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대릉원 및 그 주변 (2019.11.12)
경주에서는 스파럭스 찜질방에서 숙박하였는데 아주 럭서리한 찜질방,
시설과 위생 모두 깨끗하고 만족스러운 만큼 8시간에 13,000원, 이후는 시간당 천원씩 추가.
아침 일찍 일어나 대릉원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대릉원은 9시 오픈이기에 바깥만 가능,
하지만 인왕동,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은 담장이 없기에 답사가 가능하다.
우선 인왕동 고분군을 멀리서 보며 걷기 시작하였고 여러 봉분이 어둠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인왕동 고분군
첨성대 (국보 제31호)신라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천문대의 기능에 대하여 첨예한 의견대립이 계속되고 있지만
유홍준 교수는 천문기상관측의 상징물로 접근하여 이 시대의 천문지식을 최대한 상징한 결과로 보고있다.대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에 올라가 밟고 섰다 해서 대가 아니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이리라.
옛날 사람들은 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그래서 첨성대의 기단은 저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
계림 (사적 제19호)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른 아침에 이 유서 깊은 역사의 숲을 호젓하게 거닐었으니 이 이상의 호사로움이 있겠나.계림 정문에는 수령 1,300년의 회화나무가 있어 그 역사를 입증한다.
내물왕릉
다음 자료는 위키백과에서 인용하였다.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5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주변의 인왕동 고분군
경주향교 (경북 유형문화재 제191호)이 자리에 신라 최고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이 신문왕 2년(682)에 세워졌고고려시대에는 성종 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으며 성종 23년(1492)에 문묘와 성균관의 배치에 따라 지었다고한다.
대성전(보물 제1727호)은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몇년전의 지진 피해라고 하니 아직도 지진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경주교촌마을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들이 오기 전 조용히 마을 구경
또 다시 인왕동 고분군 곁을 지난다.
한옥 스타일의 스타벅스 커피점, 하지만 아직 오픈 하지 않았다.
대릉원다음은 네이버 지식백과의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인용하였다. 경주의 고분들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당시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 가운데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능이 솟아 있는 황남동의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것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찾기도 무척 쉽다. 큰 나무 없이 잔디떼가 잘 입혀져 있어 동산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1970년대에 엄청난 예산을 들여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으나, 담장을 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고 무덤 안 길을 닦는 바람에 옛 정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대릉원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이곳에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 그리고 그 규모가 경주에 있는 고분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 등이다. 남아 있는 23기의 능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
천마총은 어느 해인가 방문하여 답사한 적이 있지만 너무 오래되었다.이번에는 모두 담장 너머로 흘낏 쳐다보는 것으로 그친다.그래도 담장을 따라 한번 걸어보자며~~
노서동고분군 (사적 제39호)다른 역사 도시에 견주어 경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 첫번째로는 응당 시내의 고분공원을 꼽을 만하다. 20세기를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이 있고, 또 그들의 삶터인 집채보다 훨씬 더 큰 무덤들이 철책을 사이에 두고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에서 삶과 죽음이 수없이 되풀이되었을 2천여 년이라는 세월을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노서동에는 호우총, 서봉총, 금관총, 은령총, 옥포총, 마총, 쌍상총, 우등 들이 있다.
호우총
1946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이다.
당시 발굴 체계는 미흡한 것이었으나 호우 곧, 병모양의 물잔을 출토한 것은 기념할 만하다.
높이 23.9㎝의 이 그릇 밑바닥에는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호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을묘년에 만든 ‘국강’ 언덕 위 광개토왕의 제사용 그릇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고구려의 호우가 신라의 무덤에 들어 있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구명할 수 없다.
서봉총
1926년 발굴되었는데,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아돌프가
발굴 당시 직접 금관 (보물 제339호)을 들어낸 일이 있었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스웨덴 곧, 서전(瑞田)의 ‘서’자와 금관에 새겨진 ‘봉’자를 딴 것이다.
원래는 둥그런 봉분의 형태가 되어야하는데 발굴후 복구를 하지않아서인지, 누가 무덤으로 볼까?
금관총: 보수공사가 진행 중
금관총은 현재 노서동 고분공원에 발굴된 유지(遺址)가 보존되어 있다.
이 고분은 1921년 9월에 경주시 노서리 현지점에서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발견 당시부터 유구의 상당부분이 이미 파괴되어 있었고 정식으로 발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분의 구조나 유물들의 출토상황 등에 관해서는 애매한 점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금관총의 자리에는 ‘금관총’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일대를 사적 제3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노서리 제128호분으로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는 이 고분이 금관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신라유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있는 화려한 금관 일습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금관은 ‘금관총금관’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87호로,
허리띠장식은 ‘금관총과대 및 요패’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88호로 각각 지정 보존되어 있다.
노동동 고분군 (사적 제38호)
노동동에는 표주박형의 쌍분이 아닌 단일 원형 고분으로는 가장 큰 봉황대를 비롯하여 금령총, 식리총 들이 있다.
봉황대는 밑바닥 지름이 82m, 높이가 22m로 무덤이라기에는 너무 커서 차라리 자그마한 동산인 듯싶다.
그 동산 위에서 둥지를 살찌워가는 큰 느티나무 몇 그루 때문에 더더욱 고분이라는 느낌을 받기가 힘들다.
규모로 보아 왕의 무덤임이 틀림없으나 아직 발굴되지 않아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고,
이 봉항대 옆에 성덕대왕 신종의 종각이 있었으며 1915년에 구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1975년 새로 신축한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봉황대
금령총: 발굴 조사 진행중
봉황대 남쪽에 있는 밑지름 18m의 비교적 작은 무덤인 금령총은
지하에 장방형의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금관, 금방울 들과 함께 뛰어난 공예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기마인물형 토기 두 점이 출토되었다.
주차를 시킨 대릉원 입구 인근으로 이동중 대릉원 담장 너머로 본 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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