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과 소감
삼프로 방송의 '아트 앤더 시티'와 '예술 도시를 만나다'를 통해 알게된 전원경 교수의 저서 '페르메이르'를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만났다. 한 미술가의 전체 작품을, 그것도 네덜란드 17세기 화가에게서 비롯되었다는게 나 스스로도 놀랍다. 보고 듣고를 반복하면서 좀 더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는 역량이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PROLOGUE 더 좋은 날들을 기다리며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1664.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은 아마도 남편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여인의 얼굴에 그리움과 기쁨, 그리고 남편과 배 속의 아이를 곧 만나리라는 희망이 엿보인다. 여인이 입은 치마의 노란색과 웃옷의 푸른 색은 페르메이르가 즐겨 쓴 색이다. 특히 페르메이르의 푸른 색은 당시 금보다도 비싼 라피스라줄리를 갈아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선명한 느낌이 살아 있다. |
바다에 있는 남편이 보내온 편지를 아침 일찍 받은게 아닐까하는 가정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인생의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 상황인데 내 나이는 이미 40대였다. 불안하고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암스테르담의 한 펍에 혼자 앉아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모든 일이 잘 될거라는 행복한 확신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그날 이후부터 더 좋은 날들이 내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어찌 보면 그런 평온한 일상이야말로 천국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01 일본에서 만난 페르메이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온 예수: 1654~1655.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남아 있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중 가장 큰 작품이며, 또 유일한 종교화이기도 하다. 페르메이르는 이 그림에서 공간 가운데 있는 예수에게만 빛을 내리쬐게 하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얼굴에는 그늘을 드리워서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페르메이르전 관람. 페르메이르의 초기 일부 작품 등을 감상.... 마리아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예수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선택한 좋은 몫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 마르다는 자신의 섭섭함을 표현하기보다 예수의 말을 납득하는 듯한 표정이다.
디아나와 님프들: 1653~1654.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최근까지 그림의 오른편 위쪽, 칼리스토 뒤편에는 밝은 하늘과 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2000년에야 미술관 측은 이 하늘 부분이 1840년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덧칠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림을 원상태로 복원했다. |
저자가 헤이그에서 관람....페르메이르의 첫 완성작이며, 그림의 하단 왼편에 그의 서명이 남겨져 있다. .... 님프 한명이 사냥과 달의 여신 디아나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 임신한 칼리스토는 처녀신의 무리에 속하기 겸연쩍은 듯한 표정으로 동료 님프들과 조금 거리를 둔 위치에 떨어져 있다. ... 옷을 입혔다는게 오히려 특이하다,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여신들은 대부분 누드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뚜쟁이: 1656. 고전거장미술관, 드레스덴 그림의 맨 왼편, 술잔과 악기를 든채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페르메이르 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얼굴은 작가가 남겨놓은 유일한 자화상인 셈이다. 그러나 화가는 남자의 얼굴을 교묘하게 그늘 속에 가려놓았다. |
페르메이르의 세번째 작품으로 자신의 장르를 풍속화로 결정. 환한 노란색의 옷을 입은 창부, 그녀의 가슴을 은근히 만지면서 은전을 쥐어주는 남자, 창부와 남자의 거래를 부추기는 듯한 뚜쟁이 노파, 그리고 맨 왼편에 어둠에 싸인 채로 정면을 보는 남자... 오직 여자만 빛을 받고 있다. . ... 집중된 빛,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차지한 어둠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카르바조의 명암기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 도덕성 강조하는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장면인데, 당시 풍속화가들은 가끔 경계해야 마땅한 장면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02 근면하고 엄격한 상인의 나라, 17세기 네덜란드
페르메이르는 1632년 델프트에서 태어나 1675년 사망했다. 40년 조금 넘는 생애를 살았고 짧은 몇 번의 여행을 제외하면 그 시간 내내 델프트에만 머물렀다. .... 1650년으로만 한정지어도 이 당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현역 화가의 수는 700여명에 달했고.... 수많은 화가들이 무한 경쟁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황금시대라 불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권력은 시민계급의 손에 쥐여져 있었고 모든 그림은 자연히 시민들의 기호에 맞춰 그려졌다. .... 이들은 성서의 내용을 그리는 종교화가 아니라 대신 풍속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트로니 등 갖가지 새로운 주제를 담은 그림들을 그렸다.
