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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김영하 (2024.7.19)

클리오56 2024. 7. 19. 13:57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지금에야 알고 읽게된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마침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문학동네의 2019년도 판이었다.

복복서가의 2024년도 개정증보판에서는 한 챕터가 맨 앞에 추가되었는데 '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법'이다.

코로나 시대에 맞춘 여행법인듯한데 이제 코로나가 끝났으니 굳이 안읽어도 되려나....

하지만 나중 기회를 만들어 보충해보겠다.

마침 '여행의 이유' 책 출간에 즈음하여 김영하 작가와 오은 시인의 대담이 있어 유튜브를 시청하였고

대담 내용 중 나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을 나름 정리해보았다. 

 
나도 나름 여행을 적게 가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글로 남기는 습관에 대한 격려에 감사한다. 
 
* 여행 이야기를 쓰게된 동기: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한다. 결국 자기가 한 행동이 자기라는 것, 그러니까 내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게 중요하지 않고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고, 가장 많이 해왔던 일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겠구나. 생각해보니까 글 쓰는 것 말고는 여행을 제일 많이 한거다. 글 쓰는거야 직업이니까 계속 했다고 해도 여행을 20년이 넘도록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이 여행했다. 여행을 굉장히 은밀히 좋아하고 있었던 거고, 그래서 이제 쓸 때가 됐구나,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이런 형식의 글은 평생 단 한 번 밖에 쓸 수 없는 책이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여행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 여행서인데 사진이 한장도 없다: 사진이 없으면 책에 오로지 집중하게 되고, 독자들이 자신의 여행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취지였다. 


* 뒷 표지의 글귀,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너무 멋있는데 마지막 챕터에 나온다. '오늘 여행으로 돌아가다' 를 읽어 주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 책을 쓰면서 저라는 인간에 대해 알게되고, 여행을 떠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힘을 주는 측면 등등


* 여행 스타일은? 여행을 할수록 계획을 덜하게 되는데, 세상은 점점 더 계획을 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숙소를 잡는데, 예전에는 당일 전화로 혹은 운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 발달로 숙소에 대한 리뷰나 평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계획대로 매끄러운 여행은 나중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생했거나 예상과 달랐거나 문제를 겪은데는 마음에 남아있다. 지금은 준비는 덜하는 편이고, 옷도 적게 가져가고 현지에서 조달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파이들은 모두 실패한 스파이다. 왜냐하면 성공한 스파이들은 조용히 은퇴해서 삶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걸렸기 때문에 마타하리도 흑금성도 된다. 진짜 실패한 여행은 기억이 안난다. 너무나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 51쪽 말미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을 가면 시련을 겪는데, 거기서 자기가 무엇을 못견디는지, 무엇을 참아내는지, 자기가 가진 대담함과 용기 등등이 나타난다. 현실에서는 자기가 편하도록 셋팅이 되어있는데, 여행을 가면 별것 아닌것, 즉 비행기나 기차 연착 등에 대하여 참을성이 있는가 등등이 나타난다. 


* 호텔 예찬: 집에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물건들이 쌓여 있는데 호텔에 가면 너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데 거긴 좀 더 독한 세제를 쓰고 향수도 좀 더 강한 것을 쓰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사실 호텔은 인류 여행의 역사에서 여행자가 낯선 환경에 도착했을 때, 빨리 정신을 차리고 안락함을 누리도록 한다. 비즈니스를 하건 여행을 하건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노하우가 집약된 곳이다. 그런면에서 호텔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고 아주 편한 곳이다. 어떤 작가는 3류 모텔에 가서 글을 쓰는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여러 개 잡혀있는데, 카페에서는 불편하지만 호텔은 편하게 진행된다. 예약된 인터뷰가 취소되면 호텔에서 편히 쉴수도 있고 좋다. 


* 아직 아프리카를 다녀오지 못했다. 아프리카 종단 여행이 있는데 1달 정도 소요된다. 


