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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저자 패트릭 브링리

클리오56 2024. 4. 15. 07:19

내용 및 소감

책 덕후로 불리는 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하는 2023년 올해의 책 세권 중 하나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려는데 안양관내 전 도서관에서 모두 대출중이라 지난 3개월 동안 기회가 없었다. 마침 오늘 오후 바깥 나들이중 인덕원역의 스마트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하다기에 때를 놓치지 않고 도착하여 대출이 가능하였다. 2권이 있었는데 그 사이 한권은 대출되었고 잔여 한권을 간신히 대출한 것이다. 

 

우선 이동진님의 유튜브 해설을 정리하였다. 

 

 

 

곡물을 수확하고 있는 도중에 사람들이 나무 밑에 앉아서 새참을 먹는 것을 그린 풍속화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여러 번에 걸쳐서 묘사가 되는데 그 이유는 미술사를 부전공한 엄마랑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같이 왔었고, 어린 마음에 메트로 폴리탄에 완전히 압도가 되었고, 이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형과 마지막을 보냈던 이런 순간이 마치 곡물수확 같았다는 것. 삶과 미술품이 엮어져 있다. 

 

이동진님의 소개는 10여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흐름은 충분히 설명하신거고 나머지는 내가 읽어보며 오롯이 이해할 부분들이다. 스마트도서관은 대출기간이 1주일로 짧고, 더구나 다음 화요일에 일본여행을 떠나며, 내일은 산행, 모레는 손자돌보기, 글피는 와이프 생일이라 남은 시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오늘 금요일 속도를 내야할 듯~~

 

그리고 본서를 독서 중 많은 도움을 받은 블로그 하나를 소개한다. 본문에서 언급한 예술 작품들을 잘 정리해두었기에 아주 인상적이다. 

 

1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

 

형의 죽음에 충격받아 자신의 훌륭한 직장 뉴요커를 버리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이직한다는게 비현실적인듯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였고, 10년 근무하는 중 새롭게 삶의 의의를 찾았다. 요즘같은 세상에 형제간 우의가 참으로 깊은데 우선 감동적이다.  

 

취직 첫날 저자가 보게 된 첫 작품은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이다. '평범한 철제 문을 열자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흑백 세상에 갑자기 색이 입혀지듯환상같은 톨레도 풍경이 우리를 마주한다.' 

우선 톨레도가 반가우니 작년 이맘때 와이프랑 스페인-포르투갈 자유여행때 마드리드 도착한 바로 다음 날 톨레도를 찾았고, 그림을 보니 타구스강의  알칸타라 다리, 성곽을 따라 올라가 비사그라문, 그리고 톨레도 대성당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산타크루즈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 작품을 22점이나 대하였으니 미술 무뢰한으로서 무척이나 반갑다. 

 

다음 작품은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저자가 배정받은 첫 근무지 구역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홈페이지(https://www.metmuseum.org)의 search난에 작품번호를 기입하면 찾을 수 있다. 작품번호는 책의 330페이지부터 순서대로 나와있다. 그리고 유튜버 김효석TV에서는 책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보여주며 낭독해주는데 책을 읽으면서 함께 그림을 볼 수 있어 참으로 유용하였다. 

 

1300년경에 그려진 두초(Duccio)의 성모와 성자(Madonna with child)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수확(The harvesters):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은 새 한마리가 가슴속에서 퍼덕이듯 내 안에 갇혀 있었다. 

2008년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망을 보는 것,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이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기나길게 느껴진 몇 분이 더 지난 후,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했다. 

 

2장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 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 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주민은 1230년대에 태어난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이다. 이탈리아 화가 베를린기에로 작품 '성모와 성자' . 고대 철학자의 복식을 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가장 젊은 주민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1820년에 탄생시킨 초상화 속 인물이다. Tiburcio Pérez y Cuervo (1785/86–1841), the Architect. .... 옛 거장 중 우리 시대와 가장 근접한 시대에 살았던 고야만 해도 적어도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성인이 되기 까지 살아남은 건 그중 한 명뿐이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테레사는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는 어려 보였지만 나이보다 성숙한 눈을 가졌다. 예쁘거나 활발한 편은 아니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고, 무엇을 보여주지도 감추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꽤 솔직하고 침착해 보인다. 자신의 이상한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후퇴나 양보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듯 그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젊은 여성-습작': 그의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같은 테마의 작품으로 작가 특유의 구도와 명암 처리 기법을 볼 수 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잠든 하녀': 잠든 인물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물건들이 정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절묘한 작품.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비너스와 아도니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 아도니스에세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마빛 금발의 비너스와 여신의 품을 거부하고 위험 가득한 속세로 돌아가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아도니스. 둘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고를 수가 없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 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남자의 초상': 그림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부드럽게 생명으로 가득차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살아 숨 쉬는 기억, 살아 숨 쉬는 마법, 살아 숨 쉬는 예술...뭐라 불러도 좋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고,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영혼이 그랬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 말이다..... 형 톰에 관한 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베르나르도 다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3장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라파엘로 '검은 방울새의 성모': 형은 라파엘로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병실 침대 머리맡에 이 그림을 붙여뒀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친한 친구의 결혼 선물로 그린 작품이다. 성모와 아기 예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작품 속 방울새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운명을 상징한다. 작품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이다. 

 

Augustus Saint-Gaudens '다이애나':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한 동상의 축소판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슬프고 밝은 그림을 찾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갈라졌다. 내가 찾은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7세기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화가가 단순하고 진솔하게 그린 보석과도 같은 패널 그림(예수의 탄생과 경배,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이었다. 자그마한 포플러나무 패널에 달걀 노른자로 만든 물감인 템페라를 사용한 그림으로, 갓난아기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작은 동굴 입구에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기쁨의 별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현자들과 천사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경배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마리아는 주위의 소란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구유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조용한 아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형이 두 손을 꼭 쥐고 용감하게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 느낌 말고는 다른 감정이 거의 들지 않았다. 기쁨의 별에서 특별한 종류의 선명한 빛이 나오는 듯했다. 옛 거장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함과 같은 것이었다.   