네덜란드는 라인 강 등 세 개의 강이 북해로 흘러 들어가면서 만들어낸 일종의 삼각주다. 자연의 법칙대로 이 삼각주는 넓고 평평하며 매우 습한 동시에, 강물이 싣고 온 영양분이 풍부한 퇴적층이 쌓인 지역이다. 네덜란드의 국토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농사가 잘 될 수 있는 터전인 동시에 저지대여서 홍수나 침식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척박한 자연 환경 때문에 네덜란드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한 시기는 유럽에서 가장 늦은 편이다. 11세기경, 네덜란드 주민은 비옥한 습지를 이용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내서 강물이 바다로 빠지도록 만들었다. 면적의 1/4 가까이가 바다보다 낮은 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방을 쌓아 개간한 땅에도 물은 계속 차올라서 끊임없이 이 물을 풍차를 이용해 배수로로 빼내야 했다..... 수도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암스텔강에 쌓은 댐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던 플랑드르(저지대)라 불리던 이 지역은 종교개혁의 와중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분열된다. 1568년 과중한 세금에 반발한 북부 7개주가 스페인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이 독립전쟁은 1609년 휴전을 통해 사실상 독립을 쟁취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정식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때 네덜란드는 군주도 귀족도 없는 공화국체제를 선택했다. 이후 1806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200여년 시민국가라는 독특한 국가 체제를 고수했다. .... 플랑드르 남부는 가톨릭 세력권으로 남아 지금의 벨기에가 되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 그림의 밑바닥에는 근면함과 신실함을 강조하고 게으름이나 사치, 허세를 용서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다. ... 이 가치관은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듯싶다. ... 신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 실용적이고도 엄격한 시민사회가 낳은 네덜란드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03 빛과 바람은 그대로 있었다, 델프트
확실한 점은 페르메이르가 만년을 제외하고는 그리 쪼들리거나 가난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그가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는 점은 사실인데, 그림 그리는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싼 재료를 쓰는 스타일이고, 부부는 열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고 그중 열한 명이 생존하여 아이들을 키우는데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 1672년 프랑스와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사망 후 아내는 파산 절차를 밟았고 이 와중에 그의 모든 그림을 내다 팔아야 했다.
페르메이르 기념관 2층에 꾸며진 페르메이르 스튜디오의 창: 기념관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스튜디오를 재현한 방이 있다. 화가가 썼을 법한 여러 물건과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벽과 창 등도 당시 모습처럼 꾸며놓았다. 특히 와인 글라스, 와인을 권하는 남자 등 화가의 그림에 등장한 창의 색유리를 재현해 놓아 화가가 그림을 그리며 보았던 빛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열린 창 앞에서 편지를 읽는 여자: 1659. 고전거장미술관, 드레스덴 페르메이르가 풍속화로 작품의 방향을 전향했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그림이다. 그림 크기에 비해 여성의 모습이 너무 작다는 단점이 있지만 페르메이르 특유의 부드럽고 시적인 느낌이 확연히 나타난 첫 번째 그림이기도 하다. 왼쪽에 나 있는 창과 그곳을 통해 들어온 빛이 여성을 비추는 장면은 앞으로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
와인을 권하는 남자: 1659. 헤어초크 안톤울리히 미술관, 브라운슈바이크 여자에게 술을 권하는 남자와 남자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웃고 있는 여자. 창가에서 졸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잠들어버린 남자의 양심을 상징한다. 초상화 속의 아버지는 철없는 딸에게 엄격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창문의 색유리, 접힌 자국이 선명한 흰색 식탁보, 여자의 주홍빛 치맛자락 등 치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은 무언가를 손에 든 여자의 형상이 보이며, 이 여성은 절제를 상징한다. 테이블 위에는 '인생의 맛은 보기보다 시다'는 교훈을 주는 과일인 레몬이 놓여 있다. 방의 뒷벽에 걸린 그림은 나이 든 남자의 초상인데, 여자의 아버지로 생각되며 확실한 경고를 준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정면이나 오른편을 본다면, 그녀는 절제, 인생의 신맛, 아버지의 시선이라는 3중의 엄중한 경고에 번적 정신을 차릴 것이다.
