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광장: 최인훈 (2022.4.22)

클리오56 2022. 4. 22. 06:22

 

내용 및 소감

1. 등장인물: 이명준, 무라지, 선장, 변영미, 변태식, 강윤애, 정 선생(고고학자, 여행가), 은혜

 

2. 문장

- 60쪽: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쟎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가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돼 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 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허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바늘 끝만 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을러댑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 62쪽: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깐요. 좋은 아버지, 프랑스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 74쪽: 경찰서를 나선다. 서의 뒷편에 잇닿은 동산에 올라간다. 나무 그늘 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초여름 한창 길어가는 햇살은 아직도 창창하다. 셔츠 앞자락이 온통 피투성이고 보면 거리를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몰골을 한 채로 돌아가라고 그를 내보낸 형사의 처사가, 얻어 맞았을 때보다도 더 분했다. 한사람 시민이 앞자리에 핏물을 들인 채 경찰서 문을 나서는 걸 그들은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모습대로 걸어가서 온 천하가 다 봐도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을 떤다.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어. 어둠에서 어둠으로 거적에 말린채 파묻혀 가는 자기 주검이 보인다. 나는 법률의 밖에 있는건가.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준다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길. 

 

- 87쪽: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135쪽: 그는 만년필을 손에 낀 채, 두 팔을 벌려서 책상 위에 둥글게 원을 만들어, 손끝을 맞잡아봤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3. 문학평론가 김현: 사랑의 재확인, 광장 개작에 대하여 (1976년)

-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 소설사적인 측면에서는 광장의 해

* 지적으로 충분히 세련된 문체, 이데올로기와 사랑에 대하여 언급

* 가면고, 구운몽, 회색인 등등 => 전후 최대의 작가로 인정

* 구운몽: 1960년 11월 '새벽'에 발표, 최인훈이 남다른 애정을 가져 벌써 다섯번째 고쳐씀 => 중요한 의미는 무엇? 서두와 말미의 갈매기가 갖는 의미의 변모, 구성상 이명준이 갖는 연대기적 애매모호성이 상당히 제거

 

- 광장 서두의 변모, 문체에 세심한 신경

* 신구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쉬고 있었다.

=> 전형적인 재래의 소설 문장. 

* 민음사판: 바다는 숨쉬고 있다.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 신구판에 비하면 리듬에 비교적 신경을 써서, 하나의 문장을 둘로 나누고 있다. 

* 전집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 콤마의 빈번한 사용(리듬을 맞추기 위하여)과 현재형 어미(사건 진행에 속도감 부여를 주목

* 한자어를 거의 비한자어로 고침

 

- 갈매기의 표상

* 전집판에서 딸이 등장하는데, 낙동강 전투 때 은혜가 임신의 사실을 말하며 자기는 딸을 낳을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에 가능. 은혜 = 어머니 = 바다로 연결되면서 이명준을 편안하게 바다로 보내기 위한 것. 

* 은혜는 바다이며, 그녀가 수태한 아이는 그가 뿌리내린 물고기이다. 그녀의 배에서는 짭사한 바닷물 맛을 맛볼 수 있다. 은혜를 바다와 동일시하고, 마침내는 그녀와 그녀의 딸을 큰 새와 꼬마 새로 표상했다는 것은, 작자의 의식이 그 이전의 판본에서와는 상당히 먼 거리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 이명준의 죽음을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로 묘사했는데, 그 이전의 판본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죽음으로 처리하였다. 작가 자신은 이데올로기 대신에 사랑을 택한 것이다. => 미국에서의 회의와 방황 끝에 광장만을 개작

 

 

4. 줄거리: 김세라 작가

 
* 명준은 두 가지 얼굴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는데, 태식 남매와 시시덕꺼릴 때 얼굴과 혼자만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의 얼굴이다. 그런 자기가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과 일상에는 겉돌았다. 그래서 그가 열심히 한건 삶을 참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좋은 책을 죽어라고 읽어대는 거다.
 
* 대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정 선생이라는 사람을 자주 찾아가는데, 명준이 광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상도 바로 정선생이었다. 명준은 광장에 대한 자기만의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애초 광장이라는 건 모두의 헌신과 인간적 관계가 잘 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건 자기의 방 밀실뿐이라는 거죠. 결국 현실은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는거고, 밀실은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다고 말한다. 밀실이 푸짐한 이유는 밀실에 개미처럼 뭔가를 물어다 열심히 가꾸기 때문이구요. 아무도 광장에 머물지 않으며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비는 죽은 곳이 되는데 이곳이 바로 남한이라고 한다.
 
