고, 리바다비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로부터 떼어낸 연방 직할의 수도로 정하는 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중앙정부에 빼앗기는 것을 싫어해 반대 운동을 일으킨 연방파와 통일파 쌍방의 이해 관계로 엮여 결국 브라질 전쟁의 실패와 함께 리바다비아는 실각하고 이 헌법도 효력을 상실했다.
 
1835년,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로사스는 가우초보다 능숙한 승마 실력 때문에, 흑인이나 도시 하층민·가우쵸·인디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로사스 시대에는 로사시트라고 불리는 로사스파가 거리를 장악하여, 거리에는 로사스의 초상화와 로사스가 좋아한 연방파의 적색으로 가득 찼다. 또 비밀경찰이 시민을 감시하여, 많은 자유주의자가 칠레의 산티아고를 통해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1852년, 연방파에서 로사스의 심복이었던 후스트 호세 데 우르키사가 브라질, 우루과이와 동맹을 맺고 엔트레 리오스 주에서 로사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1852년 2월 3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카세이로스의 언덕(현재는 시로 승격)에서 로사스는 우르키사를 맞아 전쟁을 벌였고, 우르키사군에 패하면서 영국으로 망명하여 로사스는 실각했다.
 
우르키사는 연방주의를 체제화했고, 후안 바우티스타 알 베르디가 기초한 1853년 헌법을 연방의 헌법으로 제정해 같은해 아르헨티나 연방의 성립을 선언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연방파의 지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방은 엔트레 리오스주의 파라나에 수도를 두었다. 이후 연방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싸움이 반복되었지만, 1862년 11월 주지사 바르트로메 미트레가 우르키사를 바폰 전투에서 패퇴시킴으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을 병합하는 형태로 통일을 이루면서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미트레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로 유럽을 숭배하고, 가우초, 인디오, 흑인을 야만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혐오하였다. 이러한 자유주의자가 정권을 잡은 이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흑인은 사라져 가게 된다. 1865년에 아르헨티나 첫 인구 조사를 했을 때, 전 인구 165만명 중 2만명 정도가 흑인이었지만, 1864년에 파라과이의 로페스가 삼국 동맹 전쟁을 일으키자, 대규모의 흑인이 징병되었다. 1871년에 황열병이 유행하여, 흑인 사회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으며, 얼마되지 않는 흑인도 우루과이 등 주변국으로 출국하였다.
 
1880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 분리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연방 직할구가 되면서, 정식으로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되었다. 또, 현재의 카사 로사다가 대통령부가 되었다. 자유주의 정권은 아르헨티나 발전을 목표로 삼아 유럽으로부터 많은 백인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라이추엘로 강 하구의 항구에 접한 라 보카 지구에서는 이탈리아계 이민이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에 의해서 탱고가 발달했다. 또 수출 경제의 발전과 함께 아르헨티나에는 광대한 철도망이 건설되어 국내의 모든 철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티로 역에 도착했다.
 
1911년에는 스페인어권 및 남반구 첫 지하철(A선)이 5월 광장에서 시내 서부 방면으로 개통되었다. 1920년대 이후는 아르헨티나의 부를 반영하는 아메리카 대륙 최대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자 내륙부의 여러 주에서 인구 이동이 증가하여, 도시에 진입하지 못한 인구가 교외에 거대한 슬럼가(비쟈스 미세리아스)를 형성하게 되었다.
 
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계는 라플라타강에 의해 동부와 북동부로 구분된다. 남부와 동남부는 리아추엘로에 의해 구분되며, 북서쪽과 서부 그리고 남서부는 24km의 아베니다 헤네랄 파스 고속도로로 구분이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팜파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생태 구역이나 호르헤 뉴베리 공항이나 푸에르토 마데로, 라 보카와 같은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 중 하나인 라플라타 강의 해안선을 따라 지었다.
 
기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온난 습윤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의해 Cfa)이다. 고온 다습한 아열대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17.6 °C, 년 강수량은 1,147 mm 정도이다. 연 중 비가 꾸준히 오며, 강풍이 보통 동반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지에서 기록된 최저 기온은 1918년 7월 29일 −5.4 °C이며, 최고 기온은 1957년에 기록된 43.3 °C이다. 최강 최근의 눈이 내린 기록은 최근들어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한 2009년 7월 9일이다. 당시 이곳에는 엄동설한과 블리자드가 아르헨티나를 강타했다. 이것은 1918년 6월 22일 이후로 89년만에 최초로 기록된 제대로 된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