 

그 그림을 뒤로하고 어머니를 찾으러 초기 르네상스 전시실로 갔다. 어머니는 내가 찾은 그림보다 더 인정사정없고, 더 아름답고, 심지어 더 진실되어 보이는 그림 앞에 서 있었다. 14세기에 활동한 피렌체 출신의 니콜로 디 피에트르 제리니라는 거장이 그린 그림 (무덤의 예수와 성모,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이었다. 특징 없는 금색 배경 앞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게 확실한 젊은이를 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이다. 마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이 그림은 ‘통곡’ 혹은 ‘피에타’라고 부르는 장면에 속한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 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같은 현실 말이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 그러다 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4장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마스타바 양식의 페르네브의 무덤 (모형과 오리지날): 기원전 2350년애 석회암으로 소박하게 지은 마스타바 양식(직사각형 양식)의 페르네브의 무덤. 

 

우리 뉴요커 커플은 인내심을 갖고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이 믿기 어려운 선사시대 유물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 손도끼 (기원전 30~9만년경, 이집트 전기 구석기) 가 자기 손에 얼마나 잘 맞을지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은 10만 년이라는 시간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상상력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이 물건들에 대해 현실감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다른 사람들과는 꽤 다른 시각으로 물건들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제빵소와 양조장 모형- 메케트레무덤 출토: 기원전 1981-1975년경 이집트 중왕국 시기. 열여덟 명의 사람이 비좁은 곳에서 노동하고 있는 모습으로 머리를 깍고 허리 위로는 벌거벗은 남자들, 어깨까지 오는 머리에 싱글 스트랩 린넨 작업복을 입은 여자들이 가득하다. 

핫셉수트 좌상: 기원전 1479~1458년경, 이집트 신왕국 시기. 이 조각상은 원래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제트의 세계에 여왕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 무심함이 두드러진다. 

텐두르 신전: 기원전 10년경, 이집트 로마시기. 1970년대에 댐 공사로 나일강이 범람했을 때 이 멋진 건축물은 총 8백톤에 달하는 사암으로 해체되어 뉴욕으로 옮겨졌고, 이후 메트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5장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

 

수색평원도: 중국 곽희 1080년경. 내가 좀 더 이전 시대에 이 그림을 봤다면 두루마리를 차례로 펼치며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 풍경사이로 유유히 산책에 나섰을 것이다. 물론 이 그림은 지난 천 년 동안 해내온 것을 오늘도 똑같이 해내고 있다. 내 시선은 작고 고요한 배 위의 어부들과 벌거벗은 가을 나무들, 행상인들과 짐을 가득 진 노새, 암벽, 언덕을 오르는 허리 굽은 노인들을 지나 안개에 둘러싸인 산속으로 그 오래된 길을 따라 여행한다.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프랑스, 1899년): 금요일 저녁이다. 나는 수련과 건초 더미 그리고 미술관이 닫을 때까지 버틸 열렬한 예술 팬들과 같은 전시실에 있다. <건초 더미>는 모네가 사계절에 걸쳐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를 그린 연작의 일부다. 하품을 하면서, 나는 그가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이해한다. 실내에서도 이 시간대에는 모든 것이 더 나른해 보인다. 심지어 그림들까지도 잠들 준비가 되어 보인다. 오늘도 “너무 가까워요!”, “플래시는 꺼주세요!”라고 호통을 치느라 바쁜 하루였다. 이렇게 인기 많은 구역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남아 있는 소수의 관람객은 그저 평화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모네의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줄지, 준다면 어떤 영향일지 알아볼 기회가 온 것이다.

 

모네 '여름의 베퇴유'(프랑스, 1880년): <여름의 베퇴유>라는 제목의 풍경화가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바짝 다가선 나는 내 눈이 이 허구의 세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 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다만 모네의 세계에는 흔히 아는 햇빛 대신 색채만이 존재한다. 이 작은 우주의 훌륭한 조물주답게 모네는 햇빛을 나타내는 색깔들을 펼쳐두었다. 펼치고, 흩뿌리고, 엄청나게 숙달된 실력으로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고정해두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 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시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고, 에머슨은 이를 '눈부심과 반짝임'이라고 표현했다. 이 그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녹아내리는 수백만개의 아롱진 반영들이 바로 그것이다. ...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왕대비 이디아의 펜던트식 가면 (에도족, 나이지리아, 1880년6세기)얇게 켠 코끼리 엄니로 만든 가면에 조각한 베닌 왕국의 왕대비 이디아의 강인한 얼굴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온다. 이디아는 자신의 아들 에시기가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한 번, 그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또 한 번 군대를 일으켰다. 그녀의 불굴의 얼굴을 조각한 가면은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는 동시에 마주할수록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독특한 유형의 예술 작품이다. 메트에는 수많은 왕과 여왕이 있지만 이 가면이야말로 왕권과 그 위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은키시 주술상(송예족, 콩고, 19~20세기): 처음 그 조각상이 다른 유물들 사이에서 특히 눈에 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오랫동안 의심했다. 큐레이터들이 그것을 더 높은 받침대 위에 배치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긴 시간, 고독하게 조각상을 바라보고 나서야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 콩고 민주 공화국인 소예 사람들이 만든 은키시로, 영적인 힘을 담는다고 믿었던 주술상이다. 1970년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연대는 특정할 수 없다. 키는 약 90센티미터 정도이고 작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다. 은키시는 인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장 예술가들도 메트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배우(파블로 피카소, 스페인, 1904~1905년): 어느 일요일, 나는 1.8미터 높이의 장미 시대 그림 <배우> 앞에 배치됐다. 몇 달 전 한 운 없는 관람객이 비틀거리다가 이 그림과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그의 탓은 아니었지만 그 결과 캔버스 오른쪽 하단에 15센티미터 정도의 긴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그림은 지금은 보수되어 보호용 유리 뒤에 있지만 사람들이 희미한 흉터를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마다 나는 움찍하고 놀라게 된다.

 

하얀 옷을 입은 여인(파블로 피카소, 스페인, 1923년): 피카소의 그림을 보기 위해 자리를 다투는 사람들로 가득 찬 전시실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그러면 동시에 관람객들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좁은 해자 같은 통로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시실 저편의 한 신사가 태연자약하게 그 통로로 잠입하려는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그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라는 나의 팬터마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그래서 내 쪽으로 와서 직접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한 듯하다. 좋은 생각이다. 지금 내가 그의 출입을 저지하려고 하는 바로 그 통로를 이용하는 것이 이쪽으로 오는 가장 짧은 동선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는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피카소의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을 표구한 액자에 전속력으로 어깨를 부딪힌다.

