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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과 브뤼셀 (예술, 도시를 만나다 + 아트 앤더 시티): 전원경 (2024.7.10)

클리오56 2024. 7. 11. 09:23

 

 

* 네덜란드인은 유럽에서 가장 키가 크면서 날씬, 평균 키 182cm, 영어 실력이 대단, 상인의 도시라 친절함의 가면을 쓴듯. *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KLM 항공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 암스테르담은 운하가 많고 좁고 긴 집이 많다. 건물주는 (무역)상인, 건물에 갈고리가 있어 운하에서 직접 짐을 끌어올리는 용도로 사용. 

* 땅이 진창이었고 국토의 1/4이 해수면 이하의 저지대로 운하가 많아서, 교통수단이 자전거. => 늪지대의 악조건에서 극복하고 살아간다. 살기 위해 영어, 독어, 불어 등 유창. 겉보기의 화려함은 약하지만 근면, 규칙을 준수하며 겉은 친절하며 실리를 중시.  

* 튤립 축제는 대규모이고 화려. 잊을 수 없는 장관. 풍차는 물이 차오를 때 물을 퍼내는 장치로 활용 

* 저지대라 산이 낮고 그런 풍경을 그린 화가들이 많다. 지평선의 독특한 풍광, 소박한 삶의 자세, 악조건에서 피어나는 예술을 그려낸다. 그럼에도 17~18세기에는 유럽에서 제일 부유했다. 유대인처럼 선민의식이 작용. 구약성서를 좋아함. 

하늘이 3/4을 덮고 땅은 1/4에 불과. 언덕이 없다.
천을 말려야하는데 그 쪽에만 햇빛이 있다.
즉,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신의 가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민의식. 지평선의 교회 건물.
안네 가족이 2년이상 살았던 건물.

노르망디 상륙작전 2달 후에 체포,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후
3달 뒤 해방. 일가족 8명 중 아버지만 생존.

안네의 일기는 부친이 첨삭하여 출판. 

 

베네룩스 3국은 새의 형상. 벨기에가 몸통, 네덜란드가 날개, 룩셈부르크는 새의 발. 

경상도와 전라도 정도의 크기라 투어에 좋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 사용.
네덜란드어는 독일어와 비슷하여
네덜란드인은 기본적으로 독일어가 가능.
벨기에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사용. 

벨기에는 EU본부가 있어 보다 국제적인듯 하지만
그렇게 영어는 잘못한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이 분리운동도 있다.
네덜란드어권이 부유.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시청앞 광장
이 건물들은 1300~1400년대이다.
즉, 이때는 벨기에가 잘 살았다는 뜻인데
고급 직물 수출 덕분이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정어리 수출이라 가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100년 전쟁의 하나인
1346년 크레시 전투

100년 전쟁 발생 이유의 하나로
영국의 양모를 플랑드르의 직물기술에 접합시키는 것.

 

플랑드르 화파
 얀 반 에이크: 플랑드르 학파의 창시자, 미술 사상 최초의 초상화, 유화를 발전 
<자화상>, 1433년
최초의 초상화
얼굴 주름 섬세한 묘사, 머리에 둘러싼 빨간 터번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 1434년
결혼 당사자는 부자. 신부는 옷감을 아끼지 않고 사용한
녹색 드레스, 샹들리에와 침대, 카펫 등. 
침대는 다산, 붉은 휘장은 정열을 상징
녹색과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로 현대적 이미지 
거울 속에 결혼 증인 2명, 1명은 반 에이크 본인 

 

중앙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좌측은 이 그림을 성당에 기증하는 기증자들 모습 
우측은 목수 요셉

중앙을 보면 15세기 초반 부유한 플랑드르 집안 모습
원목 테이블, 의자, 벽난로, 쉐이드, 놋쇠주전자, 화병 등
세속적인 부유함과 안락함이 강조.

수태고지가 집안에서 발생하는데 날씨가 좋지 않기 때문.

직물기술이 발전했기에 아주 꼼꼼한 그림 
보닛의 접힌 자국, 핀까지 그려짐

* 미켈란젤로: 플랑드르 화가들은 모든 것을 그리려다
하나도 그리지 못하고 말았다.


