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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2022.11.22)

클리오56 2022. 11. 22. 22:36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편 남한강편(417쪽)에

외국에서 온 손님이 하루 동안 우리나라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어디로 모셔가면 좋을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A코스: 서산 마애불, 보원사터, 개심사, 추사고택

B코스: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효종대왕 영릉, 고달사터, 신륵사

 

두 코스 모두 우리나라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

그리고 편안하고 정겨운 한옥의 멋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고 평한다.

 

A코스는 봄이 아름답고, 非山非野의 부드러운 내포평야 들판과 함께

백제시대 대표적인 불상 조각의 아름다움이 곁들여져 있으며

 

B코스는 가을날의 서정이 일품이며, 엄숙하면서도 품위 있는 조선 왕릉과

남한강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오늘 친구와 함께 한 곳은 고달사지, 

경강선 전철을 타고 종점인 여주에 당도하여 관광안내소에서 아주 친절한 안내를 받았고

운행이 아주 드물지만 곧 도착할 988-2번 버스를 타고 주암1리에서 하차,

도보로 2.5km 정도 후 고달사지에 당도하였다.

도중에 용가네손만두 식당이 있어 들어갔지만 워낙 대기 손님이 많아 돌아올 때 다시 들러기로.

 

 고달사지로 향하는 중 좌측에 신고달사라는 태고종 절이 있는데

당연히 새로울 신(新)일줄 알았는데 믿을 신(信)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고달산 뒤쪽의 산은 혜묵산, 고달사는 그 중턱이 아닌 기슭 넓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나무 울타리로 빙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평지 중앙에는 불상좌대와 탑비가 보인다. 

그리고 입구에는 불에 탄 듯한 고목 한 그루와 벤치가 있어 답사에 앞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불경소리가 들렸는데 고달사지 뒤쪽에 조계종의 작은 새 사찰 고달사가 자리한다.

 

폐사지 영역에서 맨 처음 대한 유물은 물을 담는 거대한 석조,

화강암 내부를 아주 깊이 파내고 네모난 틀을 유지해야 하는데

제작이 단순하지만 힘든 공이 많이 들어가야겠다. 

 

다음으로는 거대한 석조대좌인데 금당에 위치하여 불상이 그 위에 놓여졌을게고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0세기 후반으로 추정, 천년의 세월이 묻어있다니 살짝 손을 대어보았다.

 

그 뒤로 원종대사탑비가 우뚝 솟아있는데 귀부와 이수는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고

비는 최근 새롭게 설치하여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비신은 글자 수가 무려 3,230자, 북한 해주 화강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종대사가 958년 돌아가신 후  975년에 조성되었고

1915년 비가 뒤로 넘어져 여덟 조각으로 깨진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으며

2016년 여주박물관으로 돌아왔으니 박물관 측의 언급대로 100년만의 귀향이다.

 

여주박물관에 전시된 깨어진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니

어찌 그렇게 뚜렸한지 천년을 넘은 유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박물관에서는 비신의 원문과 해석을 소책자로 만들어 읽어볼 기회를 가졌다.

 

원종대사탑비의 비신과 담긴 글도 중요하지만 우리 눈에는 귀부와 이수 또한 인상적이었으니

거북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는 용의 자태로 둥그런 눈, 생생한 발톱과 어깨를 뒤덮은 갑주,

이 모두가 우람한 장군의 형상이니 흡사 장비를 연상시킨다.

 

원종대사탑비 뒤로 몇 발자국 옮기면 부서진 돌거북이 있는데

이수와 비석은 아예 없고 거북의 머리 조차 사라져 애잔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데

거북 등에 비석받침 파인 자리만 일부 남아있고 꼬리도 살짝 보인다.

유홍준 교수는 원감대사 현욱의 탑비가 여기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측의 산길을 따라오르면 승탑이 두개 있는데 우선 원종대사 승탑(보물 제7호)이 보인다.

유홍준 교수의 코멘트를 옮겨본다. 보는 순간 그 장대한 스케일에 압도된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승탑이 다 있는가 큰 감동을 받게된다.

