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환자들 더 밝고 적극적
삶의 향기 느껴 戀詩를 좋아해…
입력 : 2005.05.27 18:08 / 수정 : 2005.05.28 01:07
-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 영미시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손톱 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는 장영희 교수.김창종기자
- “1년 동안 함께 살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 같아 아쉽고, 앞으로 그리워할 것 같아요. 하지만 1년이 됐으니까 지금이 헤어지기 가장 좋은 때 같아요.” 지난해 7월 1일부터 조선일보에 ‘영미시산책’을 연재해 온 장영희(張英嬉·53) 서강대 교수(영문학). 신문에 실린 그의 시선(詩選)과 해설을 오려두고 모은다는 독자들, 읽기 모임을 꾸려간다는 주부들, 연애편지에 끼워보낸다는 연인들, 자녀들에게 오려서 보낸다는 부모들… 그의 독자들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총망라다.
풍선과 꽃으로 마치 잔칫집 같은 연구실에서, 그는 마지막 원고에서 막 손을 털었다며 서운하면서도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데다 지난해 9월 암 선고를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희망과 생명의 노래로 독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풍선과 꽃들은 뭔가요?
“제자들이랑 독자들이 보내준 것들입니다. 힘내라고 써주신 글들 덕분에 행복한 1년이었습니다.”
―영시(英詩)란 건 영문학도들이나 읽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일반 독자들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나 병원의 환자들이 특히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어요. 신문을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 용기를 얻었다, 그런 말씀들이죠. 제가 아프다 보니 무의식 중에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많이 골랐던 것 같아요.”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詩)가 위로를 주는군요.
“시는 마음으로 읽는 시와 머리로 읽는 시로 나눌 수 있어요. 영문학과에서 많이 가르치는 난해한 시들은 분석과 이성으로 암호를 풀이하듯 읽어야 하는 시들이에요. 한국시에서 이상(李箱)의 작품과 같은 것이 머리로 읽는 시예요. 그러나 윤동주(尹東柱)의 시처럼 그냥 읽어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도 있어요. 너무 머리를 많이 쓰는 세상에서, 가끔은 마음을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시는 뛰어가는 사람에게 잠깐 숨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도 시의 맛을 느끼게 하면서, 부수적으로 영어 공부까지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획’(웃음)이었어요.”
―며칠 전 ‘영미시산책’에 존 던의 시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Death, Be not Proud)를 소개하면서 딸의 죽음을 겪은 어느 독자의 사연을 전하셨더군요.
“자궁암 말기를 앓는 따님을 둔 한 독자가 제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항암 치료 때문에 말도 못 하고 필담만 할 수 있던 그 따님이 ‘신은 재기(再起)를 위해 쓰러뜨린다’는 제 글을 읽고 큰 용기를 얻었다고 하더군요.(장 교수는 지난해 9월 암선고를 받은 뒤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 그렇게 말했다.) 저는 따님께 직접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나 편지를 보내기 전에 따님이 돌아가셨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했는데, 그 독자가 다시 메일을 보내셨어요. 따님과의 약속 때문에 호스피스 훈련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옹골차게 마음을 잡고 투병하라’며 격려했어요.”
―시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는 “짧은 한잠을 깨어나면,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며 죽음을 넘어선 인간의 의지를 표현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정말 죽음의 불안이 없습니까?
“암 환자에게 악몽 같은 공포는 암세포가 전이(轉移)되는 거예요. 항암 치료까지 어렵게 다 끝내고 나서 또 전이된 것을 발견하는 환자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나 저는 아직 죽음을 실감하지 않아요. 저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지,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매주 수요일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서 2~3시간 기다리다 보면 암환자가 이렇게 많구나 하고 놀라게 돼요. 다닥다닥 붙은 병상에서 기다리면서 환자들과 사귀어 보니, 신체적으로는 앙상하지만, 다 눈빛이 살아있어요.
―선생님도 전보다 살도 더 찌고, 더 예뻐지셨습니다(웃음).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아프지 않을 때 우리는 생명의 의지와 투지를 다 잊고 기계적으로 살지만, 환자들은 필생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더 적극적이고, 더 밝아요. 병 치료에 대한 정보 하나라도 다른 환자에게 더 알려주고, 서로 친하게 지내요. 오늘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 환자들에게는 삶의 향기가 있어요. ‘그래도 드셔야 돼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많이 듣는데,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저도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엄청 많이 먹어대고 있어요. 백혈구 지수가 나오도록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하니까 많이 먹었어요. 7㎏이나 쪘는 걸요. (수줍게 웃으면서) 저 완전히 찐빵이에요.”
―항암 치료를 받을 때 어떤 생각으로 버텼습니까?
“단단히 맘먹고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백혈구 지수가 낮게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그럼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치 입시에 실패한 학생처럼 풀이 죽어요. 그러면 주위에서 왜 많이 먹지 않았냐고 질타하죠. 하루에 고기 한 근씩 먹으라고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먹지 못해요. 백혈구 주사를 맞고 나면 금방 피곤을 느껴요. 제가 기동력은 없지만 옛날에는 굉장히 활동적이었는데, 요즘에는 맥을 못 춥니다. 피곤이란 것이 쉬라는 몸의 신호인데, 과거에 저는 둔감했던 모양이에요.”
―시를 고를 때 어떤 마음으로 골랐습니까. 독자들이 특별히 더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까?
“시는 문학의 한 형태이고, 문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연시(戀詩)를 좋아하고 지금 저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사랑이라고 봐요. 요즘 누구나 힘든 시대니까 손톱만큼이라도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어요.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라는 것이 문학의 궁극적 목적이잖아요.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한 마리 새’, 사라 티즈데일의 ‘연금술’,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를 꿈꾸며’에 특히 많은 분들이 편지를 보내주었어요.”
―연재를 끝내고 나면 무얼 하실 건가요. 언젠가 영어로 소설을 쓰는 일에 도전하겠다고 했는데요.
“그건 정년퇴임한 뒤에 할 일이에요. 아직 정년까지는 많이 남았어요(웃음). 제가 좋아하는 ‘어린 왕자’처럼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분의 그림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책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2과목만 강의했지만, 다음 학기에는 3과목을 가르쳐야 해요. 1년에 5과목은 필수적으로 강의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하기에는 벅찰 것 같아요.”
- 장영희/교수
- 장영희 교수는
장영희 교수는 생후 1년 만에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은 1급 장애인이다. 영문학자였던 부친(장왕록 박사)의 뒤를 이어 서강대 영문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땄다. 장 교수는 펄벅 등 미국 현대작가의 소설을 유려한 우리말로 옮기고,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영역하기도 했다. 에세이집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을 통해 일상의 작은 행복을 담은 순수문학의 감동을 일깨워주면서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장 교수는 지난해 척추암 판정을 받아 올 12월까지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투병 중에도 강의와 집필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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