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만 헤세 (1877~1962): 독일 출생, 외조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건한 기독교 집안이지만 동양철학에도 깊은 조예. 갈등과 이중성을 자기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작품에 그대로 드러내며, 싯다르타에서는 다양성, 갈등, 양극성 등이 단일성으로 귀결되는 헤세 특유의 독특한 깨달음을 피력.
*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방황하고 변화를 겪으면서 생성되어 간다는 생동하는 세계정신을 발견. 헤세의 거의 모든 문학작품에는 학교 문제,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겪는 내면적인 문제가 작품의 주제로 등장. 자기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강인한 성격의 예술가.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문을 통해 극단적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이성적 폭력에 대해 비판. 이로 인하여 독일에서는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음. 이 때의 삶이 그에게는 자신과 세상과의 갈등이자 전쟁의 잔인성과 시대정신의 위기였다.
* 헤세는 개인이 지나치게 추구하는 물질적 행복이 결국에는 정신적 공허를 겪게 되고, 이 공허는 분노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비극의 끝이 전쟁이라고 단정.
*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양극성을 극복하고 단일성을 성취한 주인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속세에서 스스로의 삶을 통해서 구도하고자 세속생활에 빠져들지만 영원성 대신에 공허와 허무만을 얻고 만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깨달은 단일성을 통해 해탈에 이르렀고 물질이나 생성의 고통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것은 헤세가 참담한 상황에 처해 고통받는 인류에게 주는 궁극의 메시지이다. 이러한 통찰은 개개인에게 스스로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헤세의 삶에 대한 번뇌와 구도라는 생의 모순과 양극성에 대한 헤세 자신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 tvN insight: 2020 명강의 Big 10 '지대넓얕 채사장' * 내면의 여행자를 이야기 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하나의 구체적인 소재로 택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소설 속의 인물 싯다르타가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니다. 이 소설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가?'를 보여주는 지침서, 교과서 같은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삶은 가끔 고통스럽고 짐스럽다. 싫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 우리는 여행의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기도 해야 한다. 삶 안에서 우리의 여행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보자.
* part 1. 금수저를 던져버린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바라문 계급으로 태어났고, 총명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한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당시 유행하던 사문(출가하여 단식과 고행하며 정신적 자유를 추구)들이 마을을 지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삐쩍 마르고 낡은 옷을 입고, 등에는 고행의 흔적들, 그리고 투명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들에게서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을 느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러 가지만 대노하였다. 아버지는 총명하고 사랑스런 아들이 브라만 계급의 지도자로 성장하길 바라는데, 갑자기 사문이 된다고 하니 반대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동이 틀 무렵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고 출가를 한다. 친구 고빈다가 함께 하였고, 그 둘은 사문의 길로 들어선다.
* part 2. 싯다르타의 롤 모델 '부처'를 넘어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깨달음을 완성한 자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완성한 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원정사로 떠난다. 기원정사의 숲에 왔는데, 수소문하지 않아도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 것 같았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자 빼곡히 모여있는 인파에 합류하고, 부처님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놀라는데, 왜냐하면 평온해 보이는 그의 얼굴, 손짓 하나하나, 말투, 그의 모든 것에서 완성한 자의 모습을 보게된다. 명쾌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감동한다. 다음날 부처님의 제자를 뽑는데 고빈다가 벌떡 일어나 가게된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 말한다. 완벽한 진리를 듣고도 부처님을 따르지 않을거야? 싯다르타는 부처님을 따르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데, 아니면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는지. 그렇게 둘은 깊은 포옹을 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슬퍼지만 기쁜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한동안 기원정사를 떠나지 못하며 고민하는 싯다르타.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부처님을 마주하게 되고, 이때 부처님께 말한다. '당신은 깨달음의 순간에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이나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은 것이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냐,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인식한 끝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지 않느냐. 당신이 얻은 그 깨달음은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지 않는냐. 즉, 당신이 깨달은 것을 당신의 가르침으로 깨달을 수 없다. 이 부분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핵심적인 주제의 하나이다. 진정한 배움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계속해서 이야기 한다.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된다면 제 자아가 겉으로만 거짓 안식을 얻게 되거나 거짓 해탈에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실제로는 자아가 계속 살아 남아 더 비대해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자칫해 세존의 가르침, 세존을 따르는 것, 세존에 대한 제 사랑과 승려들과의 공동체를 제 자아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절을 다니는 처음에는 깊은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동체 속에서의 만족 그것이 커져가지 않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나 절의 목사나 스님, 싯다르타가 우려하는건 내가 부처님을 따르겠다는 진리 추구의 목적은 사라지고 부처님을 따르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거나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거나 하지 않을까? 그것은 나의 자아를 점점 비대하게 만들 뿐이다. 하여 부처님이 싯다르타에게 "젊은이, 너무 똑똑해지지는 말게"라는 당부를 하고, 싯다르타는 부처님과 헤어진다.