* 정선생은 대부분 명준의 말을 대꾸없이 그러나 맞장구치지 않고 들어줍니다. 명준은 영미를 통해서 영미의 친구 윤애라는 여대생을 알게 되고 연애를 시작합니다. 처음이라 관계의 설정에 어색하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타인과의 깊은 관계를 알아갑니다. 그러나 윤애는 손에 잡히지 않은 허상처럼 가까운 듯 하면서도 내편이라는 확신이 오지 않아요. 
 
* 그리고 어느 날 북으로 간 아버지의 그늘이 크게 다가옵니다. 영미 아버지는 의혹으로 형사가 찾아왔더라는 말을 전해주면서 북으로 간 아버지가 요즘 대남 방송에 나온다는거다. 경찰에 불려 갈 때 불려가더라도 이름 좀 바꾸고 사는게 어떻겠냐는 말을 합니다. 명준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미 그의 삶에서 떨어져 있었거든요.
 
* 8.15 그해 북으로 간 아버지는 먼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북으로 간지 얼마 안되서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 생각은 가끔 나도 아버지는 살아서 지척에 있었건만 정히 보고 싶지도 생각나지도 않았다. 고아라 다름없는 신세였는데 살붙이가 그리운 생각이 난 적도 없다. 아마 까닭은 그의 나이였으리라.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쉬운 나이가 아니었다. 부모가 없는 탓으로 먹고 살기가 뭔지 일찍 눈이 떠지는 일도 없이 영미 부친의 살림 아래서 필요한 지급을 받고 있었다. 밥을 먹고 잠자리를 받고 학비를 타고 책을 사고하는데 쓰이는 돈이라는 물건을 한번도 자기라는 것의 살갗 안에 있는 것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는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다. 아버지가 만나지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다. 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내는 광장은 다른 동네에 자리잡은 광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엔 기관총이 걸려있다. 애당초 그리로 갈려지 말아야 했고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광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질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을까. 어리둥절한 어떤 풍문과 같다.
 
* 명준은 경찰서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명준이 철학을 전공하는 것도 마르크스와 연결시켜서 불온한 사상의 승계로 물아간다. 아버지 소식을 자주 듣는가를 위압적으로 물어 그들이 뭘 알고 싶어 하는지도 정확하지 않았어요. 명주는 모른다 못들었다는 대답을 반복하고요. 이걸 반항으로 받아들여 마구잡이로 매를 맞습니다. 맞으면서 명준은아버지를 처음으로 몸으로 느껴요. 실컷 두들겨 맞은 후에 경찰서를 나온다.
 
* 경찰서를 나선다. 서의 뒷편에 잇닿은 동산에 올라간다. 나무 그늘 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초여름 한창 길어가는 햇살은 아직도 창창하다. 셔츠 앞자락이 온통 피투성이고 보면 거리를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몰골을 한 채로 돌아가라고 그를 내보낸 형사의 처사가, 얻어 맞았을 때보다도 더 분했다. 한사람 시민이 앞자리에 핏물을 들인 채 경찰서 문을 나서는 걸 그들을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모습대로 걸어가서 온 천하가 다 봐도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을 떤다.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어. 어둠에서 어둠으로 거적에 말린채 파묻혀 가는 자기 주검이 보인다. 나는 법률의 밖에 있는건가.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준다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길. 
아무쪼록 이후에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2010년 가을 저자
 
 

5. 유튜브 일당백 시즌 1 EP 30 (2020.1.3)

- 최인훈 (1936~2018): 1960년, 25세 육군 장교시절에 광장 발표, 깊은 사상과 세계사적 인식과 철학
*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소련군 진주하면서 재산 몰수당하고 원산으로 이사, 미군 철수선에 탑승하여 목포로 이주
 
-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지금 남북 화해의 시대, 과연 70년 분단의 시대가 끝날 수 있는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살펴 가야지 미래를 우리가 여는 열쇠를 얻을 수 있으니까. 남과 북 어느 쪽에도 갈 수 없었던 주인공 이명준이라는 한 지식인을 통해서 살펴본다. 
 
