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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2023.2.15/2.17)

클리오56 2023. 2. 24. 23:33

 

이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따라하기는 10권의 서울 한양도성이고

이를 위해 김도형의 '순성의 즐거움'이란 한양도성 걷기 관련 서적 또한 참고로 읽어보았으며

오랜만에 한양도성을 두차례(2023.2.15/17)에 나누어 답사하였다.

 

앞서의 답사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옮겨왔기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권 제1부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의 건설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긴 여정
「한양도성도」와 「경조도」 / 서울의 랜드마크 / 이방인의 한양 예찬 / 무학대사 전설 /
신도읍을 위한 자리 물색 / 한양 신도읍의 건설 / 한양도성의 건설 / 한양도성 완성

한양도성의 변천 한양도성 순성길이 다시 열렸다
‘서울성곽’에서 ‘서울 한양도성’으로 / 도성과 산성 / 한양도성 순성길 /
도성의 철거와 복원 / 북악산 개방 이야기 / 숙정문

- 서울은 세계 굴지의 고도 중 하나다. 길게는 2천여 년 전에 시작된 한성백제 500년, 짧게는 조선왕조 500여년과

근현대 100여년 간의 수도로서 역사의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다. 600여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이자 고도다. 

* 서울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종묘, 사직단, 성균관 문묘 등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들이

여전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산으로 감싸인 서울의 모습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을 산이 감싸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쳐진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찾기 힘들다. 

 

한양도성도

내사산의 산줄기를 타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고 도로망은 실핏줄 처럼 퍼져있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 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러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 있다. 

 

경조도

경조란 서울 지역이라는 뜻으로 수도권의 자연 지형을 나타낸 지도다.

산세와 강줄기를 명확히 표현한 우리 고지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 이성계 초상

한양을 새 도읍지로 지목한 결정적 인물은 태조 이성계였다.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으로 현재 완전하게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다. 

 

- 이성계가 고려의 별궁인 수창궁에서 조선왕조 건국을 선포했다. 1392년 7월17일이며 제헌절의 유래이다.

* 고려 남경: 최종현 교수는 고려의 별궁이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청운동쯤에 있었으며 남경의 관아는 지금의 교동 운현궁 자리에 있었고 시가지는 청계천변을 따라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

* 무학대사의 전설이 워낙 강하게 퍼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한양 정도 이전의 서울 지역은 그저 산중의 분지였을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고려시대에 한양은 한때 남경으로 불리며 평양의 서경, 경주의 동경과 병칭되었고 별궁도 있던 고을이었다. 왕십리, 무학재, 북한산 비봉의 무학대사비 등 무학대사와 연관된 한양의 지명은 모두 훗날 무학대사가 전설적인 스님이 되면서 민간에서 생산된 허구이다. 

* 태조는 애당초 새 도읍지로 한양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미 별궁까지 있었기 때문에 천도를 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듯 곧바로 별궁을 수리하게 했다. 그러다 1393년 정월 풍수지리에 정통한 권중화가 계룡산 아래에 새도읍을 제시하여 현지답사를 하였고 3월부터 신도읍 공사에 들어갔다. 

* 계룡산 신도의 공사를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 9개월 넘어 한창 터 닦기를 진행중에 하륜이 이의 부당함을 진언했고, 이 사항을 확인 후 계룡산 신도읍을 포기했다.

* 하륜은 신도읍 후보지로 서울 무악산(안산) 남쪽, 오늘날의 신촌과 연희동 일대를 제시했지만 태조와 대신들의 현지 답사후 불가하였다. 태조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중 남경을 지나가는데 지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동행한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무학대사 왈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이리하여 한양으로 신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 

* 1395년9월 경복궁과 종묘 완성

 

한양도성 선바위 부근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인왕산 선바위를 한양도성 안으로 할지, 바깥으로 할지 두고 격렬히 대립했다.

