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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함양 여행 3일차 (2023.2.23)

클리오56 2023. 2. 24. 23:13

산청·함양 여행 일정 (2023.2.21~23)

1일차: 서울 -> 산청 -> 강변식당(메기매운탕) -> 대원사계곡 트레킹 -> 유평산방(대추차, 다슬기탕)
-> 산청한방가족호텔(교촌치킨 배달, 생맥)


2일차: 산청읍 생선구이집(생선구이 백반) -> 남원 광한루 -> 함양 상림 -> 함양 수동 메기매운탕(메기구이찜)
-> 산청 동의보감촌 족욕 -> 산청한방테마파크 트레킹 -> 가야 구형왕릉 -> 타짜오리하우스(오리불고기) -> 산청한방가족호텔


3일차: 산청한방가족호텔(부페 조식) -> 농월정(카페 보름달) -> 선비길 트레킹(농월정~동호정) -> 거연정 
-> 안의 원조갈비집(한우갈비찜) -> 안의 구경(법인사, 안의초교, 파란지붕 카페) -> 서울

 

숙소에서 간단한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손님은 우리 일행뿐,

어제는 예약한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니 어떻게 운영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즌되면 손님이 몰려오겠지하는 기대뿐, 하긴 코로나 이전에는 잘되었다는데.

 

숙소인 산청한방호텔의 현관 앞 모과나무

 

유홍준 교수는 답사를 다니면서 정말로 탁족을 즐겼다며, 옛사람의 풍류를 흉내내기 위함이 아니라

냇가에 앉아 양말을 벗고 냇물에 발을 담근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하였다.

그 한가로움과 마음편함 때문에 자신의 답사행은 곧 탁족행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건대, 그 탁족의 행복을 누린 가장 환상적인 아름다운 계곡은

함양 화림동의 농월정과 산청 지리산의 대원사 계곡이라고 하였다.

 

강 동기의 제매가 이날도 한차례 더 수고를 해주는데 바로 그 농월정으로 이동하였다.

함양 화림동 선비길 트레킹 출발에 앞서 카페 보름달에서 커피를 한잔 나누었다. 

여기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을 우연히 보게되었고

산청·함양 그리고 그중에서도 농월정이 첫 편,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음을 새삼 깨우쳤다.  

 

선비길 안내

유홍준 교수의 화림동 계곡과 정자들에 대한 유려한 이야기는 이어진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흙모래를 다 쓸어내고 골격 큰 화강암 바위를 넘으면서 곳곳에 못을 이루고

어쩌다 너럭바위를 만나면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 빚어놓았다. 

 그 계곡이 절정을 이루는 곳을 화림동이라 하여 예부터 팔담팔정의 승경을 자랑해왔다.

 

농월정 앞을 흐르는 계류는 남강인데 그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선비길이 이어지고

경모정, 동호정을 거쳐 거연정으로 이어진다. 계류의 원류는 서상면으로 남덕유산에서 발원한다.  

농월정에서 거연정까지의 선비길은 남강 남쪽변을 따라 이어지는데

정작 농월정은 남강 북쪽변에 위치하기에 우측의 다리를 거쳐 접근하였다.   

 

농월정

농월정은 '달빛이 비치는 바위 못'이라는 뜻의 월연암(月淵岩) 위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의 농월정(弄月亭)이라고 했으니 그 낭만적 분위기를 알 만도 하다.

정자는 이층누각의 가운데 작은 방을 두고 있어 그 용도가 자못 궁금한데

혹자는 바람막이, 혹은 음식 준비 등등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

지족당이 산보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새긴 각자는

매우 힘차면서도 정연하게 깊이 새겨져있어 그것이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되었다.

농월정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란다.

 

농월정과 주변 너럭바위를 구경한 후 다시 빙둘러 다리를 건너 원래 출발했던 주차장에서

선비길을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정석 플레이는 안되고 담을 너머 바로 선비길에 올라섰다.

차라리 그러는게 훨씬 자연스러우니 작은 문 하나 만들어두는게 맞지않나 생각.

 

황암사

남강을 따라 상류로 진행하니 황암사가 나오는데 처음에는 사찰인줄 알았건만

 정유재란 때 순절한 사람들을 봉안하기 위해 설립된 사당이었다.

 

황석산은 100대 명산의 하나이고 예전 겨울에 등반했던 기억이 있다. 

이곳 황암사도 등반기점의 하나이다.

 

람천정

 

경모정

 

호성마을

사과밭

 

동호정

동호 장만리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세웠다고 한다. 

 

거연정

동호정에서 강 동기의 손위 처남이자 우리들의 대학선배를 만나 거연정으로 차량 이동하였다.

화림동에 모두 여덟 정자가 있다지만 그 중 4대 정자는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그리고 거연정인데

군자정은 머지 않은 곳이지만 가보자고 우기기도 뭐하여 다음 기회로 넘길 수 밖에 없다.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소요하던 곳을 후손 전재학이 추모의 염으로 세웠다.

 

농월정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거연정까지  4개의 정자를 둘러보는데 5km, 2 시간여 소요되었다. 

 

점심 식사로 안의 원조갈비집에서 한우 갈비찜으로 거하게 들었다.

선배님은 여기서 교장으로 재직 후 은퇴 하셨으니 좁은 안의면에서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일게다. 

