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소감
- 저자 알랭 드 보통(1969~) 스위스 취리히 출생, 여러 언어에 능통,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 전공,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외 여행의 기술 등
- 유튜브 일당백 시즌 3: EP 5
정의: 지위, 지위로 인한 불안, 명제
- 지위: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좁은 의미에서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 1776년 이후 경제적 성취와 관련하여 지위가 부여되기 시작
- 지위로 인한 불안: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게다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 명제: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지위에 대한 갈망, 하지만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 의사소통
원인
-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 => 사랑(존중, 존경, 주목)을 획득. 성적 사랑, 세상이 주는 사랑
I. 사랑결핍
-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외부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다. => 하지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II. 속물근성(snobbery)
- snobbery: 1820년대 영국에서 일반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분할 때 sine nobilitate(라틴어, 작위가 없는)라 적었음 =-> 현대적 의미는 거의 정반대로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킴 =>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
- 속물: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 (노골적으로 사회적 또는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 즉 어떤 종류의 사람, 음악, 와인이 다른 것보다 분명히 낫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
=>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뀐다. (기원전 400년 스파르타의 군인, 1500년 로마의 주교, 1815년 바이마르의 시인, 중국 1967년의 농민)
-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III. 기대
- 물질적 진보: 중세와 근대 초기는 대부분 농민(가난, 기근, 영양부실) => 18세기 초 영국 농경기술 + 산업혁명 (농작물 생산 증대, 도시화, 증기기관, 물자 풍족, 과학기술 발전) => 주요 발명품: 1895년 콘플레이크, 깡통따개, 옷핀, 1851년 재봉틀, 1867년 타자기, 1884년 좌변기, 1863년 전화기 => 20세기 물질적 진보 속도는 가속화 (미국 쇼핑몰)
- 평등, 기대, 선망
* 물질적 수준은 높아지고 실제적 궁핍은 크게 줄었지만, 궁핍에 대한 공포(혹은 박탈감)는 사라지지 않고 늘어났다.=> 왜? 수준 비교는 결코 독립적이지 않고 준거집단과 비교하여 결정.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
* 중세 사회는 계급제도 =>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창조주의 의지에 도전하는 행위, 불평등 체계는 자연스러운 것
* 1776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극적이고 구체적인 표현: 계급과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직의 기회부여
* 중세의 계급 사회에서는 계급 내에서는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음 => 계급 철폐 후 평등 사회에서 오히려 비교를 하게되는데, 재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울화 때문에 생기를 잃고 증오심이 키워진다.
* 윌리엄 제임스: 성공을 거두어야만 만족하고, 실패한다고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자존심 = 이룬 것/내세운 것 => 기대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렸다. 사회는 기대를 잔뜩 늘여놓기에 기대를 낮추어 적절한 자존심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피곤하다.... 하여 필리프는 염세적으로 말하였다. "만일 신께서 나를 그렇게 일찍 죽게 하셨다면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근대는 염세주의에 그렇게 관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19세기초부터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이 영감도 주고 슬프게도 만들었다. 벤저민 프랠클린'자서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지혜로워진다.
* 루소: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 즉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첫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 오히려 원시인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지만,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는 누릴 수 있었다.
*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IV. 능력주의
-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세 가지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 중세나 근대 이전에는 계급 구조(농민, 성직자, 귀족)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이 세 계급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강한 생각. 가장 가난한 계급의 가치도 높게 평가되며, 농민도 귀족이나 성직자와 똑같이 중요하고 존엄성도 똑같았다. 농민의 삶은 힘들지만, 땅을 갈고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부를 창조하므로 그들이 없으면 다른 두 계급이 곧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사실 => 예수도 목수였으며, 여러 예술과 문학에서 농민 찬양의 이야기가 발견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 기독교적 관점에서 부나 가난은 도덕적 가치를 정확히 말해주는 척도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곤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의 도움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바늘구멍 통과 만큼이나 어렵다.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 나아가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수 없도록 특권층이 사회를 조작해놓았다. 유일한 희망은 사회적 항거, 그리고 혁명이었다. => 장자크 루소의 주장, 100년 뒤 카를 마르크스는 과학적으로 입증. 공산당 선언(1848년): 지배계급들이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위의 세가지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위로했다. => 첫째, 그들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둘째, 세상의 지위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 셋째, 부자는 파렴치하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면 서글픈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차피 존중할 가치가 없다.
