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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여행 5일차: 페루 리마 도착 및 시내투어 (2024.2.17)

클리오56 2024. 3. 18. 10:34

 

일자: 2024.2.17
코스: 리마 공항~숙소~산 마르틴 광장~아르마스광장~아모르공원~벽화마을~ 숙소
거리: 57.8km(차량 통행 포함)
소요시간: 11시간 5분(휴식 4시간 32분)


멕시코시티 출발 22:55~리마  도착 05:05

지난번 에어 캐나다로 밴쿠버에서 멕시코 시티로 이동할때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에는 멕시코 시티에서 리마로 이동하는 5시간여 국제이동임에도 물조차 무료 제공되지 않으니 황당할 뿐.

호르헤 차베스 국제공항을 통하여 입국했는데 국가적 영웅의 이름인가 했는데 페루 최초의 조종사 호르헤 차베스 다르트넬(1878~1910)을 기념하여 공항 이름을 명명하였다. 

입국 수속때 일행들에게 질문이 많았는데 좀 의아스러웠으니 외견상 관광객이 분명하고 그룹인데도.

아무튼 야간비행은 적응이 어려웠고 비몽사몽간에 숙소에 당도하여 캐리어를 맡기고, 내일 먹을 조찬을 오늘 먹는 기지를 발휘했다.

새벽에 도착했지만 A팀은 차랑기사가 숙소를 혼돈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흐를 수 밖에. 그래도 우리 숙소는 스페인에서 많이 보았던 이슬람식 중정이 있는 부티크한 멋스러움을 지녀 모두들 대만족이다.


페루는 세번쯤 출장을 다녀왔고 반나절 정도 시내 투어를 경험하였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다.

다만 하나 기억하기로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수도로 정할 좋을 장소로 원주민들이 리마를 추천했는데 실제로는 기후가 아주 나쁜 장소지만 바로 그 방문 당시에만 날씨가 좋아 침략자들이 오케이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페루는 잉카 문
명이 전성기를 누렸고 스페인 식민시대에도 수도역할을 하였으니 과거 남미의 중심지였다. 

우선 구시가지를 투어하였다. 출발은 산 마르틴 광장인데, 남미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미 독립에 앞장서 페루를 해방시킨 호세 데 산 마르틴을 기념하는 광장이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출신 장군이며 그의 기마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산 마르틴 광장에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이 보이는데 구시가지의 명동이라 불리는 라우니온 거리다. 이를 따라 아르마스 광장까지 진행.

아르마스 광장의 아르마스는 무기라는 뜻이며, 1977년부터는 마요르 광장(중앙광장)이라고도 한다.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5년 도시 설립 이래 도시의 중심이다. 

스페인 식민지 당시 수도로 정해졌을 만큼 화려하고 유수한 건축물로 둘러싸인 아르마스 광장은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특히 메인 광장인 아르마스에서 바라보는 리마의 대성당은 당시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광장 진입이 불가한데 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경찰이 통제한다.


리마 대성당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1534년 페루의 리마를 수도로 정하고 1535년부터 건설한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다. 이 식민시대풍 건물은  당시 스페인 건축 양식이었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피사로가 직접 초석을 놓았다. 입장료 30솔.

아마존의 단단한 나무로 깍아 만든 성당 정면의 원목 발코니는 화려하다.

침략자 피사로의 동상은 최근 철거되어 분수대가 세워졌지만 피사로는 리마 대성당에 잠들어 있다.

용서의 문 입구를 지나면 식민시대풍 성당내부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성당 바닥의 체스판 모양이 이채롭다. 색감이 원색적인 것들이 많이 보이는게 남미와 카톨릭 문화의 웅합을 보여주는 듯

성당내 피사로의 무덤


대통령궁도 출입통제였고, 이곳도 피사로가 건설 시작, 1541년 암살되기전 마지막 몇년을 여기서 보냈다. 많은 개조와 보수를 거쳐 바로크 양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정오의 교대식 볼만하며, 내부 관람은 투어 신청으로 가능하고 황금의 방이 유명하다.

산프란시스코 교회 및 지하무덤
1546년에 지어졌고 노란색 외관이 인상적, 정면 장식 유명하다. 하지만 높은 펜스를 두르고 상당한 보수가 진행중이다. 유감스럽게도 시간 배정에 실패하여 내부 관람을 하지 못했다.

디에고 데 라푸엔테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서는 쿠이가 만찬 상에 올려졌다. 16~18세기에 수집한 약 25,000권의 방대한 책과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지하묘지 카타쿰바가 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약 7만명의 유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모두가 가이드 투어인데 보질 못했다.

수도원에만 입장하여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내부 디자인이 다른 여느 성당과는 다르다.


이젠 소프트하게 사랑의 공원 아모르를 거쳐 절벽 아래 바닷가로 진행한다.

저기 보이는 파란색 식당 La Rosa Náutica 에서 사진이라도 한번 찍어보자며 모두들 절벽 아래로 내려간다.


벽화마을로 이동했다. 남미는 어딜가도 원색적 벽화가 유명한데 이곳 역시 대표적인듯 하다.

단체 식사하려는 식당은 대기가 길어 불가하였고, 팀별로 현장에서 스스로 검색해가며 찾았던 집이 의외로 맛집이라 소확행이었다. 술은 판매되지 않았는데 이 일대 모두 금지구역이다. 대신 치차라는 음료를 괜찮게 들었다. 맛은 물론이고 양도 많아 남은 음식은 포장하여 가져왔다.