- 한국현대문학에서 최인훈의 사유의 깊이를 넘어서는 작가는 없다. 회색인, 구락부, 라울전, 화두(소련이나 사회주의가 몰락한 걸 가지고 문명사적인 입장에서). 관념소설에서 우뚝. 70년대 초 중반까지 아주 활동을 하시다가 그 이후로 절필을 하셨어요, 미국에 4년간 다녀온 후 희곡으로 방향을 돌린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 문학 평론가 김현: 1960년은 정치사적으로는 학생의 해이지만, 문학적으로 광장의 해.
* 문학 평론가 김윤식: 광장을 다 읽었을 때 새벽 두부 장수의 요령 소리가 들렸다.
* 60년 10월에 새벽이라는 잡지에 발표. 2공화국이 없었더라면 발표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 광장의 의미: 서구 민주주의의 산물. 아테네에서 시작했는데, 그 아고라에서 연설도 하고 의견을 채택, 지도자 선출, 독재자 위험인물 추방 등 공동체의 의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광장, 그래서 민주주의의 상징. 도시국가에는 광장이 있고 시계탑이 있는데 항상 표준, 약속, 기준을 생각한다. 시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같은 공동체라는 느낌을 지닌다. 하지만 공동체로서만은 살 수 없다. 그래서 밀실이라는 프라이버시 공간도 필요하다. 광장은 공동체, 밀실은 개인. 남쪽은 광장이 없고, 북쪽은 있지만 앵무새로 같은 소리만 한다. 
 
- 이명준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아비판을 받음. 태백산맥에서의 사례: 어떤 폭격을 맞고 딸을 잃은 엄마가 있다, 그럼 보통 기사를 미제의 폭격으로 인해서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가슴을 태우는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썼는데 비판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니라는 것. 그냥 하나의 어떤 카메라로 찍은 밖에 안되고 사회주의의 당성을 감안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미제의 폭격으로 인해서 자기 자식을 잃었지만, 이 어머니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미제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다시 해방 혁명 투쟁에 나선다, 이런식으로 해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된다. 
 
- 명준은 만주의 조선인 꼴호즈를 방문한 후 기사 작성하였지만 혹독한 자아비판. 나도 보람있게 삶을 살고 싶었다, 근데 남쪽에는 광장이 없다. 북쪽에 오니까 공기가 항상 무겁다. 인민이 어디있냐? 프랑스 인민처럼 자기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힘을 가지고 해야 되는데 인민이 하는게 아무 것도 없다. 앵무새만 있다. 남조선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자기 밀실에서 이익만 가지려하고, 북조선은 결국 뭐냐, 당이 주인공이라 당만 생각을 하고 판단한다. 이런 건 말이 안된다. 어떻게 왜 진리를 당이 결정하냐, 개인의 생각은 사라지고 어디있냐, 한마디 말해서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름 개들이고, 인민들은 양들이다. 이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있는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다, 하하하~~ 완전히 불경스럽게 비웃는거다. 아버지는 이제 아무 말 안하고 그날 밤 몰래 들어와 자고 있는 명준의 이불을 덮어주고, 부정을 그렇게 표시 했다. 결국 명준은 갈데가 없다. 남쪽은 돈과 섹스만 있고, 북쪽은 기계처럼 손발만되라, 지식인은 갈 곳이 없다. 
 
- 그러면서 나중에 북쪽과 남쪽 사회를 비교한다. 기독교와 스탈린이 같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에덴 시대를 상징하는데, 공산주의는 원시공산사회에서는 착취가 없었고, 사유재산이 없었다. 근데 이제 에덴동산이 타락하듯이, 원시공산사회에 사유재산이 발생하면서 타락하게 된다. 인류에게 원죄가 남게되고, 또한 계급이란 원죄가 있다. 구약시대에 유태 민족이 수난을 당하듯, 마찬가지로 노예 봉건 자본주의 시대에 인민은 수난을 당한다. 그런데 누가 나타나느냐, 칼 마르크스가 나타나서 예언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는 사회주의의 낫과 망치이다. 북한은 낫과 망치 사이에 붓이 있다. 낫은 농민, 망치는 노동자, 붓은 지식인. 고해성사는 자아비판. 바티칸 궁전은 크레믈린 궁전, 마지막에 기독교에서는 천년왕국이 오고, 공산사회가 온다. 이렇게 비슷하지 않는냐. abc이론이라고 있는데, a는 army, b는 볼세비키, c는 크리스트 기독교, 그들의 조직이 같다는거다. 군대나 공산주의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데, 기독교도 교황도 그런 조직이다. 의견을 반대하면 교회에서는 이단이 되고, 볼세비키에서는 반동이 되고, 군대에서는 반역이 된다.
 
- 김일성은 수령이라고 하는데, 항일 유격대 활동을 했기 때문에 두령이라고 했는데, 브루스 커밍스라는 미국의 한반도 문제 연구학자는 수령이란 말이 고구려에서 가장 최고 지도자에게 붙여졌다고 한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전체에서 수령이고, 어느날 김일성이 위대한 수령 어쩌구하면서 불려진다. 다음은 한격 낮게 지도자로 부르는데, 김정일의 경우이다. 여담인데, 김일성이 출생한 날이 타이타닉이 침몰한 날로 1912년 4월 15일이다.
 