 

* 16세기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가 플랑드르를 지배. =>  북부 7주(네덜란드)는 1579년 독립을 선언. 칼뱅파 개신교가 표면적 이유. 실제로는 청어무역 극복하고 가성비 좋은 무역으로 부유해졌기 때문. 유대인 덕분으로 크게 부흥. 세금문제. 공화국 체제를 확립하여 나폴레옹 침공시기까지 200년간 유지. 이상하게도 지금은 왕국.  

* 벨기에는 1839년에야 벨기에로 독립 

네덜란드 독립전쟁: 홀란트 등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하면서, 15817월 독립을 선언하고 빌렘 1세를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웠다.
 
1584년 빌렘 1세가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된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던 중,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데다 1598년 펠리프 2세가 사망함으로써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리프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하였다.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종식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의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 네덜란드가 먼저 동인도 회사 설립. 1799년까지 존속했는데 당시 세계 제일 회사. 17천명의 군대 보유. 1608년 세계최초 증권거래소 창설. 전세계 물동량 75%가 암스테르담 경유. 그 전에는 베네치아. 종교에서 열린 자세라 발전. 

일본 막부가 쇄국을 할 때도 네덜란드에게는 무역을 허용. 
1700년대에 일본-네덜란드어 사전 발간. 

가장 비싼 튤립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1637년 구근 하나에 5,200 길더
당시 황소 한마리 120길더 
램브란트 야경 1,600 길더

튤립 원산지는 파미르 고원. 
꽃의 여왕 자리를 장미에서 튤립으로 이동 

그근에서 어떤 꽃이 필지 모르는데, 미리 구매 (선물의 시초)
술에 취해 남편은 매춘부와 함께, 아내는 술에 취해 졸고 있다.
매춘부는 숨겨놓은 돈을 빼내가고 
사계를 풀어가고
집안살림이 엉망이라 돼지가 들어와 주어먹는다.

창밖에서 개가 뛰어들어와 차려진 음식을 먹고
피리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게 당시로는 긍정적이지는 않다.

이렇게 흥청망청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에 가는 끈 하나로 연결된 바구니의 목발이 떨어진다.

결국, 목발은 건강을 잃고 어려운 처지로 빠진다는 의미.

칼뱅파: 근면하게 돈을 버는 것은 좋으나
이를 자랑하거나 흥청망청 사용하는 것은 나쁘다.
부자와 모녀가 각각 같은 검정 옷을 입고 있다. 
당시 부자라하여 옷을 잘 차려입는 것은 비난받는 일이다.

흑인 소녀는 하녀인데,
하녀를 사용할 만큼 부자라는 것을 은근히 표현.

혹은 정원에 튤립, 특히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심으면
엄청난 부자임을 알 수 있다. 

 

* 이렇게 철저히 실리를 따지는 상인들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화가가 많이 배출되었는가? 

=> 플랑드르에서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는 성상과 성화로 교회를 장식하는 것이 터부시된다. => 1566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 북부 7주는 이미 독립했고, 남부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1839년 벨기에로 독립했다. => 가톨릭에서는 파괴된 성화 대체 필요. 이때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화가 루벤스 등장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인 루벤스
1620년부터 1640년까지,
20년 이상 전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군림했다.
베스트팔렌 조약 전후로 유럽 각 국가에서 자리잡은
절대 왕정도 루벤스의 활약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영국, 플랑드르, 스페인, 프랑스의 궁정이 그를 원했다.
우리가 오늘날 유럽의 미술관 어디서나
루벤스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성화에도 능했지만 루벤스의 진가는 바로 역동성과 관능,
우아함이 넘치는 그리스 신화의 재현에 있었다.
루벤스는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만년까지 부유한 삶을 살았고 그의 작품들은 훗날 들라크루아와 르누아르에게까지
긴 궤적을 남겼다.

* 루벤스는 10년 가까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그림 유학.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카르바조의 화풍을 습득.
'플란다스의 개'에서 넬로가 보고 싶어했던 그림

이런 성당 그림이 가장 큰 수입원이고
다음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 
 <파에톤의 추락>, 1604~5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1636~1638년
안토니 반 다이크 (1599~1641)는 19세에 화가 길드에
가입하였고 곧 루벤스의 수석 조수가 되었다.