큰 눈이 내린 다음날 선바위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녹지 않고 쌓여 있어,

선바위를 한양도성 바깥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 한양도성의 공사

* 1396년1~2월 49일간 1차공사, 11만8천명 동원 (당시 한양인구 10만 미만)

* 8~9월, 49일동안 7만9,400명 동원 동대문 구역을 완공, 4대문 및 4소문의 석축을 준공

* 숭례문은 1398년 준공

* 세종 4년(1422년) 한양도성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공사. 토성을 없애고 성곽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여 오늘날 남아있는 한양도성의 기본 골격.  1~2월 38일만에 완공, 32만명 동원, 사망자 872명

* 각자성석: 한양도성의 공사 실명제

각자성석
자, 이제 300개가 넘는 각자성석을 찾아 한양도성 탐방을 떠나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남산과 응봉산이 만나는 계곡부에 우뚝 서 있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옛 타워호텔)은 출발점으로 삼기에 좋은 장소다. 용산구 한남동에서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정상에 조금 못 미치는 곳, 작은 주차장 경사지에서 쉽게 성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 간다면 ‘경인삼월금시(庚寅三月禁始)’라고 적힌 성돌을 찾아보자. 경인년(숙종 36년·1710년) 3월 3군부 중 하나인 금위영에서 공사를 맡았던 구간의 시점임을 알리는 글씨다.

같은 장소에 각자성석이 또 있다.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천자문’ 49번째 글자인 ‘검(劍)’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흔히 ‘천자문’ 하면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떠올린다. 천자문은 이렇게 네 글자로 구성된 구(句)가 250개로 구성된, 그래서 꼭 글자 1000자가 담긴 책이다. 앞서 소개한 ‘검’은 이 책의 검호거궐(劍號巨闕) 부분에 쓰인 글자다.

이 각자성석이 있는 자리에서 길을 건너면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곽을 따라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가에 또 글씨가 새겨진 성돌이 있다. 이번 글씨는 ‘칭자종야자(稱字終夜字)’. ‘칭’ 자 구간이 끝나고 ‘야’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칭’과 ‘야’는 ‘천자문’의 주칭야광(珠稱夜光)에 나오는 한자들로 각각 54번째, 55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1. 동대문 북측각자. 흥인지문 북쪽 길 건너편에 있는 각자성석. 조선시대 관직명과 사람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2. 검자육백척. ‘천자문’의 49번째 글자인 ‘검(劍)’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3. 경인삼월금시. 1710년 3월 금위영에서 보수 공사를 맡았던 성벽 구간의 시점임을 알리는 글씨.

4. 칭자종야자. ‘칭(稱)’ 자 구간이 끝나고 ‘야(夜)’ 자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칭’과 ‘야’는 ‘천자문’에서 각각 54번째, 55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출처: 주간동아, 한양도성 성돌에 새겨진 조선 역사,
2015.5.11)

 

담졸 강희언의 인왕산도

'늦은 봄 도화동(지금의 남산 부근)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렸다'는 화제가 쓰여 있는데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인왕산의 음영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겸재 정선의 장안연우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목멱산을 바라보며 그윽한 서울 장안의 모습을 그린 명작이다.

동아일보 2002.4.11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은
한양(현재 서울)의 산과 강, 나무와 개울 등을 소재로 한 산수화를 여러 점 남겼다.
겸재의 그림에 나타난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겸재 그림 1인자’로 평가되는 최완수(崔完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의 글을 통해 살펴본다.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의 창시자다.
진경산수화라는 것은 우리 국토의 자연환경을 소재로 하여 그 아름다움을 사생해 낸 그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은 늘 그렇게 있어 왔는데 어째서 겸재에 의해 그런 그림이 시작되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겸재가 살던 시기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에 의해
우리 고유 이념으로 심화 발전된 조선 성리학이 사회를 주도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여진족이 청(淸)을 건국하여 중국 대륙을 여진화시켰다는 현실이
우리에게 이런 자신감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계 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자존의식이 팽배하여 우리 자신을 긍정적 시각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물론 풍속과 산천까지도 우리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자긍심이 생겨
우리 문화를 그렇게 이끌어가려 노력하였다.
그런 시기가 숙종(1674∼1720)부터 정조(1776∼1800)에 이르는 125년간이었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문학도 진경시문학이 발전하였고
그림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출현하여 일세를 휩쓸게 되었으며
서예나 조각은 물론 음악까지도 모두 짙은 조선 고유색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진경시대라 부른다.


이 진경시대의 절정기인 영조 17년(1741년) 봄에 겸재가 당시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자부하던 서울을
그의 독특한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이 ‘장안연우’이다.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육상궁의 뒷산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으로 지금 청와대 서쪽 별관 서쪽의 궁정동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사적 149호인 이곳이 최근에는 일반에 공개된다고 한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겸재가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다.