part 3. 세속으로 돌아온 싯다르타의 모험: 어떤 배움이란 것은 스스로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을 곰곰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브라만이었다가 사문이었다가 부처님을 따르거나 항상 자신이 추구했던 것은 자기로부터의 도망침이었던 것이다. 자기라는 것을 없애고 해탈, 초월적인,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추구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그것이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나에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구나.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 자신, 나자신에 대한 것을 알아가야겠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마을을 향한다. 우선 마을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게 되는데, 그런데 지금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강을 태워주는 배를 공짜로 타고서 마을로 들어간다. 이 소설이 구조적으로 잘 나눠졌는데, 강을 기준으로 두 가지 세상을 보여준다. 첫번째는 바라문이고 사문이고 붓다였던 탈속의 공간을 보여주고, 그 강을 건너면 세속의 공간인 마을이 있다. 싯다르타는 지금 탈속의 공간을 넘어 세속의 공간으로 향하는 중이다. 마을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아름다운 기생 카말라를 본다. 카말라는 굉장히 유명하며 부유한 기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가마에 태우고 여종들이 뒤따르는데, 싯다르타가 이를 보게된다. 싯다르타는 그녀라면 자신이 모르는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카말라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사랑을 배우러 왔다고 밝힌다. 카말라는 자신을 찾아온 무수히 많은 남자들은 많은 선물을 하고 지갑을 두둑히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향기나는 기름을 바르고 찾아온다고 했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카말라가 물어본다. 싯다르타는 세가지를 할 수 있다고 답하는데, 사색, 굶기, 기다리기이다. 카말라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많은 선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답한다. 돈을 어떻게 구하느냐에 대해 카말라는 방법을 알려준다. 마을의 부유한 상인을 알려주니, 싯다르타는 많은 돈을 벌어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답한다.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돈 자랑, 권력 자랑을 하지만 싯다르타에게서 처음으로 순수한 열정을 보았으며 마음에 담게된다. 싯다르타는 상인을 찾아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본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상인의 물음에 싯다르타는 사색, 굶기, 기다리기를 답했고, 다른 것은 뭐냐는 물음에 기도를 할 줄 안다고 답하는데, 기도란 당시에 브라만 계급이 하는 것으로 계약서를 읽고 쓰기가 가능하였다. 싯다르타는 많은 것을 배워가는데, 물건을 파는 방법, 물건을 구해오고, 진열, 무역, 사람 관리를 배운다.
part 4. 세속과 탈속 사이, 완성을 향해가는 싯다르타: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10년 동안 싯다르타는 많이 바뀐다. 처음에는 돈을 잃거나 얻거나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점점 돈을 잃으면 화를 내고, 돈을 벌면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름, 주사위 놀이, 술 진탕 마시기도 하고 사람들을 골탕 먹이기도 하고, 보통 부유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걸리는 병에 걸리기도 한다. 권태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며, 10년의 시간 동안 점점 변해갔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 누가 있느냐, 한 늙은 상인이 있었다. 고집불통이고 물질적인 유혹에 빠진 늙고 어눌해 보이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좋은 옷을 입고 기름을 발라 겉모습은 화려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음을 알게된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실패했구나, 윤회의 고리 속에 빠지고 말았구나, 이번 삶은 망쳤다며 슬픔이 몰려온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구토가 몰려온다. 싯다르타는 실패했으니 죽어버린다며, 그날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세속의 공간으로 건너갔던 싯다르타는 세속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강으로 오는데, 강에 빠져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강에 빠지려하는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 침을 뱉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진다. 기절후 다시 깨어났을 때 뱃사공을 만난다. 이 뱃사공은 싯다르타를 공짜로 태워주었던 그 뱃사공, 바수데바이었다. 그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싯다르타가 물으니 강으로부터 배웠다고 답한다.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당신도 언제가는 평온해지며, 이 세상이 당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게된다고 답한다. 싯다르타는 그의 오두막에 머물며 일을 돕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5년이 지나고 싯다르타는 점점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며 뱃사공처럼 편안한 표정이 된다. 소문이 도는데, 이 강에는 쌍둥이 같이 보이는 평온한 표정의 두 현자가 있다고.