-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세가지
* 18세기 중엽부터 사회 전체의 중대한 물질적 개선을 배경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 이 이야기들 때문에 실제로 낮은 지위를 견디기가 더 어려워졌고, 그런 자리에 놓이게 될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근심이 깊어지게 되었다.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 1723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 '벌의 우화':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들은 부자라고 주장, 부자들이 지출을 하기 때문에 그들 밑의 모든 사람들이 고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다. 즉, 돈을 모으고(상업, 산업, 농업에서) 그 많은 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 아담 스미스: 그들은 이기심과 탐욕을 타고 났지만, 오직 자신의 편리만 추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의 만족뿐이지만, 결국 부자들은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누어 가진다. => 부자들은 기독교 초기부터 경제이론에서 악당 취급을 당하다가 이제 영웅으로 새롭게 묘사, 부자들은 그들 밑의 모든 사회계급을 돕는다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미 물질적 국핍이라는 짐을 지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은 새로운 경제 이야기 때문에 부유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암묵적 비난까지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 계급과 가치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수백년 동안 자리는 재능보다는 혈연에 따라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 세습에 대한 의문이 문단과 비교하며 제기. 토머스 페인 '인간의 권리'(1791년): 세습적인 통치자는 세습적인 작가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호메로스나 유클리드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그들이 완성시키지 못한 작품들을 아들이 완성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통치 초기부터 개방적 인재등용. 세습귀족은 '나라의 저주요, 바보요, 세습멍청이들'이었다. => 토머스 칼라일: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한 세상, 즉 능력주의 사회. 이는 물자분배의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는 평등주의, 그리고 지위의 세습원리와는 경쟁. => 능력주의 확산: 의무교육, 학력평가 시험제도, 경쟁시험을 통한 공무원 선발(예전에는 귀족 자제), 고용차별 철폐 =>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잇다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만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미국 신교 교파: 신이 신자들에게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고 주장. 이 세계에서 모은 재산은 내세에서 좋은 자리를 얻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 =>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은 역시 그럴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즉 경제적 실패는 수치감과 연결되니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 사회진화론: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진다는 사상.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두고 공정한 경쟁을 하며,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잇기 때문.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이른 죽음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된다고 주장. 마치 동물의 왕국처럼. 능력주의 체제하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V. 불확실성
- 근대사회의 위대한 야망은 세습특권을 없애 개인적 성취가 지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 개인적 성취는 주로 경제적 성취를 의미했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 변덕스러운 재능: 성공은 재능에 달렸지만 그 재능을 우리가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스 뮤즈 신화에서,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든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진정한 자기의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이 바뀌면 끝이었다.
* 운: 예전에는 신, 악마, 도깨비, 귀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승리를 행운 탓하기엔 지나치게 겸손하고, 패배를 불운 탓으로 하기엔 궁색하다. 승자는 운을 만든다는 것이 현대의 주문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 고용주: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 달려있기 때문에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더욱 심각해진다. => 1907년 미국 볼턴 홀'3에이커와 자유': 사무실을 떠나 미국 중부 농지 3에이커로 농사, 소박하지만 편안한 집 유지가 가능. 전세계적으로 소농에서 노동자로 변화. => 출세를 위한 책략: 동료를 조심, 거짓말하고 과장, 무서워야 한다.
* 고용주의 이익: 제품과 용역의 사이클은 단축, 제품의 시장 진입, 성장은 모험의 연속.
* 세계경제: 경제는 성장과 후퇴를 반복, 기업의 생존 전략
* 경제적 요구(사업의 이윤 실현)와 인간적 요구(피고용자의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 갈망) 사이는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쪽을 택할 상황이 오면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따라서 노동자의 삶은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 고용의 이런 불안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질문에 대하여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문데, 다섯가지 예측 불가한 요인 때문이다.
해법
I. 철학
- 명예와 약점
* 유럽의 결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차세계대전 무렵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수십만명이 희생. 성인 남성의 일차적 과제가 명예의 유지였기에 타인의 시선(겁쟁이, 나약한 자)을 의식하여 결투가 벌어짐. 자신이 규범을 지키지 않는 것도 불명예지만, 다른 사람으로 부터 받는 모욕에 충분한 폭력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도 불명예였다.
