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작년도 소설책 베스트 4에 선정되었다. 다행히 분량이 작은 긴 단편소설이라 읽기 쉬웠다. 영화로는 '말없는 소녀'로 개봉되었다고 한다.
요약: 1980년대 아일랜드 어떤 시골마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아홉 살짜리 소녀가 주인공이다. 이 소녀는 집안이 가난하고 형제 자매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엄마가 다시 아이를 임신을 하게되니까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방학 기간 중에 다른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서 아버지가 딸을 멀리 있는 친척집에 데려다준다. 그 전까지는 그 엄마 아빠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 본인이 마음 둘 곳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그래서 굉장히 외롭게 자라고 점점 말이 없어졌던 이 소녀가 그렇게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먼 친척집에 가서 태어나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그런 굉장히 내밀하고도 서로의 정이 제대로 오가는 그런 관계를 친척 아주머니와 함께 겪게 됩니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내용 및 소감
소설의 영어 원제는 foster. 통상의 뜻은 조성하다, 발전시키다이다. The club’s aim is to foster better relations within the community.
하지만 여기서는 (수양부모로서) 아이를 맡아 기르다, 위탁 양육하다의 뜻이다. They have fostered over 60 children during the past ten years.
우리말로는 소설의 제목을 '맡겨진 소녀'라 하였으니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2010년 소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2023년 번역 출간되었으니 상장히 늦었는데 부커상 후보가 되니 부랴부랴 번역 출간한 듯하다. 주인공의 이름과 나이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축약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12쪽: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에 아빠가 침을 뱉고, 대화는 다시 소의 가격, 유럽경제 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17쪽: 나는 아빠가 왜 건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까 생각한다.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 아빠가 나를 여기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19쪽: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들, 버터 만들기, 저녁 식사, 씻기고 깨워서 성당이나 학교에 갈 채비시키기,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 밭을 갈고 일굴 일꾼 부르기, 돈 아껴 쓰기, 알람 맞추기.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른다.
25쪽: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30쪽: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0쪽: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 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평소에는 틀림없이 양동이를 두 개 가져왔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36쪽: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40쪽: 나는 곧장 출발해서 진입로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 우편함을 찾아 편지를 꺼내서 달려 돌아온다. 킨셀라 아저씨가 손목시계를 보고 있다.
67쪽: 킨셀라 아저씨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고마워요, 밀드러드. 얘를 맡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말한다. “참 조용하네요, 얘는.”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 아저씨가 말한다.
69쪽: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73쪽: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98쪽: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교보문고 책소개
문학의 나라 아일랜드, 그곳에서 현재 최고의 주목과 찬사를 받는 작가가 있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 같은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트레버와 견주어지며 국제 문학계의 떠오르는 별로 꼽히는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이야기다. 섬세하고 감동적인 필체로 유명한 키건은 24년의 활동 기간 동안 펴낸 단 4권의 책으로 전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천재 소설가라는 칭호와 함께 평단의 찬사를 받아왔으며 특히 지금, 세계의 독자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 마침내 처음 번역 출간되는 키건의 책 『맡겨진 소녀』는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애정 없는 부모로부터 낯선 친척 집에 맡겨진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말없는 소녀」 또한 세계 관객들의 열렬한 호평을 받으며 올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추천사
- 소설 『맡겨진 소녀』에서 모든 존재들은 온당한 시선을 받는다. “가지가 땅에 끌리는” 수양버들이나 더 이상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개, 우편함까지 매일 달음질쳐 나가는 ‘나’, 상실 뒤의 나날들을 미움과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침묵으로 보듬으며 살아가는 킨셀라 부부에까지. 깊고 서정적이며 감동적인 이해가 모든 장면에 램프처럼 환하게 가닿는다.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이 소설을 펼쳤을 때 나는 여러 일에 지쳐 아주 나쁜 상태였으나 단번에 읽어 내려간 뒤에는 이 새로운 전율을 표현할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읽는 모두를 “매끈하고 깨끗하고 연약한” 시절로 데려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섬세한 사랑을 “손안”에 쥐여주는 이 소설의 가슴 벅찬 여름날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몹시 정밀하다. 그는 한 소녀의 눈으로 아일랜드의 목가적 풍경 속 어느 특별한 여름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히 묘사한다. 고요하지만 뜨겁게 끓어오르는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작가는 유년의 신비와 고독 그리고 기쁨과 슬픔 등 인간이 생에 걸쳐 거듭 풀어야 할 원형적 감정들을 깊이 있게 다루며,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정수를 펼친다.
- 감히 체호프에 비견할 만하다.
- 키건은 지독하게 경제적인 작가다. 이 소설의 모든 말 없는 여백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 모든 문장이 문체와 감정을 어떻게 완벽하게 배치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 작가는 언제 머뭇거려야 할지 잘 알고, 아무 수확 없이 그렇게 하는 법이 절대 없으며,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는 절대 겁을 먹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한다.
- 당신이 올해 읽을 그 어떤 두꺼운 책만큼이나 큰 감동을 줄 것이다.
-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움과 점증적인 힘의 결정체.
- 딱 당신의 짐작만큼 슬프지만 당신이 예상한 것보다 놀랄 만큼 생생하다.
- 아름다운 속도로 세심하게 만들어낸 이야기. 키건은 정말로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이야기를 만들었다.