와인글라스: 1659. 국립회화관, 베를린 와인을 권하는 남자와 거의 동일한 구도와 주제이지만, 이 그림속 남녀에게는 연인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흰 두건을 쓴 채 와인글라스 끝을 살짝 들고 와인을 마시는 여성의 모습이 우아하다. 배경에 걸린 그림 역시 서정적인 느낌의 풍경화이다... |
두 남녀는 연인이기는 하지만 지금 막 연인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남자의 눈빛에는 어두운 욕망이 번득이고 있지 않을까? .... 최종적인 해석은 '아무리 연인이라 할지라도 서로 절제하지 못하면 위험한 순간에 빠질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일 수 있다.
골목길: 1658.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차분하고 고요한 골목길의 풍경이다. 낡았지만 깨끗이 정돈된 두 채의 집이 나란히 서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지점은 화가의 생가에서 멀지 않은 플라밍 거리 40~42번지 사이로 추정된다. 화가는 두 채의 집을 꼼꼼하게 그린 반면, 네 명의 등장인물은 마치 그림 속 정물처럼 간결하게 표현했다. 이 그림 속 두 아이는 화가의 실제 자녀들 이었을지도 모른다. |
풍경화의 주제가 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데, 화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일상은 이토록 평온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흘러간다'는 이야기 말이다. 왼쪽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한 여인이 막 청소를 마친 듯, 물통을 내려놓고 있다. 오른쪽 집의 안에 앉은 여인은 바느질을 하는 듯싶다. 오른편 집앞에는 아이 둘이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다.... 그림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다. 집의 안팎을 청소하고 바느질을 하는 일은 주부의 의무이며, 아이들은 사이좋게 뛰놀면서 서로를 배려 할 줄 아는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은 거창하게 꾸며진 교회가 아니라 이렇게 평화롭고 성실한 일상 속에 함께한다고 믿었다.
델프트 풍경: 1660~1661.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여름 아침, 델프트로 들어가는 운하입구를 그린 그림이다. 운하 양쪽으로 각각 스히담 수문과 로테르담 수문이 있다. 이 지점은 17세기 당시 델프트를 찾는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관문이었다. 운하 너머 시가지는 구름이 만든 그늘 속에 덮여 있지만 유독 신교회의 첨탑만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
17세기 당시에 화가의 시선, 이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운하를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신만이 하늘 높은 데서 델프트를 굽어볼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모습은 창세기에 나온대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할 만한 풍경이었다.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서 그 자신의 모습으로 빛난다. 평범한 여름날 아침의 풍경에서 천국을 끄집어낼 수 있는 화가, 그가 페르메이르였다.
04 일하는 여자는 아름답다, 암스테르담
우유를 따르는 하녀: 1660.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칼뱅파 개신교는 일상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어떤 일이든 간에,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선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칼뱅파의 가르침이었다. 화가의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노동의 고귀함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평범한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하녀의 모습은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 속에서 성모의 모습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화가는 한 사람만을 그린 그림의 뒷편에 보통 '그림 속 그림'이나 지도 등을 넣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부엌의 흰 벽에 아무 것도 걸지 않았다 |
화가는 요리 도구와 재료 등을 모두 치우고 부엌을 텅 비움으로써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림의 한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하녀에게 집중하게 된다..... 부엌으로 비쳐 들어오는 아침 햇빛은 반투명한 젖빛 유리로 인해 원래의 빛보다 상당히 부드러워진 상태다. 오직 하녀의 이마에만 깨진 유리창을 통해 강렬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남자처럼 벌어진 어깨도 화가의 다른 그림에 등장하는 가녀린 아가씨들과는 천지 차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성스러움은 그녀의 앞치마가 보통 성모의 푸른 망토를 칠할 때 사용하는 라피스라줄리로 칠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 화가의 시점은 최소한 하녀의 어깨 밑으로 내려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저절로 이 처녀를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따르는 우유를 보느라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다. ...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그런 그녀를 축복하듯 밝은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와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진다. 천국은 이처럼 근면한 자들의 것이다라는 신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벽은 비어있는 듯하지만 사실 비어 있지 않다. 우선 하녀의 좌우 어깨를 비교해보면 빛과 그늘이 확연히 다르게 그려져 있다. 하녀의 왼쪽 어깨와 팔, 엉덩이 부분은 그늘이 되어서 흰벽에 선명한 윤곽선을 만들어 주고 있다.
