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2019.11.11)
박물관은 무료입장이었고 주차비도 받지 않은 듯하다.
이른 아침부터 많이도 돌아다녔으니 정신도 혼미해지는 듯 ㅋ ㅋ ㅋ
쉬는 기분으로 우선 옥외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작품의 안내설명을 힘들게 타이핑하여 사진과 함께 하였는데 나름 공부가 되어 만족한다.
특히 박물관의 안내설명이 고리타분한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를 사용하여 쉽게 풀고있다.
유홍준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자신에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경주박물관장을 두번 역임한 소불 정양모선생이고, 소불선생이
'경주를 알려면 이 세 곳을 보라'하였으니 진평왕릉, 장항사지, 그리고 에밀레종를 꼽았다고 한다.
다행히 오늘 하루만에 장항사지, 진평왕릉에 이어 이곳에서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을 대하여
뭔가 임무를 완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봐야할 유적과 유물은 산적하니 우선 유 교수가 많이 강조하였던
산화령 애기부처를 이곳 박물관에서 만나질 못했고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는 시간제약상 남산까지 갈 여건은 되질 못하였다.
이렇게 다음 기회에도 여전히 볼거리가 있다는 것에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
국립경주박물관
삼층석탑 (경주 남산 삼릉계 출토, 통일신라 9세기, 높이 2.22m)
이 석탑은 신라의 다른 석탑들에 비해 크기가 비교적 작고
각 층마다 지붕돌과 몸돌이 각각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맨 아래쪽의 기단부와 꼭대기의 장식부분은 현재 없어진 상태입니다.
각 층의 지붕받침은 5층으로 단이 져 있고, 몸돌의 높이는 1층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낮아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승감을 느끼게 합니다.
승소골 삼층석탑 (경주 남산 승소골, 통일신라 9세기 후반, 높이 3.77m)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승소골에 있던 탑입니다.
이 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받침의 수도 4단으로 줄어드는 등
9세기에 만들어지는 석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에 다른 탑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조각이 있습니다.
위층 기단에는 상다리무늬 조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1층 몸돌에는 상다리무늬 안에 사천왕을 새겼습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성립이후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이 탑에 새겨진 사천왕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사리가 모셔진 탑을 지키려던
신라인들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 석조 불두 (경주 남산 철와골, 통일신라 8세기 말~9세기 초, 높이 1.53m, 무게 1.7톤)
이 부처 머리는 한 차례 큰 태풍이 지나간 후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되었으며,
1959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이 부처가 온전했다면, 얼마나 컸을까요?
그 높이를 추정하는데 경주 남산 열암골에서 발견된 마애불이 좋은 비교 자료입니다.
이 열암골 불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4.6미터로, 이 중 머리 크기가 1/4를 차지하는 4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를 크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각가는 예배자의 시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느 불상과 같은 비례로 머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3층 건물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부처에게 예배드리면서 불심이 우러날까요?
철와골 부처를 만들 때도 비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6미터 정도의 높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부처 머리가 나온 철와골에서는 그 정도 크기의 몸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철와골 부처의 몸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관음보살: 석조 관음보살 입상 (경주 낭산, 통일신라 8~9세기, 높이 3.76m)
본래 이 보살상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따로 전하다가 머리는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경주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습니다.
1975년 몸체를 조사할 때, 그 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서 가져갔는데,
그 모양새가 여느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국립박물관 정원에 전시 중이던 보살머리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몸체가 묻혀있던 부근에서 연꽃대좌를 발견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불상이 관음보살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며, 자비를 상징합니다.
이 보살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대개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이 새개져 있고, 정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수 있습니다.
부처: 석조 불 입상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장항리 절터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과 불상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을 하반신이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입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크기가 대략 4.8미터, 옛날 척도로는 1장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들여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부처의 키가 1장6척이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만들었을까요?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상당수의 불상은 언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불상은 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에 따라 대체로 시기를 결정합니다.