1628년 이사벨라 여왕의 궁정화가
곧 영국 왕 찰스 1세 궁정화가로 초청

초상화에는 루벤스의 작품과는 다른 예리함과 우아함,
우수가 깃들어 있다. 
네덜란드에는 성당, 왕족과 귀족이 없어서 수요가 제한.
신 종교적 분위기를 주는 정물화가 유행.

바니타스(헛되다)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골, 술병, 칼, 책, 악기, 불꺼진 램프, 소라껍질 들은 
영혼이 빠저나간 육신을 뜻한다.
해골, 램프, 소라껍질은 죽음, 유한한 생명을 뜻함. 

술이나 악기가 의미하는 쾌락도
칼이 의미하는 권력도 
책이 의미하는 지식도 모두 소용이 없다. 

왼편에서 빛이 들어오는데 그 끝은 십자가일게다. 
즉, 죽음, 쾌락과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최고의 초상화가

부유한 상인들이 의뢰 

(자화상 80여점)
초상화 청탁시 유의사항
1. 자기의 직업이 보이도록 한다. 자신의 자긍심이니까. 
2.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을 보이게 하라. 단, 은근하게. 
=> 모피 모자와 외투. 정전기 발생한 흔적 좋은 털이라는 의미 
3. 눈은 충혈, 홍조. 즉 80세인데 은퇴하지 않고
밤 새워 일하고 청구서 체크한다. 
엄지손가락은 비정상적으로 큰데, 평생 험한 일한 흔적. 

이렇게 스토리를 제공하는 그림  
(부유하면서도 근면한 상인)
시민계급이 좋아했던 집단 초상화

해부학을 공개강의중이고 시신은 사형수의 것.
잘못된 점은 해부는 배부터 가르고 시작.

겸자로 힘줄을 잡아당기고
그 힘줄에 의해서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것을 설명. 

집단초상에서도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었다. 
보통의 집단초상화의 그림 
모두 돈을 내었으므로 1/N씩 그림에 나와야 한다.  
렘브란트는 영광의 정점에서 무너진다.

민간경비대가 의뢰한 그림. 
대장이 손을 내밀며 부관에게 모두 모이라고 지시하는 장면.
모두들 무질서하게 서있는데 민간자경대이기 때문,
한 여성이 허리에 닭을 차고 있는 이유는
자경단의 상징이 닭이기 때문. 

렘브란트 작품의 예술성에 감탄했지만 
다음에 아무도 작품의뢰를 하지 않았다. 
(=> 등장인물들이 균등하게 화면에 등장했어야 한다.)

* 작품이 원래는 더 환했는데 보존 문제로 어두워졌다. 
작품 속 여성은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를 닮았는데
그 무렵 아내는 다섯째 아이를 출산후 죽게되었다. 
그들이 원한 작품은 
1/N씩 돈을 냈기 때문에 평등하게 그려야했다. 
이 작품 처럼....
렘브란트는 수집광이었고,
파산 당시의 기록에 따라 모은 것이다.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에서
자신은 탕자, 부인을 매춘부에 비유..

렘브란트는 젊을 때 이만큼 오만방자한 생각을 지님. 
다섯아이중 하나만 살았는데
그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고용.
유모와 사실혼 관계로 비난 받음. 
당시의 암스테르담 분위기로는 용납이 안됨. 

20대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점점 나락에 빠짐. 
네덜란드 사람들은 구약을 좋아해서 구약 이야기를 그림.

다윗이 장군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장군을 멀리보냄.
궁으로 들어오라는 다윗의 쪽지를 받고
울수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의 표정.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인간이 낙담하고 절망하는 모습
=> 렘브란트 자신의 심정도 이런 처지 

렘브란트가 죽기 얼마전 그림

십계명판을 들어올린 모세는 영웅이 아니라
자기 앞에 벌어진 상황에 대하여 울분을 느끼고
너무 속상해서 울고 싶은 얼굴  

렘브란트의 작품엔 영혼이 들어있다는 느낌의 작품이 많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코가 빨개지고
얼굴 피부도 좋지 않아 죽음에 바싹 다가선 모습. 
조금도 미화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

청탁도 들어오지 않는 그런 상황.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은 렘브란트의 영향. 

