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장영희교수 영미문학

어느 囚人과 에밀리 디킨슨

클리오56 2008. 7. 3. 11:14
  • [책마을] 문학의 숲…/ 어느 囚人과 에밀리 디킨슨
    • “사랑은--생명 이전이고/ 죽음--이후이며--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시(詩)라기보다는 마치 경구와 같이 짧은 이 시는 영미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의

      작품이다. 미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청송 감옥에 있는 어느 수인(囚人)이 내게 보낸 편지에 인용하고 있었다.

      24세 때 들어와 지금 12년째 복역하고 있다는 그는 검열 도장이 찍힌

      편지에서 영한사전을 보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디선가 이 시를 보고

      가슴에 와닿아 노트마다 적어놓았다면서, “이런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제 마음에 큰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사랑이야말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며 ‘지구의 해석자’라고 정의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매우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것이었다. 1830년에

      매서추세츠 주의 앰허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5월, 55년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까지, 표면적으로 그녀의 삶은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이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골수까지 파고드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칩거생활과

      흰색 옷이다. 선교사의 신부감을 양성하는 여자전문대에 다니다가 1년도

      못되어 돌아온 이후 그녀는 일생동안 자기 집 문지방을 한 번도 넘지

      않았고, 30대 후반부터 죽는 날까지 철저하게 흰색 옷만을 고수했다.

      이러한 고립생활과 흰옷에 대해 전기 작가들은 그녀가 겪은 사랑의

      경험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그토록 절실한 사랑의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연대미상의 시에서 그녀는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나는 두 번 죽었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두 번 겪은 것으로 쓰고 있는데, 어쩌면 그녀의 흰

      옷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수의와 사랑하는 이와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는 순결한 웨딩 드레스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현실에서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지만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에게 시의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주는 비상구를 찾게 했다.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입니다./ 무엇으로도 그 아픔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고통은

      오랫동안 남습니다. / 가치 있는 고통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법이니까요.”

      디킨슨은 19세기 당시에는 전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녀

      생전에는 그녀를 어렵게 설득하여서, 또는 그녀 몰래 서너 편의 시가

      발표되었을 뿐, 그녀가 시를 쓴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서랍장에는 약 2000여 편의 시가

      차곡차곡 챙겨져 있었다.

      그녀의 시는 전통적인 시형에서 벗어나 규칙적인 운율을 무시하고,

      문법이나 논리적 어순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을 뿐더러, 자신을

      비밀스럽게 감추려는 의지와 폭로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함께 엇갈려

      때로는 마치 풀 수 없는 암호문과 같은 난해한 시가 된다.

      그러나 ‘만약에...’는 그녀의 ‘쉬운’ 시들 중 하나이다. “내가

      만약에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에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걸핏하면 오는 컬럼 마감일이 부담스럽고

      없는 재주로 원고지 10매 메꾸는 게 여간 힘들지 않지만 나도 감히

      에밀리 디킨슨을 흉내내어 말한다면, “만약에 이 글이 감옥에서도

      노트마다 “사랑은...천지창조의 시작이고...”를 적어놓은 그

      누군가에게 정말 마음의 양식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내 어줍잖은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 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