 

헤르메스의 대리석 두상 (그리스, 기원전 5세기 후반):  1979년쯤이었나. 내가 여기서 일하기 얼마 전의 일이야.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날이었다더군. 투탕카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걸 빼고는. 여태까지 메트가 열었던 전시 중에 제일 큰 규모였어. 검색해봐도 좋아. 그게 원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쌍한 경비원 하나가 그리스 전시관을 순찰하다가 뒤로 돌았는데 전에는 비어있지 않았던 게 확실한 전시대 하나가 비어 있었다는 거야. 며칠이 지나서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됐어. 경찰들한테 헤르메스를 찾고 있다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몇 번 라커를 들여다보는 게 좋을 거라는 제보가 들어왔다는 거야. 헤르메스는 도둑의 신이지, 우연찮게도. 경찰이 쇠지레대로 무장한 채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해서 라커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이 빈 눈구멍들이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대..... 이 헤르메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른쪽 눈 위에 두 번째 하트가 새겨져 있었대. 쌍을 이루도록. 갓 조각한 쌍둥이 하트라니!

도난당한 키프로스 팔찌의 전기주물 복제본 (키프로스, 기원전 6~5세기): 내가 찾은 첫 번째 절도 사건은 1887년, 한 경비원이 전시 케이스가 지렛대로 열어젖혀져 있고 고대 키프로스의 금팔찌가 도난당한 것을 알아차리는 ‘충격적인 발견’을 한 사건이다. 당시 신생 미술관이었던 메트로서는 키프로스 컬렉션이 유일하게 큰 가치가 있는 소장품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여신 네이트 소형 조각상 (이집트 신왕국 시기, 기원전 664~380년): 다음으로 찾은 기사는 1910년에 발행된 것이다. 그해 한 남자가 이집트 조각상을 가지고 바우어리 지역 전당포로 들어섰다. 다음은 <<뉴욕타임즈>>가 인용한 그 남자의 말이다. ”여기 이 놋쇠 덩어리로 돈을 좀 벌고 싶은데 얼마나 하는지는 모르겠네, 우리 고모가 갖고 있던 거라. 하지만 고모는 이런 걸 보는 안목은 있어서 산 것들은 항상 진품이었어.“ 전당포 주인은 2500년 된 유물을 훑어보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당신이 지금 세공이라고 말하는 게 놋쇠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어.“ 그는 남자에게 50센트를 주었고 도둑은 전당표까지 팔아 10센트를 추가로 챙겼다. 이미 도둑맞은 유물을 찾고 있던 경찰은 평소처럼 전당포들을 순찰하다가 그 조각상을 발견했다. ‘두려운 존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신 네이트는 이제 메트로폴리탄 이집트 전시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방문객들이 미술관을 관람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은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람 구경도 할수록 는다. 이러한 ‘기예’에 통달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매일 보는 수천 명의 사람 중에서 전형적인 인물들을 골라내는 법을 터득했다. 첫 번째는 ‘관광객’ 유형이다. 대개 사는 지역 고등학교의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카메라를 목에 건 채 무조건 가장 유명한 작품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예술에 특별한 관심은 없지만 보는 눈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옛 거장 전시관의 솜씨들을 관람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뭐, 액자를 본 것만으로도!”......다음은 공룡 사냥꾼 유형이다. 이 유형은 미취학 아동들을 데리고 다니며 동선의 길목마다 목을 빼고 앞을 살피다가 이 박물관에는 예술 작품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당황하는 어머니들이다. 

 

안데스의 오지 (미국 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1859년): “ 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 그녀는 <안데스의 오지>의 광활한 풍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좀 봐요… 얼마나 능숙하게 잘 그렸는지… 몇 달, 몇 년 동안 잊혀지지가 않지요… 계속 떠올리게 되죠. 휴식 같은 곳으로 나를 계속 데려다놓아요… 대단해… 사진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닌데. 단지 눈으로 본 것일 텐데… 그리고 그렸을 텐데 말이죠….”

 강의 곡류- 뇌우 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의 홀리요크산에서 바라본 풍경 (미국 토머스 콜, 1836년): 내가 그녀에게 또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풍경화인 <강의 곡류>가 있다고 알려주자 그녀는 “그걸 들여다보러 가야겠네요”라고 답한다.


나는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세 명의 미국 작가를 조명한 사진전 <스티글리츠, 스타이컨, 스트랜드>에서 근무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사진 속 풍경들의 친숙함이다. 폴 스트랜드는 내가 기차역에서 걸어오는 길에 봤던 것처럼 신트럴 파크에 소복이 쌓인 눈을 찍었다.

 

에드워드 스타이컨은 나의 오랜 친구인 플랫아이언 빌딩의 초상화를 남겼다. 형의 병원에서 점심을 먹으러 매디슨 스퀘어까지 걸어 다닐 때 그 건물을 지나다녔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그래, 뉴욕은 바로 이렇게 생겼지”라고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고층과 저층이 공존하는 도시의 경관을 기록했다. 작가들의 대표작을 보면 뷰파인더 뒤의 들뜬 눈과 마법 같은 이미지를 인화 수조에서 꺼내는 손의 열망이 느껴진다.

 

전시실 한두 개를 지나다 보면 스트글리츠가 그의 파트너이자 후에 아내가 된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촬영한 일련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초상화도 아니고 스냅사진도 아니다. 습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은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한 노력들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손, 발, 몸톰, 가슴, 얼굴, 다시 얼굴 그리고 다시 얼굴.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 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 몸짓으로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7장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원래라면 내 결혼식이 열렸을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수확(The harvesters, 네덜란드 1565년): 그런데 형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치킨  맥너깃을 먹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맨해튼의 밤거리로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던 그때 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침대를 둘러싼 채 우리는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가득한 소풍을 즐겼다. 돌이켜보면 그 장면은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 수확>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까지 광활한 풍경을 배경으로 농부 몇몇이 오후의 식사를 즐기는 모습 말이다. 배경 중간쯤 교회가 있고 그 뒤로 항구 그리고 황금빛 들판이 아스라한 지평선까지 펼쳐진다. 화면 앞쪽에는 큰 낫으로 곡물을 거두는 남자들과 그것을 한데 묶느라 허리를 굽힌 여자가 보인다. 맨 앞쪽 구석에는 일을 하다가 배나무 아래에 앉아 식사를 하는 아홉 명의 농부들이 다소 희극적이면서도 애정을 담아 묘사되어 있다.