* 작년 8월 영국 내셔날갤러리 명화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전시 작품중 가장 감명 깊었던 작품....  




자신을 탕아로 표현한 30여년 후 죽음 앞에서
그는 다시 자신을 탕아로 그리는데

탕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머리를 빡빡 깎고 
한쪽 신발은 다 떨어져서 한쪽밖에 신발 안 신고 있고
왼쪽 발에는 발바닥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가 나있다.

이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탕아를
아버지가
따뜻하게 안아 주는데
어찌 보면 이 아버지는 램브란트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을 받아줄 신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다 읽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자기보다 먼저 죽고 두 번째 아내도 자기보다 먼저 죽었고
그리고 파산했고 모든 재산은 다
경매에 넘어간 상태에서
죽음 앞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어차피 팔리지 않을 그림이라 테크닉을 생각하지 않았고
하여 어떤 위대함과 감동이 주어졌다.

 

* 레이크스 뮤지엄: 1880년대 건축, 왕립미술관, 당시 네덜란드에서 제일 큰 건물, 실용적 스타일의 시청 건물같은 느낌.

건물 2층의 영광의 길 맨끝에 렘브란트의 야경이 위치. 

 

그림 사이즈가 세로 50cm가 안되는 소품이지만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림이 반짝거림이 있고 사연이 있기 때문. 
색감이 상당히 세련: 치마의 청색, 토기, 벽  

여성이 일을 열심히 하고
그 시선이 우리를 보는게 아니라 일에 집중

렘브란트가 그리는 초상화가 인기있었고
다음으로는 사연이 있는 풍속화가 차지. 

상인들은 재미있고 예쁜 그림, 교훈, 매각시 차익 기대
=> 풍속화가 그런 기대를 충족 

젖빛 유리가 있고 시간은 아침이다.
하녀는 주인의 아침식사로 호밀빵에 우유를 준비하는데
아주 부유한 집은 아니고 여염집이다.

지저분한 환경이 아니라 낡았지만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는 하녀를 그렸는데...

젖빛 유리창에서 구멍 하나를 통해
빛이 들어와 하녀의 이마를 비춘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신의 손길처럼 하녀에 주목한다.
뒤의 벽에는 못도 박혀있고 못을 뺀 흔적도 있어
깨끗하지만 여기가 실제 부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귀한 청금석으로 칠한 앞치마,
보통은 성모의 망토를 칠하는데 사용된다.   
즉, 천국은 그녀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는 뜻. 

일의 귀천에 관계없이 정성을 다해서 자기의 일을 하는 여성, 

이 그림은 어떤 간접적인 종교적인 메시지를 준다.

일이 어떤 일이든간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영혼은
선한 영혼이며 천국이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에서 굳이 하녀를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통상은 이런 지저분한 환경에서 하녀가 일한다. 
남녀의 연애가 풍속화의 주요 주제인데
한 그림에 남녀 연애를 그리는게 도덕적이지 못함.
두 개의 그림을 한쌍으로 연결하는 매개체로 편지나 악기

책상에 깐 카페트, 은 잉크병으로 보아 부자집
그림속 그림에는 염소, 프레임에는 비둘기, 이는 번식력 왕성 
남자는 차분한 얼굴이지만, 가슴속에는 들끓는 욕망 가득



복숭아빛 치마에 금색 수, 노란 상의로 보아 부자집
편지를 빛이 들어오는 창쪽으로 기울여 읽는 중

전령 역할을 한 하녀는 왼손에 봉투를 들고 있다
오른손은 그림 위의 커튼을 걷고 있는데
푹풍 치는 바다이다.
이를 보여주는 하녀의 의도는 앞에 고난이 있다는 뜻
강아지는 처녀편이라 하녀에게 괴롭히지 말라며 짖고 있다

풍속화는 이런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다.
초상화보다는 가격이 저렴하지만 꾸준한 수요가 있었다.
여자는 술이 좀 들어가 헤실헤실
남자는 와인 잔을 주면서 유혹, 그렇게 좋은 남자는 아닌듯.
좌측의 잠들어 있는 남자는 이 남자의 양심,
즉 음흉한 생각만 남아있다. 