* 여행은 오히려 영감을 얻거나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란 구절이 또 마음을 많이 남았다.  작가님은 오하려 자유로워진 것 같아서 신기했다. 모국어가 들리는 장소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스타벅스에 있으면 옆자리의 온갖 얘기가 들려온다. 해외에서는 어떤 도시 카페 앉아 있으면 와글와글 하긴 하지만 그게 언어적 정보가 아니니까 그냥 화이트 노이즈로 지나가는거다. 그럴 때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머리가 텅 비면서 오래 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많이 떠오르고 그런 점들이 좋다. 


*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서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발효한다. 갔다온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 그 다음에 또 그걸 떠올리면서 내 기억을 확인하고 어떤 것이 떠오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이런 것들이 여행의 연속이라는 말씀인지? 여행이라는 게 사실 아주 강렬한 경험이다. 낯선 곳에 가는거고 그리고 돈도 들고 또 신경도 예민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렬하게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강렬한 경험들을 다녀오자마자 바로 본업으로 돌아오면서 날려버리면 너무 아깝다. 랭 드 보통 같은 분은 글그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현장에 이런 것을 말로 한번 표현해 보자는 것도 제안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사진만 찍고 SNS에 올리고 잊어버린다. 저는 글로 남기려고 늘 노력하고 또 그림으로도 그려 보고 또 소리 같은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여러 차례 우려먹는게 좋지않을까.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면. 한번 다녀온 여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기는 혼자놀기의 방법을 많이 개발했다.

 

* 여행은 무엇인가?: 여행은 몸으로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 책은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눈으로 읽을 수 있고 그렇지만 여행은 내가 직접 거기를 가야만 하는 거다. 내가 직접 가야만 하고 내가 가서 읽어줘야 그것이 비로소 읽히는 텍스트이다. 남의 여행은 백날 들어봐야 재미없고 내가 직접 가서 거기의 공기, 공간감, 느낌, 촉각 이런 것들을 다 경험해야 읽혀지는 한 권의 책, 텍스트가 된다.

 

* 환대의 순환: 환대를 받으면 그 사람한테 갚아야한다는 생각이 강한데, 이제 바뀔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지구의 여행자라고 생각할 때, 내가 받은 환대를 다른 사람, 그것을 더 절실히 필요하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그런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 여행지에서 위험을 맞이하는 그런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강형욱 개훈련사 처럼 단계적으로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매번 새로운 여행지를 가야하는 것보다 제2의 고향 같은 곳으로 수차례 방문 할 수도 있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면서 낯썸을 극복해간다. 자신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조금씩 적응시켜간다.   

 

* 패한 여행 같은 건 없다. 깊이 파보면 거기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마음의 어떤 변화들이 있다. 그런게 당장은 파악이 안되지만 우리가 늘 알지만 내 마음 이라고 해서 내가 아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오직 글을 쓰고 사유하고 생각할 때만 좀 더 분명해진다. 그래서 자기 자신들이 하는 여행 하나하나를 조금 더 각별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글로 남길 것을 권하고 싶다. 사진은 지나고 나면 일이 있었던 것을 그때 감정 같은게 의외로 공허하게 느껴진다. 언어라는 것은 강력하게 감정을 흔들고, 환기하는 효과가 크다. 또한 쓰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기억이 좀 더 명료해지고 좀 더 풍성해진다. 지금은 별로 같은 것이 10년, 20년 후에는 또 다르게 새록새록 생겨나고 그동안 내안에 변화가 일어났고 또 그때의 일이 싹을 피웠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여행을 하나하나 기록해가는 그런 여행을 권하고 싶다.  
 

내용 및 감상

추방과 멀미
15쪽: 여행은 아무 소득 없이 하루 만에 끝나고, 한번 더 중국을 왕복하고도 남을 항공권 값을 추가로 지불했으며, 선불로 송금해 버린 숙박비와 식비는 아마도 날리게 될 것이 뻔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나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17쪽: 메뉴판의 맨 위에는 셰프가 가장 자신 있으면서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던 요리를 넣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함부로 시키기 어려운, 담대함이 요구되는 요리들이 등장한다. 비둘기 고기나 잉어 부레 같은 식재료로 만든 이색 요리를 원한다면 맨 아래에서부터 봐야 하고, 닭가슴살이나 쇠고기 등심 같은 무난한 요리를 원한다면 위에서부터 봐야 한다. 셰프들이 굳이 이런 도전적인 요리들을 메뉴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다양한 손님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식당과 차별화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실력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18쪽: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마르코 폴로, 길가메시, 오디세우스

