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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 (2022.2.5)

클리오56 2022. 2. 5. 20:49

 

내용 및 소감

- 실크로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고대 중국으로부터 로마까지의 교역로를 통해 유럽에서 내륙의 길을 통해 중국으로 갈수있다고 주장, 1877년 최초로 실크로드로 언급. 활발하게 교역했던 비단에서 유래. 전통적으로는 중국 서안에서 로마 사이, 중심지는 동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자치구)과 서투르키스탄. 

 

역자 서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 미술품은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 벽화 60점 및 조각, 공예품 등 1,700여점 

- 위구르인들은 무엇 때문에 저항하는 것일까? 중국에서 독립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잇으나, 가깝게는 즉, 근대적 의미에서는 야쿱 벡에 의해서 세워진 카쉬가리아 정권(1864~1877)이 분수령이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위구르인들은 중국을 자기들의 땅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때 생겨난 민족적 각성은 그들의 영토안에 존재하는 문화재에까지 당연히 미치는 것이었다.

- 벽화를 프레스코라 총칭했는데, 프레스코는 회반죽 벽이 마르기 전 축축하고 신선한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고, 반면 중앙아시아 벽화는 회반죽이 마른 뒤그리는 세코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일단 본서에서는 프레스코로 번역하였다. 

- 투르키스탄은 투르크인들이 사는 지역인데,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는 동과 서의 투르키스탄을 가리킨다. 이때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으로서 오늘날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를 말한다. 위구르는 투르크계의 민족으로 1926년 비로소 공식적인 민족명을 얻었다. 서투르키스탄(=소련령 중앙아시아, 혹은 소련령 투르키스탄)은 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일컫는다. 

프롤로그

- 고고학적 침략의 탐험가 6명: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본 수집품들은 최소 13개국의 박물관과 연구기관에 산재. 

- 유물 손상: 무자비한 수집광들 + 투르크 무슬림의 광신적인 문화재 파괴 + 홍위병 파괴 + 주민들의 무의식적 파괴 => 그나마라도 투르키스탄의 불교 유물을 구출한 것은 전적으로 유럽의 고고학자들 덕분

* 벽화의 밝은 색 안료를 특수비료로 사용, 사원 유적의 들보는 땔감이나 건축자재로 사용, 벽화를 무슬림들이 혐오하여 파괴, 중국의 유교신봉으로 불교 유적 혐오, 베를린 폭격, 오타니 수집품 중 1/3 종적 묘연

   
1. 실크로드의 성쇠 

- 타클라마칸의 악명과 공포, 3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들에 둘러싸이고, 한 면은 고비 사막에 의해 닫힘

* 북쪽 장엄한 천산산맥, 서쪽 세계의 지붕 파미르, 남쪽 카라코람과 곤륜산맥, 동쪽 롭 사막과 고비 사막 

- BC 138년, 한 무제는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월지와 교섭하도록 장건을 파견, 흉노에서 10년 포로 생활 등 고생 끝에 월지와 접촉하나 흉노와 복수할 마음은 없음. 장건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실크 로드의 아버지로 칭해짐. 

- 로마인들은 비단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믿음. AD 6세기가 지난 뒤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승려가 누에고치를 비잔티움으로 밀반출하여 독점 체제 무너짐. BC 53년 로마군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인과 전투중 거대한 깃발을 보는데, 구름처럼 가볍고, 얼음처럼 투명한 것은 비단이었다. 이 비단은 한 무제의 사신이 준 것이고 대신 타조 알과 마술사를 데려갔다. 로마는 비단을 수입하고, 파르티아인은 비단을 중개하였다. 2세기에는 인도에서 해로를 통해 로마로 들어왔다.

* 중국 수입품: 금과 보석, 모직물과 면직물, 상아, 산호, 호박, 석면, 유리

* 중국 수출품: 모피, 도자기, 철, 칠, 계피, 대황, 혁대 고리나 무기, 거울

- 비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동되었는데, 바로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이다. AD 1세기 한 명제때 중국으로 전파되고, 승려, 순례자, 경전과 서적, 예술품이 전해졌다. 세레스(중국)과 인디아라는 두 단어를 합성하여 세린디아로 알려진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겨줌. 