어느 한 시기, 특정 지역에서는 비슷비슷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불상은 바로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근엄한 표정의 얼굴, 건장한 신체, 사실적인 옷 주름 등 이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숭복사쌍귀부
두 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터에 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숭복사)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목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이 비석받침 위에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숭복사 외에도 경주 배리에 있는 창림사터와 경주 암곡동의 무장사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비석과 달리 쌍거북받침일까요?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요?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 석탑탑신부조불상 (경주 출토, 통일신라 8세기 후반~10세기 초)
통일신라 후기에는 석탑의 표면에 부처, 보살, 신중을 비롯하여 다양한 상들이 새겨졌습니다.
이 조각상들은 석탑의 내부에 모셔진 불사리를 받들거나 장엄하여
예배대상으로서 탑의 성격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석탑의 1층 몸돌 네면에 새겨지는 불상인 사방불은
온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고 그 가르침이 사방으로 퍼져간다는 불교의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통일 신라 석탑 사방불은 좌상뿐만 아니라 서 있는 입상으로도 표현되었고,
동쪽면에 약사불이, 서쪽면에는 아미타불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석탑 몸돌에 새겨진 신장(또는 명왕): 석탑탑신부조신장(혹 명왕)상
이 석탑 부재는 ㄱ자 모양으로 다듬은 네 개의 돌을 사방으로 배치한 석탑 1층 몸돌의 일부분입니다.
두 개의 돌이 맞닿는 곳의 가운데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비를,
그 바깥의 양쪽으로 수문장 같은 상을 하나씩 새겨 원래는 모두 8구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중에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네 개의 팔을 지닌 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존상을 비밀불교에 나오는 명왕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상이 새겨진 ㄱ자 모양의 석탑 부재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에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석탑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 석탑탑신부조사천왕상, 경주읍성출토, 통일신라 8세기, 높이 87cm
석탑의 1층 몸돌로 보이는 이 부재에는 불교에서 사방을 수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하늘의 신인 사천왕이 네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두기의 석탑 몸돌은 크기와 상의 조각수법이 서로 비슷하여 쌍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통일신라 조각에서 사천왕상은 대게 손에 보탑을 든 다문천이 북쪽이 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세면의 방위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 불상부조석탑신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통일신라 9세기)
경주경찰서에 보관하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본래 5층으로 된 동서 쌍탑의 1층 몸돌이었습니다.
형태가 온전한 왼쪽은 동탑, 한쪽 면이 결실된 오른쪽은 서탑의 것입니다.
두 몸돌의 네면에는 각각 부처가 한 구씩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약그릇으로 보이는 둥근 물건을 손에 든 부처는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불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서 있는 자세의 부처를 부조로 새긴 것은 경주 지역 석탑의 특징입니다.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 통일신라 771년, 높이 3.658m, 무게 18,908kg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성덕대왕(재위 702~737)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있다가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영묘사, 경주읍성 남문 밖, 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우리들에게는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종을 만들 때 어린 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의 전설이 망라되어 있는 조선 후기 읍지인 동경잡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1920년대 종을 보다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진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과연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넣었을까요? 살생을 금지하여 벌레조차도 죽이지 않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집어넣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범종을 만들었을까요?
성덕대왕 신종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펼친 결과 사람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종의 형태와 무늬,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습니다.
종 한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들고 있는 비천의 모습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 하지 않나요?
사자.공작무늬 돌: 사자공작문석, 경주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너비 3.0m
기다란 화강암의 한쪽 면을 편평하게 다듬은 뒤, 오른쪽으로 치우쳐 크고 작은 세개의 원을 붙여 새겼습니다.
맨 오른쪽 제일 작은 원 안에는 사자가 커다란 잎이 달린 나무를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원에는 둘레에 구슬무늬 띠를 돌리고, 그 안에 나무 한 그루를 사이에 둔
공작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였는데, 마치 먹이를 쪼는 듯합니다.
가장 큰 원은 둘레에 구슬무늬 띠만 돌려져 있을 뿐,
원 안에는 아무 조각도 하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원 외곽의 구슬무늬 띠와 대칭을 이루는 새 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서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경주박물관을 이곳으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1975년 새로 세운 다보탑과 석가탑
금강역사: 석조금강역사상, 경주 구황동 절터, 통일신라 8세기, 높이 1.56m, 1.53m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 절터에 있던 것을 1915년 경주박물간으로 옮겨왔습니다.
