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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과 그 외연: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2023.2.11)

클리오56 2023. 2. 16. 08:55

일자: 2023.2.11

코스: 덕수궁

등로: 시청역 6번 출구 ~ 환구단 ~ 대한문 ~ 덕수궁 ~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 ~ 시청역 1번 출구

소요시간: 3시간 34분 ( 휴식시간 1시간 35분 포함)

도상거리: 3.61km

이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하기는 10권의 '덕수궁과 그 외연'이며

대한제국 관련하여 환구단을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했고

덕수궁과 대한제국역사관을 각각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관람하였다.

 

대한제국역사관은 사전예약이 필요하지만 만 65세 이상은 현장접수가 가능하다. 

중명전도 다시 한번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패스하였다.

 

덕수궁 외벽공사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휴관중이라 관람하지 못했고

덕수궁의 입구인 대한문도 차단되어 이번에는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음을 재차 언급한다.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제3부 덕수궁과 그 외연
제3부 덕수궁과 그 외연
덕수궁 전사(前史)
시청 앞 광장은 이렇게 변해왔다
궁궐 공원인 덕수궁 / 신덕왕후의 정릉 / 흥천사 / 3층 사리전의 역사 / 태평관 /
흥천사 범종 / 자격루 / 신기전
경운궁·인경궁·경희궁
선조, 인목대비, 광해군의 역사 단막극
덕수궁의 유래 / 월산대군 / 선조의 행궁 / 석어당과 즉조당 / 『계축일기』 /
광해군과 궁궐 / 아관파천과 경운궁
덕수궁
대한제국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법궁
대한문 / 환구단 / 함녕전 / 정관헌 / 석조전 / 중명전

 

덕수궁은 조선 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원래 이 자리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 흥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1593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선조가 머물던 건물이 석어당이다. 석어당이란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을 이궁으로 삼기 위해 공사를 벌였으나

1623년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가 공사를 중단시키면서 왕가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당시 경운궁 주위는 서양 여러 나라의 공사관, 교회와 성당, 학교 등 근대적 건축물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이런 시류에 맞추어 경운궁에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속속 세웠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으로 남은 어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수궁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궁궐공원처럼 남아있다. 

덕수궁을 보면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홍준 교수는 덕수궁 답사를 흥천사 범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범종과 더불어 보루각 자격루, 신기전기 화차는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환구단

고종이 나라 안팎에 독립된 근대국가임을 선포하기 위해 대한제국 수립에 들어갔다.

조선이 독자적인 황제국임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환구단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다. 

환구단은 제천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여기에서 하늘로부터 국가의 정통성을 확인받는다.

 

원래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신들의 위패를 모시던 황궁우가 장엄하게 있었다.

일제가 1913년 환구단을 헐고 이듬해 그 자리에 총독부의 조선철도호텔을 지으면서

현재는 황궁우 3층 전각만 외롭게 남아 있다.

석고

황궁우 옆 3개의 석고는 1902년 고종황제의 즉위 40년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돌북은 제천의식 때 사용되는 악기를 본뜬 것이고, 몸체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고종황제는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황제의 존엄과 대한제국을 과시하고자 했다.

장례식을 자세히 기록한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가 당시 성대했던 장례 모습을 보여준다.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이 약 4,800명이었다.

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중이었다. 대한문이 보수공사중이라 위치는 조금 바뀌었다.

 

대한문 (2017.2.3. 사진)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의 대한문 상량문에 따르면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1906년, 을사늑약을 당한 바로 그다음 해 정월에 고종은 이런 염원을 담아

덕수궁의 대문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고쳤던 것이다. 대한문의 현판은 남정철의 글씨다.

금천교

광명문

광명문은 본래 함녕전의 대문이었지만 이왕가미술관이 덕수궁 안에 세워지면서

옥외전시물의 보호각으로 사용하게 되어 흥천사 범종, 자격루 물기둥, 신기전기 화차가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 본 전시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중화문

중화전

정전인 중화전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1905년 1월 복원 공사에 착수했는데

당시 나라의 재정이 넉넉지 못해 전처럼 중층으로 짓지 못하고 지금의 모습처럼 단층의 단출한 규모로 축소했다.

그래서 궁궐의 위용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쓸쓸한 최후를 느끼게 한다.