- 주인공 명준은 전쟁 중 친구와 윤애를 만난다. 낙동강 전선에서 은혜를 다시 만나고 동굴이란 밀실에서 만난다. 이후 거제 포로 수용소에 간다. 제네바 협약으로 만들어졌고, 최대 17만명까지 달했다. 중공군이 2만명, 북한군 약 15만명. 북한군 내에서 친공파, 반공파로 나뉘어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와중에 미국 준장이 포로가 되어 3일만에 풀어진 사건 발생. 2001년에 나왔던 배창호 감독, 이정재 이미연 주연의 흑수선이란 영화가 포로수용소를 배경. 시인 김수영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 통일은 내부적인 해결을 못보고는 통일도 없다. 중국과는 간도 문제가 이슈 가능. 2004년 송환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비전향 간첩 이야기. 아직 우리 국군 포로들도 못돌아 온 분이 많다. 
 
 
6. KBS 특선 드라마 광장 
- 1985.6.25 방영
- 1954.2월 중립국 88명 선택, 중공군 12명 포함. 
 
 
 
 

교보문고 책소개

세대를 거쳐 거듭 읽히며 사랑받고 있는 전후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작!
해방 후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살아 있는 지식인의 표상,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 구운몽』. 《광장》은 해방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깊은 갈망과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남북 간의 이념, 체제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을 담고 있다.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 개인과 사회·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의 자유와 사랑 같은 본질적인 주제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아낸 한국 현재 문학사 최고의 고전이다. 《구운몽》은 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억압된 무의식을 보여준 소설이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이지만 여덟 겹 꿈속에서 사랑을 찾아내는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 : 최인훈

저자 최인훈은 19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법대에서 수학했다. 1959년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 『자유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집필과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주요 작품으로 『광장/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총독의 소리』 『화두』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제1회 박경리문학상(2011) 등을 수상했다. 『광장』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회색인』이 영어로,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영어와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현재 서울예대 명예교수로 있다.
 

목차

[서문]

광장
구운몽

[해설] 사랑의 재확인·김현

출판사 서평

광장이 없는 밀실과 밀실이 없는 광장-남과 북의 분단과 대결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이념적으로 접근한 현대 한국 문학의 고전. 주인공 이명준의 비극과 갈망은 우리 자신, 우리 민족의 바로 그것이다.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차츰 자리잡아온 가로쓰기의 관행에도 맞추고, 새로 나온 표기법에도 맞출 수 있게 된 이번 판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운 형식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판에서도 몇 군데 내용이 고쳐졌다. 언제나처럼 큰 흐름에는 영향이 없고 그 흐름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첫 발표로부터는 30년,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운명의 성격 탓으로 나는 이 주인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여전히 필자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준은 그가 살았던 고장의 모습이 40년 후에 이러리라고 생각하였을까-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당자가 아니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현실의 결과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한국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유보 없는 꿈과 희망에 휩싸인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의 생전에 결국 그런 꿈과 희망이 쉽사리-적어도 그의 감각만큼은 그렇게 유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 것이지만, 40년이 지난 다음에 지금 같은 상태라고는 다시금 짐작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무의식을 짐작해보는 일은 그렇다고 하고, 작가인 필자의 사정을 말해본다면,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필자 자신의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확실히 떠올릴 수 있어서가 아니고, 어렴풋이-지금 돌이켜 생각해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주인공이 마주친 인생 문제도 상대적으로 시대와 더 관련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보지만 그 두 부분이 깨끗이 나누어진 모양으로 제출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문제’라는 표현은 다만 비유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먼저 이렇게 저 문제는 다음에 저렇게, 하는 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인생 ‘문제’의 성격이다. 그 성격에 비교적 어울리는 형식이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자기와 만난다는 자기 인식으로 돌아온다.

이번 판에서 고친 부분에서도 그 무렵의 주인공의 능력과 자연스러움에 변화를 주는 일 없이 그 무렵의 그만한 젊은이의 생활과 생각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1989년 4월 30일, 최인훈
[전집판 서문]

이번 개정판에서 고친 것은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바꾼 일이다. 예술로서의 소설 문장의 본질은, 표기법에 따라서 높고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표기를 가지고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례적 표현과 어떤 심상이 오래 결합되어 쓰이고 보면, 심상의 형성 과정-의식과 현실 사이의 싱싱한 갈등의 자죽이 관례적 표현으로서는 나타내기가 미흡해 보이는 때가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표현이 낡아진 것이 아닌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여럿 되겠지만, 그 한 가지는 의식이 보다 더 깊게 현실과 어울리는 힘을 가지게 될 때다.