레이스를 뜨는 여자: 1669~1670. 루브르 박물관, 파리 여자의 손동작만으로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화가는 그림의 전면에 색색가지 실과 쿠션 등을 대담하게 흩어 놓아 지금 그녀가 레이스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짐작하게 만든다. 처녀는 누군가가 보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레이스 뜨기에 열중해 있다. |
일하는 여성의 모습은 온화한 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고, 일상은 이렇게 반짝이며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교적인 교훈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그리 먼 데 있지 않다는 지극히 이 화가다운 결론이 그림의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 1671.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편지를 쓰는 여인을 이토록 빛나게 하는 것일까? 벽을 거의 차지하다시피 하는 그림 속 그림은 이집트 공주가 아기 모세를 담은 바구니를 나일강에서 건져 올리는 장면을 담고 있다. 민족의 구원자가 될 모세의 운명처럼이 편지를 주고받는 남녀 역시 운명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색유리가 깨어진 창으로 무심하도록 환한 봄의 햇살이 들어온다.. |
아가씨 뒤에 서 있는 하녀는 두 연인 사이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할 참이다. 이제 곧 아가씨는 곱게 접은 편지를 주면서 연인에게 전해 주기를 부탁할 것이다. 편지 쓰기에 몰두한 처녀와는 별개로 하녀는 창으로 들어오는 봄볕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다. 잿빛 유리창에서 들어온 온화한 빛이 크지 않은 방안과 그 빛 속에 있는 두 여성을 부드럽게 감싼다. 빛의 색깔처럼 반투명한 크림색 커튼이 창을 반쯤 가리고 있고 그림의 전면에도 침착한 느낌의 녹색 커튼이 걸려 있다. 우리는이 전면의 녹색 커튼을 막 젖히고 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7세기 네덜란드의 검소한, 그러나 기품있는 여염집의 방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림 속 그림이 보여주듯 이 아가씨의 상대가 정말로 운명으로 맺어진 사랑이기를, 두 사람의 진심이 서로에게 가닿기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기원하게 되는 것이다.
여인과 하녀: 1666~1667. 프릭컬렉션, 뉴욕 머리를 곱게 장식하고 귀고리를 단 여인이 하녀에게 모종의 전갈을 받고 있다. 그녀는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은 눈치다. 우리는 하녀의 여유로운 표정에서 그 질문과 대답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05 미소 속에 담긴 수수께끼, 헤이그
진주 귀고리 소녀: 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소녀의 귀고리만큼이나 눈망울과 입술이 투명하게 빛난다. 소녀의 뒤편 배경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치고는 이례적으로 검은색이다. 2020년 4월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측은 2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림의 배경이 검은색이 아니라 초록색 커튼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소녀의 눈과 입술이었다. 물기 머금은 연회색의 눈망울이 진주보다 더 명징하게 빛났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보는 이와 눈을 맞추는 소녀는 금세라도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을 할 것만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그림은 치밀한 완벽주의자 페르메이르의 작품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대담했다. 가장 꼼꼼히 그린 부분은 검은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얼굴의 소녀가 홀연히 떠오르는 듯한 인상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왜 보는 이를 대번에 매혹시키는가?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어둠 속에서 홀연히 떠오른 소녀의 얼굴은 살아있는듯한 생동감으로 빛난다. 금방이라도 보는 이들에게 입술을 달싹여 말을 걸듯한 분위기다. 이 그림의 탁월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동시대 네덜란드 화가들은 그림의 모든 요소를 치밀하고 꼼꼼하게 그렸다. 페르메이르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유독이 그림에서만 화가는 최소한의 터치와 최소한의 색감을 사용해 그림을 완성시켰다. 여러 겹으로 색을 겹쳐 칠하긴 했으나 우리의 눈에 뜨이는 색감은 검정 흰색 노랑 파랑 정도뿐이다. 이 단순함과 대범함이 오히려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누구나 한 번은 젊은 날을 맞지만 그 젊은 날을 영원히 붙잡을 수는 없듯이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빛났던 페르메이르의 천재성은 다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는 여전히 눈부신 반짝임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 복원 전후의 그림 비교
병사와 웃고 있는 젊은 여인: 1657. 프릭컬렉션, 뉴욕 여인에 비해 그림의 전면에 앉아 있는 병사의 모습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다. 육안으로 볼 때는 앞쪽에 앉은 사람이 이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다. 페르메이르는 이 작품의 밑그림을 구성하며 카메라 오버스쿠라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젊은 여자의 얼굴: 1665~166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진주 귀고리 소녀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트로니다. 그림 속 모델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 숄을 두르고 머리를 뒤로 넘겨 묶었다. 자세히 보면 이 소녀 역시 진주 귀고리 소녀에 등장하는 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진주 귀걸이 소녀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움과 놀라운 광채를 찾아볼 수 없다. |
붉은 모자를 쓴 소녀: 1667. 미국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진주 귀고리 소녀를 완성한 후 그린 트로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진주 귀걸이 소녀보다 명백하게 떨어진다. |
