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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1):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2023.2.25/27)

클리오56 2023. 3. 2. 05:34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 하기는 계속 이어지고

이번에는 12권의 '망우리 별곡',

이를 위해 두 차례 답사했는데 처음은 와이프와 함께, 두 번째는 홀로 다녀왔다.

 

앞서의 답사에서도 누누이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재차 언급한다.

 

다만 한 가지 유 교수에게 섭섭한 것은 보수파에 대한 홀대는 여전하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는데

일종의 네거티브 블랙리스트를 심중에 담아두고 교묘히 비껴간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13도 창의군탑'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07년 11월 망우리 일대에서 13도창의군의 선발대 300여 명이 서울로 진격하여,

망우리에서 혈전을 치른 것을 기념하고 항일의병의 구국혼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이만하면 유 교수가 구라를 풀만한데도 전혀 언급 없이 넘어간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이 탑을 세운 것이 동아일보가 3.1 운동 유적 보존운동 차원에서 주도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유 교수가 그런 좀스러움을 제거하고 좀 더 폭넓은 면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망우리 별곡
망우리 별곡 1: 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리 공동묘지 조성 과정 / 반 고흐 무덤과 위창 오세창 무덤 / 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원으로 /
중랑망우공간 / 이태원 공동묘지 무연분묘와 유관순 / 시인 박인환의 묘 / 이중섭의 무덤 / 국민강령탑과 중랑전망대 /
설산 장덕수와 난석 박은혜의 무덤 / 죽산 조봉암의 무덤 / 아차산 보루

망우리 별곡 2: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길
장례 풍습 / 만해 한용운의 무덤 / 호암 문일평의 무덤 / 위창 오세창의 무덤 / 소파 방정환의 무덤 / 방정환과 어린이날 /
국회부의장 이영준 묘 /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 / 민예의 선구자, 아사카와 형제 / 도산 안창호와 유상규의 무덤 /
화가 이인성과 조각가 권진규의 무덤 / 송촌 지석영의 무덤 / 지석영 선생의 집념 / 시인 김상용의 묘 / 삼학병의 묘 /
노고산 천골 취장비 / 다시 중랑망우공간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

통상 망우리 공동묘지하는 말은 이미 역사 저 너머로 사라졌고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이며

이를 관리하는 중랑망우공간이라는 현대식 건물도 세워져 산뜻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인사들에 대한 묘소의 위치를 제공하여 접근이 용이하도록 도와주며

웹사이트에서 주요 인사들의 묘소 위치도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유홍준 교수의 영향력이 아주 지대해서인지 이 책에서 열거한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 망우리 역사 (출처: 망우역사문화공원 manguripark.or.kr)
*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경탄한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 1912~1932 일제강점기,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등장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공동묘지 조성을 위해 경성부는 1920년대 전후로 서울의 동서남북(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에 부립공동묘지를 설치했다.
 
* 1933 망우리공동묘지의 시작
서울 동서남북에 있던 공동묘지의 터가 부족해지자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경성부는 망우리 일대의 임야 75만 평을 매입하고 그 중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하도록 하였다. 
 
* 1950~1953 한국전쟁의 상처까지 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가매장된 시신이 시내에 묻혀 있었다. 서울시는 시내 곳곳에 묻혀있는 시신을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 이장을 하였다. 망우리공동묘지는 그렇게 전쟁으로 생긴 상처까지 보듬었다.
 
* ~1973 격동의 근현대사 속 안식처로 자리매김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40년 동안 묘지 47,700여기로 가득찼고, 추석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성묘객으로 가득했다. 1973년 더 이상 묘지로 쓸 공간이 없어지면서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 ~1990 꽉 차 있던 수만 개의 묘지
1977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이 변경. 1990년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 위인의 무덤 주변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
 
* ~2021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상의 묘를 찾던 묘지에서 시민들이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힐링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며 근현대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 ~2022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로운 출발
전시·교육·홍보의 중추역할을 할 중랑망우공간이 2022. 4.1일 개관,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롭게 발돋움.