 

대한제국 선포로 황제가 되면서 이전의 조선 왕과 달라지는 점 몇 가지를 해설사로 부터 전해들었다.

현판이 검은 바탕에 황색 글씨가 쓰여진다는 점,

왕의 상징은 봉황이었지만 황제의 상징은 용이라 점,

황제의 상징은 황색이라 건물의 문에 황색 칠을 한다. 

정(鼎)

일종의 향로, 담배꽁초를 막기위해 어슬프게 덮어두었다.

 

덕홍전

덕수궁에서 가장 늦게 지어진 건물로 귀빈 접객용으로 사용하였다.

함녕전까지 복도를 놓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함녕전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으며 화재 탓에 3년간 중명전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고종은 줄곧 여기서 기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채취가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함녕전에 방장, 외주렴, 무렴자 등을 새로 설치하여 높은 수준의 실내장식을 구현해 가고 있다함.

함녕전 아궁이에서 최초로 발화되어 대형화재로 전개

1907년 7월 초대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그 수행원,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그리고 이완용 놈들이 모여 술만 처먹지 않고 연작시를 지었다.

이완용 견자는 兩地一家 天下春 (두 땅이 한집안을 이루어 천하가 봄인 것을)라고 짖었다하며

이 시비는 철거되어 아마도 함녕전 뒤뜰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아픔이 서린 함녕전이다.

 

정관헌

화계 맨 위쪽 평평한 언덕에는 근대식 정자인 정관헌이 있다.

조용히 관조하는 집이란 뜻의 이 양관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이다.

고종은 여기서 조용히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박쥐 문양이 독특하다. 아마도 다산의 상징~

황제가 출입하는 문에는 용 문양이 새겨져있다.

유현문

함녕전과 덕홍전 뒤쪽 높은 지대엔 널찍한 화계가 있고

그 옆으로는 꽃담이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감싸고 있다. 

꽃담 사이에는 유현문이라는 그윽한 이름의 아름다운 근대식 벽돌 기와 나들문이 있다. 

 

준명당(왼쪽)과 즉조당(오른쪽)

석어당 옆의 즉조당은 의젓한 기품이 돋보이고 팔작지붕의 곡선미가 아름다운 건물로 인조가 여기서 즉위했다.

고종은 즉조당 곁에 준명당을 짓고 두 건물을 돌기둥 복도로 연결했다.

두 건물이 어우러져 자못 길면서도 당당한 위용을 보여준다. 

 

석어당

덕수궁 안에 유일하게 단청이 없는 건물인 석어당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행궁으로 삼은 곳이라

옛 석(昔), 어거할 어(御)를 써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석어당 옆모습

석어당은 성종의 큰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집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2층집으로 규모도 상당하고 생기기도 늠름하다.

석어당 옆 살구나무

석어당 옆에는 살구나무 고목이 있어, 봄이면 살구꽃이 눈부시게 피어난다.

석어당 2층 남쪽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만발한 살구꽃이 더욱 환상적이다.

 

석조전

석조전은 덕수궁의 상징이다. 정확히는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구상되어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1910년 준공되었으니 제국과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

석조전 내부를 40여분간 가이드 투어하였다. 개별 관람이 허용되지 않으며 사전 예약이 필요,

다만 65세 이상은 현장 예약이 가능하다.

 

석조전 실내

현재 석조전 실내에는 총 133점의 가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응접탁자, 옷장, 세면대, 책장, 화장대 등 41점은

준공 당시의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과 창덕궁에 100년 이상 보관되어왔던 것이다.

 

고종황제 초상

고종황제 초상은 여러 폭 전하는데 그중 석지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제에 오른 고종이 황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중단된 근대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것이 광무개혁이다.

휴버트 보스의 고종황제 초상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고종의 초상에는 황제로서의 늠름한 품위가 잘 나타나는데

한편으로는 외세에 시달리던 우수 어린 분위기도 느껴진다.

석조전 2층에서의 조망

 

덕수궁 미술관

1922년 이후 덕수궁이 방치되면서 석조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에 따라 일본인들의 소장품 중 영친왕이 선별한 것들을 전시하는 덕수궁 미술관이 되었다.

이날 덕수궁 외벽 공사로 인하여 미술관은 휴관이라 관람할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