- 불교 전파의 실질적인 진원지는 인도 본토가 아니라 현재 서북 파키스탄의 폐샤와르 계곡에 위치한 간다라의 불교왕국이었다. AD 1세기에 쿠샨 왕조에 의해 도입된 인도의 불교 미술과 그보다 400년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그곳에 들어오게 된 그리스 미술과의 결합이었다. 이 그레코-불교식, 혹은 간다라식 미술의 가장 혁신적인 점은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 전에는 어떠한 예술가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전에는 발자국, 수레바퀴, 나무, 탑, 산스크리트 문자 등과 같은 신비적인 상징을 통해 표현될 뿐이었다. 그러나 간다라 미술에서 조각은 부처를 곧고 날카롭게 솟은 코와 눈섭, 고전적인 입 모양과 파상형 머리카락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헬레니즘적인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 불교와 간다라 미술은 함께 북방 루트를 통해 중국령 중앙아시아로 들어왔고, 다시 새로 개척된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종교가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 도시를 따라 전파되면서 수많은 사원과 석굴과 스투파가 생겨났다. 

- 불교 외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 종교 역시 미술, 문헌과 함께 타클라마칸 주변에 자리잡았다. 그리스도가 동시에 인간과 신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432년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주목되자, 많은 추종자들이 동쪽으로 도망쳐 이란의 사산제국 영내로 들어갔고, 다시 상인 겸 선교사들은 그 교리와 미술을 중국으로 전달하여 638년 장안에 교회를 세웠다. 금세기초 투르판과 돈황의 석굴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문헌들이 발견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말 카쉬가르와 호탄을 지나면서 많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 3세기 페르시아에서 태동한 마니교는 빛(영혼)과 어둠(육체)이라는 대립하는 두개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마니의 제자들은 5세기 말 서구 기독교의 무참한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도망쳐 결국 중국령 중앙아시아와 중국 본토에 들어와 수당 때 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독일 탐험대가 투르판 지역에서 마니교 서고를 발굴하였다. 10세기경에 전성기를 이룬 뒤 곧 쇠퇴하다가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 실크로드 문화와 미술은 황금기로 불리는 당나라(618~907)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시 장안은 742년 인구 2백만명. 하지만 한때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흔적은 너무도 철저하게 사라져버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되었다.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오아시스 도시로 흘러들어가던 빙하의 눈 섞인 물이 만들어낸 하천이 서서히 말라버리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저 먼 아라비아에서 출현한 종교 즉 이슬람의 갑작스런 도래였다. 

  
2. 사라져버린 도시들

- 인도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위협을 항상 의식하고 있던 영국은 만약 러시아군대가 침입해 올 경우 과연 이 무인 지역의 어떤 루트를 통해 들어올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 결과를 몹시 갖고 싶어했다. 

- 타클라마칸 아래에 묻힌 도시들에 관한 허황돼 보이는 전설들의 이면에 무엇인가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이처럼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유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과학적인 관심은 주로 중앙아시아 오지의 지리적, 지질적, 전략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카라코람 산맥 저 너머의 건조지대에 사라진 불교문명의 세계가 잠들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3. 고문서 발굴의 대경쟁 

- 1889년 영국 바우어 대위가 쿠차에서 고문서 입수, 산스크리트어 강신술, 5세기경 인도 불승이 작성, 현존 최고 문서중 하나, 이후 추가 문서들이 입수, 동양학자 훼른레가 해석 발간, 일부는 러시아에서 입수하여 에르미타주 박물관 보관


4. 스벤 헤딘-개척자 

- 스웨덴 출신 위대한 탐험가, 다만 2차례 세계대전에서 친독일 편으로 존경을 상실

- 탐험을 평생의 일로 생각하여 필요한 기술 습득. 스톡홀름 대학에서 2년간 지질학, 물리학, 동물학 공부. 베를린 대학 등에서 자연지리학, 역사지리학, 고생물학 공부

- 1895~1899년, 중앙아시아 횡단 여행, 타클라카칸 탐험 2차례로 고고학적 중요한 발견. 사라진 불교 문명 유적을 발견, 누란에서 3세기 추정의 고사본 입수. 