 

8장 푸른색 근무복 아래의 비밀스러운 자아들

하트 하우스의 방(미국 1680년): 잠시 후 우리는 천장이 낮은 ‘하트 하우스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방도 17세기 매사추세츠에서 지어진 건물의 일부로, 철거될 운명에 처하자 미술관에서 이 방만 도려내듯 해서 옮겨왔다.

 

조지 워싱턴(미국 길버트  스튜어트, 1795년경): 조셉과 나는 계단을 내려가 구관 2A로 간다. 여기도 굉장히 작은 공간이다. 우리는 조지 워싱턴이 마지막 생일 파티를 했던 버지니아의 호텔 안에 서 있다. 조지에 관해서는 조셉에게 해줄 말이 많다.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유명한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는데 조셉은 앞으로 1달러 지폐를 꺼내 들고 그림과 비교하며 눈을 게슴츠레 뜨는 관람객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될 것이다.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독일 출신, 미국 에마누엘 로이체, 1851년): 람들은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을 테고 조셉은 그들을 실망시켜야 할 것이다. 옥외 광고판처럼 커다란 그 그림은 건물을 보수할 때 옮겨올 수가 없어서 현재 관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호가니 사이드 체어(미국, 1760~1790년경): 슬슬 걸어서 치펜데일 스타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테렌스가 가르쳐준 것이 생각난다. 마호가니 목재는 카리브 연안 지역, 아마모 벨리즈에서 수확되었을 확률이 높은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예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테렌스는 자신이 아마도 카리브 연안으로 납치되어 온 마지막 아프리카인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노예 무역 초창기에 납치된 사람들은 보통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다가 중간 항로를 거쳐 끌려온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로 대체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테렌스는 함께 바라보고 있던 의자의 제작일을 확인했다. 영국 제품을 그대로 모방한 모델이었다. “1760? 아이고.”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좋은 징조가 아니네.”

 

“이봐 트로이, 이 일은 어쩌다 하게 됐어?”
“보험회사에서 20년 동안 일했어.” 그가 대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상사가 직업 적성 검사를 하라는 거야. 어떤 일이 각자에게 제일 잘 맞는지 보여주는 검사라나 뭐라나. 왜 그런 걸 하랬는지 이유는 묻지 마. 검사 결과를 보면서 생각했지. 내가 유일하게 되고 싶었던 건 개인적으로 예술을 후원하는 부자였다고. 이게.” 그는 입고 있는 푸른색 근무복의 옷깃을 잡아당겨 펴면서 말한다. “그 꿈에 제일 가까워.”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9장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그리스, 기원전 590~580년경): 이 전시실의 유명 인사가 '뉴욕' 쿠로스라고 불리는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이라는 사실이 이 모든 배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유명한 쿠로스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의례적인 이름일 뿐이지만 나는 내 나름의 이유로 뉴욕 쿠로스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그 이름은 마치 이 호리호리한 아테네 청년이 고국을 떠나 아스토리아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며 우리들처럼 지하철을 타고 메트로 출퇴근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같은 이주자로서, 또 미술관에 매일매일을 서 있는 사람으로서 이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과 동질감을 느낀다.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옮기는 아이아스가 그려진 목이 긴 테라코타 암포라 (그리스, 기원전 530년경):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의 오른쪽으로 목이 긴 암포라의 감탄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암포라는 기원전 6세기에 물레 위에서 만들어 채색한 후 가마에서 구운 저장용 항아리다. 항아리의 표면에는 방금 전사한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그의 전우가 전장에서 들어 옮기는 장면이 특별히 공들여 묘사되어 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는 생명과 활력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는 화염처럼 밝고 커다란 눈을 가진 견실한 몸의 뛰어난 주자로 격력한 기쁨과 사나운 분노의 포효는 공기를 찢듯이 가른다. 그러나 이 암포라의 그림에 담긴 그의 몸은 애처롭게 축 늘어져 있고, 그의 정신 혹은 영혼도 마지막 숨과 함께 그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 사진을 찾지 못했음...

 

메디치 아테나(아테나 대리석 두상) (로마, 기원전 430년경의 그리스 조각상 모사): 지금은 유실된 고전기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작품을 모사한 <메디치 아테나>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두상 쪽으로 학생들을 데려간다(이 모작도 몸통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함께 평온하고 무표정하지만 굳거나 얼어붙지는 않은 여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혈색이 돌고 유연한 지혜의 여신은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푸른 쿠란 한 장 (튀니지, 850~950년경): 전시관의 서론에 해당하는 다양한 나라와 시대의 쿠란들을 보여주는 전시실 안에 선다. 9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디고로 염색한 양피지에 쓴 쿠란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휴대용 쿠란 필사본 (이란 혹은 튀르키예, 17세기): 쿠란 한 권 전체가 오스만 제국 병사의 목에 걸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진 것도 있고, 투르크-몽골 제국 황제 티무르의 소유였던 세로 2미터가 넘는 쿠란의 페이지도 있다.

 

에미르 사이프 알 두냐 와일 딘 이븐 무함마드 알 마와르디의 향로 (이란, 1181~1182년)/체스 세트(이란, 12세기): 12세기 이란에 도착하니 사자 모양의 청동 투각 향로와 그 옆의 이슬람식 체스판을 마주한다. 왕 자리에는 샤, 왕비 자리에는 와지르, 코끼리 모양 비숍, 전차가 룩을 대신한 800년 된 체스판이다. 이전에 봤던 다른 관상용 체스 세트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분실된 것은 폰 하나뿐이다.