* 지위를 부정당할 때, 즉 일에서 어떤 목표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 때 우리는 명예를 잃어버린 전통적인 공동체의 구성원과 똑같이 괴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 철학과 약점의 극복
*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았다. 소크라테스 "봐라, 내가 원치 않는 것(금과 보석 행렬)들이 얼마나 많은지", 디오게네스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옆으로 좀 비켜주시오. 해를 가리고 있잖소" =>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 (지적인 양심, 즉 이성)을 도입한다. 즉,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너는 불명예스럽다'고 말을 한다면, 이성이 작동하여 (참)나는 불명예스럽다 혹은 (거짓)나는 나에대한 이미지와 관계없이 괜찮은 사람이다, 즉 흔들릴 필요가 없다. =>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 지적인 염세주의
* 철학자 샹포르: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간단하게 정리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 철학자 쇼펜하우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 시각이 편협, 잘못이 많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그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된다." => 샹포르: 이런 관점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 => 쇼펜하우어: 이 세상에서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철학자들은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껴야 하는데, 사실 이때 느끼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II. 예술
-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하는 문제가 1860년대 영국에서 현안. 영국을 최고의 나라로 만든 것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과 오래 접하면 유약한 성격, 내성적 태도, 동성애, 통풍, 패배주의에 오염될 위험이 있다.
*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반박: 위대한 예술은 구름잡는 이야기이기는 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지닌다..... 그들의 작품에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두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서 늘 가짜 신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횅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준다. 우리가 지위와 그 분배에 접근하는 방법만큼 비평(또는 통찰과 분석)이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풍자나 분노가 서려 있기도 하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 예술과 속물근성
* 제인 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는 재벌인 숙부댁에서 거주, 사촌들은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하지만 곧 좋은 사람은 아니며, 이들은 속물근성이다. 반면, 패니는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 삶을 비평하고, 그럼으로써 그 삶을 바꾸려는 시도다. => 표준적인 사회적 위계에 대한 공격, 경제적 자산, 혈통 < 도덕적 가치
* 하지만, 이런 교훈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내면의 가장 좋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외적인 성취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예술적 매체는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모든 드러나지 않은 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술이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조지 엘리엇: 영웅적인 삶을 살지 못한 수많은 데레사가 이 땅에 태어났다. 그들은 잘못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영적인 숭고함이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빈약한 기회를 만나 빚어낸 결과이다)
* 화가 샤르댕의 '회복기 환자의 식사', 존스의 '나폴리 지붕들', 쾨브케의 '리메 킬른의 동네 풍경':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중요성을 기준으로 여러 장르의 회화의 등급을 정했다. 역사화 - 왕의 초상화 - 풍경화의 순서. 하지만, 이들 화가가 그린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는 미지의 여자, 햇볕에 달구어진 얽은 벽, 여름날 저녁의 하늘이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갈망하도록 배워온 많은 것의 가치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 비극
* 오이디푸스 왕 '어머니와의 동침으로 눈이 멀다' / 마담 보바리 '쇼핑 중독자인 간통녀 비소를 삼키다' 이런 머리 기사는 어딘가 어색하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을 경우에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 희극
* 샤를 필리프의 루이-필리프 왕에 대한 배 모양 풍자화로 6개월형 선고, 잉글랜드의 풍자만화가 제임스 길레이의 나폴레옹에 대한 풍자 (추종자, 아첨꾼을 이끌고 점잔빼며 걸어가는 황제, 여드름 자국의 뚱보 조세핀)
*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즐거움 + 은근히 교훈을 전달....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 존 드라이든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
* 역사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집단의 악을 교정하고, 강한 자의 허세나 기만을 흔들려는 농담이 부족하지 않다. => 18세기 말 잉글랜드의 부잣집 젊은 여자들의 거대한 가발 유행, 상류사회 여자들의 모유 먹이기 유행, 지위 높은 사람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프랑스어로 말하기
* 만화도 다른 예술과 함께 예술의 정의, 즉 삶의 비평이라는 정의를 공유. 권력의 불의, 높은 지위에 대한 지나친 선망도 교정하려 한다. 만화가들의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III. 정치