 
5. 오렐 스타인-비범한 유물 탐사가

- 오웬 라티모어 교수: "동 시대인 중에서 동양학 학자, 탐험가, 고고학자, 지리학자를 겸한 가장 경이적인 학자"

- 헝가리 출생 유대인, 영국을 제 2의 고향

- 타클라마칸 노인이 발견한 프레스코 벽화, 불교 양식 스투코 부조 파편, 기타 고문서에 기반하여 단단윌릭 탐사결정


6. 엄청난 유물을 발견하게 된 스타인 

- 단단윌릭 유뮬: 고대불교의 프레스코 벽화, 스투코 부조, 5~6세기 산스크리트어 불교경전, 채색 패널, 지편, 고문서

- 니야 유물: 카로슈티 문자가 새겨진 목독, 고대 가옥에서의 일상용품

- 라왁 유뮬: 거대한 부처상과 보살상 91상, 하지만 모래의 관에 다시 매몰, 5년 후 다시 오니 주민들이 파괴    


7. 위조자의 가면을 벗기다

- 고문서가 돈이 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현지인이 위조하여 탐험가에 판매하여 유럽에 전달, 연구 보고되기까지


8.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 

- 두 탐험대의 성과에 자극받아 1902년 독일과 일본이 등장, 이후 4반세기 동안 7개국이 경쟁

- 독일탐험대 1902~1914년에 걸쳐 4차례 탐험, 특히 투르판 지역, 불교 프레스코 벽화, 고사본, 조상, 트기 카라호자에서 마니교 벽화 등 유물, 동 건물에는 블교승 시체 최소 1백구가 수북이 쌓여있었음. 간다라 양식의 등신대 불상,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사원(비잔틴 양식 벽화)


9. 폰 르콕이 동전을 굴리다

- 1천년 전 베제클릭(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장소)에 100여 석굴사원에 놀라운 벽화 => "이 벽화를 안전하게 가져갈 수만 있다면 탐험의 성공은 확실한 것",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뜯어내는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방은 모든 벽화가 완벽히 옮겨온 하나의 작은 사원이었다" => 대형 벽화는 톱질을 하여 몇 조각으로 분할

* 공양을 드리는 소그드 상인: 9~10세기. 베제클릭 사원 20굴의 벽화

(현재 베를링 국립인도미술관 소장)

- 쉬팡의 유적: 기적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 필사본 발굴 => 5세기 성시집, 마태복음, 니케아 성경 일부 

 
10. 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뛰어난 벽화

- 키질 석굴 벽화: 중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658년 이전의 작품으로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언어와 회화양식을 표현. 

11. 쓰레기 더미에 숨겨진 비밀

- 누란 유적: 오직 죽음만 떠돌 뿐 황막하기 짝이 없는 깊은 사막에서 구상의 불탑을 발견. 하지만 요새 도시였기에 훌륭한 프레스코 벽화나 거대 불상은 발견하지 못함. 고문서 역시 군사 기록들이었다. 

 

12. 돈황-숨겨진 고대의 서고

- 돈황 천불동: 벼랑을 뚫고 만들어진 4백개가 넘는 석굴사원은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상들로 가득했다. 길이 1마일

- 돈황은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떠나는 여행자들이 중국 내에서 마지막으로 캐러밴을 푸는 곳으로 저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기 전 정신적 불안과 육체적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석굴사원을 찾았음. 서방에서 돈황에 도착한 여행자 역시 저 공포의 사막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데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림. 

- 스타인: 돈황이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라는 사실을 밝힘. 고문서, 벽화 발굴 => 1907.5.21 스타인은 석굴지기 왕원록 도사를 만남. 유럽 측에서는 스타인의 대승리로 칭송되는 반면, 중국에게서는 도덕,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비난.  

- 돈황의 고문서를 보고난 후: 작은 방안에 펼쳐진 광경에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질서하게 빼곡이 쌓여있는 두루마리 필사본의 높이가 거의 3미터, 부피로는 약150입방미터에 육박했다. => 미증유의 고고학적 특종 => 16개월 뒤, 필사본 24상자, 회화와 자수품 등 미술품 5상자가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이동. 


13. 펠리오-품위 있게 적을 만드는 기술

- 프랑스는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발견에 집중되어 중앙아시아 진출은 늦게 이루어짐. 1906년8월에 탐험대 도착

- 돈황 천불동: 17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 

 

14.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 일본 오타니 탐험대: 정토진종의 기원을 찾는다는 명목, 영국과 러시아에서 미행

- 러시아 코즐로프 탐험대: 카라호토에서 고비 사막의 아득한 곳에 모래 위로 솟아난 거대한 요새도시를 발견

- 스타인의 아스타나 고분군 발굴: 입관자의 이력이 한문으로 새긴 명전이 발견, 시신을 싼 비단 등 고대직물이 발견되었고 중국 및 중근동 기원의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특히 명전에 의하여 정확한 연대를 알수 있다는 것이 중요. 1915년 2월이며, 이것이 중국 문화재가 반출되는 마지막기회였다. 

