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저자 서동욱

클리오56 2024. 4. 23. 20:28

 

이동진 평론가가 선정한 2월 최고의 책이다. 그래서 꼭 읽어봐야지 하며 접근하였다. 에세이라 쉽게 읽혀지겠지 생각했건만 철학 에세이라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동진님의 선정 이야기를 챙겨본다. 그리고 저서 전체를 읽어보지는 못했고 관심이 가는 소제목에 집중하여 선별적으로 읽었다. 

 

철학자의 저술이라고 마냥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자유, 사랑, 동물권, 인공지능, 심지어 쓰레기, 혼밥, 수집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룬다. 

책의 부제는 '삶을 쓰다듬는 위안의 책'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삶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의 책이라고 대신 주제를 붙여봤다. 

 

서문: 철학자 하이데거는 폭풍우가 칠 때야 말로 철학자의 시간이다. => 날씨가 철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이는 저자가 가진 깊은 사유와 문학적 역량이 다시 한번 비범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어릴 때 분무기로 무지개를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날씨를 선물한 경험이다. 

 

 

 

 

 

내용과 소감

프롤로그: 날씨를 선물하는 일기예보

철학자 하이데거: 독일의 검은 숲 속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 때가 철학자의 시간. 오두막을 눈으로 덮어 따뜻하게 만드는 날씨는 생각의 알을 암탉의 체온으로 데우는 부화기이다. 

 

중요한 것은 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날씨가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 날씨를 만드는 사상은 없는가? 고대 민족이 먼 옛날 마음에 담았던 ‘레인메이커’의 꿈을 철학은 간직하고 있는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날씨의 언저리를 맴돌며 거기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니체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날씨를 바꾸고자 한다.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로, 그러니까 구름 뒤에 숨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원리들로부터 자유로. 나는 자유와 하늘의 청명함을 푸른색 종처럼 모든 것 위에 펼쳐놓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날씨는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날씨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없다,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조차 영원한 좌절을 친구로 삼는다. .. 그러나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켜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의 눈은 삶에서 어디에 햇살이 깃들고 어디에 반가운 여름비가 오는지 찾아주어야 한다. 

 

나는 정말 날씨를 만들어내던 그 행복한 여름을 간직하고 있다. 정원에서 태양을 향해 분무기로 빗방울을 날려보내면 경이로운 무지개가 나타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날씨를 선물했다.... 그 정원을 오래전에 떠나온 나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날씨를 선물할 수 있을까? 지금은 타인에게 건네는 글만이 무지개를 꺼낼 수 있는 길이다.... 일기예보는 날씨를 알려줄 뿐 아니라, 이미 파산한 이를 위로하며 구제책을 조언하듯 옷을 따뜻하게 입어라, 우산을 잊지 말고 출근하라 말한다. 그런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  

 

1부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더글라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뭐냐고 우주에서 두번째로 똑똑한 컴퓨터인 '깊은 생각'에게 질문 => 750만년 동안 연산한 뒤의 답은 '42'. 답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자 컴퓨터가 하는 말: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 이에 제대로 된 질문을 찾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를 만드는데 바로 '지구'이다. .... 제대로 된 질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설령 해답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호두알처럼 꼭 닫힌 채 우리의 이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 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 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기생충의 예술과 철학>

괴테의 '벼룩의 노래'에서처럼, 왕궁이 간신배를 근절하지 못하듯 가련한 숙주는 벼룩에게 물리면서도 그놈을 꼭 눌러 박멸하지 못하는 그런 운명을 가졌다. 숙주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박멸의 대상이다. 

 

영화 프로메테우스: 공식 예고편에서의 내레이션 "왕은 통치한다. 그러고나서 죽는다. 이는 피할 수 없다" 어떤 막다른 골목을 뚫어야 할 때 외계인 왕(프로메테우스)는 이질적인 것, 기식자가 일으키는 동일성의 파괴를 통한 변신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불가역적인 새로운 길을 열어나간다. 

