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장영희교수 영미문학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클리오56 2008. 7. 3. 11:13
  • [책마을] 문학의 숲…/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 요즘 들어 부쩍 더 말, 말, 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디를 보나

      함부로 생각 없이 내뱉는 말, 누구에겐가 아부하려고 하는 말, 천박한

      말, 자극적인 말, 폭력적인 말, 남을 모함하고 해코지 하려는 말이

      난무한다. 말이란 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데, 생각하면 한심하고

      슬픈 일이다. 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 성경에서도 ‘여러분은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말을

      하십시오’(에페소 4:17)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로운 말, 기쁨을 주는

      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은커녕 들어서 불쾌한 말, 의심이 가는 말,

      입에 발린 말, 말도 안 되는 말만 자꾸 들린다.

      하지만 남 탓할 것 하나 없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무심히 내가 한

      말이 남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쓸데없는 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놓고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 간혹 내 삶이 다 하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내 생애 마지막 말이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 본다. 고르고 골라 좋은 말, 예쁜 말, 유익한 말,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영미문학작품 속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오지(Heart of Darkness)에 나오는 커르츠가 한

      말이다. 원주민을 계몽하고 문명을 전한다는 위대한 명분을 갖고

      ‘암흑의 오지’ 콩고로 간 커르츠는 결국 상아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

      타락하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탐욕과 위선에 대해 “끔찍하다,

      끔찍해” (horror, horror)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작중인물의 유언은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에 나오는 말이다.

      생기발랄한 22세의 미국 처녀 이자벨 아처는 부모가 죽고 난 후, 런던에

      사는 친척 타쳇씨 집에서 살게 된다. 타쳇의 아들 랠프는 병약한 몸으로

      이미 죽음을 예기하고 있지만, 이자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

      이지적이면서도 상상력에 넘치는 그녀가 좀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그는 자기가 상속받을 유산의 절반을 준다. 이자벨은 미국의

      실업가인 굳우드와 영국 귀족 워버튼경의 구혼을 거절하고 이탈리아에서

      자유롭게 예술적 삶을 즐기는 듯 보이는 오즈몬드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자벨은 곧 자신의 결혼이 중매인 멀부인과 오즈몬드가 돈을

      노리고 꾸민 책략임을 알게 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랠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영국으로 온 그녀는 다시 오즈몬드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랠프의 권유도, 다시 구혼하는 굳우드도 뿌리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의붓딸 팬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이자벨은 결국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고 사랑을 줄 줄 아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살 수 없는 삶을 대행시키기 위해 유산을 물려준

      것이 화근이 되어 불행해진 이자벨에 대해 랠프는 통한을 느낀다.

      죽어가는 랠프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그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다고 흐느끼는 이자벨에게 그는 말한다.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남지. 그걸 모르고 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고, 그리고 너는 아직 젊어….”

      너무나 많은 것이 있는 삶, 사랑이 있는 삶을 우리는 매일 쓸데없는 말,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 진실이 아닌 말로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통은 결국 사라지지만,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내가 사라져버린

      후에도 이 지상에 남을 수 있는 사랑을 만들기 위해 오늘 무슨 말, 무슨

      일을 할까.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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