 

복희여와도, 8세기 전반, 189x79cm

오타니 탐험대가 투르판의 아스타나에서 수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 1차 미국 탐사대, 1923년 가을, 랭던 워너(미술사학자/고고학자) 외 1인: 아직 남은 유물이 있는지의 정찰여행, 그리고 당 시대의 거장들이 어떤 안료를 사용했고 어디서 구했는지의 미술사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하는 희망 

- 돈황의 천불동에서 "동굴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만개의 인물상을 보고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꼈다", 하지만 2년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쳐왔던 백러시아 군인 4백명이 돈황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이들이 벽화에 무수한 낙서를 남긴 것을 보고 분노. 벽화 12점과 보살 좌상 1점을 미국으로 운반. 윤리적 문제를 고심한 그는 연대가 가장 이른 최상의 그림들은 남겨두고 이미 훼손된 걸작품 중에서 가져갈 벽화를 골라내었음. => 하지만 벽화들은 이동중 많이 훼손

* 한국의 개성 만월대 유물을 보존하는 큰 공헌. 미군 주둔하려는 것을 막음. 

 

랭던 워너가 돈황 천불동에서 가지고 나온 보살 좌상

(하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 소장)


16. 중국이 문을 걸어잠그다

- 1925년 미국 워너 2차 탐험대가 돈황에 도착했으나, 농민들이 위협적 태도를 보임. 상해에서 영국 경찰이 폭동을 일으킨 학생들에게 발호하여 11명이 사망한 사건의 여파. 결국 중요성이 떨어지는 마이너급 석굴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탐험을 포기.

- 세린디아의 유물과 필사본은 현재 12개국의 박물관과 연구기관(약 30개소)에 분산되어 있다. 하지만 제대로 전시되지는 못하고 있음. 또한 독일베를린 박물관은 폭격을 받아 대형벽화들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음. 소련은 벙커를 접수했을 때 소조 8~9상자를 약탈해감. 일본 오타니 탐험대의 유물들의 많은 부분이 행방불명.   

교보문고 책소개

이 책은 일반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전문적인 내용을 비전공인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교양 도서이다.

저자 : 피터 홉커크

 

역자 : 김영종

 

목차

001. 역자 서문 ...4
002. 프롤로그 ...15
003. 실크로드의 성쇠 ...23
004. 사라져버린 도시들 ...54
005. 고문서 발굴의 대경쟁 ...70
006. 스벤 헤딘-개척자 ...83
007. 오렐 스타인-비범한 유물 탐사가 ...104
008. 엄청난 유물을 발견하게 된 스타인 ...121
009. 위조자의 가면을 벗기다 ...147
010.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 ...163
011. 폰 르콕이 동전을 굴리다 ...183
012. 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뛰어난 벽화 ...194
013. 쓰레기 더미에 숨겨진 비밀 ...209
014. 돈황-숨겨진 고대의 서고 ...224
015. 펠리오-품위 잇게 적을 만드는 기술 ...253
016. 실크로드의 스파이들 ...274
017. 랭던 워너가 위업에 도전하다 ...303
018. 중국이 문을 걸어잠그다 ...322
019. 참고문헌 ...346
020. 찾아보기 ...353

출판사 서평

20세기 초반 이 방대한 세계에 숨겨져 있던 고대의 오아시스 폐허들에서 문명사에 획을 긋는 유물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1930년 중국이 유물 반출을 금지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스웨덴,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탐험가들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따라 그 곳의 오아시스 도시에 묻힌 수많은 유물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삐내갔다. 이 책은 중앙아시아의 유물들을 발굴한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밝혀 내고 있다. 진청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이들 탐험가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을 중심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벽화 60점을 비롯하여 조각, 공예품 등 1천7백여 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이 보관 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의 손에서 옮겨 온 것이다. 또한 미추왕릉에서 발굴된 금제감장보검(5∼6세기),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봉수형 유리병(5∼6세기)도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래 아시아의 패자를 꿈꾼 일본이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연구한 것에 반해, 우리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최근에야 비로소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그 기반은 허술하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 책은 다소 뒤진 우리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한층 높여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