 

안의면은 면 단위로는 제법 큰 마을로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현감이 다스리던 현이었다. 

하지만 안의초교는 올해 입학생이 2명이라며 교장이셨던 선배님의 걱정이 많으시다.

 

 

법인사

작은 절로 보이지만 극락보전에 보물을 두 점이나 보유하고 있다.

현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57년에 영규(靈圭)와 조능(祖能) 등이 조성한 불상이다. 현재 영규가 조성한 다른 불상은 조성한 예가 확인되지 않지만, 조능은 1640년 법영(法靈)이 수화승을 맡아 제작한 전북 옥구 불명사 목조불좌상의 조성에 참여하고, 1655년에는 수화승을 맡아 전북 전주 봉서사 목조관음보살좌상(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6호)을 조성하였다.

이 상은 타원형의 원만한 상호에 신체는 허리가 길고, 어깨는 넓고 완만한 어깨선을 갖추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는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 전체적인 비례가 알맞고 안정감이 있다. 수인은 하품중생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하여 중지와 엄지를 맞대었다. 나발을 표현된 머리에는 육계가 구분이 불분명하게 낮고, 육계의 경계에는 반달형의 중간계주를, 정수리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상호는 타원형으로 이마가 좁은 편이며, 이목구비는 반개한 눈이 길고 위로 치켜 올라가 눈매가 날카로우며, 초승달형의 눈썹과 오똑한 코, 가늘고 길게 표현된 입술은 그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미간에는 백호를 돌출되게 표현하고, 목에는 삼도의 흔적을 얕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이중으로 걸쳐 입은 방식이다. 오른쪽 어깨 앞쪽으로 살짝 걸쳐 내린 대의는 끝단이 약간의 곡선을 이룬다.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은 군의는 발목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양측으로 서너 개의 주름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 불상은 군의 주름과 오른쪽 다리 소매 자락의 표현이 매우 특징적인데, 다리 중앙에서 수평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주름을 이루는 것이나 무릎 좌우의 주름이 각기 다른 점 그리고 왼쪽 무릎 뒤에 놓인 좁은 소맷자락이 무릎에 밀착되어 흘러내려 승각기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표현하였지만 소매자락이 몸에 밀착되지 않게 표현한 점 등은 이 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법인사 아미타여래좌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발원문과 복장 유물이 확인되었으나 발원문은 현재 불상에 다시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발원문을 제외한 묘법연화경과 보협인다라니, 복장 마개 등의 복장 유물은 현재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위탁 보관중이다. 법인사 아미타여래좌상은 이 시기 불상 중에서 조각적 완성도도 비교적 높다.
감로왕도는 화기에 의하면 원래 안국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함양군 금대암에서 제작되었다.

화면의 구성은 상부에 칠여래, 인로왕보살, 관음·지장보살을, 중심부에는 재단(齋壇), 아귀, 법회를 주관하는 작법승, 참여하는 후손들이, 그리고 하단에는 산불, 호랑이, 홍수 등 사람들이 죽는 다양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등, 18세기의 일반적인 감로왕도 도상의 범주에 속하고 있다.

얼굴을 비롯한 몸체의 윤곽선과 의복 등의 묘선이 매우 섬세하며,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엷은 부채법과 잘 어울려 화면전체에서 부드러운 화취가 느껴진다. 더구나 칠여래 아래의 소극적인 나무 표현, 표정이 없는 듯한 아귀의 묘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에 걸맞은 강한 인상은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먹으로 표현한 영혼의 형상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이 그림은 화면 아래의 화기에 의하면 1726년에 채인(彩仁), (일민)日敏, 태현(太玄) 등 세 화사에 의하여 제작되었으며, 이들은 18세기 전반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겸(義謙)의 화업에도 참여하였다. 수화승인 채인은 운흥사 감로왕도(173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제작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인지 양자는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현존 감로왕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이르고, 당시의 화풍을 잘 전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안의초교

유홍준 교수는 지리산 동남쪽 답사길에 굳이 이 안의 마을을 들러야 했던 이유가 안의초교 때문인데,

옛날 안의현의 동헌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 함양 출신으로 무오사화 때 죽음을 당한 거유 정여창이

이곳에 부임하여 그때 선화루를 크게 고쳐짓고 광풍루라고 했었고,

 

속화 장르를 확립했던 선비화가 조영석이 여기에 근무하던 중 영조가 어서 올라와서 세조의 초상화를 새로 그리는데

붓을 잡으라고 명했건만 그것은 환쟁이가 할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연암 박지원이 1792년부터 5년간 그의 첫 외직으로

이곳 안의현감을 지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소설 양반집, 호질, 허생전도 유명하지만 시와 산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안의 초교 교정 화단 한쪽에 연암사적비가 세워져있다고 하니

나는 바로 곁에 서 있었서면서도 알지를 못했다. 

안의 면사무소

안의 거리

 

강 동기의 고향 친구가 운영중인 파란지붕 카페에서 커피 한잔들며 귀경 버스를 기다렸다. 

친구가 왔다며 케익을 서비스로 대접해주시네~~

3시 버스를 타러 터미널 왔더니 강 동기는 우연히 여동생을 만나기까지 한다.  

2박3일의 짧은 여행, 하지만 행복과 기대 가득 안고 귀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