 

 미라지, 혹은 애마 부라크를 타고 승천하는 무함마드(이란, 1525~1535년경):  시간에 신경을 쓰며 수많은 매력적인 유물들을 스쳐 지나간다. 이 전시관에서 길고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나의 미래가 그려진다. 하지만 6백 년 전 중앙아시아의 그림 속에 또렷하게 묘사된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습은 참으로 진귀한 것이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미흐라브(기도용 벽감)(이란, 1354~1355년): 독실한 무슬림 방문객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지 물어온 것이다. 그와 나는 예배자들에게 메카의 방향을 안내하는 벽감인 미흐라브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도해도 되는지 묻는다. 나는 태연하게 답한다. “, 물론이죠. 하지만 다른 관람객들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 엎드리는 건 안됩니다.” 그는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두 손을 모으며 미흐라브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나도 그를 따라 하며 하나의 중심점, 이 경우에는 실제 위도와 경도상의 좌표를 향하도록 자신의 믿음을 맞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다. 방문객에게 이 작품은 그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거룩함으로 통하는 관문인 셈이다. 

 

시모네티 양탄자 (이집트, 1500년경):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서 그 유명한 <시모네티 양탄자>를 내려다본다. 섬세한 조명으로 밝혀져 있어 마치 마법처럼, 형형색색의 연못 위로 연기가 자욱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 자체로 시각의 우주 같은 이 양탄자 속에서 길을 잃고 싶은 기분이었다면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더비시의 초상화 (중앙아시아, 현재 우즈베키스탄 추정, 16세기):  나는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 앞에 앉는다. 더비시는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로 수도사와 다소 비슷하다. 종이에 그린 이 초상화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그려졌다. 그림 속 주인공은 주황색 망토와 독특한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쓰고 땅 위에 낮게 웅크려 있고 시선은 구부러진 코의 능선을 타고 아래를 향한다. 손에 들린 염주는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매일 의식처럼 행하는 그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10장 애도의 끝을 애도해야 하는 날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프랑스, 니콜라 푸생, 1633~1634년경): 블레이크가 근무 중에 생긴 일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들어봐.” 그가 말한다. “내가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가 있는 B구역 프랑스 전시실에 있는데 한 꼬마가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로 그림을 찌르는 거야. 하느님 맙소사. 꼬마한테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하고 그림을 살피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이가 찌른 부분에 약간 자국이 난 것 같은 거야. 보고를 했지. 기술자가 도착했고. 그리고, 이게 정말 이상한 대목인데, 기술자가 표면 전체를 손가락으로 훑는 거 있지! 꽤 세게, 선크림을 바르듯이. 그리고 말하더라고. ‘아냐, 자국처럼 보이는 게 뭐든 간에 바니시 몇겹 아래에 있어. 오래된 거야.’”

 

바다로 지는 노을 (미국, 존 프레더릭 컨셋, 1872년):  어느 날 나는 메트가 처음으로 취득한 그림 몇 점을 발견했다. 그림들의 취득 번호, 작품의 캡션 라벨 하단에 나오는 일련 번호 같은 것을 보고 눈치를 챈 것이다. 취득 번호는 대개 ‘2008.11.413’처럼 길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74.3’으로 이건 메트가 영구적으로 터를 잡기 6년 전인 1874년에 컬렉션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림들은 미술관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존 프레더릭 켄셋이 그린 사랑스럽고 절제된 느낌의 풍경화다.

 

자일스 카펠 경의 격투용 투구 (영국 추정, 1510년경): 가장 잔인해 보이는 얼굴은 그 유명한 1520금란의 들판에서 결투에 참여했던 자일스 경의 투구다. 아무 장식이 없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을 알아볼 만한 인간적인 특징은 전혀 없고, 자일스 경이 숨을 쉬고 바깥을 보는 데 필요한 작은 구멍들만 격자형으로 나 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부분은 이 투구의 차갑고 냉정한 정직함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내려쳐서 부술 때 자신의 두개골을 보호하기 위한 커다랗고 속이 빈 중금속 덩어리일 뿐이다.

 

 

마담 X(마담 피에르 고트로) (미국, 이탈리아 출신, 존 싱어 사전트, 1883~1884년):  싱어 사전트의 매혹적이기로 유명한 초상화 <마담 X> 옆에 자리를 잡는다. 비록 지금은 그림과 대조를 이루는 내 허름한 몰골이나 이 희극적인 조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말이다. 이건 그냥 일상이다. 시간이 흐르고 관람객들이 줄지어 들어올 때면 여러 파편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오늘은 여호와의 증인 그룹이 몇 번이나 방문할지 궁금해진다.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담 X>로 가는 길을 물으며 다가오길래 돌아봤더니 록스타 마이클 스타이프와 배우 킴 캐트럴이었던 일을 떠올린다.

 

북동풍(미국, 윈슬로 호머, 1895년, 1901년 재작업): 나는 6미터 정도를 걸어서 다음 위치로 이동한다. 바위에 부딪혀 장엄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바람에 휩쓸린 메인주의 해변을 그린 윈슬로 호머의 작품들 앞이다. 그림들은 너무나 강렬해서 내 기분을 조금 물들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으로 그친다. 바닷가의 짠 공기가 맡아지지도, 딱히 맡고 싶지도 않다.

 

엄마와 아이(낮잠에서 깨는 아이) (미국, 메리 카사트, 1899년경): 어느 순간엔가 나는 기계적으로 A지점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미국의 인상파 화가 메리 카사트의 작품 옆에 선 나 자신을 발견한다. 카사트는 분명 훌륭한 화가였지만 나는 항상 그녀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그랬기 때문에 최근에 아메리카 전시관을 돌아볼 때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카사트는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네와 드가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면서 프랑스에서 거의 모든 주요 작품을 완성했다. 프랑스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형적인 미국인도 아니고, 주류에 속했던 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부르주아 계급이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인상파 작품들만큼 흐릿하지않고 옛 거장들의 그림보다는 더 즉흥적이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스타일인 것이다. 그녀에 대해 한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건 명확하게 생각할 만한 부분을 찾지 못해서였다

 

정리하자면 나는 그녀의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믿을 수도, 견딜 수도 없어서, 아주 오랜만에 그저 깊이 흠모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이런 순간들은 예전만큼 자주 오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슬퍼진다. 위대한 그림은 경외감, 사랑 그리고 고통같은 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메자닌의 골동품들에 대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격렬한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삶의 중심에 구멍을 냈던 상실감보다 그 구멍을 메운 잡다한 걱정거리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옳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11장 완벽하지도 않고 완성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

 

무제(로스엔젤레스의 로스의 초상) (미국, 쿠바 출신,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 1991년): 경비원으로서 특히 흥미로운 작품은 색색으로 포장된 80킬로그램에 달하는 사탕 더미로, 관람객들이 그 작품을 만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져갈 수도 있었다. 이 작품은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가 에이즈로 쇠약해져간 자신의 배우자를 표현한 초상화다. 초상화의 주인공과는 달리 그를 기념한 작품의 무게는 끊임없이 다시 채워진다.

