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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2):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2023.2.25/27)

클리오56 2023. 3. 2. 05:52

 

유홍준 교수는 점차 공동묘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전환된다면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그렇게 된다면 망우는 단순히 근심을 잊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고

논어에 나오는 樂而忘憂, 즉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는다는 의미로 한층 깊어질 수 있다고 했다. 

 

유홍준 교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망우리 별곡
망우리 별곡 1: 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으로
망우리 공동묘지 / 망우리 공동묘지 조성 과정 / 반 고흐 무덤과 위창 오세창 무덤 / 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원으로 /
중랑망우공간 / 이태원 공동묘지 무연분묘와 유관순 / 시인 박인환의 묘 / 이중섭의 무덤 / 국민강령탑과 중랑전망대 /
설산 장덕수와 난석 박은혜의 무덤 / 죽산 조봉암의 무덤 / 아차산 보루

망우리 별곡 2: 역사문화 인물들의 넋을 찾아가는 길
장례 풍습 / 만해 한용운의 무덤 / 호암 문일평의 무덤 / 위창 오세창의 무덤 / 소파 방정환의 무덤 / 방정환과 어린이날 /
국회부의장 이영준 묘 /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 / 민예의 선구자, 아사카와 형제 / 도산 안창호와 유상규의 무덤 /
화가 이인성과 조각가 권진규의 무덤 / 송촌 지석영의 무덤 / 지석영 선생의 집념 / 시인 김상용의 묘 / 삼학병의 묘 /
노고산 천골 취장비 / 다시 중랑망우공간에서

 

만해 한용운 묘

만해 한용운의 무덤은 망우리에서는 보기 드문 쌍분이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외치며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민족은 장래를 위해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슬하에 딸도 두었다. 

 

호젓한 순환산책로

 

송암 서병호

우선 표석의 한자가 특이하여 눈길이 갔는데 이 분의 묘는 답사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에서 소개된 글을 옮겼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은 초기 장로교의 신자. 호 송암(松喦). 황해도 장연 출생.

장로교 최초의 7명의 목사 중 한 사람인 서경조(徐景祚)의 차남으로 모태 크리스천이었다.

국권피탈 후 1914년 중국으로 망명, 난징 금릉대학을 나왔고,

1919년 김규식·여운형·장덕수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그 당수가 되었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자 가족들의 어려운 살림을 돕는 한편,

1927년부터는 남화학원(南華學院) 등을 세워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호암 문일평 묘

문일평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국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독립운동가였다.

호암의 무덤 한쪽에는 위당 정인보의 비문이 새겨진 자그마한 비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새로 세운 키 큰 대리석 비가 있는데 이규태의 비문이 있다. 

정비석의 비문이 새겨진 비석

호암 문일평의 논저에 일관하는 것은 '조선심'이었다.

호암은 조선의 마음을 살리기 위하여 화하만필을 비롯해 무수한 논문과 평론을 발표했다.

 

위창 오세창 묘

위창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명필의 사예가였다.

또한 한국서화사 연구에 전념해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역서화징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위창의 묘소에는 제자인 소전 손재형의 글씨로 세운 묘비와 상석만 있다고 유홍준 교수는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망주석도 보이니 제자들은 자꾸 뭔가 가져다 놓아 치장하고 싶은 것이리라, 스승의 뜻을 잘못 새겼는지.

무덤 뒤에는 늠름한 소나무가 문기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까이로는 호암 문일평의 묘가 있어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소파 방정환 묘

소파 방정환은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어린이의 벗'으로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분이다.

소파의 무덤은 고인돌 형식을 빌린 현대식 조형이어서 신선한 인상을 준다.

흙으로 덮인 통상의 봉분이 아니라 메줏덩이처럼 생긴 듬직한 화강암이 갈색 막돌 위에 얹혀 봉분과 묘비를 대신하고 있다.

앞면에는 위창 오세창이 쓴 동심여선(어린이 마음은 신선과 같다)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동무들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것이다.

 

지기 문명훤

연보비만 세워져 있고 현재 묘는 이장되어 없고 묘의 터만 있다.

