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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로방스 (예술, 도시를 만나다 + 아트 앤더 시티): 전원경 (2024.7.11)

클리오56 2024. 7. 11. 11:02

 
전원경 교수는 삼프로 유튜브에서 네덜란드 편 방송에서 고흐를 소개하였고 여기서 고흐편은 대부분 방송에서의 내용이 담겨있다. 예술, 도시를 만나다에서는 7장 프로방스, 사이프러스 나무와 라벤더 향기에서 고흐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동 서적에 프로방스에서 활약한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정리하였다. 
 
* 고흐의 대표작 포함하여 많은 작품이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동생 테오와 그의 부인 덕분이다. 
* 고흐는 30이 다되어 그림을 그리겠다하였으며 이로 인해 부친과 크게 다투었고, 얼마 후 부친이 돌아갔다. 부친의 사망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마음의 상처가 고흐에 남아있다. 그래도 고흐는 그림을 그려 화상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보낼 때 편지도 동봉했는데 800통에 이른다. 일종의 후원이었다. 

 

무겁고 육중한 성경이 있고 옆에 양초가 있는데
불이 
꺼져 있는 것은 성경책이 상징하는 아버지의 생명이
육신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성경책 옆에 작고 낡은 
초라한 노트가 하나 있는데
성경에 비하면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노트는
아버지 앞에선 고흐 본인이다.

 고흐 작품은 해석하기 좀 좋은 부분이 있는데
그림들에서 
고흐의 감정이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1885년에 최초의 걸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당시에 고흐가 머물렀던 탄광촌 광부 가족의 저녁 식사이다.
어두운 
램프불 아래에서 찐 감자와 커피만으로 저녁을 먹는다.

 그림이 이렇게 어둡고 둔탁해 보이는 이유는 당시 
고흐가 가장 좋아했던 화가가 바로 밀레이기 때문이다.
동생 테오가 밀레의 그림도판을 
많이 보내 줬고 그 그림을 보면서 고흐는 독학을 하였다.
밀레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농민들의 진실을 그렸다.

테오는 이 
그림을 받고 가능성이 있지만 지나치게 그림이 어두운거 같다고 했는데 맞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태오는 1886년 고흐를 파리로 불러 
인상파 화가들의 최신 경향을 보면서 그림을 좀 배우라고 하였다. 
 
파리로 갈 무렵에 그린 이 자화상은 누가 봐도 램브란트의 영향하에 있다.
렘브란트와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게 우연의 일치가 아닌데
레이크스 뮤지엄에 
많은 램브란트의 자화상이 소장돼 있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을 고흐가 보았기 때문이며, 물론 나중에 모델을 못구해 자화상이 많았다는 것도 있다.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햇빛과 대기를 포착해서 그림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림이 밝았다.
좌측 그림에는 까만색이 없고 전부 환한 색이다. 파란 하늘에 6월쯤이고, 
그림자 조차도 회색에 파란색을 섞어서 그림 자체가 막 빛이 나는 것같은 느낌이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고흐도 
조금 경향을 바꿨고, 환해지기는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고흐 그림은 아직 안 나왔다.
고흐는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 동안 파리에 머물때
그림들을 보면 
자기가 스스로를 이제 화가로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이 얼굴을 보면 당시의 고흐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우울하다.
고흐는 
파리에서 화가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지만
그의 성격이 너무 극단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동료 화가들이
그의 성격에 넌더리를 내었다.

또한 좁은 셋집에서 2년 동안 사니까 테오도 힘들어
점점 형제들 끼리도 투닥거리고하여 낙담한다.

1888 2월 동생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기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목표없이 가다가
16시간만에 새벽에 아르에 도착하였다. 
아를은 프로방스 지역인데 지중해와 접하여 날씨가
굉장히 좋고 사시사철 온화하고 또 강수량이 적어서
모든 자연이 
선명한 빛깔을 띄고 있다.

좌측처럼 하늘도 파랗고 사이프러스는 짙은 
초록이며,
보라빛의 라벤더 이런 것이 프로방스 색채이다.

 
 
아를에 2월에 도착하여 3월 봄이 되니 꽃이 피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바닥도 그림자도 하얗게 칠했다.
꽃이 피는데 마치 생명의 나무를 불태우는 듯~
하늘의 구름도 솜사탕처럼 몽실몽실~

즉, 아를의 자연이 고흐 자신도 몰랐던 화가로서의 본능을 
일깨우고 미친듯이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이 그림을 그리고 2년밖에 못산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아를의 태양과 대기를 보면서
고흐는 희망과 
생명과 태양의 색인 노란색을 발견했다. 