나말여초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승탑 형식으로 받침대, 기단부, 몸돌, 지붕돌,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동을 뒤로하고 낙엽 수북한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승탑이 등장하는데

어느 분을 기리는 승탑인지 확인되지 않아 고달사지 승탑으로 이름지어졌지만 무려 국보(제4호)이다.

 

유홍준 교수의 말씀: 이 승탑은 한눈에 원종대사 승탑과 비슷한 것에 놀라고

또 전체적인 균형미와 조각의 생동감이 조금 전에 보았던 원종대사 승탑보다

한 차원 높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며 자꾸 비교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균향과 조화, 그리고 디테일이 훨씬 우수하다는 인상을 받고

이것이 국보와 보물의 차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크기도 높이 3.4미터로 우리나라 승탑중 가장 크다.

 

유교수는 이 승탑이 고달사를 처음 세운 원감대사 현욱의 승탑으로 생각하고 있어

전 원감대사 승탑으로 부르는게 어떨까 하였다. 

 

그리고 이곳 고달사터 승탑 앞에서 옮겨갔다는 석등이

보물 제282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고 한다.

 

친구는 이런 폐사지는 처음이라며 역시 감동을 받았다하여 소개한 나도 뿌듯~

도보 2Km 정도 걸어서 용가네손만두 식당에 다시 들렀고

이번에는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 조용한 상태에서 우리는 곱창전골에 막걸리로 늦은 점심을 들었다.

 

마침 30여분 기다리니 버스가 당도하였고 신륵사 앞에서 하차하여 여주 박물관을 견학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100년만의 귀향이란 주제의 원종대사탑비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앞에 류주현 문학비가 세워져있어 검색하니

여주 출신으로 파천무, 대한제국, 총독부 등 역사소설의 장르를 개척하였다고 평한다.

 

참고: 아래 사진들에서 국보와 보물 등 유적의 설명을 붙였는데

모두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주역 앞의 여주시 관광안내소

고달사지 안내판

고달사지 입구의 고목

고달사지 석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석조(石槽)란 돌의 외부를 장방형으로 다듬고,

내부를 완만한 곡선으로 파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거대한 돌그릇이다.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승려들이 거주했던 사찰에서는 필수적인 생활용품이었다.

고달사지 석조는 보원사지 석조와 비슷한 시기인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 고달사’는 고려 시대에 왕실의 후원 속에 번창했던 대표적인 선종사원이다.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절터의 금당지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단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금당지의 고달사지 석조대좌와 함께 고달사지 부도,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 탑비의 귀부와 이수 등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조 유물이 남아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역시 여주 고달사지의 대표적인 석조유물이다.

고달사지 석조는 화강암 통돌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내부를 완만한 곡선으로 파내어 만든 것으로

중앙부 바닥 한쪽에 마련된 원형 구멍은 물을 뺄 때 사용했던 배수공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 석조는 표면을 매끄럽게 잘 다듬었으며, 각 모서리의 모를 죽이면서 세로줄의 홈을 내서 장식했는데,

석조에 장식을 가한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왕실의 후원을 받던 고달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고달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8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대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종대사탑비 (보물 제6호)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지금은 여주박물관에 보존),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서진 돌거북

유홍준 교수는 원감대사 현욱의 탑비가 여기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생각

원종대사 승탑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높이 4.3m의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의 각 면에는 내부에 꽃 형태의 무늬가 있는 안상(眼象)이 2구씩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16엽의 연판이 돌려졌다.

중대는 이 승탑에서 가장 조각수법이 뛰어난 부재로써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용과 같은 얼굴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가운데 거북을 중심으로 총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쥐고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구름무늬를 가득 채웠다.

상대석에는 큼지막한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탑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몸돌에는 문비와 자물쇠, 사천왕상(四天王像), 광창(光窓)이 표현되어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 비천과 구름을 표현하였다.

지붕돌 윗면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귀꽃이 달려 있는데, 일부는 파손된 상태이다.

상륜부에는 둥글넓적한 복발 위로 보개(寶蓋)보주(寶珠)가 올려져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승탑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 구조를 잘 따르면서도

조각의 세부수법에서는 고려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주박물관

원종대사탑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