part 5. 아들에게 버림받은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 카말라도 그 소문을 듣게되고 마지막으로 완성한 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 기원정사로 가기 위해 숲을 지난다. 아들은 10~11살 정도, 하지만 개망나니로 자랐다. 강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때를 쓰며 가기 싫다, 배고프다.... 두 모자는 잠시 강가에 앉아서 바나나를 먹기로 한다. 이때 카말라는 뱀에 물려 소리를 외쳤고, 아들은 울고불고, 의식을 잃어갈 즈음 바수데바에게 발견된다. 바수데바는 카말라를 들쳐업고 오두막으로 왔고, 싯다르타는 10여년만에 카말라의 얼굴을 본다. 싯다르타의 무릎에 카말라가 눕고, 의식을 점점 잃어가며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물어본다. 평화를 얻었느냐고, 이에 싯다르타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한다. 카말라는 그렇게 죽음에 이르고, 싯다르타의 마음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의 감정이 점점 커진다. 하지만 아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데, 딱딱한 돌침대도 싫고, 좋은 음식이나 부리는 종도 없고, 점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데,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 아들의 얼굴을 보면 카말라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냥 잘해주기만 한다. 결국 아들은 돈과 나룻배를 훔쳐 도망쳐 집으로 돌아간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쫓아가고, 결국 대궐같은 카말라의 집까지 도달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한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 바수데바가 쫓아온다. 바수데바의 다독임과 위로와 함께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 => "싯다르타는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는 많은 여행자들을 나룻배에 태워 건네다주어야했다. 그들을 볼 때 마다 부러워하며 생각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 수천의 사람들은 애정이 가득 담긴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까? 악인도, 도둑과 강도들도 자녀가 있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에게서 사랑을 받는데, 나 혼자만 그러지 못하는 구나. 그는 이처럼 단순하고 분별없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이 부분이 중요한 결말 부분인데, 왜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가 완성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었다고 표현했는지? 싯다르타가 계속해서 추구했던 것은 과거 탈속의 공간에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그리고 세속의 공간에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나 열망에 사로잡혔는데, 그러면서 싯다르타라는 하나의 인간 안에서 탈속과 세속의 조화를 이뤄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보는데, 뭔가 배운, 뭔가 깨우쳤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많은 지식을 갖고 많은 지혜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삶은 아름답지 않은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은 진정한 앎이나 깨달음은 아니라고 생각든다. 진정한 앎과 깨달음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의 욕망이나 감정도 함께 느끼고 있을 때 비로소 지식과 삶이 균형을 이루면서 하나의 완성으로서 다가간다. 아마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의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그런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part 6. 나는 삶의 여정 중 어디쯤 도착했을까?: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삶의 여정중 어디쯤 도착했을까? 가끔은 길을 잃을 때도 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고 있고, 도대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고, 내가 왜 회사를 다니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이런게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싯다르타처럼 긴 인생을 경험하게 되는데, 태어난 이후 지금을 거쳐서 우리한테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미래의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체험해가게 된다. 이 삶이 나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를 그 때 비로소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삶의 과정을 겪고, 무엇을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짐진 여행자가 안심하고 자신의 감춰진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바라며 강의를 마친다.
- 주요 문장들
* 그 심오한 지식을 단순히 아는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데 성공한 브라만/승려/현자/참회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트만 속에 안주하는 것을 잠에서 일깨어 내어 깨어있는 존재로, 삶으로, 한걸음씩 내딛는 것으로, 말과 행동으로 변하도록 마법을 구현시킨 선각자는 어디에 있는가?.... 자아 속에 흐르는 샘의 원천을 찾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탐하는 것이요,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것에 불과하다. 싯다르타의 사상이 이러했다. 이것이 그의 목마름이요, 이것이 그의 고뇌였다.