 

기생충 영화에서 기생충들은 말(거짓말)을 통해 숙주 속에 침투한다. 기존의 메세지를 차단하는 일종의 소음 만들기가 기생충이 숙주에 침투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생충 서사는 많은 경우 숙주의 관점에서 공포 이야기로 만들어졌지만, 기생충의 고나점에선 정보를 속이고 숙주 속에 들어앉은 즐거운 이야기가 된다.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소음을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이리라. 헤롯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왕국에 침투해 숙주의 왕 자리를 차지하려는 명백한 기식자, 박멸의 대상이다. 결국 이 기식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라불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소음을 만들어 기성 종교와 사람들 사이의 정보체계를 차단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기식자는 지금껏 없었던 하나의 방향을 창조한 것이다. => 그렇다면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일이다. 기식자는 새로운 차원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 올려놓는 자이다.... 우리의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 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  

 

<아이네이스, 보트피플의 로마 건국: 바다 이야기 3>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창세기로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옆에 스승으로 모셔두고 참조하며 쓴 작품이다. 전반부는 보트피플의 방황, 후반부는 정복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국 패배한 트로이 유민들의 건국 이야기.

=> 보트피플로 이탈리아에 도달했을 때, 그 땅의 왕이 받은 신탁: 이방인들이 와서 네 사위가 될 것인즉,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으로 우리의 이름이 별들에 이르게 할 것이다. => 이질적인 자들에 대한 환대가 있고, 이 환대 속에 새로운 문명과 국가의 탄생이 준비되었다. => 타자에 대한 개방으로부터 한 공동체는 새 길을 찾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2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

혹성탈출:종의 전쟁의 유인원 지도자 시저는 총대신 여의 봉을 메고 이마에 금테만 두르면 영락없이 손오공이다. 

시저는 그를 제압하려는 인간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다. 이를 넘어서는 전 우주적 대혼란의 충격은 서유기가 담고 있다. 손오공은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를 쩔쩔매게 하며 하늘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 그런데 혼란을 일으킨 두 원숭이의 이야기는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 손오공은 석가여래에게 벌을 받고 삼장을 도와 수행을 마친 뒤, 마침내 죄를 씻고 싸움꾼다운 투전승불이라는 부처가 된다.....반대로 종의 전쟁에는 혼란과 투쟁에 들어간 자들을 화해와 조화 속으로 이끌어주는 통일의 이념이 없다. 화해의 목소리는 실패하고, 죽거나 죽이는 실력행사, 승리 아니면 패배, 그리고 바이러스 같은 우연적 변수만이 남는다. 그 결과 한 종은 멸망하고 다른 한 종은 발전한다.... 정치만이 인간의 꿈에 귀 기울이고 그 꿈을 향해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주: 지금은 정치가 개판이니 이런 사회적 발전을 기대못하는 상황이라는 뜻이겠다)

 

<근대와 인간주체의 탄생>

영어 modern times는 1800년경을 중심으로 이전의 3세기를 서술한다. 보통 이 시기를 우리는 근대라는 명칭 아래 들여다본다. ....근대란 자신의 현재를 새로운 시기로 감지하는 태도인 것이다.... 모든 시대가 새로움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 성인들의 경전에서 이상을 발견하고, 상실한 과거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복고적 노력을 보인 시대들이 더욱 많다. 반대로 근대는 새롭게 되는 것 자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새로운 순간을 계속 갱신해나가는 것, 그것이 근대이다. 

 