** 참고로 서울 인구는 1905년 을사늑약 때 20만 명 미만, 1930년대 약 40만 명으로 급증, 1940년대 약 100만 명.

 

- 2월 25일 와이프와 함께 간단한 트레킹 차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다녀왔고, 이때 유관순 열사 묘소를 먼저 답사 후 우측 방향으로 순환했는데 박인환 묘소가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개별 묘소의 답사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순환로를 따라 걷는데 우선하였다. 이후 2.27일 홀로 재차 방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언급된 인사를 답사하였고, 주노선 바로 인근의 인사도 가능한 방문 하였다. 소요시간은 5시간, 거리는 총 11.3km (양원역 출발 기준)로 적지 않은 운동도 되었다.  

 

13도창의군탑

 

중랑망우공간

2022년 개관한 중랑망우공간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방문자 센터로 기획전시실과 카페, 미디어 홀 등을 갖추고 있다.

경희대 건축학과 정재헌 교수의 모노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것으로 설계 공모 당선작이었다. 

 

현재 '한글과 망우 이야기' 기획전시중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한 국어학자 세분이 이곳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석영 선생은 종두법을 도입하여 천연두를 종식시키는데도 공헌하였다.

 

 

권진규 청동 자소상

중랑망우공간 우측에 조각가 권진규의 자소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인물광장

비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에 묻힌 역사인물들을 소개한 인물광장이 나온다. 

나무 데크를 널찍이 설치하고 역사인물 50여 명의 사진과 약력을 2단으로 길게 펼쳐놓았다. 

 

유관순 열사와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로 3.1절이라며 그날 공휴일로 잘 즐기기만 할 뿐

3.1절의 상징이다시피한 이 분에 대한 예우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묘비도 없이 지내다가,

무연고라 하여 다른 28,000 여기와 함께 화장되어 사라졌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에서 모래알 보다 작은 흔적의 끈을 이어간다.

 

시인 박인환 묘

명동백작으로 이름을 떨친 박인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동료문인들은 술과 담배를 좋아했던 그를 위해 조니 워커 한 병과 카멜 담배 한 갑을 부장품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 '세월이 가면'은 1956년 어느 날 명동의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 자리에서 박인환이 이 시를 쓰고, 극작가 이진섭이 작곡하고, 나애심이 즉석에서 악보를 보고 노래 불렀다고 한다. 

 

서동일 선생

순환로에 표시석이 있어 사진을 남겼다. 다물의 뜻이 뭔지 적혀있다. 묘소는 찾아뵙지 못했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동일(徐東日)[1893~1966]의 호는 춘파(春波)이다.

1923년 1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남형우(南亨祐), 배천택(裵千澤)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당에 가입하여 재정 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경상북도 대구 일대에서 군자금 1,300여 원을 모집하여 2월경 베이징에 전달하였다.

1925년 1월에 재차 남형우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또 1925년 4월에는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 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서동일은 1926년 3월 31일에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중섭 묘

이중섭의 무덤에는 아담한 묘비가 있고 구상 시인이 장례 때 심은 소나무가 굳세게 자라

이 불우했던 천재 화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묘비는 조각가 차근호가 세웠는데 두 아이가 꼭 부둥켜안고 있는 이중섭의 은지화가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그리움의 화가였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그리움의 감정이 절절히 녹아 있다.

 

 

박인환 묘에서 바로 순환로로 올라오지 않고 용마약수터를 지나 평행으로 진행하며 흙길을 밟은 후 올라섰다. 

 

국민강녕탑

이 탑은 망우산 지킴이로 수십 년 간 산속의 쓰레기를 주워온 최고학 할아버지가 막돌을 모아 수미탑 형태로 쌓은 것이다.

 

최학송 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언급이 없는 분이지만, 마침 묘소가 순환로 바로 지척이라 답사했더니 

최하층민의 생활을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든 분이다.

출처를 월간조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종배라는 분이 저술한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 刊)이 원출처이다.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하려 검색해 보니 보유 도서가 아니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위원인 정종배씨는

1937년부터 1973년까지 등재된 모든 묘적부를 열람했다.

묘지기록이 없거나 사라진 인사들이 많아 유족과 후손을 탐문하고 세월에 잊힌 망우리 골골을 누볐다.

그렇게 20여 년간 땀을 흘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덧붙여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을 펴냈다.
 