이 포즈는 밀레의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특이한 것은 파란 하늘을 노란색으로 그렸는데
태양의 빛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란 색으로 대지를 채웠다.
푸른 대지에서 사람이 솟아나온 것처럼 그렸다.
모든 것이 희망과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을 그릴 때 고흐의 마음속에는
오직 희망만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이제 노란색을 적극적으로 쓰게된다. 
그 노란색을 많이 쓴 그림이 '밤의 카페 테라스'이다.
아를의 중심 광장
에서 여름밤에 사람들이 식사후 술한잔 할까 이러면서 걸어 오는 그림인데
카페도 
노란색으로 가득 차 있고 별들도 노란색으로 반짝인다.

카페의 가스등 조명에서 
노란 불빛이 나왔지만
이 노란색이 좀 
지나치게 노랗다.
노란색은 고흐의 희망과 생명의 색깔이다. 
그 희망과 생명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론 강 위에 빛나는 별들인 북두칠성이 
엄청 크게
주먹만한 사이즈로 노랗게 빛나고 있고
강가의 
집들이 노란 불빛을 켜고 있고
그 노란 불빛이 강에 길게 꼬리를 끌고 있습다.
지상과 천상이 고요하게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다.

고흐가 테우에게 말했다.

 화가는 죽어서도 죽은 이후에도 그림을 통해서
후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것이다.

고흐는 정말로 그런 안정적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위의 그림을 그린지 9개월 후 그린 그림은 
그 안정감과 차분함이 사라지고
온통 어지럽게 막 소용돌이가 가고 있다.

오른쪽에 달이 지나치게 크게 막 뜨고 
있고
음산한 사이플러스 나무가 있는데
이 그림을 고흐가 그린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평했다.
 최후의 어떤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위태로운 그림이다.

대체 
9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밝고 맑고

안정적이고 고요한 상태에서 어지러운 상태로 변했는가?

바로 
고갱의 등장이다. 
1888 5월에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기로 하고
노란 집에 방 두 개를 빌렸다.

바깥은 노란색, 방안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집이다.
이 건물은 2차 세계대전때 폭격을 맞아서 무너졌다.

아를의 공동생활에 유일하게 답장한 고갱이 방 하나를 사용.
고갱의 방에 장식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그렸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장식한 듯한 느낌을 주고싶어 했다. 
꽃, 꽃병, 테이블, 배경 모두가 노란색인데
다양한 모습의 태양을 그린 듯하다.  
고갱은 대단히 자기의 에고가 강한 사람이었다.
황색 예수는 기독교의 신, 다른 하나는 원시부족의 토템을
배경으로 하고 가운데 자기 얼굴 크게 그렸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과 원시 토템의 신처럼

자신은 예술의 신, 예술의 창조주가 될 것이다는 이야기이다.

대단히 에고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1888 10월에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싸웠다.
고갱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고흐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고흐는 예민하고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이해 11월에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라는 작품을 보면
노란빛이 사라지고 불길해 보이는 녹색과 갈색이 채우고
촛불이 켜져 있고 책이 두 권 있는데
초도 기우뚱하고 책은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다.
초와 책이 바닥
으로 떨어지면 불이 나게된다.
즉, 
파국이 가까이 온다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12월 중순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하고
두 사람은 크게 싸우고 결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고흐는 자기의 귀를 자르는 자해를 하게 된다. 
귀를 자른 상처에서 회복되고 정신착란을 심하게 일으켰다.
정신착란은 거의 한 달을 갔는데 그다음 해 
1월 말이 되어서

조금 정신을 차리고 그린 그림인데 정말 빼빼 말랐다.

그리고 귀가 아직 
낫지 않아서 붕대를 매고 있고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그 붕대 위에 털모자를 쓰고 있고
환자복 위에 녹색 
외투를 입고 있다.

내가 이제 나았으니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뒤에 보면 그림을 그리다가
뭔가 
형상을 뭉갠 캔버스가 보인다.
이것은 고흐의 무의식 속에 있는 불안,
내가 이제 
그림을 더 이상 못 그리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이때부터 고흐 그림에 이런 많은 소용돌이가 등장한다.
의복에 소용돌이가 등장하지만 얼굴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유, 바로 고흐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렇게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과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만
결국 그 싸움은 패배가 예견된 싸움이었다.

아를에서 생 레미 요양원 1년, 이후 오베르 쉬르에 이사갔다.
결혼한 동생 테오와 함께 있을 수 없어
오베르 쉬르의 의사에게 맡겼다.