이 새로움을 이루는 주된 내용,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원동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바로 인간 주체의 출현이다. 인간 주체가 근대에 출현했다는 것은, 곧 주체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다양한 자연 만물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이성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 이성이 지닌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數)이다. 이성은 수를 바탕으로 연구공간을 열어놓고, 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수리물리학적 질서가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더불어 수적 계산의 정밀성은 학문이 갖추어야 할 이상이 된다. 수가 본질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대는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정밀함의 시대가 된다. 강물은 수량으로 측정되는 수자원으로, 임야는 생산할 수 있는 목재의 총량으로 계산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수학적 파악을 바탕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근대 기술이 탄생한다. 근대기술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바로 인간에게 유용하기 위한 기술이다. ... 세계의 근거와 귀결의 자리 모두에 인간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인간 주체의 등장을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로 불러도 좋겠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도련님의 시대, 부제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 국가를 급조하느라 이 40년 동안 쌓인 피로, 그것도 알겠습니다. 일본은 많은 모순과 대면하며 잰걸음으로 걷고 있지요. 국가의 급조와 잰걸음, 이것이 주체로서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늘 조급하고, 늘 바쁘고, 늘 경쟁하며, 늘 피로와 자연의 파괴를 끌고 다니는 근대인의 모습이다. 

 

<근대 이후, 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인간 이성이 아니라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챗GPT, 즉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이 있다. 이제는 이성과 이성이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기계가, 이성과 비인간이 소통한다. 그래서 이성과 기계의 합작품, 바로 하이브리드가 탄생한다. 하이브리드는 어떤 미래를 가져올까? 

 

물론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만 기계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기계가 결코 기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즉 기계 안에는 인간적인 것이 섞여들어 있다. 바로 챗GPT가 그렇지 않은가?... 이성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소통은 사라졌다. 챗GPT의 존재가 증언하듯 이제 이성의 소통 상대자는 비이성이자 비인간인 기계이다. 판사는 챗GPT와 상의해 판결을 이끌어내고, 학자는 챗GPT와 대화해 어엿한 공저자로서 책을 쓰며, 정치가는 챗GPT와 함께 연설문을 만든다. 공론장 안으로 인간 이성이 아닌 기계가 들어선 것이다. 챗GPT는 까다로운 논쟁 상대자가 아니라 비서와 같은 협력자이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쉽게 그와의 대화에 빨려들어간다. 

 

챗GPT는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창의적으로 보이는 답을 내놓는다. 그의 답은 자신을 창조한 개발자, 즉 인간 주체의 이성과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계는 자율적이다. 요컨대 기계이자 대산인 동시에 자기의식이 없는데도 주체인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구별이 철폐되고 도구와 주체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 하이브리드, 라투르가 붙인 별칭대로 키메라가 출현한 것이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혹이 예술의 영역에 그칠까? 일단 유혹의 기술을 배우면 그 적용 범위는 한없이 넓어진다. AI가 유혹의 문제라는 것은, AI가 칵테일이나 요리 레시피에 대해서까지 독자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최고의 레시피를 제공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우리는 결코 답하지 못한다. 관건은 AI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인간을 유혹할 것이고, 결국 적응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3부 위안의 말

<산책>

레비나스: 산책하는 것은 바람을 쐬기 위한 것이고, 건강 때문이 아니라 공기 때문이다. 의무나 달성해야 할 목적이 아닌, 야외에서 누리는 공기의 즐거움이 산책을 이끈다.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이라는 학당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는 제자들과 산책하면서 토론하고 연구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른다. 

 

니체: 사상이란 산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몰두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함과 몸의 움직임이 일치하는 축복의 체험이다. 불길을 키우듯 산책이 생각의 숨구멍을 열어준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사랑의 말>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을 비로소 현실로 만든다. 맹세한다는 말만이 비로소 맹세를 세상 속에 등장시킨다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현실 속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창조해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말도 말해지는 순간 비로소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말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법으로서 효력을 지닌다는 뜻이다. 

 

사랑을 금덩어리로 믿고 보관해놓은 채 영영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꺼내 보려 하면, 그것은 장롱의 나프탈렌처럼 다 녹아 사라지고 흔적도 보이지 않으리라. 오로지 입 위에 올려놓을 때만 사랑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사랑은 죽기 쉬운 생명체인 듯 끊임없이 발화를 통해 숨결을 불어놓어 주어야만 살아 있다

 

<혼밥>

혼밥의 시대다. 혼밥은 개인화된 삶의 중요성을 드러내며 우리 시대의 한 특성을 표현하는 듯도 하다. .... 어떤 혼밥에는 식도락을 혼자 즐기는 사람의 ㅇ유같은 것은 없다. 어떤 여유도 없이 밥에 절실히 매달려야 하는 이가 있고, 그 어깨에는 고단한 삶이 놓여 있다. ... 혼자서 먹는 밥은 말 그대로 홀로됨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소외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따돌림의 결과로서 혼밥이 있는 것이다.... 혼밥을 통해 자발적인 고립을 표현할 수도 잇다ㅓ.