24쪽: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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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 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57쪽: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저자의 '나는 호텔이 좋다'는 의미 => 60쪽: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 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 60쪽: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프로그램의 근원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나의 유년은 잦은 이주로 점철 되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경험들이 쌓여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내 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63쪽: 소설 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비록 내가 창조했지만) 낯선 세계와 인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64쪽: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호텔에서는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다음날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67쪽: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36개 계책 중에 36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68쪽: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오직  현재
80쪽: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80쪽: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게 현재 시제로 서술된다. 과적 픽업트럭에 실려 이동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유적의 규모와 그 유적을 부수어버릴 듯 맹렬히 자라고 있는 나무의 위용에 압도된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82쪽: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87쪽: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그들은 무려 8시간이나 영양을 쫓는다. 그들이 사냥감을 마침내 잡게 되는 것은 누군가 화를 잘 쏴서도 아니고 창을 잘 던져서도 아니다. 영양은 탈진하여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들은 창을 들고 사냥감 가까이 다가간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109쪽: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사항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114쪽: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여행하게 하고 자신이 나중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바야르의 의하면 그것은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117쪽: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층의 간접 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 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 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128쪽: 아델 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림자가 없어 더 큰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성원권이 없다면 이 주인공처럼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136쪽: 지구가 고작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 구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인은 자존심을 다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푸르게 빛나는 우주의 오아시스와 우리 서로를, 모든 동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139쪽: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접대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147쪽: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 요금을 내 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148쪽: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바디의 여행

155쪽: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일 뿐이다.

181쪽: 여행자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면 흥미롭다. 여행자 오디세우스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거의 허영심이었다. 그를 위험에서 구한 것은 스스로를 노바디로 낮춘 덕분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감추고 '아무도 안'인 존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숫양의 배 아래에 몸을 숨겨 키클롭스의 동굴, 자신의 허영심이 초래한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하게 된다.

185쪽: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여행으로 돌아가다
191쪽: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정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수백 년 동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청년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어디론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곳, 그의 부족은 늘 이동 중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 이들에게 여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197쪽: 모험 소설들은 나와 같은 어린 독자에게 삶이란 예기치 않은 재난과 도전의 연속이지만 인간은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존재라고 조용히 속삭여주었을 것이다. 여행기는 모험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여행기의 저자 역시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 낸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와 그것을 글로 기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어린 날의 나에게 그것은 모험 소설이었고 여행기였다.

201쪽: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아침에 산 바케트 빵 하나로 세 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지만, 그제야 나는 비로소 진짜 여행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다. 어린 날의 강제 이주와는 너무나 다른 경험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여행이었다.

206쪽: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7쪽: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작가의 말
212쪽: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 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13쪽: '여행의 이유'를 캐다 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교보문고 책 소개

60만+ 독자의 선택, 김영하 산문의 정수 〈여행의 이유〉

모방이 불가한 독보적인 사유와 치밀한 문장으로,
여행-일상-여행의 고리를 잇는, 열 개의 매혹적인 산문
출간 이후 6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읽혀온 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이 복복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의 일상에서 여행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김영하만의 현란하면서도 정밀한 사유의 경로를 통해 비로소 이해해보게 되는 글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법」이 추가되며 새롭게 출간된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 산문의 정수로 불릴 만하다.
『여행의 이유』는 여행지에서 겪은 이런저런 경험을 풀어내는 여행담이 아니다.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 환대,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로 그 주제가 점차 확장되어가는 사유의 여행기다. 우리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한쪽에 미뤄둔 여행과 인생에 관한 단상이 작가의 독보적이고 깊은 인문학적 사유를 따라 각기 그 맥락과 형태를 갖춰가는 독서의 경험은 마치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여행처럼 강렬하고도 긴 파장을 남긴다. 이는 떠나기 전 여행의 의미와 목적을 가다듬기 위해, 혹은 자신이 다녀온 여행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헤아리기 위해 수많은 독자가 『여행의 이유』를 집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_본문 252쪽