이 절터에는 지금도 석탑 지붕돌, 주춧돌과 함께 네 구의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모양의 벽돌모양 서재도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분황사처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금강역사상 역시 분황사 모전석탑의 예와 같이 탑의 감실 좌우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강역사는 불교가 성립된 이후에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보통 쌍으로 만들어지는데, 한 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구는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범어로 '아'는 입을 벌렸을 때 나는 가장 첫소리이고, 홈은 입을 다물고 때 나는 가장 마지막 소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미루어보면 부처와 부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다는 상징으로
금강역사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등: 경주 읍성, 통일신라 8~9세기, 높이 5.63m
경주 읍성 터에 있던 이 석등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여
하대석, 간주석이라 불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다란 팔각기둥, 그리고 상대석의 일부만 남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왔던 1975년 당시
없는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 넣고서 지금의 모습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복원한 석등은 높이가 거의 6미터에 이르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큰 석등의 하나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등불을 밝히는 곳의 높이가 거의 5미터에 가까운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 하는 점입니다.
매번 사다리를 놓았을까요? 그 답은 전북 남원의 실상사 석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상사 석등 앞에는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석등에도 별도의 돌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함께 발견된 것은 없습니다.
석등 앞에 있는 네모난 돌은 배례석이라고 합니다. 이 돌의 용도는 향이나 각종 공양물을 올려 놓기 위한 것입니다.
석등과 함께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배례석은 경주 읍성에 있던 석등과 함께 놓였던 것은 아닙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 고선사지삼층석탑, 경주 고선사절터, 통일신라 686년이전, 높이 10.2m, 국보 제38호
이 탑은 원래 고선사에 있던 것입니다. 1975년 고선사터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 탑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국립경주박물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선사는 원효대사(617~686)가 머물렀던 절입니다.
원효대사는 신문왕(재위 681~692) 6년(686년)에 입적하였으므로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그 이전에 만들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1914년5월, 이 삼층석탑이 있던 주변에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가리킵니다. 이 비는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고선사와 원효대사의 관련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너무나도 닮은 탑이 신문왕 2년(682)에 세운 감은사터 삼층석탑입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에는 철주가 남아 있어 언뜻 달라보입니다만, 2
단으로 된 기단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된 모습, 노반까지의 높이가 모두 10.2미터라는 점,
82장의 돌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이 쌍둥이 탑이라고 할 만큼 닮았습니다.
고선사터 삼층석탑 1층 몸돌에 문을 표현한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삼층석탑의 양식은 그 이후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비석받침: 비좌, 경주 고선사절터, 통일신라 9세기초, 높이 0.7m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원효대사를 기리며 고선사에 세운 서당화상비의 비석받침입니다.
거북을 닮은 받침돌의 머리부분은 없어지고 몸통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등부분의 귀갑무늬는 희미하며, 등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일정한 폭의 무늬띠가 확인됩니다.
등 가운데에 비신을 세우기 위해 턱이 있는 네모난 홈을 만들었고, 홈 주위를 돌아가면서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1914년 고선사터에서 글씨가 새겨진 비신의 아랫부분이 발견되었고,
윗부분은 1968년 경주시 동천동 민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비신 부분으로 보아 비문은 33행이며 각 행은 61자로 추정됩니다.
경주 천마총 금관 (국보 제188호, 6세기) 및 금허리띠와 꾸미개 (국보 제190호)
신라 국명의 유래
이차돈 순교비: 경주 백률사, 817년
고구려와 백제는 370년대에 불교를 공인하였지만, 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 15년(528)에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이차돈(502년 또는 506, 507년)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는 사인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박염촉과 이차돈은 같은 사람입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의 머리는 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덕왕(재위 809~826) 9년(817)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백률사에 있던 이차돈순교비입니다. 비석을 왜 백률사에 세웠을까요?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사람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라 했다고 합니다.
가시가 있는 호두는 곧 밤이니, 자추사가 곧 백률사를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즉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비석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정간을 치고, 3cm 크기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글자는 마멸이 심하여 아쉽게도 판독이 쉽지 않지만, 다행히 흥인군신각김생서, 원화첩에 관련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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