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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예술, 도시를 만나다 + 아트 앤더 시티): 전원경 (2024.7.3)

클리오56 2024. 7. 3. 12:08

 

 

삼프로에서 방영된 전원경 교수의 아트 앤더 시티 중 오스트리아 빈 편을 리뷰하였다.

그리고 관련 서적 '예술, 도시를 만나다'중에서 빈 편을 함께 정리해보았다.

우연히 시청하게된 아트 앤더 시티의 여러 도시들을 반복해서 보게되었는데

전 교수의 유럽 미술, 음악, 문학에 대한 조리있는 설명에 흥미가 배가된다. 

제국의 영광 최근
빈 시청 빈 국립오페라 하우스 빈 소년합창단 클림트

 

성 슈테판 대성당 (1137~1160) 쇤브룬 궁(1638-1643 건축, 1740-1750년대 개보수)

 

* 합스부르크가 치하에 10개 이상의 소수언어가 분포 => 독일어로 통일이 어려운 상황. 음악이 제국의 통일 구심점 역할

=>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은 황제가 있는 제국으로 약 600년 지속

* 신성로마제국 => 로마제국을 계승하고 게다가 신성하기 까지 => 주교 서임권 확보, 황제관에 십자가 장식. 하지만 처음에는 7명의 선제후가 선출. 1359년 루돌프 4세가 대공 가문 문서를 제시, 황제의 세습 지위 확보 

 

* 히틀러는 빈을 천일야화로 비유. 빈 미술학교에 3번 낙방. 빈에는 유대인이 많이 거주, 이로 인한 반 유대인 악감정 발생. 

 

* 합스부르크 가문의 치명적 약점은 가문 내의 결혼. 합스부르크가의 최고의 배필은 합스부르크가이다.

 

*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몰락은 자손이 없기 때문. 테레사 공주는 오스트리아 황제와 결혼 약속때문에 어릴 때부터 초상화 그려 보내줌. 그림은 벨라스케스 작품. 나이가 들면서 부정교합이 보여짐. 어릴때부터 부정교합 있었겠지만 그릴때 포샵. 

* 3~4년 후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는 부정교합이 더욱 뚜렷...

=> 결국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멸손으로 멸망하고 스페인은 다툼 끝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넘어감... 

* 오스트리아는 동쪽 나라라는 뜻. 그 동쪽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존재. 유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데, 2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1592년 빈 전투, 1683년 빈 공성전. 이 두번에서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는 더 이상 유럽으로 확대하지 못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위상은 상승 

* 마리아 테레지아는 계몽 군주, 16명의 자손을 둠... 그 막내가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 쇤부른 궁에서 태어나고 베르사이유 궁에서 결혼생활... 그런 금수저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시민, 서민의 가치관을 몰랐는게 당연...

=>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최초로 빈 미술사 박물관 개관. 프랑스와는 대립관계라 프랑스 미술품은 없음.. 

 

*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품

 

* 농한기에 헛간에서 결혼식 장면... 신부 주변은 얘기 나누고, 신랑은 배가 고픈지 먹고, 문짝을 떼서 음식을 나르고, 성질 급한이는 음식을 가져가고, 악사는 배가 고픈지 음식을 쳐다보고...

* 한때 히틀러 소유. 패전이 전망될 때는 소금광산에 숨겨둠. 작가의 홍보용 그림 역할. 화가는 본인. 작가의 전문 영역은 풍속화 중에서도 젊은 여성이 등장하는 분야. 

 

<음악가>

* 하이든: 빈에서 멀지 않은 어느 공작궁에서 29세에 채용되어 악장, 부악장을 29년간 지냄. 빈 소년합창단을 나온 후 10년 정도 고생하여 이런 직위에 만족. 1791년 런던은 하이든을 초청하였고, 장기체류하며 교향곡 대부분은 런던에서 완성. 