- 이상적인 인간형
*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사회마다 시대마다 상이하며 변화한다. 스파르타(기원전 400년)에서는 근육질의 싸움 잘하는 남자. 서유럽(476~1096)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성직자, 서유럽(1096~1500)에서는 부유한 가문 출신의 기사, 잉글랜드(1750~1890)에서는 부유하고 춤 잘 추는 신사
*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사냥 능력 부족, 전투 능력 부족, 신에게 헌신능력 부족, 자본시장에서 이윤 창출 능력 부족.... => 정치의 개입으로 변화 초래
- 현대의 지위 불안에 대한 정치적 관점
* 현대의 성공한 사람: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연구를 포함)의 어느 한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 => 능력주의에 기반, 네 가지 미덕을 지닌 것으로 칭송 받음(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
* 갤브레이스 '부유한 사회':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이 생존에는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공동체의 소득에 비해 현저하게 뒤쳐지면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경우 공동체 품위 유지의 필수품을 가질 수 없으며, 품위가 없다는 공동체의 심판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 어째서 부와 가난을 개인의 도덕성의 핵심적인 표지로 읽는가? 돈을 버는 것은 지능, 힘, 선견지명, 협동등의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여, 애덤 스미스는 아마포 셔츠를 못입을 정도의 궁핍에 대하여 "아무도 극단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는 그런 상태로 빠져들 수 없다"고 생각. 즉, 주정뱅이나 도둑질이나 하는 자가 아니라면 하찮은 일자리라도 얻어 아마포 셔츠 정도는 살 수 있을거라는 생각. 여기서 나아가 옷장 가득히 셔츠, 저택, 요트, 보석을 갖춘 자는 행동이 대단히 훌륭하고 미덕을 갖춘 자로 상상. 가장 비싼 물건 = 가장 훌륭한 인격적 자질
* 조지 버나드 쇼: 소득을 근거로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 하는 일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부의 차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생기는 것을 가능한 한 마고 싶다는 주장. => 존 러스킨: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작용. 운, 환경, 병, 공포, 우연, 적절한 시운과 불행 => 부와 미덕을 연결시키는 관행 중단
* 돈과 행복: 16세기 미국 인디언 사회는 물질적으로 소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보람있는 생활 => 유럽인 도착후 변화: 사슴 사냥으로 가죽 교역, 자살과 알코올 중독 증가, 근대 문명의 시시한 장신구의 유혹에 굴복
* 자동차 광고는 광고의 자동차를 소유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망칠 수 있는, 또는 약화시킬 수 있는 심리의 여러 측면을 교묘하게 무시한다. 소유하고 나서 얼마 후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소유하고 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 불안이 다른 불안으로 대체된다고 하여 그런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정치적 변화
* 크로머 경(1911): 교육 받은 유럽 남자와 유럽 여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차이는 유럽 남자와 중앙아프리카 야만 부족에 속한 니그로 사이의 차이 보다 크다. =>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 칼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진술
* 조지 버나드 쇼: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작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늘 존재해왔고 또 늘 존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다. (여성 투표, 치마 입은 여성들이 의회 입성 등등)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1929): 여성이라고 도서관 입장 금지를 당하면서 자각 시작. 여자는 늘 가난했다. 단지 200년 동안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다. 여자는 아테네의 노예의 아들보다 지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울프의 정치적인 요구 "여자에게는 존엄만이 아니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1년에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IV. 기독교
- 죽음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판사 이반의 병은 동료들에게 슬픈 생각 보다는 기회(승진, 판공비)를 주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가족들 조차 약간의 걱정은 있지만, 부인은 연금 규모가 작아질것을 염려하고, 딸은 장례식 때문에 결혼 일정이 엉망이 될까 걱정한다. 이반은 살 날이 몇주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상에서 얻은 시간을 낭비했고, 겉으로는 품위가 있지만 속으로는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성장, 교육, 일을 돌이켜보며,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자신의 이익과 감수성을 희생해왔는데, 이제야 그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하고 싶다는 어렴풋한 충동, 늘 억눌러왔던 그 모호한 충동이 어쩌면 중요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진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는 판사이기에, 또한 부유한 아버지이자 가장이었기에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 톨스토이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결국 그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 지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다른 데로 방향을 트는데 죽을병이 어떻게 도움을 줄까?: 우리를 존중하던 여러가지 이유를 빼았아간다. 즉, 저녁 파티, 능률적 일, 후원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나를 사랑했는지, 혹은 나의 지위, 부, 위신, 권력을 사랑했는지....