- 미세하게 벼린 아름다움과 누적된 힘을 가진 책. 암시와 정밀함, 효과적인 디테일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책 속으로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들, 버터 만들기, 저녁 식사, 씻기고 깨워서 성당이나 학교에 갈 채비시키기,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 밭을 갈고 일굴 일꾼 부르기, 돈 아껴 쓰기, 알람 맞추기. 하지만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여윳돈도 있을지 모른다. _19쪽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_25쪽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_30쪽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따라 밭을 다시 지나올 때 내가 아주머니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없으면 아주머니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평소에는 틀림없이 양동이를 두 개 가져왔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_30~31쪽
킨셀라 아저씨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고마워요, 밀드러드. 얘를 맡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말한다. “참 조용하네요, 얘는.”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 아저씨가 말한다.
_67쪽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_69~70쪽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_ 73쪽
출판사 서평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
클레어 키건의 국내 초역 작품
《타임스》 선정 ‘21세기 출간된 최고의 소설 50권’ 중 하나이자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년 전부터 주목한 작가,
드디어 한국 독자들을 만나다!
자국 아일랜드에서는 오래전부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2021년부터 미국 독자 대중 사이에 서서히 화제가 되더니, 이제는 독자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려는 듯 애타게 찾는 소설가가 있다.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로 불리는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이야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4년에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은 『생일 이야기(Birthday Stories)』의 개정판에 그의 작품을 실으며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나간다”라는 평과 함께 그를 향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고 평한 바 있는데, 이는 24년의 활동 기간 동안 그가 단 4권의 책만을 펴냈기 때문이다. 키건은 이 몇 안 되는 작품으로 오웰상,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 윌리엄 트레버상, 에지 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로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그의 이름을 평단과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맡겨진 소녀』는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다.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한 이 책은 2010년 2월 《뉴요커》에 축약본으로 먼저 발표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중편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 출판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자국의 국민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콤 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어 아일랜드 영화로서는 최초로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 등을 수상했고, 올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느 여름 친척 집에 맡겨진 소녀,
그곳에서 처음으로 겪는 다정한 돌봄과 사랑
이 책은 아일랜드 시골에 사는 어린 소녀가 먼 친척 부부의 집에서 보내는 어느 여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책에는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지만 소설 속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아일랜드 단식 투쟁”이라는 말로 1980년대 초반이 이야기의 배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가 많은 가난한 집에서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지내던 소녀는, 또 다른 아기를 임신한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기 전까지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 그리고 그 집에 도착해 마주하는 것들은 소녀가 그동안 겪어온 일상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_69~70쪽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는 무심한 아빠와는 달리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춰 걸어주는 어른을 만나, 소녀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들을 마주한다. 살뜰한 관심과 배려로 소녀를 돌보는 아주머니와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다정히 마음을 전하는 아저씨가 있는 집.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족의 모습을 통해 소녀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사랑과 다정함이 더욱 따뜻하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이러한 줄거리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라 할 수는 없는데, 작가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것이 오히려 바로 이 지점이다. 키건은 이 오래되고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들려줌으로써 그 어떤 이야기와도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능력을 발휘한다.
또한 아이를 화자로 하는 대개의 소설들이 ‘아이의 조숙함’을 편의적으로 채용하는 것과 달리, 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키건의 소설이 지닌 특징 중 하나다. ‘어린이를 화자로 한 소설 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찬사에 걸맞게, 키건은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등장인물을 둘러싼 디테일을 발견해냈는데 그중 하나가 ‘어느 날 밤 킨셀라 부부가 자신들의 침대에 누워 이 가엾은 소녀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충분히 감동적인 순간을 떠올리고도 그 장면을 본문에서 제외한 이유에 대해 그는 “화자인 어린 소녀는 그 일을 모른다. 소녀가 알 수 없는 것은 나 또한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소녀는 어른들의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규칙에 익숙하지도 않고, 킨셀라 부부가 지닌 과거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 대신 순수하면서도 불안으로 가득찬 눈으로 어른들의 삶을 바라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욱 깨끗한 희망과 생생한 슬픔을 품게 한다. 즉, 등장인물이 원했던 바를 독자가 함께 기대하도록 만들고, 그들이 바람을 이루지 못했을 때 엄청난 비통을 독자에게 전달하게 된다.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 클레어 키건의
완벽하고 아름답게 증류된 이야기
“키건은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다.”(《타임즈》)
이 말은 한 저널리스트가 키건의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출간되었을 때, 10년도 넘게 키건의 신작을 기다려왔으나 그 분량이 114쪽밖에 되지 않는 데에 전혀 실망할 필요가 없다며 던진 찬사이다. 키건의 소설 중 한 가지 특징은 짧은 분량이라 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내 많은 작업은 나의 노동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데 쓰인다”고 고백했듯이, 키건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본질만이 남을 때까지 주변에 있는 것을 덜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양이 제한되어 있기에, 그만큼 자신이 이 좁은 공간에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를 쥐어짜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맡겨진 소녀』 역시 짧은 분량 속에 디테일과 장치들이 대단히 빡빡한 밀도로 들어차 있는 덕분에,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고 읽을수록 보람을 안기는 짧고도 긴 작품이다.
키건은 자신이 그리는 세계의 특별함을 독자들에게 조심히 꺼내 보여주면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듣고 우리의 삶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한다.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면서 정확한 단어 선택으로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클레어 키건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키건의 깊고 섬세한 공감 능력, 절묘하게 짜여 있는 디테일, 황홀하고 반짝이는 문체와 묘사, 그리고 간결하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만나 마치 한 폭의 미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맡겨진 소녀』는 소설이 전개되는 부분을 셈하면 1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증류한 듯이 맑고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이 이야기는 당신이 올해 읽게 될 그 어떤 두꺼운 책보다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지혜 > 독서, 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2024.6.13) (0) | 2024.06.13 |
---|---|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0) | 2024.06.07 |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2024.5.27) (1) | 2024.05.27 |
역사 속 성 문화, 史色 (0) | 2024.05.16 |
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0) | 2024.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