플루트를든 소녀: 1670. 미국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붉은 모자를 쓴 소녀와 동일한 모델을 그린 그림이다. 페르메이fm가 일부만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다. |
잠든 하녀: 1656~165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고단한 표정으로 잠든 처녀의 등뒤로 누군가 방금 나간 듯 문이 열려 있다. 어둠 속에 걸려 있는 그림 속 그림의 주제는 기만의 상징인 가면이다. 문을 막 열고 나간 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의 술을 마신 이는 그녀를 기만하고 있는 남자가 아닐까? |
버지널 앞에 선 여인: 1670~167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 작품도 어찌 보면 관람객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듯하다. 여인의 뒤에 걸린 그림 속 큐피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카드를 내보인다. 이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이번 한번뿐이라는 뜻이다. 페르메이드의 숨은 의도는 얌전한 척하면서 남자의 마음을 뺏는 요염한 여인을 그리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
회화의 기술: 1666~1668. 빈 미술사박물관, 빈 환한 빛으로 가득찬 스튜디오에서 베레모를 쓴 화가가 고요한 표정의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담은 그의 명함과도 같은 걸작이다. 아마도 페르메이르는이 작품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걸어 두었을 것이다. 화가의 사후 그의 유족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
페르메이르 자신을 홍보할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면 스튜디오는 패르메이르의 실제 스튜디오보다 더 근사하게 그려졌을 공산이 크다.
신비로워 보이는 이 젊은 여성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모든 모델들을 한 몸에 압축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페르메이르 연구자들은 그녀가 역사의 뮤즈 클리오라고 추측한다. 그녀가 든 책은 역사를, 트럼펫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한다.
저울을 든 여인: 1664. 미국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한때 금을 다는 여인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졌던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인이 든 저울은 비어 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은 보석이나 재화가 아니라 곧 태어날 아이의 영혼의 무게를 달아 보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위쪽에서 들어오는 빛과 벽에 걸린 그림 최후의 심판이 작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 준다. |
결정적으로 왼편 위에서 들어온 빛 때문에 방안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다른 실내보다 어둑하다. 위에서 내려오는 빛은 신의 은총처럼 느껴진다. 곧 아이를 낳을 여인은 자신의 아이가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선한 영혼으로 태어나기를 간구하고 있는게 아닐까. 선한 영혼은 그 무게를 달 수 없으며 테이블에 흩어진 여러 보석이나 동전보다 훨씬 더 존귀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천문학자: 1668. 루브르 박물관, 파리 천문학자는 경외감이 담긴 손길로 천구의에 손을 대려하고 있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천구의 자체가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
지리학자: 1669.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이 그림의 실내 구조는 천문학자와 상당히 비슷하다. 천문학자에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천구의가 방의 뒤편 캐비닛 위에 올려져 있다. |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있는 천문학자의 얼굴은 긴 수염 때문에 얼핏 장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얼굴을 꼼꼼히 들여 뜯어보면 그리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이 아니다. 페르메이르는 천문학자와 지리학자 두 그림의 모델을 달리 보이게 하려고 굳이 없는 수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천문학자와 지리학자의 얼굴은 볼수록 비슷하다.
07 화가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 런던
신앙의 알레고리: 1670~167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탄식하는 표정으로 지구본을 밟고 있는 여자, 바닥의 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림, 천장에 걸린 투명한 유리공. 모든 면에서 기존 페르메이르 그림과는 달라 보이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페르메이르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프랑스 풍의 화려한 작품을 그려야만 하는 처지에 몰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
1672년은 네덜란드 역사에서 재난의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해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네덜란드는 패배했다. 프랑스, 영국, 바이에른 왕국 등과의 전쟁에 계속 휩쓸리며 네덜란드 전체의 경제 상황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의 작품도 또 그가 거래하는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 .....1674년 큰딸이 결혼해 집을 떠나긴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부양해야 할 아내와 10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이런 곤궁함과 빈곤에서 오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결국 화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마흔 셋, 화가로서도 한 남자로서도 아까운 나이였다.