 

최근 젊은이들의 초상화에서도 목격할 수 잇을 이 혼밥은 깨 오래전부터 잇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그는 창가 자리 일인석에 앉아 식사한다. 밤이 깃든 뒤 혼술 역시 즐겁다. 그리고 잠이 올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면서 마의산을 마저 읽었다. 그는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혼밥은 예외적인 식사법이 아니다. 혼밥은 함께 먹는 밥만큼이나 수많은 얼굴로 인간의 다채로운 운명을 증언한다. 

 

4부 예술과 세월과 그 그림자

<인생의 빛나는 한순간>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푸코의 추'에서 이런 순간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 생사를 정당화하는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간 줄 모른 채 평생을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 수도 있다"....루소는 말한다. "가장 뛰어난 여인에게 받은 도움을 언젠가는 갚는데 나의 여가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저술가로서 루소가 탄생한다. 연인과의 완벽한 순간을 반추하고 그 반추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저술가로서 루소가 보내는 현재의 삶이다. 

 

모차르트는 어느 누가 자신의 이발사 피가로 보다 헤라클레스에게 더 귀를 기울이겠냐며 과거의 영원한 가치들을 반박한다. 현재를 보지 않고 고대의 신화에만 몰두해 있는 자들을 그저 대리석 똥을 싸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이 새로운 코미디라는데 가치를 두는데, 여기서 방점은 새로운에 있다. 현대성이란 바로 새로운 순간인 현재에 대한 존중이다. 

 

19세기 유럽의 수도라 할 만한 파리에서의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댄디는 고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다. 영웅은 댄디의 모습으로 출현한다. 댄디는 보들레르가 보기에 위대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 모습이다....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

들뢰즈처럼 말하자면, 나이 드는 자는 소진된 자이다. 무엇이 소진되는가? 바로 그의 가능성들이 소진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이 하나둘 사라진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못하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 지는 것이다. 이는 나쁜게 아니라 당연하며 필연적이다. 그러면 잃어버린 나이의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헤겔은 철학 자체를, 사색을 통해 지난 시간을 되찾는 일로 이해한다. .... 나이 들어서야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눈으로, 지나간 현재의 진상을 이렇듯 뒤늦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이 말하듯이 나이 든 이 철학적 올빼미의 눈을 통해서는 "생명의 형태는 젊음을 되찾지 못하고 다만 그 진상이 인식되는 데 그칠 뿐"이더라도 말이다. 

 

이제 가능성은 타인의 가능성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나이 든 주인공은 어린 고아 소년을 떠맡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돌보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그는 다시 젊음을 체험하고 청춘의 갑옷을 되찾는다. 삶이란 한 개인의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타인의 미래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간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 

 

<레트로마니아 또는 수집가>

박물관이 공인된 역사적 시간을 표현하는 사물들에 몰두한다면, 수집가들이 눈독 들이는 레트로 감성의 아이템들은 사적 추억의 역사 또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사소한 역사의 조각을 간직한다. 전자가 공식 역사 교과서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재야의 비사에 해당하리라. .... 수집가 푹스는 복제해 대량 생산한 당나라 도자기를 수집했다.... 특정 창작자가 만든 개별 작품을 특정 소유주가 감상하는 귀족적 향유와 반대로, 익명의 예술이 대중의 실생활 자체에 스며든 사회의 모습을 푹스의 저 수집품들은 증언한다.  이 수집품들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경제체제로 이루어진 세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감성이 이끄는 대로 옛날 게임을 손에 들거나 오래된 잔에 술을 따르는 레트로 마니아는 기존의 가치를 떠나, 이제 막 발견한 진귀한 가치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자다.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죽음은 산자를 건드리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는 건드릴 필요가 없다. 인생은 두려운 죽음과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사유를 버팀목 삼아 로마인들은 불멸에의 욕구 때문에 내세를 상상하는 일 없이 유한한 인생에서 평온을 찾았다. 이것은 철학이, 내세에 대한 갈망이라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에 종교 속으로 움츠러들곤 하는 인간을 해방시킨 위대한 경우가 아닌가?