 

성 바바라(네덜란드, 얀 반 에이크, 1437년,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어느 날 오후, 나는 일리노이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재미있는 일을 한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관람객을 지켜본다. 고급 문화 전문가로 보이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와서 얀 반 에이크의 <성 바바라>를 바라보고 있다. 딱 봐도 감탄으로 넋이 나간 상태다. 하지만 그의 넋을 뺀 것은 이 작품의 역사성이나 신학적 의미가 아니라 겉이 깨져 안이 들여다 보이는 시계처럼 완전히 드러난 작품 내부의 작동 방식이다.

 

 

12장 무지개 모양을 여러 번 그리면서

 

바티칸 시스타나 예배당 천장화: 만일 어떻게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높게 쌓아 올린 비계 위에 서서 턱을 치켜들고 설 수 있다면 거장이 하루에 얼마만큼의 작업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은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했다. 이것을 이탈리아어로 하루의 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라고 하는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사실 이렇게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성취들이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아담은 조르나타 네 개, 팔을 뻗고 있는 신도 조르나타 네 개, 조각들을 세어보면 미켈란젤로가 붓과 물감통과 모래, 회반죽 자루를 가지고 흙손으로 그 높은 곳에서 570일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사초의 성 베드로와 팔 연구(앞면)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1493~1494년경): 소묘화에 다가서면서 그 작품을 선배 거장 마사초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10대 미켈란젤로의 시선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한다. 이 소묘는 마사초의 성 베드로 프레스코화를 붉은 초크와 펜, 갈색 잉크로 베낀 작품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다. 부오나로티 가문은 빈털터리였지만 귀족이었고 그의 아버지 로도비코는 아들이 손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그물처럼 교차하는 선들로 세심하게 공을 들여 음영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로도비코가 한 가지 면에서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육체노동이었다.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몸을 쓰는 노동. 숙련이 가능한 노동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름길도 없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 획 한 획 긋는 것 말고는 일을 진척시킬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겸허한 작업인 것이다.

 리비아인 예언자 연구(앞편)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1510~1511년경):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근면성의 산물이다. (중략) 종이 위의 무엇 하나 그냥 그린 건 없다. 한 획 한 획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에너지와 야심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빈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혼신의 힘을 바쳐 주어진 과제를 해냈고, 씁쓸한 불평 따위는 일이 끝난 후에나 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또 있을까?


피에타와 예수의 매장 구도 스케치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1555~1560년경, 옥스포드 애쉬몰리언 박물): 나는 돔 그림이 있는 방에서 나와 그가 노년에 진행한 또 다른 프로젝트였지만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던 피에타상의 스케치를 찾아 나선다. 종이 한 장에 80대 노인의 떨리는 손으로 그린 다섯 점의 습작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작고 치열하며 솔직한 느낌의 그 그림들에서는 그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라고 의식을 한 흔적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80대에 접어들어서도 미켈란젤로는 사소한 실수로 성 베드로 성당의 완공이 늦어지게 된 일로 크게 자책했다. “수치심과 슬픔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라고 그는 당시를 기록했다. 다섯 점의 스케치 중 두 점은 그가 결국 만들어낸 조각과 비슷하다. 수직으로 서 있다시피 하는 숨을 거둔 예수와 그의 무거운 시신을 받치고 있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듬직한 근육질로 예수의 몸을 조각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돌을 깎아나가 마침내 수척하고 쪼그라들어서 묘하게 현대 인상파 조각 느낌이 나는 예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1490년대에 제작된 그의 <피에타>가 거장의 명성에 걸맞는 걸작이라면 이 <론다니니 피에나>에서는 고통과 내밀한 슬픔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13장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리우스의 승리 (이탈리아,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29년):  근무복을 입는 마지막 날, B구역 대장의 데스크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의 책상은 그레이트 홀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있다. 그곳으로 가면서 눈앞의 광경을 찬찬히 둘러본다. 머리 위로 보이는 접시 모양의 돔 세 개는 하나만으로도 대성당을 만들 정도로 커다랗다.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텅 빈 홀에는 동료 두 명이 강철 받침대를 밀면서 가로지르고 있다. 내 뒤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장군이 포로로 잡은 유구르타 왕을 데리고 행진을 하는 장면이 티에폴로의 커다란 화폭에 펼쳐져 있다. 모퉁이를 도는데 옛 거장 전시관에 배치될 경비원들이 배치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목이 긴 테라코타 암포라(정면: 헤르메스와 여신 사이의 아폴로, 후면 에티오피아 지주들 사이의 멤논)(그리스, 기원전 530년경): 방향을 돌려 매표소를 지나 그리스 조각 전시실로 들어갔다가 그림이 그려진 고대 도자기들이 있는 부속 전시실로 향한다. 마지막 날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야외에서 일하며 염소를 기르고 소크라테스를 알았던 이름 모를 누군가가 불로 흙을 굽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가족이 사용할 기름과 포도주를 보관한 소박한 그릇들이지만 삶과 죽음, 신들의 모험을 담는 여유를 가진 예술품이기도 하다.

 

사르디스 아르테미스 신전의 대리석 기둥 (그리스, 기원전 300년경): 웅장한 사르디스의 기둥을 지나 다시 한번 로마의 궁정을 거닐지만 이번에도 대리석에 조각되고 동전에 새겨진 수많은 황제들의 이름을 제대로 맞추는 데 실패한다.

 

남성의 대리석 흉상 (로마, 1세기 중반): 내 주의를 끄는 것은 대리석 흉상들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은 우락부락한 얼굴들은 그 사이를 오가는 내 동료들의 모습과 그닥 다르지 않다.