*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 바니타스(vanitas)는 헛되다라는 뜻으로 가정의 침실이나 서재에 걸렸는데, 꽃, 동전, 만돌린, 체스판, 포도주병들은 천박과 세속적 영광의 상징이다. 이들과 함께 두개골이나 모래시계는 죽음과 짧은 생명의 상징이다. 이런 작품의 목적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으로 그 소유자를 우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신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
* 우리가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는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거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
* 죽음이 가장 잔인한 교훈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 때문에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 즉 부유하고, 아름답고, 유명하고, 권세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발견된 옛 귀족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 묘지)
* 18세기 프랑스 화가 위베르 로베르는 문명이 멸망한 미래의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을 그리면서 기쁨을 느꼈는데, 시대의 오만한 수호자들에 대한 경고이자 보복이었다. ....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상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주는 효과가 있다. 폐허가 무한한 시간의 대표자이듯이 이런 풍경 역시 무한한 공간의 대표자로, 거기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하약하고 수명도 짧은 몸은 나방이나 거미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든 가장 힘 센 인간과 커다란 자연(큰 사막, 높은 산, 빙하와 대양)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공동체
* 기독교는 처음부터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방법은 교회 예배의 의식과 교회 음악 연주였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 초월적 중개자 덕분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이, 수입, 옷, 배경 등 많은 것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도 있지만, 음악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연금술의 과정도 시작된다. 영혼의 움직임을 귀로 들을 수 있고, 그래서 그만큼 쉽게 다다달 수 있게 된 것에 안도와 감사를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 스위스 취리히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런던만큼 강하지는 않다. 취리히는 그만큼 최고 수준의 전차 네트워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 두 도시
* 예수는 떠도는 장인인 동시에 가장 거룩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지위에 대한 발판 => 세속적 지위(직업, 소득, 평판으로 결정)는 낮아도 영적 지위(심판의 날에 신의 눈에 드러나는 장단점으로 결정)로 존경 받을 수 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국'(427년)에서 세속 도시(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돈, 별장, 전쟁 승리)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하찮은 것이며, 신의 도시(이웃 사랑, 겸손과 자선 실행, 하나님에게 의존)는 기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다. 이 두 도시는 심판의 날까지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구분되어 있다고 주장. 세속 도시에서는 왕이라도 천국 도시에서는 하인일 수 있다는 뜻.
* 단테는 신곡(1315년)에서 지옥 9층, 천국 10구를 나열하였고, 각 층과 구에는 특정한 종류의 죄와 미덕에 대응한다. 천국과 지상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이런 식으로 차이가 있기에 신자들은 성공에 대한 억압적인 일차원적 비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
* 물질적 성공보다 영적인 성공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중하는 가치에 매혹적인 진지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 그림, 문학, 음악, 건축 등 예술작품을 이용하여 성당을 건축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을 노래하는 음악 등등 (유럽 도시의 가장 당당한 건물들은 성당인 경우가 많음)... 도시인들은 지상의 거처가 아무리 초라해도, 그들의 마음은 성당에 속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내적인 가치를 반영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천장은 예수가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영광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세속적 건물들이 우리에게 지상의 권력의 중요성을 무자비하게 외쳐대는 세상이지만, 큰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우뚝 서 있는 성당들은 영을 앞세우는 공간으로 유지되며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고 있다.
V. 보헤미아
- 보헤미안은 전통적으로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 생활'(1851년)이 성공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보헤미아는 보헤미안들의 사회 또는 집단.
* 부르주아지를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보헤미안들에게는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스탕달은 방종의 취향이 있고, 백일몽을 좋아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들을 때 솟아오르는 감정을 환영하고, 혼잡한 거리에서 어떤 아름다운 얼굴을 흘끗 본 뒤에 몇시간씩 달콤씁쓸한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
* 헨리 소로우: 1845년 7월 월든 호수의 북쪽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 외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 집단과 전통은 열등, 개인의 우월성 강조,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랄프 왈도 에머슨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 보헤미아 역사: 1917년 뉴욕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그리니치빌리지 공화국 창설 선언, 다다주의 "이제 똑똑한 사람은 표준이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백치다." 1924년 초현실주의자들은 파리에 초현실주의 연구부 개설, 미래주의자, 1844년 매사추세츠 프루트랜즈라는 공동체 농장 설립 => 그들의 교의는 모두 영적이지만, 늘 마지막에는 돈을 좀 더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였다.
*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 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시작한다. 산업가, 보헤미안, 가족, 철학자 등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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