* 모짜르트: 그 반대의 경우. 7살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준 예복을 입을 정도. 부친은 모짜르트로 돈을 벌 생각. 7살때부터 남매를 데리고 3년 동안 유럽 순회. 신동이 성인이 되어 후광은 사라지고 어른으로 적응하기 힘듬.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다스리는 궁전의 오르가니스트로 만족 못함. 빈으로 이주. 하지만 궁정악장은 되지 못함. 지금은 모짜르트 곡이 더욱 뛰어나다고 인정하지만 당시로서는 전위적이라는 생각. 더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짜르트 부친의 순회공연이 돈을 구걸하는 모습으로 비침. 당시에는 음악가는 평민 계급, 하여 하이든은 하인과 같은 옷을 입고 지냄. 모짜르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쓰기도 많이 씀. 오스트리아가 오스만과 국지전 하면서 귀족들이 예술에 지출할 돈이 없는게 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듬. 모짜르트는 경제관념이 부족했고, 하늘이 준 재능을 돈 버는 레슨 같은 것에 사용한다는 것도 부정. => 건강을 잃고 35세에 세상을 떠남. 남긴 유언: 나는 무척이나 전도유망한 그런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앞날을 알아볼 수는 없다. 

* 영국에서 모짜르트를 초청했지만 거절했고, 하이든이 가게되면서 큰 성공을 거둠. 

* 영화 아마데우스: 궁정악장 살리에르와 대적관계로 나오지만 실제는 아님. 모짜르트의 시신이 다른 시신들이 함께 있는 공동묘지 구덩이에 떨어지는 장면은 당시 법률을 따른 것임. 평민은 개별 묘지와 관을 사용못한다는 한시적 법률의 시기. 불운하게도 모짜르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함. 지금 빈의 무덤은 가묘이다. 

 

* 베토벤은 빈을 대표하는 음악가.  모짜르트 보다 14년 이후 출생. 피아노 조기교육으로 평생 교향곡과 피아노곡에 몰두. 17세에 빈 진출하여 모짜르츠에게 선보여 좋은 인상. 하지만 집안사정으로 곧 본으로 돌아감. 다시 빈 유학 왔을 땐 모짜르트는 이미 세상을 떠남. 베토벤은 반항아였고, 평생 독신이라 많은 돈은 필요하지 않음. 하여 궁정악장 등에 무관심. 귀족들의 후원과 출판사의 인세 등으로 돈에 쪼들리지 않음. 프랑스 혁명의 지지자, 계몽주의자, 선천성 난청으로 40대 중반에 완전히 청력 상실. 

* 교향곡 운명.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리며 오는거야. 하지만 이런 고난을 인간은 싸워서 이겨나가는거야. 귀족들의 후원을 받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자신을 후원한 공작이 요청한 나폴레옹 군인들 앞에서 연주를 거절하고 뛰쳐나감. 다음날 편지까지 쓰게된다. 기억하십시오 공작, 당신 같은 귀족은 수백 수천 명이 있을 수 있지만 나 베토벤은 한 사람뿐입니다. 후원은 당연히 중단되었다.  54세에 마지막 교향곡 합창에서 형제애, 인간애, 인류애를 외침.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위로부터의 권력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계몽주의자였다.. 

* 나폴레옹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공식적으로 무너뜨리고 자신이 로마의 후계로 자처한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가는 제국의 이름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바꾼다. 

그리고 자기의 딸을 나폴레옹과 결혼시킨다. 나폴레옹은 결국 7차 대불동맹과의 전쟁에서 패퇴하고 세인트헬레나에 가게된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에서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었고, 결핵으로 죽었다. 곁에 있었던 새 한마리기 박제가 되어 그 방에 지금도 남아있다. 나폴레옹 후손은 멸손.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직전 황제인 요제프 1세는 68년간이나 재위, 이탈리아 1866년, 독일 1876년 독립을 보고 소수 민족들이 독립요구했지만 물리침. 헝가리 독립요구가 거세어 제국 이름을 오스트리아-헝가리로 개칭.

너무나 과거 속에서 살았음. 수세식 변기나 자동차도 사용하기를 거부. 그의 부인은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빼았기다 시피하고 유럽을 전전하다가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스위스에서 송곳에 찔리는 암살로 사망. 아들은 유부녀와 동반자살했는데, 그의 부친의 고식적인 성정에 실망한 탓. 