작가정보

저자(글) 김영하

소설가. 장편소설로 『작별인사』 『살인자의 기억법』 『검은 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 『아랑은 왜』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소설집으로 『오직 두 사람』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호출』이 있고, 산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 『다다다』 등을 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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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법
    추방과 멀미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

    작가의 말
책 속으로

『여행의 이유』를 냈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같은 질문을 요즘도 많이 받는다. 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아닐 수 있겠지만, 최근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을 하나 경험하기는 했다. _9쪽

외부 자극에 극도로 민감한 자폐인에게 좋은 집이 비자폐인에게도 좋은 집이라는 어느 건축가의 말처럼, 여행자에게 좋은 세계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좋은 세계였다. 여행은 적대와 혐오, 전염병과 전쟁이 있는 세계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_24쪽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_37~38쪽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_43쪽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_76쪽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_82쪽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_88쪽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_본문 93쪽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_94쪽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_본문 173~174쪽

 

출판사 서평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때,
인생의 난제들에 포위당했다고 느낄 때,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법」에 이어지는 글 「추방과 멀미」는 2005년, 작가가 집필을 위한 중국 체류 계획을 세우고 중국으로 떠났으나 입국을 거부당하고 추방당했던 일화로 시작한다. 흔치 않은 경험인 추방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작가의 이야기는, 여행의 목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여행의 목적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휴식일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늘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나기 마련이고, 이는 행로를 바꾸고 어떤 경우엔 삶의 향방까지 바꾸기도 한다. 애초 품었던 여행의 목적이 우연한 사건들로 미묘하게 수정되거나 예기치 못한 무언가를 대신 얻게 되는 경험, 작가는 이것이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식인 여행기가 지닌 기본 구조이며 인생의 행로와도 닮았기에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험 소설과 여행기를 좋아해왔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는 제목이 암시하듯, 일상과 가족,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피로로부터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에 관해 다룬다. 집안 벽지의 오래된 얼룩처럼 마음의 상처는 손쉽게 치유되어 없던 일처럼 아물지는 않지만, 여행은 불현듯이 그에 맞설 힘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_본문 93쪽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기도 하며(「오직 현재」), 인류의 오랜 속성이기도 하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앉은 자리에서 모든 정보에 접속 가능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오버투어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여행 인구는 멈출 기색 없이 증가하고 있다. 왜일까. 우리는 왜 끊임없이 여행을 갈망하는가. 일상의 장소를 벗어나 생생하고 색다른 모험을 겪길 바라는 욕망, 여러 가지 일들로 번잡해진 머리를 비우고 먼 곳으로 떠나 홀로 휴식을 취하고픈 간절함은 우리를 ‘여행하는 인간(호모 비아토르)’으로 만든다.

오로지 김영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하고도 깊은 사유의 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면서 겪은 독특한 ‘여행’에 관한 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에서는 김영하의 감각적이고도 깊은 사유와 문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유쾌하게만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대한 독특한 인문학적 통찰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영하표 스토리텔링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떠도는 자들의 쓸쓸한 숙명과 그로부터 그들이 벗어날 반전이 있는 해법이 담겼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여행의 또다른 기쁨인 타지에서 경험하는 환대에 관한 글이다. 1968년 12월 24일 아폴로 8호가 찍은 지구돋이Earthrise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인류 모두가 지구 위의 승객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타자에 대한 환대 때문임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_본문 173~174쪽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노바디의 여행」은 성숙한 여행자의 태도와 한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유비해 보여주는 글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담긴 고대의 지혜에 대한 반짝이는 해석이 담겨 있다. 허영과 자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지혜롭고 겸허한 여행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기도 하다. 마지막 글 「여행으로 돌아가다」에는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여행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겼다. 한곳에 평화롭게 정착하지 못한 채로 항구적인 여행 상태로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담담한 위로의 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