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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선정릉 (2023.1.10)

클리오56 2023. 1. 11. 06:29

Track_2023-01-10_봉은사선정릉.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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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도 봉은사를 다녀왔었고 선정릉 역시 서너 차례 경험을 갖고있지만
오늘은 대학 동기들과의 트레킹 일환으로 이 코스를 택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2권, 서울편4에 봉은사와 선정릉이 소개되어
미리 숙독하여 하나씩 확인하고 느껴보려했지만 사실 걷기 동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으니...

이번에는 그저 보이는대로 간단히 다녀왔다는 사실만 남기는 수준에서 그쳐야했고
역시 차분하게 느껴보는 단계는 홀로이거나 많아도 두세명일 때라야 가능.

유홍준 교수는 담장 끝에 주차장 쪽에서 들어오는 작고 예쁜 쪽문인
'하심문'이 있다고 했는데 이 문이 아닌지하는 생각이 든다.
바깥쪽에서 바라보아야 현판을 볼 수 있는건지... 다음 기회에 확인해보련다.

만세루의 대도량 현판
위창 오세창 선생의 글씨로 오른쪽에 전서체로 선종종찰이라는 협서를 붙였다.
이 네글자는 봉은사의 위상과 자랑을 한마디로 말해준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

명상길

곶감과 군고구마로 간식을 즐기는 친구들

선정릉을 방문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곳의 능 3기가 모두 임진왜란 때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어 당시 남아있는 재와 뼈를 수습해 새로 짠 재궁에 넣어 묻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굴이 가능했던 것은 선릉과 정릉이 석실분이었기 때문이고
만약에 세조의 유지대로 석실 대신 단단한 강회로 이루어진 회격분이었다면
명종의 강릉과 문정왕후의 태릉처럼 도굴되지 않았을 거라는 유홍준 교수의 아쉬운 코멘트가 있다.

성종대왕 선릉

선릉의 무인석과 문인석
국조오례의에는 문신석과 무신석의 크기가 약 2.5미터로 규정되었지만
선릉에 세워진 것은 높이 3미터를 약간 넘기는 장대한 규모로 조성되었다.

선릉의 문신석과 무신석은 조선왕릉의 석인상 중 명작으로 꼽힌다며
정면 정관의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라
왕릉에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돈다고 유 교수는 평가를 이어간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무신석이 한 단 아래 위치해 있어 조선왕조의 문신 우대를 그대로 보여주며
그 뒤에는 석마가 조신한 자세로 서있고
사진 우측의 석등은 장명등으로 능침을 밝히는 역할이다.

정현왕후 능
성종의 능에서 보이던 병풍석이 없어 어딘지 짜임새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유 교수의 평가.
성종에게는 세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며
19세의 젊은 나이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나 파주 삼릉에 있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두번째 왕비가 폐비 윤씨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고
세 번째 왕비가 정현왕후이며 중종의 어머니이며 여기 선릉에 잠들고 있다.

중종대왕 정릉
단릉이라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데, 실제로 중종은 세 명의 왕비중 누구와도 함께 묻히지 못했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인데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중종반정 때 반대편에 있어 죽임을 당했던 터라
단경왕후는 역적의 딸이라고 하여 왕비된지 7일만에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폐비는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면서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그 바위가 인왕산 치마바위이다.
두번째 왕비는 장경왕후는 아들(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죽었고 고양 서삼릉의 희릉이다.
세번째 왕비가 문정왕후인데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하며 왕권을 강력히 행사하였다.

중종은 사후 두번째 왕비의 희릉 곁에 마련된 정릉에 안치되었지만
문정왕후가 지금의 정릉으로 천장시켰는데 아마도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길 원하는 속셈이 있었고
그녀가 후원했던 봉은사 보우스님은 봉은사를 옮겨 사세를 넓히려는 심산이었다는게 유 교수의 평가이다.

정릉에 가까이 접근하여 보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빨리 가자며 재촉하는지라
그저 홍살문 근처에서 원경으로 사진 하나 남기는 것으로 만족~

선정릉역 인근의 논현수구레에서 뜨끈한 수구레 해장국을 들었다.
소주도 한잔 곁들이고 영흥도 아주머니 사장님의 입담을 즐겨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