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궁남지 (2019.8.25)
사실 궁남지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방문하였는데
지난 번 찾았던 무안의 백련지에서 연꽃은 이미 져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달랐는데 무안 백련지는 흰 연꽃 한 종류뿐이지만
궁남지에서는 다양한 연꽃이 소개되며 호수와 정자의 어울리는 모습도 즐길 수 있었다.
부여에서는 관련한 축제로 서동연꽃축제를 매년 7월에 궁남지에서 개최하고 있다.
궁남지는 유네스코 인증의 백제역사유적지구에는 포함되지 않는 듯하고
그럼에도 답사 대상이 된 연유는 무왕의 출생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궁남지의 정자 이름이 포룡정(抱龍亭), 즉 포가 잡을 捕가 아니고 안을 抱이니
무왕, 즉 서동의 어머니가 용을 안고난 후 서동을 낳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다른 의견도 있으니, 김희태 지음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을 읽어보면
"서동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연못이 바로 마룡지(현 연동제)로 전해지는데,
그 위치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오금사 남쪽 백여보 되는 자리에 있다"라고 했다."
하여 체크해보니 익산의 금마면에도 서동공원이 있으며, 연동제 호수, 오금산도 있으니
서동을 두고 익산과 부여의 다툼이 있을 듯 하다.
여하튼 이와 관련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내용을 소개한다.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포룡정
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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