『광장』은 이번으로 다섯번째 개정인데, 나는 이 여러 번의 개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적어도, 『광장』이라는 이름의 작중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 쓸 때보다 훨씬 익숙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개정에서는 보태야 할 데라든지, 빼야 할 데, 플롯에서 중요한 데를 바꾸고 새로 맞춰넣어야 할 데가 거의 저절로 떠올랐다.

다음에 고친 것이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고친 일이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 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과정을, 이미 만들어진 한자어에 밀어버리고도 그런 줄 모르게 될, 표기에서 오는 함정을 감추고 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반드시 비한자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즉 그 한자어를 문맥 속에서 더 꼼꼼하게 정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워진다.

이 판에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길을 골랐다. 그러나 관습에서 너무 멀어져야 할 때는 거기서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부피로 보면 그대로 둔 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 같은 표기상의 바꿈 말고도, 표현도 바꾸는 것이 좋다고 느낀 데는 눈에 띄는 대로 바꿨다. 작자의 사정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개정 내용들이, 나의 짐작으로는, 이명준의 사람됨과 그의 걸어간 길을 독자에게 좀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976년 7월, 저자

[일역판 서문]

이 땅 위에 사람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 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없어져버리거나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랑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지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머릿속에 있는 골이라는 기관을 짜본다든지, 몸을 놀려본다든지 한다. 그러나, 골을 짠다든지, 몸을 놀렸을 때 그들은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에 부딪히기가 일쑤다.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기나 하려 들면 대뜸 몸을 다치게 된다.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그 사람은, 산다는 일을 무언가 신비한 도깨비 놀음처럼 알게 된다. 무서운 낭떠러지 언저리 따위에는 얼씬도 않으려 들고, 눈익고, 발에 익은 골목만 골라 다니면서 하다못해 푸근한 인정이나마 놓치지 말자고 든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짐작이 들었노라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그들의 짐작이라는 것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짐작이다. 버린 것-그것은 무엇일까? 귀한 어떤 것이다. 버리기 어려운, 버려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그것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짐작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선뜻 몸과 마음을 내키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

이 얘기의 주인공도 그런 사람이다. 초목처럼 살기도 싫고, 그렇다고 계산이 다 되지도 않은 데를 잔인하게 잘라버리고 사는 데도 내키지 않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힘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주인공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리고 이 주인공과 시대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그가 한 자리 얘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되레 그렇지 못한 탓으로, 많건 적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표징으로서 이 소설 속에 나타난 것이다.

이 주인공이 만난 운명은 그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 힘에 부쳤다는 것-이런 까닭으로 이 주인공은 파멸로 휘말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 또한 주인공 한 사람의 생애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국토에 시대를 함께한 숱한 사람들이 만난 운명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란, 정말 사람보다는 얼마쯤 분명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이 주인공이 걸어간 길도 그 나름대로 상황을 밝혀내는 몫만은 해낸 셈이라 볼 수 없을는지.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그저 막연히, 산다고 절로 풀릴 숙제일 리 없지만, 어쨌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들어간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가 쓰러진 데서 한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일문판: 김소운 역, 『광장』(동수사, 1973)]

[1973년판 서문·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工房)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 가지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숨은 바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누가 잠수부를 내려보낼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도 주인공을 삶의 깊이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살아오는 경우 그의 입으로 바다 밑의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요-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그의 연락이 끊어진 데서 비롯하는, 그 밑의 깊이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이명준은 그 암초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사이의 바다 밑 지리며, 심도에 대해서는 송신해주었다.

이명준 이후로 나는 연이어 적잖은 수의 잠수부를 같은 해역에 내려보냈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이라면 이명준이 혹시 목숨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만큼의 심해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다, 그런들 한번 간 사람에게야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저 마음을 달래볼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잘 쓰기만 하면 숱한 잠수 벗들에게 유익할 수 있는 심해 정보의 쌓임이 이명준에서 비롯되었고, 그는 안내 없는 바다에 내려간 용사였음을 다짐하는 일이다.
12년 전에 내가 『광장』을 쓴 것도 바로 용사의 기념비였고, 묘비명의 뜻이었다. 그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묘비명에 보탤 것도 깎을 것도 없다.
다만 바람먼지에 얼마쯤 파묻힌 비면(碑面)의 때를 씻어내는 일을 하였다.
이명준, 나의 친구여. 그제나 이제나 다름없는 나의 우정을 받아주기를. 그리고 고이 잠들라.
1973년 7월 1일, 저자

[1961년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1961년 2월 5일, 저자

[서문]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새벽』, 1960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