* 싯다르타에게는 한 가지 목표,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이 있었다. 그것은 해탈이었다. 갈증에서 벗어나고, 욕망에서 벗어나고, 꿈에서 벗어나고, 기쁨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자아를 죽이는 것, 더 이상 자아에 갇히지 않는 것,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평온을 찾는 것, 자아를 초탈하여 사유하는 가운데 기적을 아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었다.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될 때, 마음속 모든 욕망과 충동이 침묵할 때, 그때야 비로소 가장 궁극적인 것이, 자아를 초탈한 본질 속 가장 심부의 것이, 가장 위대한 비밀이 깨어날 것이었다.
* 오, 고빈다! 우리가 고타마로부터 얻은 그 열매는 그가 우리를 사마니들로부터 불러내었다는 것 아니겠나! 그가 우리에게 다른 것, 그리고 훨씬 더 좋은 것을 줄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는, 친구여, 우리 조용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도록 하세.
* 당신의 독자적인 길에서 얻으셨고, 사고를 통해서, 몰입 수행을 통해서, 인식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 세존이시여! 어느 누구도 가르침을 통해서 해탈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오, 지존이시여! 지존께서는 깨달음의 순간에 일어난 일을 언어로 그리고 가르침을 통해서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못하실것이고, 말해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편력을 계속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제가 당신의 제자들 중 하나가 된다면, 저의 자아가 단지 겉으로만, 허위로만 안식에 도달하고 해탈을 얻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의 자아가 계속 살아서 커지게 될까봐 두려울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저는 가르침을, 복종하는 일을, 세존에 대한 저의 사랑을, 세존의 승단을 저의 자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 (깨달음) 너에게 많이 가르쳐 주었던 그 분들이 너에게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란 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자아였다. 그 의미와 본질을 나는 배우려고 했다. 내가 벗어나려고 했고, 내가 극복하고자 했던 그것은 바로 자아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단지 그것을 속일 수 있었을 뿐이고, 단지 그것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며, 다만 그것 앞에 숨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 어떤 가르침도 나를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 나는 스스로 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 그 한가운데서 싯다르타, 각성자인 그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 그 모든 노란색과 푸른색, 강과 숲이 처음으로 눈을 통해 싯다르타의 내면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은 더 이상 마라의 마술이 아니었고, 더 이상 마야의 베일이 아니었으며, 더 이상 무의미하고 우연한 현상계의 다양성이 아니었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일성을 구하는, 깊이 생각하고 있는 브라만에게 그것은 시시했다. 파란색은 파란색이었고, 강은 강이었다..... 의미와 본질은 사물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물들 안에, 모든 것 속에 있었다..... 이제 나는 깨어났다. 나는 실제로 깨어났고 오늘에야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 문득 실제로 깨달은 자이거나 새로 태어난 자는 인생을 새롭고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사라지고, 마치 하늘의 별처럼 고독하게 서 있는 그 순간에, 냉혹과 절망의 그 순간에 싯다르타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아가 굳게 뭉쳐서 위로 솟아올랐다. 그는 이렇게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각성의 최후의 전율이며,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바로 다시 성큼성큼 걸었고, 조바심치며 급히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것도,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가는 것도, 더 이상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 (카말라) 지난 날 그 모든 것(산, 강, 나무 등등)이 싯다르타에게는 눈 앞에 드리워진 경망스럽고 기만적인 베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어 보였고, 사고에 의해 채워졌다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체가 아니었고, 본체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했고,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고, 전처럼 본체를 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구함 없이, 그렇게 단순하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관찰하면 세상은 아름다웠다. 달과 성좌도 아름다웠고, 시냇물과 강 언덕도 아름다웠다.... 싯다르타는 숫양이 암양을 뒤쫓아 교미하는 것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은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보지못했다. 그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두었고,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눈에 빛과 그림자가 스며들었고, 그의 가슴에 별과 달이 스며들었다. => 깨달은 순간에 체험한 것은 가르쳐 줄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그는 체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 저는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강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사마나 당신 또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의 우정을 배삯으로 하겠습니다. 신들께 제사를 올릴 때면, 잊지말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소인배들 곁에서) 그(싯다르타)는 아름답고 영리한 이 재주꾼(카말라)과 함께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황홀한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의 제자가, 애인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살아가는 현재의 가치와 의미는 카말라에게 있었지, 카마스바미의 장사에 있지 않았다.