이분도 흥사단에 가입된 분인데 도산 안창호 묘터를 중심으로 여러 흥사단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명훤(文明煊)[1892~1958]의 호는 지기(知期)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하였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맹산(孟山)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다시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서기를 지내다 같은 해 6월 24일 의원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1년 초에 귀국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 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7년 6월 회원 15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4년 여의 옥고를 치르면서 재판 끝에 1941년 7월 21일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일경의 심한 고문을 받았다.

 

유상규 묘

유상규는 외과의사로 일하며 국민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유상규가 치료하던 환자에게 감염되어 40세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다.

유상규는 임시정부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수행비서를 지내며 도산과 부자지간처럼 지냈다.

도산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상규 의사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도산 안창호 가묘

도산 안창호의 무덤이 서울 강남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된 뒤 그 자리에는 가묘와 비석을 남겨두었다.

이렇게 도산은 유상규 열사와의 깊은 인연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김봉성 묘터

도산 안창호의 가묘 주변으로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묘

조선의 흙으로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에는 조선시대 팔각 항아리를 닮은 아담한 팔각탑이 오롯이 서 있다.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도자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스스로 도자기를 연구했고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는 형의 영향으로 조선의 민예에 심취하여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 등을 연구했다.

두 형제는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경숙 묘

주변에 산재한 또 한 분의 여성계 인물이 있어 소개한다.

 

이영학 묘

흥사단원으로 소개된 이영학

 

이인성 묘

이인성은 당대에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까지 맡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중 경찰의 총에 맞아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망우카페에서 다음 작품을 상설 전시 중이라고 망우역사문화공원 웹사이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가을 어느 날>은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한 작품이다.

고갱, 세잔의 영향이 드러나면서도 친동생을 모델로 하고, 그가 직접 사용하였던 소품들을 그려

풍성한 색채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조선 향토색"을 담았다.

 

 

구리 한강 전망대에서의 조망, 하지만 미세먼지로 흐릿하다. 

역사전망대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에 오르면 한강과 나란히 뻗어 있어 금암산, 무갑산, 검단산, 예봉산,

백봉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동대교, 암사대교가 선명히 다가온다. 

 

지석영 묘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한 의사이기도 하지만

한글을 연구하고 독립협회에 가담한 개화기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한글학자로서 한자를 한글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펴냈고 종두법의 보급을 위해 우두신설을 저술했다.

선생의 묘소는 가족 묘역으로 넓은 터를 잡았고 역시 의사였던 아드님의 묘와 나란히 있어 어느 묘소보다 분위기가 밝다.

 

김상용 묘

유홍준 교수는 4시간이 넘는 답사에 몸은 지치고 발이 무거워 발길을 좀처럼 이쪽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삼학병 묘로 가는 입구로 순환로 바로 아래인데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듯하다. 

무덤엔 기념비가 없고 '월파김상용지묘'라는 작은 비석 하나만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다.

 

삼학병 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을 두고 찬탁과 반탁이 격렬히 대립하는 가운데

찬탁이었던 학병동맹 소속의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여 총격전이 벌어졌고 학생동맹원 3명이 피살되었다. 

이들 세명의 학생이 삼학병 무덤의 세 영혼이고, 비석뒷면에는 '1946년 1월 19일 조국을 위하여 죽다'라고 적혀있다.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1933년 망우리 공동묘지를 개설할 때 마포 서강대의 뒷산인 노고산의 공동묘지를 없애면서

무연고 무덤을 화장하여 합장한 뒤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글씨가 위창 오세창 선생의 단정한 예서체로 쓰여 있어 당시로는 정성스러운 예를 갖춘듯한 인상을 준다.

 

공동묘지의 산자락

울창한 숲 사이로 간간이 비탈을 헤집고 조성된 망우리 공동묘지의 무덤들이 옛 모습 그대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가장 양지바른 곳인 듯 푸르름이 싹트고 있다.

 

다시 중랑망우공간으로~

양원역 기준으로 5시간, 11.31km를 걸어 다니면서 답사하였으니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다.

많은 애국투사, 문학인, 예술인들을 만났고 그들의 처절한 삶과 죽음을 애도했다.

 

묘를 찾아가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지만

아래의 GPX를 다운로드하여 설치하면 궤적을 따라 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Track_2023-02-27_망우역사문화공원_.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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