숙소로 가는 도중 마트에 들러 내일의 행동식 식사를 위해 장을 보았다. 바케트 빵과 과일, 음료, 치즈와 햄 등 여러가지를~

페루 소개

 
정식 국가명은 페루 공화국이다. 
국기는 빨간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빨간색이 한 번 더 중복되어 있는 삼색기이다.
빨간색은 독립과 싸움 때 희생된 사람들의 피를, 하얀색은 용맹함, 평화를 나타낸다.
대통령기 등 관공서에서 사용되는 깃발에는 페루의 국장이 들어가 있으나 
민간들끼리 사용하는 국기에는 국장이 생략되어있다.
국장 주변에는 종려나무 가지와 월계수 가지들이 장식되어 있다. 종려나무 가지와 월계수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뜻한다.

 

 

페루라는 이름은 원래 이곳에 살던 한 원주민의 이름 Birú였고, 스페인인이 지역 이름을 물어보는 것을
자기 이름을 물어보는 것인 줄 알고 답한 것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 이름을 '페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원주민 언어로 '저기'가 Birú이고, 금의 나라를 물어본 침략자들에 추장이 가리키며 그랬다는 설도 있다. 
 
나무위키에서 페루의 역사를 정리해서 옮겨보았다.
페루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노르테치코 문화가 등장하였으며
섬세한 문화같은 건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복잡한 도시국가들의 존재가 암시된다.
이후에 여러 거대한 건축물들을 보아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한 강력한 국가들도 나타났던 걸로 여겨지며
나스카 지상화 등 페루의 많은 유적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당시에 존재하였던 치무 왕국이나 와리 제국 같이 강력한 국가들에 대한 전설, 설화, 신화, 서사시 등이 전해오지만
발달된 형태의 문자는 없어서 이 당시의 국가에 대한 기록물들은 거의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이며,
단지 남겨져있는 그림이나 유적 등으로 그 형태를 추측할 따름이다.

 

잉카 제국은 13세기 초에 건국되었다. 잉카 제국은 15세기에 전성기를 맞으며 북으로는 콜롬비아 남부,
남으로는 칠레 중부와 아르헨티나 북서부, 브라질 및 볼리비아 아마조니아에 영토가 이를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전성기가 시작된지 90여년만인 1532년 스페인에서 온 콩키스타도르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공격을 받아
국왕 아타우알파가 죽고 계속 스페인에 맞서 항전하다가 1572년 잉카 제국이 멸망한다.
이후 300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스페인은 우상숭배 타파, 기독교 전파한다며 신전을 때려 부수고 신상 등은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 유럽으로 싣고 갔다.
이후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에서 은 광산이 발견되고 채굴된 은은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유럽에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이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하고 그의 형을 왕으로 임명하자
스페인과 식민지간의 고리가 끊어지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아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 등이 남미 독립전쟁의 열풍을 몰고 오자 식민 통치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남미 최후 식민지 페루는 182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볼리바르는 남미 6개국(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을 독립시켰으며
산 마르틴 역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독립에 기여하였다.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와 한 차례 회담 이후 "내 과업은 이미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하고 물러났다.
볼리바르는 미국형 연방제 국가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각 지역 세력가들은 제 동네를 지배하길 원할 뿐이었다. 
거의 300년의 식민지 시절을 청산하고 독립했지만 이후 남미 각국은 분열과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독립 후 페루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진 않고 따로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1830년대 잠시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만들기도 했으나 주변에 강대한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경계하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견제와 볼리비아와의 합병에 반대한 페루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그 뒤의 역사는 그야말로 정권수립! → 무너지다! → 정권수립! → 무너지다!의 연속의 정치 혼란을 겪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대립, 리마 중심주의자들과 쿠스코 중심주의자들이 대립이 이어졌으며
20세기 때는 군사 쿠데타와 군부독재, 경제위기가 연속되었다.
 
80년대 말 페루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마오주의 성향의 빛나는 길 반군이
페루의 수도였던 리마를 포함한 전 국토의 반 이상을 장악하여, 전국적인 인민전쟁이 벌어졌는데,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강경 진압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빛나는 길의 지도자였던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되면서 내전은 잠잠해진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제 상황도 개선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의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미에서는 민주화의 물결이 불어오고 있으며 
경제적 측면에서도 불균형 해소와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중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821년 스페인에서 독립한지 20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식민시절의 유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가톨릭 국가라면 '내 탓이요'하는데 익숙해져야한다.
 
이승호 지음 '언제가는, 페루' 여행소개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사람들과 경이로운 자연,
그리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평하였다. 기대하자~~
 
리마 소개
이 도시는 쿠스코와 달리 잉카가 아닌 스페인 침략자들이 세운 계획 도시인데
그 유명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535년 최초의 주춧돌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시내를 리마크 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며 시를 반으로 나누고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2월은 가장 따뜻한 달인데 평균기온 22.5°C, 평균최고기온 26.8°C , 평균최저기온 19.8°C이며
강수량은 극히 미미하여 여행하기엔 괜찮은 날씨로 여겨진다.


민족은 메스티소 40%, 원주민 29%(케츄아족 85%, 아이마라족 15%), 유럽인 25%, 흑인 3%, 기타 3%로 구성된다.
리마 인구는 약 천만이며 광역의 경우 12백만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