 

생명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 삶은 겉으로 다양한 방식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쾌락은 긴장이 모두 사라진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행위일 것이다. 

 

에필로그: 쓰다듬는 손길

 

교보문고 책 소개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늘의 기분과 내일의 세계를 바꾸는 힘에 관한 이야기

《생활의 사상》 이후 7년, 철학자 서동욱 교수의 신작 에세이!
염세주의 사상가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생을 향한 그의 적나라한 응시가 ‘욕망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힘’을 주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사라진 자리를 그대로 비워놔도 괜찮을까. 시간도 방법도 없다는 이유로 더 나은 삶에 대한 생각을 이대로 멈춰도 될까.
국내 최고의 들뢰즈 사상 연구자이자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해온 서강대학교 철학과 서동욱 교수가 7년 만에 출간한 에세이. 연결될수록 고립되는 세계, 버틸수록 소진되는 일상에 던지는 철학의 위로는 “삶에서 어디에 햇살이 깃들고 어디에 반가운 여름비가 오는지” 찾아준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생각, 날씨를 선물해주는 생각의 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저자(글) 서동욱

철학자이자 시인, 문학평론가.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5년부터 계간 《세계의 문학》 등에 시와 비평을 발표했다. 루뱅대학교와 어바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등에서 방문교수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방문작가를 지냈다. 한국프랑스철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계간 《철학과 현실》 편

목차

  • 프롤로그: 날씨를 선물하는 일기예보

    1부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기생충의 예술과 철학│반복, 인생과 역사와 예술의 비밀│자기기만, 영혼의 질병│서양의 본질, 우울과 여행: 바다 이야기 1│물과 바다의 철학: 바다 이야기 2│아이네아스, 보트피플의 로마 건국: 바다 이야기 3│남녀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희생양 없는 사회를 향하여

    2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소년의 나라│바보와 천재│늑대인간│인공지능과 인공양심│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철학과 매스미디어│철학자와 계몽군주│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근대 이후, 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3부 위안의 말
    산책│염세주의│유머│사랑의 말│기차 이야기│피젯스피너와 너무 지친 인간│혼밥│바람과 허파의 철학│《홍루몽》의 시회│차이가 우리를 보호한다

    4부 예술과 세월과 그 그림자
    느려질 권리│환생 이야기│쓰레기의 철학│디자인, 예술로서의 장식품│경직된 세계와 예술이 알려준 자유│인생의 빛나는 한순간│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레트로마니아 또는 수집가│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축제

    에필로그: 쓰다듬는 손길
책 속으로

중요한 것은 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날씨가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 날씨를 만드는 사상은 없는가? 고대 민족이 먼 옛날 마음에 담았던 ‘레인메이커’의 꿈을 철학은 간직하고 있는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날씨의 언저리를 맴돌며 거기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 니체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날씨를 바꾸고자 한다.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로, 그러니까 구름 뒤에 숨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원리들로부터 자유로. 나는 자유와 하늘의 청명함을 푸른색 종처럼 모든 것 위에 펼쳐놓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날씨는 바꿀 수 있다. _7쪽(프롤로그)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 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 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_22쪽(1부)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혹이 예술의 영역에 그칠까? 일단 유혹의 기술을 배우면 그 적용 범위는 한없이 넓어진다. AI가 유혹의 문제라는 것은, AI가 칵테일이나 요리 레시피에 대해서까지 독자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최고의 레시피를 제공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우리는 결코 답하지 못한다. 관건은 AI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인간을 유혹할 것이고, 결국 적응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_168쪽(2부)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_180쪽(3부)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친지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능성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보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시간을 되찾는 길이 아닌가? (…)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간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_298쪽(4부)