*(윤회) 오랫동안 싯다르타는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다. 격렬하던 사마나 시절에 억눌렀던 관능이 깨어나, 그는 부귀를 맛보았고, 환락을 맛보았고, 권세를 맛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사마나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사실을 카말라, 그 영리한 여인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사고, 기다림, 단식의 기술이었고, 그가 그들에게 낯선 존재이듯이 속세의 사람들, 소인배들은 여전히 그에게 낯선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의 재산이 늘어가면서 싯다르타는 스스로 소인배의 기질을, 소인배의 천진난만함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세속이 그를 사로잡았다. 쾌락, 욕망, 타성이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가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고 경멸하고 조롱했던 그런 악습도 그를 사로잡았다.... 심지어 도박과 노름에도 빠지고.... 무의미한 악순환 속에서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어 갔다.
* 수년동안 그는 높은 목표도 없이, 갈망도 없이, 비약도 없이, 사소한 쾌락에 안주했지만 결코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이 유희는 윤회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놀이처럼 아마 한 번, 두 번, 열 번 저오는 그런 유희를 즐길 수 잇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한다면 어떨까?.... 그는 그것과도 결별했다.... 그날 밤 싯다르타는 자신의 정원을 떠났고, 도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강가에서)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물속을 응시했고,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다가 거기에 침을 뱉었다...... 두 눈을 감은채 그는 죽음을 향해 빠져들었다. 바로 그때 그의 영혼의 한구석에서, 그의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어떤 울림이 전해졌다..... 그것은 모든 브라만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지막 말로서, 완성하는 것 또는 완성을 뜻하는 신성한 '옴'이었다.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때리자 순간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깨어났고,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인식했다.
*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그리도 많은 어리석은 짓, 아주 많은 악덕, 아주 많은 오류, 아주 많은 혐오와 환멸과 비참을 통과해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내 마음은 그것에 대해 긍정의 말을 하고 있고, 내 두 눈은 그것에 대해 웃음을 짓고 있다. 나는 절망을 체험해야만 했다.... 처절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아트만을 다시 내 안에서 발견하기 위해서 바보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다시 살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길은 또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 그것은, 그 길은 멍청하다. 그 길은 꾸불꾸불하고, 그 길은 어쩌면 빙빙 순환하는 지도 모른다. 그 길이 제멋대로 나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 길을 갈 것이다. .... 그는 죽었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도 늙게 될 것이고, 그도 언젠가 죽어야만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무상하고, 모든 형상은 무상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젊고, 어린아이이고, 새로운 싯다르타이고, 기쁨으로 가득해 있다.... 그강에 피곤하고 절망에 빠진 과거의 싯다르타가 오늘 익사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꼈고, 그래서 그 강을 쉽사리 다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 (뱃사공) 그는 강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강으로부터 고요한 마음으로, 영혼을 열고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격정을 일으키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 경청하는 법과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현재이며, 모든 것이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 일체의 번뇌는 시간이 아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과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 모두 시간이 아닌가, 그러면 시간을 극복하는 즉시, 시간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즉시, 이 세상의 모든 힘든 일, 모든 적대감은 사라지고 극복되는 것 아닌가.
* (아들) 당신이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아들만은 번뇌와 고통과 환멸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들을 위해서 열 번을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아들의 운명을 조금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싯다르타는 오랫동안 유원의 정문 앞에 서 잇다가 자신을 그곳까지 오게 한 스스로의 욕망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들에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도망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마치 하나의 상처처럼 가슴속에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그 상처가 결코 아프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상처가 활짝 꽃을 피우고 분명 빛을 발하게 되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 (옴) 그는 사고와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이끌리는 그들(평범한 소인배)의 삶을 이해했고,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거의 완성에 가까이 다다랐고, 최후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소인배들이 형제처럼 여겨졌고, 그들의 허영심, 탐욕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웃음거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것, 사랑스럽고 심지어 존경할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 그러던 어느 날, 그 상처가 심하게 화끈거리자 그리움을 못견딘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갔다. 그는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도성으로 가서 아들을 찾고 싶었다. ...... 물에 비친 그 얼굴은 브라만인 자기 아버지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아버지 또한 자신이 지금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까? .... 이것, 즉 이러한 반복, 숙명적인 윤회 속에서 이렇게 빙빙 도는 것은 하나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 그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기를 그만두었고, 고뇌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의지도 그것에 맞설 수 없는 지혜의 기쁨이 활짝 꽃피어 있었다. 그것은 완성을 알고 있고, 생성의 강, 삶의 큰물과 일치했다는 지혜, 완전히 함께 괴로워하고, 완전히 함께 기뻐하고, 흐름에 몸을 맡기고, 단일성에 속해 있다는 지혜의 즐거움이었다.