기타 연주자: 1672. 켄우드하우스, 런던 페르메이르의 그림 치고는 이례적으로 빛이 오른편에서 들어오도록 설정되어 있다. 기타 연주자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화가 특유의 고요함과 시적 정서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준다. 밝고 환한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페르메이르는 날로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쪼들리고 있었다. |
어느 평론가는 이 그림을 두고 페르메이르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 페르메이르 사후 아내 카타리나는 빵장수에게 그동안 밀린 외상값 대신에 남편의 그림 두 점을 주었다. 이 그림과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이다.
음악 레슨: 1660년대 초, 로열컬렉션, 런던 버지널을 연주하는 처녀의 뒷모습과 음악 선생의 옆모습만 보이는 그림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읽히는 듯 싶다. 거울에 비친 처녀의 시선은 건반이 아니라 악기에 놓인 선생의 손 쪽으로 향해 있다. 넓은 방 탁자를 덮은 원색의 카펫, 은뚜껑이 달린 흰 주전자 등이 처녀의 집이 넉넉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악기는 헛된 꿈이나 관능적인 여성의 몸매 같은 부정적인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더 많은 풍속화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남녀를 통해 그들이 키워나가는 연애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류트를 연주하는 여자: 1662~1,663.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손으로 류트를 조율하고 있지만 처녀의 신경은 온통 창밖에 쏠려 있다. 그녀가 듣고 있는 것은 류트의 음이 아니라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일지도 모른다. 처녀의 큰 눈이 기대와 갈망으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
가장 환히 빛나는 건 단연 처녀의 이마와 눈이다. 생기와 총명함이 깃든 큰 눈에는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바로 빛나는 사랑의 순간이다.
연애 편지: 1669~1676.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페르메이르는 관람객이 두 여성이 있는 공간 바깥에서 안쪽을 몰래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도록 화면을 좁고 길게 구성했다. 여유로운 표정의 하녀가 시턴을 연주하던 여성에게 편지를 건네고 여성은 놀란 표정으로 하녀를 본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중일지 관람객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
성녀 프락세데스: 1655경, 국립서양미술관, 도쿄 무릎을 꿇은 채로 손에 든 해면을 짜내 예수의 피를 항아리에 담고 있는 성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특이한 점은 이 그림이 이탈리아 화가 펠리체 피체레리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정말로 페르메이르가 이 그림을 그렸다면 그가 도제 시절에 연습 삼아 그린 결과물일 것이다. |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 1670~1672, 레이던컬렉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허술한 느낌을 주며 여성의 표정 역시 생기가 없다. 진위여부의 결론이 명확히 나지 않은 이유는 이 그림의 소장자가 페르메이르의 후원자 판 라위번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EPILOGUE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콘서트(혹은 이중주): 1663~1665. 행방불명 1990년 3월 18일 밤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드 가드너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작품이다. 거액의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행방은 현재까지 묘연하다. |
책 소개
‘북구의 모나리자’ 〈진주 귀고리 소녀〉의 거장
페르메이르가 빚어내는 고요하고 온화한 세계를 만나다
천국을 끄집어낼 수 있는 화가,
그가 페르메이르였다.”
- 전원경
페르메이르가 평생을 보낸 델프트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예술의 도시 빈까지
‘빛의 마술사’ 페르메이르의 흔적을 더듬다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거장 페르메이르. 좁은 땅에 1천여 명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고요하고 내밀한 작품 세계와 베일에 싸인 생애 때문에 ‘델프트의 스핑크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클래식 클라우드 21 『페르메이르』는 수수께끼 같은 페르메이르의 작품들과 그보다 더 수수께끼 같은 그의 삶을 다루며 페르메이르가 빚어내는 평온한 빛의 세계로 안내한다. 저자인 전원경 작가는 세심한 눈길로 페르메이르의 작품 전작을 톺아보며, 델프트와 암스테르담, 헤이그에서 빈과 런던까지 거장의 흔적을 따라나선다. 페르메이르의 모든 작품을 수록한 친절하고 깊이 있는 안내서이자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빠짐없이 다룬 전원경 작가의 이번 책은 마법 같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세계를 다룰 뿐 아니라 일상의 빛나는 찰나를 포착하는 그의 눈을 통해 우리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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