 

붓꽃 (네덜란드,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 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빈센트의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가 삶을 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운이 좋다는 사실에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다. 내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탈리아, 프라 안젤리코, 1420~1423년경):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작품이 좋다. 단단한 나무판 위에 입혀진 템페라의 느낌도, 자디잘게 금이 간 금박아래로 붉은 진흙 베이스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 것도 좋다. 옛 기독교 예술품과 거기에 깃든 빛을 발할 정도로 선명한 슬픔이 좋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예수의 몸은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중략)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 하단이 있다. 그곳에서 그림의 톤은 다시 한번 변화한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 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형의 죽음 이후 모든 것과 단절한 채 완벽한 고독 속으로 숨고자 했던 브링리는 어느새 스스로가 고요하고 정돈된 세계를 더 이상 원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전시실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과 자신의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위로 그 자체가 되었음을, 이제는 ‘그간의 애도를 애도해야 하는 날들’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마침내 저자는 그토록 거부했던 세상으로 나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기로 결심하며 10년에 걸친 내밀한 고백을 맺는다. 예술이 건네는 위로를 통해 상실과 혼란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책은, 치열하고 제멋대로인 삶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잔잔하지만 커다란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교보문고 책 소개

 

“나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했던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고요하게 서 있고 싶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10년,
인류의 위대한 걸작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 남자의
삶과 죽음, 인생과 예술에 대한 우아하고 지적인 회고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패트릭 브링리의 독특하면서도 지적인 회고를 담은 에세이다. 가족의 죽음으로 고통 속에 웅크리고 있던 한 남자가 미술관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선망 받는 직장에서 화려한 성공을 꿈꾸며 경력을 쌓아가던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가족의 죽음을 겪게 된다. 이를 계기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끝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며 스스로를 놓아두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도피하듯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브링리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최소 여덟 시간씩 조용히 서서 경이로운 예술 작품들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거장들의 혼이 담긴 그림과 조각부터 고대 이집트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걸작들과 오롯이 교감하고, 푸른 제복 아래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동료 경비원들과 연대하는 동안 서서히 삶과 죽음, 일상과 예술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나가며 멈췄던 인생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한다.

저자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영미권 유수 언론으로부터 ‘잊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 ‘슬픔까지도 포용하는 삶에 대한 빛나는 서사’라는 극찬을 받으며 40주 연속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길어 올린 삶과 예술의 의미,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내밀한 고백은 예기치 못한 인생의 소용돌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버린 이들, 소란한 세상에 지쳐 완벽한 고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잔잔하지만 묵직한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선정내역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2023년 올해의 책 3" 소개 도서

 

저자(글) 패트릭 브링리 Patrick Bringley

대학 졸업 후 《뉴요커》에 4년간 몸담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뉴욕 한복판에서 성공을 꿈꾸며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각별한 사이였던 형이 갑자기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는다. 2008년 가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그곳에 있는 300만 점의 예술 작품을 지키게 된다. 2018년, 10년간 근무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 뉴욕 도보 여행 가이드로 일하며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All the Beauty in the World)』를 집필했다.
저자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2023년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CBS》, 《NPR》, 《AP통신》 등 영미 주요 언론의 극찬을 받았고,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4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현재 브루클린 선셋파크에서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며 비정기적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목차

  • 1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
    2장. 완벽한 고독이 건네는 위로
    3장.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4장.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5장.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
    6장. 예술가들도 메트에서는 길을 잃을 것이다
    7장.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8장. 푸른색 근무복 아래의 비밀스러운 자아들
    9장.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10장. 애도의 끝을 애도해야 하는 날들
    11장. 완벽하지도 않고 완성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
    12장. 무지개 모양을 여러 번 그리면서
    13장.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추천사

  • “앞으로 방문할 모든 미술관에서 내 곁에 패트릭 브링리가 있으면 좋겠다. 다행히 이 책은 그 차선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뉴욕에 1년간 살았을 때, 메트는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외로운 날이면 전시실을 어슬렁거렸다. 무작정 미술관을 배회하다 보면 발길을 붙드는 그림이 꼭 하나쯤은 있었고, 나는 새로 사귄 친구처럼 그 그림과의 관계를 정립하며 이국異國 생활의 고달픔을 달래곤 했다. 인적 없는 회랑을 순찰하며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저자의 발길을 따라 나는 다시 메트에서 낯선 고독을 어루만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 책은 미술관의 그림을 지킨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예술을 통해 제 마음의 소중한 부분을 경호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오래된 그림들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는 저자의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미술관을 거닐며 머물고 있는 이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관객으로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작품들 이면의 이야기와, 이 이야기
    들을 지키는 사람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이 책은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기분을 선사한다.”
  • “아름다움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 고귀한 것과 평범한 것 모두에서 기쁨을 찾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미술관, 그곳에 있는 작품, 그리고 그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인내심 있는 관찰자가 들려주는 공감 가는 연대기.”
  • “이것은 아름다운 위로다.”
  • “세계적인 박물관의 경이로움에 대한 깊은 오마주이자 슬픔까지도 포용하는 일에 대한 빛나는 이야기.”
  •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많은 예민한 독자들이 박물관 경비원이 되고 싶어질 것이다.”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걸작들만큼이나 감동적인 통찰이 풍부한 이 책은 ‘예술로부터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슬픔에 빠진 그를 위로해준 오래된 명화만큼이나 빛나는 예술 작품들.”
 

책 속으로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 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 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_‘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중에서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중략) 그러다 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_‘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중에서

밥은 500명이 넘는 경비원들의 이름을 모두 아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다.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는 이름과 소속 구역이 적힌 타일을 찾아 미술관의 수많은 관리 구역 중 하나를 나타내는 게시판의 세로줄에 놓는다. 구역마다 그가 채우고자 하는 할당 인원이 있지만, 당일에 특별 근무 인원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따라 각 구역에 배치할 인원을 늘리거나 줄이기도 하고, 몇몇 전시실을 닫기도 한다. “브링리, A(중세)구역!” 그가 곧 외친다. 아니면 “R(근대)!”, “K1(그리스ㆍ로마)!”, “F(아시아)!”, “I(19세기)!”, “G(아메리카)!” 혹은 또 다른 시대, 문화, 지역을 외친다. 오늘 아침은 “브링리H, 구역!”이다.
_‘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중에서