 

* 늙은 황제는 무려 68년을 재위했다. 전제정이 너무도 탄탄하고 융통성이 없어 정치적인 무기력과 소시민주의 합쳐진 독특한 시민문화, 즉 비더마이어(Biedermeier)가 탄생했다. 이 문화는 정치적 체념, 가톨릭 신앙심, 체제 순응주의, 아름다움과 쾌락에 대한 갈망이 합쳐진 형태이다. 실망한 시민들은 빈 특유의 유미주의가 탄생하고 성장하며, 왈츠에 몰입. 요한 스트라우스 등장. 당시 가장 인기있는 음악가였고, 왈츠는 지휘자가 바이올린을 켜면서 지휘. => 모든 변화를 외면하며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어제의 세계.   

링 슈트라세(환상도로) 부근에 중요 기관들이 포진. 

* 클림트의 등장. 그의 대표작 키스의 인상과는 다른 나뭇꾼, 장군의 외모. 부친은 금세공업자. 링 슈트라세 주변에 화려한 건물들이 신축될 때 회사를 세워 장식일을 직접 수주. 부르크 극장 천장화. 16세기 라파엘로 스타일이 생각남.    

* 세기말을 향해가는 시기에 악몽, 죽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그리는 상징주의, 절규와 같이 작가가 느꼈던 것을 형태도 망가뜨리는 것이 표현주의. 세기의 변화와 함께 예술사조도 변하고 있다. 모든 의식 속에는 성욕이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 프로이트(1856~1939) 심리학. 

* 이러한 상황들이 클림트와 그 친구들을 자극하여 분리파를 만든다. 나이 먹은 예술가들로 부터 스스로 분리하겠다는 것. 그림의 맨위는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단하는 장면으로 구세대를 그렇게 처단하겠다는 것. 이 포스트는 테세우스의 성기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검열에 걸리는데, 나중 나무로 가렸다. 그리고 분리파 건물도 세웠는데, 예술이라는 신앙을 황금빛 돔으로 상징했고, 건축을 단순화하여 기존 바로크식 건축물들에 반기를 들었다. 건물에 글귀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하지만, 그리스 신전을 모방한 듯한 건축물에서 보듯 결국 과거에서 돌파구를 찾는 한계. 

* 이러한 상황에서 클림트의 변화 모습들이 등장. 그리고 20세기를 맞아 빈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 베토벤에게 바친다. 

* 클림트는 베토벤 프리체라는 34m 띠벽을 만드는데, 이는 합창 교향곡 4악장의 느낌에서 영감 받았다. 금박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클림트의 천재적 독창이자 한계이다. 20세기를 맞아 앞으로 나아가야하는데 1827년에 죽은 과거의 베토벤에게 바쳤다는 것, 그리고 베토벤 프리체도 과거의 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클림트는 천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결같이 빈이 지닌 과거로의 회귀 성향을 버리지 못했다. 

클림트의 두 초상화는 완연히 다른 모습... 

* 클림트의 영감은 과거에서 온 것이다. 리들러 부인의 초상은 벨라스케스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에서 비롯.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에서 영감이 비롯되기도. 

*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를 보고 클림트는 자신의 영감의 원천은 고대 장식에 있음을 깨닫는다. 원근법은 없다. 

* 이후 클림트는 원근법이 없는 황금시대가 시작한다. 얼굴과 손을 제외하면 원근법이 없다. 그리고 장식이 빽빽하다. 장식은 고대이집트 무덤벽화, 그리스 미노아 문명 에서 비롯된다. 클림트의 단일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금을 사용한 작품. 

