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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2019.8.25)

클리오56 2019. 8. 25. 20:32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2019.8.25)


둘레길 조사 도중 멋진 불탑을 우연히 마주친 경우 일종의 득템인데

지난 주 서천의 성북리 5층석탑, 그리고 보령 성주사지 3층 및 5층 석탑 4기의 경우가 그러하였고

오늘은 작심한 듯 하루가 불탑 여행이 되었다.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을 시작으로 장하리 3층 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그리고 정읍 은선리 3층석탑의 차례로 순례하였다.


정림사지는 유네스코 지정의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이며

정림사지박물관에서 매표(입장료 1,500원) 후 입장이 가능하며

국보로 지정된 5층석탑과 보물로 지정된 석불좌상을 관람할 수 있다.


백제는 오랜 불교의 역사를 보여주지만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이 2 기 뿐인데,

백제의 탑이 대부분 목탑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림사지 박물관 사이트의 소개글>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림사!

정림사지의 의의를 소개합니다.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였다.

정림사지에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의 대지는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북동쪽은 깍고, 낮은 서남쪽은 성토하여 조성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정심사지 사역의 남편과 서편은 원래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사역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 사찰의 위용이 한껏 과시되었을 것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그 북·동·서편의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회랑에 접속된 북· 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 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예불대상이 되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이다.

탑과 금당간의 관계에 따라 <1탑-1금당>, <1탑-2금당> 등의 가람배치양식을 구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그리고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내에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사찰터로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 된 목조의 기와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사찰지의 규모는 북승방지에서 중문지까지 107m이며, 폭은 동서건물지외곽 기준으로 62m이다.

두개의 연못지가 중문지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정림사지 박물관 입구

박물관 앞 송림




정림사지 5층석탑: 국보 제 9호

(안내 설명: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반하여

정림사지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층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출처, 김희태 지음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정림사지 5층석탑의 1층탑신에 새겨졌는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들의 공적을 새긴 내용이다.

5층석탑은 예술성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백제 멸망의 치욕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 108호

(안내 설명: 고려시대 작품.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았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잇다. )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호각




정림사지 박물관


백제계석탑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