하지만 화가는 하나의 상징을 남겨두었다.
즉 탁자의 레몬, 이는 인생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예쁘지만 막상 까보면 시어서 먹지못한다. 
즉 인생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쓴맛이 있다. 

좌측의 색유리에는 절제의 여신이 그려져 있고
뒷편의 그림에는 여성의 부친이나 조부가 그려져 있다.
하여 여성이 얼굴을 돌리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풍속화 중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연애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 편
여성이 편지를 쓰고 나중 하녀는 전달하겠다.
여성은 흰블라우스를 입고 빛이 나는듯 묘사.
그 이유는 뒤의 그림에서 이집트 공주가 바구니에서 아기를
꺼내는 모습인데 모세는 그런 숙명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편지를 받을 연애 상대와는
운명에 의해 사랑으로 엮어진다는 것.
즉, 사랑의 힘이 여성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었다.

하녀는 바깥을 보며 나의 짝은 그런 생각에 잠겼다.

페르메이르는 여자만 그리면서도 그런 연애 감정을 잘 살렸다.  
빛의 층이 있다. 하단은 어둡고 중간은 창에서 빛이 들어온다,
반투명한 젖빛 창을 통해 환한 빛이 아닌 온화한 빛이 들어옴.
뒤의 커튼으로 다시 어둠이 생겨났다. 
빛 때문에 여성은 한층 더 드라마를 갖는다.

여성은 반짝이는 눈으로 창밖을 보며
류트를 연주가 아니라 조율하는 듯하다.
귀걸이를 하고 집안 옷차림으로는 너무 잘 차려입었다. 

창밖에서 다가오는 어느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다.  
악보 2개와 더블 베이스 악기로 미루어
발자국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오면 이중주를 할거라는 예상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애인 
페르메이르 그림에서 보통 왼쪽에 창이 있는데
이 공간이 실제 페르메이르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주 귀거리 소녀는 이렇게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뭔가 막
말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눈과 입술이 반짝이고 이 진주 귀걸이가
진짜 진주는 아니었겠지만 자세히 보면 창이 비치고 있다.

이 그림은
인물의 다양한 얼굴 표정을 연구하는 트로니이고
초상이 아니다. 그래서 과연 그녀가 누구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모델이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이 너무나 생생하여
1600년대 여성과 우리가 대화하는 듯하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많은 것을 생략했다.
코의 선을 생략하였으며 옷도 간소하게 하였다.
오직 눈동자와 입술만을 강조하여 더 살아있도록
화가의 순간적인 마법이 발휘되었다.
(아래 그림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 네플릭스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영화를 볼 수 있었다.
소녀는 페르메이르의 집에서 하녀로 일한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라니 소설도 있나보다. 
 
진주 귀걸이 소녀에게서 표현된 광채가 사라지고 있다. 

모델은 화가의 맏딸 마리아일 가능성이 있다. 

15명의 자녀중 11명이 생존하였고
지금은 이 화가가 신비의 화가로 대접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아래는 페르메이르의 고향 델프트의 지금 풍경이다. 
좌의 그림은 6~7층 높이에서 바라보며 그린 풍경이다.
빛-그늘-빛의 계층을 보여주며 시간은 초여름 아침. 
평범하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참으로 보기 좋았다는
창세기의 한 구절을 표현하였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여름 일상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팬데믹 때 세상을 보면서 진짜 이
그림에 삶의 진실이
담겨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선명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상황을 그림. 하지만 일상에서 자주 보는 오브제만을 그렸고 기이한 상상 속 괴물 등은 다루지 않았다. 그의 치밀한 이미지들은 얀 반 에이크 이래 디테일에 집착했던 플랑드르 화파의 전통이 현대로 이어진 것이다. 

<빛의 제국 2> 1950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