 

* 두 남녀의 몸은 완전히 겹쳐져 있고, 양감이 없다. 남자는 네모, 여자는 둥근 문양으로 구분하며, 남녀의 에로틱한 감정을 종교적 수준까지 끌어올린 듯. 황금빛 비가 그들 뒤로 내리고 있지만 여성의 발에는 황금빛 덩굴이 감겨 있고 그 밑으로 끝도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곧 죽음과 동의어다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사랑의 어떤 성스러움을 부각시킨 작품인 것 같기도 하고, 종말에 가까운 제국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금을 많이 사용하고 옛날의 기법을 동원하는 것은 클림트의 한계이자 그의 개성이다. 키스가 기억에 남는 것은 동시대 전후가 아니라 천년전의 영감에서 오기때문에 그만큼 기억이 남는다. 장식적 요소가 강하므로 많이 어울린다. 

키스 작품은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에 제출, 영광의 정점에 도달. 

* 키스에 등장하는 여인은 아마도 그의 영원한 연인 에밀리 플뢰게일게다.... 100명의 직원을 고용한 의상실 오너...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휴가도 보내고 사실상의 혼인 비슷... 

 

* 에곤 실레의 등장. 클림트를 압도하는 새로운 재능의 출현. 16살 때 매독에 걸린 아버지가 광증으로 사망, 이에 충격. 성을 생명의 탄생이 아닌 죽음의 통로로 여김. 20세에 그린 자화상은 자신을 불능의 남자로 그림. 팔도 다리도 잘리고, 피부는 뼈위에 근육없이 피부만 있고, 그것도 죽은 사람의 피부, 몸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간다. 죽은 어머니의 경우, 아이를 잉태한 상태인데 이미 죽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생명의 기운이 없지만, 자궁 속의 아이는 자궁을 빠져나와 생명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궁의 관은 검고 어둡고 질겨 아이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죽음 앞에서 필사적으로 서로를 탐하려는 젊은 남녀의 포옹을 보면, 클림프의 포옹은 얼마나 밋밋한가, 아무런 감흥이 없다.   

* 클림트는 실레가 자신의 재능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실레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사복을 입은 은둔자들에서 두명의 남자는 앞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데 실레 자신이고 뒤의 눈을 감고 있는 자는 클림트이다. 두 송이의 꽃 중에서 하나는 꽃을 피우고, 다른 하나는 이미 꼬꾸라지고 있다. 클림트는 도망가려하고 도망간 곳은 동방이다. 클림트는 일본의 기모노, 중국과 조선의 도자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뭔가 초조한, 쫓기는 느낌이 온다. 

* 클림트가 죽은 후 유산은 에밀리가 가져갔는데, 1차세계대전 중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사진만 남은 상태..

 

* 클림트의 부친은 56세에 뇌출혈로 사망했는데, 클림트가 그 나이 근접하면서 두려워 했다. 1916년에 클림트가 5년에 걸쳐서 완성한 이 죽음과 삶이라는 작품은 이례적 으로 배경이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오른쪽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는데, 아기, 엄마, 노인, 젊은 남자, 젊은 여자도 있다. 그들은 모두 이 현란한 생의 다양한 무늬들이 주는 여러 가지 기쁨 슬픔 즐거움 고통 등 자신들의 감정에 너무 몰두에 있어서 몽둥이를 든 죽음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클림트는 1918년 아버지가 사망한 56세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진다. 미완성의 신부라는 작품을 보면 클림트의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 이전에 화가로서의 죽음이 클림트를 먼저 찾아왔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그림을 그리다가 클림트가 쓰러졌고, 같이 살고 있던 여동생이 목격했다. 클림트가 기우뚱 쓰러지면서 정신을 읽기 직전에 여동생을 보면서 한 마지막 말이 에밀리를 불러오라였다. 그리고 클림트는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버지가 사망한 56세와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찾아간 실레가 죽은 클림트의 얼굴을 그렸는데 한때는 장군이라고 불렸던 당당한 클림트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그가 죽음과 삶에서 그렸던 나약한 노인의 얼굴만 남아 있다. 클림트가 사망하고 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끝이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80% 잃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물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추방되 었다.