비록 남대문로와 종로, 을지로 일대의 번화가가 운무에 가리워 있다 하나
궁정동, 효자동, 적선동, 통의동 일대에서 동쪽으로는 광화문과 종로 초입 부근까지,
서쪽으로는 청운동, 옥인동, 필운동 일대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경희궁 근처까지 표현하고 있어
당시 인구 18만명 남짓이 살던 한양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무성한 숲 속에 싸여 천연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나간 선인들의 도시경영 실태를 이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그 생활의 예지와 문화역량에 새삼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자연의 파괴와 무질서한 건축으로 천부의 미관을 되찾을 수 없이 망가뜨리고 있는 현대 문화의 오류는
이런 수준 높은 우리 전통문화의 역량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자각과 반성을 거치면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는 북방의 침입에 대한 대비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전도 맹약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한양도성조차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 그뒤로 근 70년이 지나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재위 30년(1704) 한양도성의 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해 6년만에 끝마쳤다. 재위 37년(1711) 4월에는 곧바로 북한산성의 축성을 시작해 불과 6개월 뒤인 10월에 완공했다.

* 북한산성이 완성되자 숙종은 이어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의 빈 공간을 잇는 성곽을 축조하고자 했다. 결국 재위 44년(1718) 한양도성의 인왕산 동북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제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는 총 4킬로미터의 성을 쌓았다. 이 성이 바로 지금 세검정 인근에 남아있는 탕춘대성이다.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임진왜란 후 수도 남쪽의 방위를 위해 축성했다.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남한산성의 모습이다.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수도 북쪽 방위를 위해 축성한 것으로 병자호란 후 숙종때 고려시대 중흥산성 자리에 쌓았다.

 

- 한양도성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자연공원으로 서울사람들이 사철 산책하고 등산하며 즐기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서울사람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고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음미했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고 했다. 풀어 쓰면 성곽 순례쯤 된다. 

 

순성놀이 구간안내도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 북악산 개방에 부쳐

- 황지우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끄바에도 없는 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제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가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질틀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비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아, 이제 가물면 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落款)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숙정문

한양도성 순성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북악산 정상이고 한양도성 개방의 상징은 숙정문이다.

숙정문은 삼청터널 입구, 삼청각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있다.

숙정문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 글씨이다. 북한산 보현봉과 형제봉, 칼바위 능선이 널리 펼쳐진다.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하여 통행금지되었다.

뒤쪽의 육중한 삼각산을 천연의 방어벽으로 삼았다.

가뭄때는 음의 기운인 숙정문을 열고 양의 기운인 남대문은 닫아두었다고 한다.

숙정문 일대는 팥배나무 군락이 있는데, 열매가 팥같고 꽃은 배꽃을 닮았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암문

북악산 성곽에는 성곽 밖으로 통하는 암문이 하나 있다.

이 숨겨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외부에서 보는 한양도성의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곡장

성벽이 말발굽처럼 굽어 돌아가게 쌓은 부분을 곡장이라고 하는데

꿩의 머리처럼 고개를 내밀었다고 해서 치성이라고도 한다.

북악산 촛대바위와 청운대 사이에는 길게 돌출한 치성이 있다. 

 

1.21 사태 소나무

1968년 김신조와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해 총격전을 벌인 흔적이 남은 소나무이다.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백악산(북악산) 정상 표시석

북악산 정상에 다다르면 보이는,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그 넓고 멀고 시원한 전망이 대단하다.

세계 어느 도시에도 없는 서울만의 자랑이다. 

 

성가퀴의 기본 구조

낮은 맞배지붕에 3개의 총구멍, 하나의 성가퀴를 1타, 1타에는 3개의 총구멍, 근총안 1개, 양옆으로 원총안 2개.

원총안은 수평 구멍,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향함. => 성곽에 멋을 더하는 의관

 

촛대바위

높이 약 13미터의 긴 바위인데 북악산 정상에서 보면 확실히 촛대처럼 생겼다.

촛대바위 위에 지석이 하나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쇠말뚝 박은 자리이다.

주변의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촛대바위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인다.

 

청운대

청운대라는 이름은 원래 없었는데 유홍준 교수가 정기용 건축가와 함께

북악산 개방에 앞서 현장답사하면서 즉흥적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에 서면 북한산 비봉 능선이 모두 보이고 일산방향을 비롯해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까지 조망되며, 홍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상명대 건물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심전 안중식의 백악춘효도

조선왕조의 마지막 화원인 심전 안중식이 1915년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백악산의 봄날 새벽'이다.

잃어버린 조국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래 자료 출처: 서울시 한양도성 사이트 서울 한양도성 (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