고흐 -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이 오베르 쉬르에서 두 달 반 동안 70여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거의 마지막에 그린 그림이 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다.

하늘 
가득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고 길이 밀밭 한 가운데서 끊어져 있다.
이는 고흐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이다.

끊어진 길처럼 고흐는 1890년 7월에 이 밀밭에 
들어가서
피스톨로 가슴을 쏘아서 37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총알이 심장을 비켜가서 늑골에 맞았는데 엄청난 고통 속에서 이틀을 더 살아 있었다.
마지막에 테오와 고흐가 만났을 때
아마도 고흐는 태오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했을 것 같다.

그리고 태오는 이듬해 1월에 시름시름 앓
다가 죽었다.
테오는 자기가 형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태오가 이해 5월에 이제 더 이상 그림값을 못보낸다.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가니 형도 형의 인생을 좀 살아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 경제적 지원을 더 이상 해 줄 수 없다는 테오의 말을
고흐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친구이자 자기의 가족인 테우가 자기를 버렸다고 해석한 거 같다.
그러니까 아무도 
자기 주위에 없다라고 판단한 고흐는 결국 절망 속에 세상을 떠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을 다 알고 있었던 테오는 죄책감으로 병을 얻었다.

고흐는 8년동안 800점을 그렸고 그중 단 한점만 팔렸다. 

어찌 보면 테오는 고흐에게 단순히 어떤 형제, 후원자인 것을 넘어서서 영혼의 동반자였다. 

 

프로방스 - 사이프러스 나무와 라벤더 향기

프로방스에서 활약한 예술가들은 전원경 교수의 '예술, 도시를 만나다'의 7장 프로방스, 사이프러스 나무와 라벤더 향기에서 소개되는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가 있어 간단히 리뷰하겠다. 
 
프로방스는 영어로는 지방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프랑스 남동부 지방으로 남쪽은 지중해, 동쪽은 알프스 산맥을 접하고 있다. 거점도시는 마르세유이고 액상프로방스, 툴롱, 니스가 속한다. 

 
* 폴 세잔(1839~1906)은 인상파전에 간간이 참여하긴 했지만 파리가 아닌 고향 액상프로방스의 자연에서 진정한 그림의 대상을 발견했다. 그는 자연을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이지적인 원리로 표현하고자 했다. ... 루브르에 가서 관찰했던 푸생의 고전적 작품들이 가르침을 준 유일한 스승이었다.... 1876년 에스타크에서 "지중해의 햇빛 아래에서 모든 것이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 20년 이상 액상프로방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거듭해 그리면서 세잔의 형태는 점점 추상으로 변모해 갔다. 만년의 세잔은 눈에 보이는 실제 리얼리티를 재현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 속 이미지를 꺼내어 그리고 있다. ... 그는 자신이 본 그대로를 그렸지만, 그 결과물은 형태와 색채로 표현된 화가 자신의 정서적 감각이었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본다".. 세잔에 의해서 19세기 미술의 문이 닫히고 현대 미술의 세계가 열렸다. 
 

<생트 빅투아르 산>, 1904~1906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1907년 파리를 떠나 니스 근처의 작은 마을인 카녜 쉬르메르에 정착하였다. 류마티즘을 앓고 있던 그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만년의 12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르누아르의 인물들은 벨벳 같은 풍만한 부드러움을 되찾았다. 만년의 누드화는 점점 더 화려하고 밝은 색상으로 채워졌다.... 죽기 몇 시간 전, 화가는 팔레트와 붓을 어루만지며 "이제서야 이걸 좀 이해하기 시작했어"라고 중얼거렸다. 

 
<하얀 모자를 쓴 자화상>. 1910년

<Women Bathers>, 1916

 
* 앙리 마티스(1869~1954)는 르누아르의 후배로 니스에서 자신이 원하던 찬란한 은빛 햇살을 발견했다. 마티스는 남태평양과 뉴욕으로 자신의 색채를 찾아 긴 방랑을 하였지만 언제나 니스로 돌아왔다. ...그는 파라솔, 커튼, 병풍, 거울 등 니스의 호텔을 장식한 지중해풍 실내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니스 작품들은 타일이 깔린 마루나 아라베스크 무늬의 벽지 등 이국적인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 

<바이올린이 있는 실내 풍경> 1919년


* 마르크 샤갈(1887~1985)도 니스 근방에서 만년을 맞았다.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미국 망명을 했지만 러시아의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로 프로방스에서 지냈다. ... 방스에서 예술가로 완전한 원숙기에 접어든 샤갈은 필생의 작품인 성서 시리즈에 돌입했다. 

<출애굽기>,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