* 빈 분리파은 새롭게 작업을 개시하게 되고 수장으로 실레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운명은 실레에게도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다. 실레는 1915년 에디트와 결혼하여 임신 중이었고, 가정을 꾸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림에서 남자는 실레이지만, 여자의 얼굴은 에디트의 얼굴이 아니다.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가 사망하고, 실레도 3일후 28세로 사망했다. 이렇게 한때 세기말의 빈을 빛냈던 재능들은 모두 사라졌다.

 

* 유튜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등장하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두 점을 소개한다. 그의 그림은 사춘기의 악몽을 그림으로 그린 듯, 거칠고 야성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클림트는 여성의 관능을 밀도있게 표현했지만, 코코슈카는 여성과 남성의 갈등을 폭력적으로 묘사한다.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에서 해골같은 여인이 남자의 몸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다. 초상화의 경우, 클림트는 탐미주의적이며 화려하며 과거지향적이다. 코코슈카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화면이 클림트처럼 아름답고 섬세하지 않다. 클림트는 전통적인 미의 규범을 파괴한 적이 없다. 그러나 코르슈카와 실레는 아예 미의 개념을 비웃고 있다. 그들은 아름답기는 커녕 추악한 형상으로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 1909년 아돌프 로스의 초상화, 1909년

 

<합스부르크 왕가 요약 (네이버 지식백과)>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1273년 ~ 1918년)는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표적인 가문이다. 1273년, 스위스 알프스 산악 지역에 위치해 있던 보잘것없는 집안을 이끌던 백작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독일의 왕으로 선출되면서 일약 왕가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되었다. 물론 정치적 부침이 없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마지막 황제 카를 1세가 퇴위할 때까지 장장 650년 동안 제국의 품격을 지킨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터키, 체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등을 포괄하는 다민족 제국으로 성장했다.

18세기 중반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근대 개혁정치의 시발점으로 평가될 만한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국의 통치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19세기 초반에는 혁명 프랑스에 반대하는 유럽 보수반동 정치세력의 보루가 되어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연방국가 모델을 창출하는 왕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 6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의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발생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유서 깊은 왕실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스위스 알프스 북부 지역의 작은 봉건영주에 불과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루돌프 1세가 하루아침에 독일의 제왕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엿한 유럽의 왕가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소유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중세 유럽의 세력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 1359년, 루돌프 4세(1358~1365 재위)가 자신이 공작들 위에 존재하는 대공이라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문서를 들고 나타났다. 주교 위에 대주교가 있듯이, 합스부르크가는 일곱 선제후의 의에 군림할 자격이 있는 대공이라는 주장이었다. 

 

- 1452년, 10년 전 (신성)로마독일 왕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가 로마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의 황제 대관식은 로마에서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직접 집전했다. 그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고, 이제 합스부르크 왕실은 이후 46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는 어엿한 황실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황제의 손자인 미남대공 필리프 1세의 아들 대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황실은 스페인 계보의 국왕 카를 5세와 오스트리아 계보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로 가문이 분리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넘겨받은 오스트리아 계보는 다시 티롤 계보인 페르디난트 2세 황제에 의해 유지되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왕인 카를 6세까지 이어졌다. 1732년 1월 11일, 황제 카를 6세는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왕자가 아닌 공주가 상속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시한 국사조칙을 공인받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 1736년 2월 12일,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트링엔 공작인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이 시작되었다. 1741년 여왕에 등극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유럽의 군주들과 맞싸워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지켜냈다. 1745년, 그녀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이후,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배출하는 황실로 꾸준히 성장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에 계몽군주로 평가받은 황제 요제프 2세는 갖가지 근대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그런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제국에 불어닥친 혁명의 바람은 신성로마제국의 종식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이 과정에서 혁명 프랑스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도리어 유럽 보수반동 정치의 보루가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초반 메테르니히 총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수성은 1848년 3월 빈 시민혁명에 의해서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저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1848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황제에 오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향후 68년 동안 보수와 진보, 반동과 개혁, 전통과 근대, 절대군주와 입헌군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사이에서 적당한 절충주의적인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 총소리는 결국 650년 동안 군주의 품격을 유지해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이 되고야 말았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촉발된 4년 동안의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패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