  벽돌 두께인 705쪽에 걸쳐 독립운동가 안창호·오세창, 정치인 장덕수·조봉암·이기붕, 의사 지석영·오긍선,

시인 한용운·김동명·김영랑·박인환·김상용, 작가 김말봉·최학송·계용묵·김이석, 아동문학가 방정환·강소천, 희곡작가 함세덕·이광래, 영화인 나운규, 작곡가 채동선·함이영, 화가 이인성·이중섭,

조각가 차근호·권진규 등 근현대사 130여 인사를 열전(列傳) 형식으로 정리했다.

 

 (출처: 월간조선 12월호) 최학송은 1901년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어려서 집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고 《청춘》 《학지광》 등의 문학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10세 때 간도로 간 아버지를 찾으려 1918년 두만강을 건넜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曺雲·1898~?)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녀’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했다.

두 아들 ‘백’과 ‘택’을 낳았다. 아내가 얼마나 예쁘고 좋았으면

함평, 영광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景)’이라 일컫는 남도여행기를 남겼다.  

한때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직접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표현, ‘빈궁(貧窮)문학’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대표작 〈탈출기〉 〈홍염〉 〈그믐달〉 〈기아와 살육〉은 남북한, 중국 조선족자치주, 러시아 등지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의 묘역은 세월에 잊히다 정종배씨와 동국대 곽근 교수가 발견했다.

최학송의 식솔이 모두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최학송묘 관리인이 정씨다.

 

계용묵 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길 아래쪽에 계용묵의 묘소가 있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는데

우리에게는 '백치 아다다'가 기억나니 아래로 내려가 묘소를 탐방하였다. 

 

중랑전망대

여기에 올라서면 면목동과 망우동 일대의 아파트숲 너머로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삼각산, 보현봉까지

백두대간(유교수는 백두대간이라 했지만 정확하게는 한북정맥이다)의 북한산 줄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영민 묘터

순환로에서 이영민 묘터는 150m,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왕복을 고려해야 하고 앞으로도 이런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고 생각하면

묘도 아니고 묘터뿐이라는데 굳이 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고교야구가 한창이던 시절이 생각나 다녀왔다. 

 

차중락 묘 

차중락 묘는 순환길에서 무려 300m, 오늘 가장 길었던 코스이다.

그런 탓으로 현장 답사가 누락되지는 결코 아니겠지만 '낙엽 따라가 버린 사랑'의 가수로

오빠부대의 효시라는 말로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표현되고 있을 뿐 증명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다녀왔다를 과시하고파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을 뿐임을 알아주세요~~

 

추모비에는 시인 조병화의 시 '낙엽의 뜻'이 형 차중경의 글로 새겨져 있다.

차중락 기념사업회의 멤버들 이름이 보이는데 최희준, 정훈희 등의 이름이 보인다.

 

순환로: 봄이 오면 꽃이 만발하여 또 다른 분위기를 보여줄 듯하다.

 

설산 장덕수와 난석 박은혜 묘

설산과 난석의 묘역은 망우리 묘지 중 예외적으로 아주 넓고 묘비와 망주석, 장명등은 물론 문인석까지 갖췄다.

장덕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중 안타깝게 암살당했고,

박은혜는 경기여고 교장으로 헌신하며 평생을 교육자로 살았다.

 

장덕수의 암살범 박광옥, 배희범은 형사로 위장하여 접근, 총으로 암살하였는데,

이 범인들이 속한 대한 학생 총연맹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암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중동 이슬람국처럼 

당파가 다르다고 죽고 죽이는 행동은 아무런 고민 없이 횡행했음을 알 수 있다. 

 

사이토 오토사쿠 묘

일본인 묘가 있어 궁금하기도 했고 순환로에서 가까워 답사하였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장으로 산림 정책에 관여하였고, 일본식 묘는 봉분 없이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안치한다. 

비석의 이름자에 누군가 훼손시킨 흔적이 남아있다. 졸장부 같은 행동이다. 

 

조봉암 묘

복권 이후 자연석과 회양목으로 돌 축대를 반듯하게 쌓고 장명등과 망주석을 세워

이 비운의 정치인을 기리는 품격 있는 무덤으로 정비되었다. 

조봉암 사형 이후 그를 언급하는 것은 세상이 민주화되기 전까지 금기였다.

그의 묘비는 앞면의 이름 석자 이외에 아무런 글이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