메트는 2천 명 이상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데 오늘만큼은 많은 이들이 제 물을 만난 듯하다. 큐레이터들은 전시실 한복판에 서서 어느 유물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토론한다. 기술자들은 누군가와 부딪힐 염려 없이 예술품이 실린 카트를 이리저리 밀고 다닌다. 인부들은 그들의 실력을 믿고 편안해 보이는 보존가들의 감독하에 로프와 도르래로 조각상을 어떻게 들어 올릴지 몇 시간씩 계획을 세운다. 도처에서 전기 기술자, 공기조화 기술자, 페인트공(세밀한 붓이 아닌 롤러를 사용하는)들이 몰고 다니는 전동 리프트의 삐, 삐, 삐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몇몇 직원들은 손님을 한두 명씩 데려올 수 있는 특권을 활용하기 위해 휴일임에도 얼굴을 비춘다. 큐레이터들이 고액 기부자와 VIP에게 미술관을 안내하는 동안 경비원과 청소부는 부모님께 호사스러운 투어를 제공한다.
_‘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 중에서

방문객들이 미술관을 관람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은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람 구경도 할수록 는다. 이러한 ‘기예’에 통달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매일 보는 수천 명의 사람 중에서 전형적인 인물들을 골라내는 법을 터득했다. 첫 번째는 ‘관광객’ 유형이다. 대개 사는 지역 고등학교의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카메라를 목에 건 채 무조건 가장 유명한 작품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예술에 특별한 관심은 없지만 보는 눈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옛 거장 전시관의 솜씨들을 관람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뭐, 액자를 본 것만으로도!”
_‘예술가들도 메트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중에서

“이봐 트로이, 이 일은 어쩌다 하게 됐어?”
“보험회사에서 20년 동안 일했어.” 그가 대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상사가 직업 적성 검사를 하라는 거야. 어떤 일이 각자에게 제일 잘 맞는지 보여주는 검사라나 뭐라나. 왜 그런 걸 하랬는지 이유는 묻지 마. 검사 결과를 보면서 생각했지. 내가 유일하게 되고 싶었던 건 개인적으로 예술을 후원하는 부자였다고. 이게.” 그는 입고 있는 푸른색 근무복의 옷깃을 잡아당겨 펴면서 말한다. “그 꿈에 제일 가까워.”
_‘푸른색 근무복 아래의 비밀스러운 자아들’ 중에서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 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_‘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중에서

그토록 불만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근면성의 산물이다. (중략) 종이 위의 무엇 하나 그냥 그린 건 없다. 한 획 한 획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에너지와 야심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빈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혼신의 힘을 바쳐 주어진 과제를 해냈고, 씁쓸한 불평 따위는 일이 끝난 후에나 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또 있을까?
_‘무지개 모양을 여러 번 그리면서’ 중에서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중략)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_’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중에서

 

출판사 서평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숨기로 했다”

상실의 고통으로 삶이 무너진 순간
가장 경이로운 세계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우리는 때때로 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얼마든지 삶을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던 패트릭 브링리도 그랬다. 대학 졸업 후 선망 받는 《뉴요커》에 입사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고층 사무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자신의 인생이 그대로 수직 상승해 언젠가는 ‘빅 리그로 올라가리라’ 여겼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며 경력을 쌓아가던 어느 날, 누구보다 똑똑하고 배려심 깊던 형 톰이 젊은 나이에 시한부 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의지했던 형의 투병과 죽음을 겪으며 브링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그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러던 저자는 불현듯 형의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와 미술관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침묵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슬픔과 달콤함이 허용되는 미술관. 그런 미술관 한 구석에 조용히 서서 관람객들을 지켜보는 경비원. 브링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며 스스로를 그저 놓아두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008년 가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연 700만 명이 넘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길어 올린
삶과 죽음, 일상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연 700만 명의 관람객을 자랑한다. 이 거대한 미술관에서 매일 여덟 내지 열두 시간씩 최소한의 기척으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경비원 일은 저자가 뉴욕 한복판 마천루 숲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매일 아침 관람객들이 입장하기 전 고요한 전시실에서 벽에 걸린 작품들을 바라보다가 렘브란트나 보티첼리를 만난 듯 강렬한 몰입을 체험하기도 하고, 고통의 순간을 포착한 베르나르도 다디의 회화를 마주하고는 “거대한 바위처럼 냉혹하고 가슴 저미는” 운명을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미켈란젤로의 특별전에서는 천재 조각가가 여든의 나이에 그린 소묘를 바라보며 부단한 근면함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느끼고, 메리 카사트의 다채로운 그림에서는 ‘햇살에 젖은 것 같은’ 알 수 없는 따스함에 젖어든다. 저자는 이처럼 너무나도 장엄하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비통한 순간을 묘사한 거장들의 작품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보며 “일상은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며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것”임을,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며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임을 서서히 깨달아간다.

아름답고 거대한 미술관과 그곳을 채우는 작품들,
그리고 그 공간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위트 있고 공감 가는 연대기

브링리가 근무할 당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우스갯소리로 스스로를 ‘보안 예술가’라고 부르는 600여 명의 경비원들이 있었다. 경비원 동료들은 대체로 엘리트 사립학교 출신에 비슷한 이력을 지녔던 《뉴요커》의 이전 동료들과는 전혀 달랐다. 암살 위협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민자 출신의 동료, 보험회사에서 일했던 동료, 문학가로서 등단을 꿈꾸는 동료,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동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동료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출신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었다. 푸른 제복 아래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동료들과 작지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무심한 듯 격려하고, 함께 편견에 맞서는 과정에서 저자는 엇나갔던 삶의 리듬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을 느낀다.

“삶은 고군분투하며 성장하고, 장조해내는 것이다”
지독한 슬픔과 무기력감을 내려놓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에 대하여

형의 죽음 이후 모든 것과 단절한 채 완벽한 고독 속으로 숨고자 했던 브링리는 어느새 스스로가 고요하고 정돈된 세계를 더 이상 원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전시실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과 자신의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위로 그 자체가 되었음을, 이제는 ‘그간의 애도를 애도해야 하는 날들’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마침내 저자는 그토록 거부했던 세상으로 나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기로 결심하며 10년에 걸친 내밀한 고백을 맺는다. 예술이 건네는 위로를 통해 상실과 혼란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책은, 치열하고 제멋대로인 삶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잔잔하지만 커다란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