 

출판사 서평

과부하와 무기력을 오가는 현대인에게
마음의 날씨를 찾아주는 철학의 위로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날씨를 만든다는 착상이 철학사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던진 이 말도 안 되는 질문에서였다. 소진하듯 살아가는 매일이 당연한 삶, 남보다 빨리 정답을 얻고 싶어 조바심 내는 인생, 숫자로 매겨지는 성장에 다다르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 놓아버리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초상을 직시한 철학자 서동욱은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
국내 최고의 들뢰즈(Gilles Deleuze) 사상 연구자이자 시인과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타자’ 문제에 깊이 천착해온 서강대학교 철학과 서동욱 교수는 이 책에서 ‘날씨를 찾아주는 생각’을 써내려간다. 철학, 문학, 미술부터 영화, 만화, 게임까지 온갖 영역이 풍성하게 교차되는 마흔 편의 글들이 익숙한 단어의 뒷면을 들추며 흐린 일상을 깨운다.
그의 글 속에서 익숙한 개념들은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에서는 무거움을, 무거운 것에서는 가벼움을 찾아내는 각각의 글은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필요한 것들, 반복 속에서 필멸하는 삶을 마주하는 법, 평범한 일상에 보석처럼 숨겨진 위안, 우리가 예술에 위로받는 이유 등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모든 변화는 생각에서 시작된다’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달라진 머릿속의 날씨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차이’의 힘
단단한 성장으로 이끄는 ‘타자’의 힘

서동욱 교수는 철학뿐 아니라 시와 평론 등을 통해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타자 개념에 대해 깊이 탐구해왔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도 ‘차이’다. 이질성과 타자 등으로도 언급되는 이 단어는 서로 다른 주제의 여러 글을 가로지른다. 차이는 오랫동안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쳐왔다. 전염병과 기후위기, 타자를 배척하는 극우 정치 등 오늘날 전 지구가 맞닥뜨린 문제들의 돌파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따르면 ‘차이’는 삶을 보호한다. 차이를 통해 우리는 기준 없이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차이는 창조적 사고의 원천이다. 바로크 문화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동방의 수많은 문물을 흡수해 다양한 창조물로 분화시킨 역사처럼 말이다. 이 책이 현대사회의 온갖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차이, 즉 타자와 이질성을 대하는 태도를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숙주로서 ‘기생충’을 불편해하지만, 이 책은 기생충이 숙주의 동일성을 흔들어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다는 점에 주목한다. 로마의 건국 신화부터 식민지 역사까지 아우르는 ‘바다’에 관한 세 편의 글 또한 타자가 열어주는 새로운 길로 수렴되는데, 이는 바다가 연결이 아닌 적대의 장소로 바뀐 오늘날 현실에 울림을 준다. 피타고라스 개, 니체의 말, 데리다의 고양이 등 ‘동물’을 사유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타자의 범위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의 정답이 쓸모없는 시대
나의 질문을 던지는 법

마음의 날씨, 그리고 세계의 날씨를 바꾸는 방법으로 이 책은 ‘질문’의 힘도 강조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컴퓨터가 750만 년의 연산 끝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 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생각도 제대로 된 질문에서 나올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선망과 공포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인공지능이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모두가 주목하는 ‘인공’이라는 단어 대신 ‘지능’에 초점을 맞춰 질문했기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보’와 ‘천재’도 비슷한 단어로 묶인다. ‘어떻게 창조하는가’의 관점에서는 둘 다 규칙을 뒤집는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열광은 각박한 일상에서 삶의 허무에 대한 인정이 차라리 힘을 주기 때문일 테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예방주사일 뿐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더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나침반 삼아 낯선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그렇게 만든 생각이 우리 마음의 날씨를 바꾸고, 서로에게 날씨를 선물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