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박물관 (2019.8.25)
오늘은 일요일, 여행다운 여행을 즐기고 싶어 무리를 하며 답사를 진행한다.
정림사지 5층석탑 인근의 부여박물관을 찾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를 관람하고 싶은게 우선이었다.
발굴 당시 신문의 기사를 보곤 저렇게 화려하고 디테일한 표현이 가능한지 완전 경악했던 기억.
이외에도 연통형 토기, 왕흥사 사리기, 그리고 야외에 설치된 여러 불상들이 관심을 끌었다.
동남리 석탑: 기단 일부와 4층 탑신이 없어짐
부여 석조: 보물 제194호
(안내 설명: 본래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저장는 용도로 쓰던 석조물이다.
부여석조로 알려진 이 석조는 원래 있던 장소가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인의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미감을 살린 형태나 세부 표현기법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석조 표면에는 정림사지 5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것과 같이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 287호
(안내 설명: 백제인의 탁월한 예술 감각과 뛰어난 공예 기술,
나아가 종교와 사상까지 담은 백제 문화의 정수이다.
1993년 부여군 능산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발견. 이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으로 구성된다.
뚜껑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있다. 산 모양의 뚜껑에는 다양한 인물과 동물,
신비한 힘을 가진 괴수 등이 크고 작은 산봉우리 사이에 장식되었다.
봉황의 가슴과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멍 12개가 있다.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한 몸체에는 물고기와 새, 다양한 상상 속 동물들이 연꽃잎 사이에 장식되었다.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을 표현한 받침은 용의 역동적인 몸짓과 향로를 안정적으로 받친 균형미가 돋보인다.
이 향로는 구리와 주석을 녹인 청동을 거푸집에 부어 형태를 만든 후 그 위에 금을 입혔다.
일정한 두께와 균일한 도금층은 백제 장인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향로의 높이는 61.8cm, 무게는 11.8kg이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국보 제288호
(출처, 김희태 지음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석조사림감은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감실로
목탑지의 심초석에서 출토되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公主供養舍利"
백제 창왕 13년(=567년) 정해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석조사리감은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고 바로 인근의 능산리 고분군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공주가 공양을 바쳐야 했던 인물, 즉 공주의 아버지인 성왕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왕흥사지 사리기: 국보 제327호
사리 2매를 묻으려 하자 신의 조화로 사리가 3매가 되었다는데
어이하여 사리가 하나도 없지? 인간의 심술 조화가 더 강한 것인가??
연통형 토기: 능산리사지에서 1993년 발굴
(연기를 바깥으로 빼주기 위한 연통, 높이 122.2cm
상류층 주택장식에 사용되었을 듯......)
석조여래입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6호
(아내 설명: 부여 금성산에서 1933년 발견, 얼굴은 크고 비만하게 표현한 반면 신체는 밋밋하게 표현,
특히 몸과 머리의 폭이 거의 비슷한 돌기둥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
이러하 석주형 석불은 고려 전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유행했던 양식)
동사리 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고려전기의 고려시대 석탑 특징을 간직:
연꽃무늬의 탑신받침, 2층 탑신 이상의 급격한 축소, 1층 탑신에 새긴 감실)
연꽃무늬 석등받침: 통일신라 8~10 세기
보광사 대보광선사비: 보물 제107호
(안내 설명: 보광사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 충감(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을 기록한 비.
충감은 선원사 출신으로 원나라 유학을 다녀온 이름난 선승.
비문은 당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원나라 위소가 짓고, 원나라 양지와 주백기가 각각 비문과 전액을 썼다.
이 비석은 비 받침과 모난 형태의 몸돌로만 이루어진 고려후기 비석의 전형을 보여줌)
당유인원기공비: 보물 제21호
(안내 설명: 660년 나당연합군 일원으로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 부소산 중턱에 있었던 것이다.
행적을 기록한 몸돌과 용 6마리가 새겨진 머릿돌을 한 돌로 제작한 전형적인 당나라 형식의 비석.
반면 거북 형태의 비 받침이 별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유인원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비이지만
의자왕과 태자, 신하 700여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백제 멸망 과정과 부흥운동의 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조: 백제 시대, 6~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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