* (고빈다) 항상 구하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한다 함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찾아낸다 함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아무런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스님이시여, 당신은 구도자인 것 같습니다.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나는 한 가지 사상을 발견했네. 고빈다, 자네는 그 사상을 농담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여기겠지만, 그것은 내 최고의 사상이라네. 그 사상이란,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 시가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세계와 영원 사이, 번뇌와 행복 사이, 선과 악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간격은 또한 착각이네.
교보문고 책소개
출간과 동시에 10만 부 이상 판매된 헤르만 헤세 명작!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줄거리 인도의 고위 성직자 계급인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그 밖의 스승들로부터 배우고 또 배워도 어딘가 채워지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출가하여 떠돌아다니며 수행하는 사마나들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한다. 싯다르타는 사마나가 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익히고 수행하고, 무아가 되어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가슴속 깊은 곳에 채워지지 않는 게 있음을 느낀다. 그 즈음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고타마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사마나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길을 나선다. 고타마의 가르침에 깊이 감명받은 고빈다는 곧바로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만으로 자신이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빈다와 헤어지고 만다. 이후로 싯다르타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자아를 알아 가기로 결심하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1877년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계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를 입학했으나 기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쳐 나왔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한 헤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간됐다. 특히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으며, 문단에서도 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1904년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문학적 지위가 확고해졌다. 같은 해 아홉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나, 1923년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획득했다. 1906년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 자기 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 《데미안》과 《동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을 출간했다. 인도 여행을 통한 체험은 1922년 출간된 《싯다르타》에 투영되었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뇌출혈로 사망한 후 아본디오 묘지에 안치되었다.
▶ 내면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어느 고행자의 이야기 《싯다르타》는 ‘싯다르타’라는 어느 젊은 고행자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로, 헤세 자신의 삶을 이상화시킨 것이다. 헤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삶과 싯다르타의 해탈 과정을 병행하고 있다. 주인공 싯다르타의 성격과 그의 체험을 통해서 헤세의 깨우침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작가의 삶과 그가 체험한 문화적 영향이 혼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집안의 아버지와 남인도 언어학자 집안의 어머니 덕분에 헤르만 헤세는 힌두교, 불교, 도가 사상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지식 얻을 수 있었는데, 《싯다르타》는 이러한 영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의 자서전적인 세계관과 삶에 대한 철학 문제 이 소설은 행동을 전환시킬 만한 강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고, 긴장이나 자극이 거의 없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서전적이며 세계관과 삶에 대한 철학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싯다르타》는 세계와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헤세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즉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헤세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단계에 해당된다. 특히 동양철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 문학에 있어서도 독특한 작품이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헤세는 싯다르타처럼 자기 부모와 그들의 경건한 기독교 전통 신앙과 개인이 지닌 독자성에 대한 시도를 파괴하는 엄격한 학교 제도에 반발하였고, 부모로부터 고요하고 행복한 평온을 받아 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과의 조화 그리고 자지 자신과의 평온을 원했으나, 그의 삶에 있어서 종교적 기반과 교육적 기반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세는 2부를 쓰기에 앞서 다시 한 번 검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자기의 쾌락을 해탈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세는 자기의 경험과 세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기초를 구축하기 위하여 종교적 이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싯다르타는 강물과 대화와 사고를 통해서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다. 헤세 또한 세상과의 조화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종교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만 했다.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서 그리고 삼라만상이 윤회한다는 사실, 삼라만상이 모든 다른 것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조화를 발견했다. 헤세는 자기에게 세상과 그의 체험을 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신앙에 대한 재구성을 통해서 조화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