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2022.1.13)

클리오56 2022. 1. 14. 07:48

 

내용 및 소감

1. 웨딩드레스 

- 드레스를 빌려 결혼하는 4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전개. 결혼 준비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하지.... 결혼은 겉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보호의 문제이니 말이다.....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게 아주 많아. ...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거야.... 결혼한지 3년이 되었을 때, 내가 내부모에게 속았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오랫동안 속아서 똑같은 삶의 궤도를 선택해버렸나?...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너는 이해못해. ...  

 

2. 효진

- 효진은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쳐온 인물. 효도 효, 다할 진이라는 이름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가난해서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열등감 가득한 전 애인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예고된 불행에 맞서는 인물이 아니라 도망치라고 말할 뿐이다.
-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해서 도망치는 사람
-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3. 알다시피, 은열

- 은열: 홍경래의 난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 고아들을 모두 이끌던 고아였다. .... 홍경래의 난이 끝나고 가담자 2983명중  여자와 아이를 뺀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당했다. 그때 은열은 여자였을까, 아이였을까. 정확한 생몰년을 모르니 그 가운데쯤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고아들의 맏언니, 과부들의 맏딸, 후에 은열이 섬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홍경래가 섬에서 다시 봉기하리라 믿었던 당시 민중들의 바람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 그(은열) 아우들이 나아가 반상을 불문하고 아녀자를 험하게 대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으리라 하니, 관에서 방을 붙인 것보다 백배 나으렸다. 기강이 어디까지 흐려지면 한낱 도적때가 도를 논하는가. 

- 은열은 황해도를 떠나 원산을 거점으로 활동, 원산은 항구도시이고 전통적으로 자유로운 풍토이기 때문 => 대마도의 도주 소가의 사남 소시로가 은열에 합류하면서 은열의 무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 내륙 깊이 조세 운반로를 습격하는 대신, 오히려 수수료를 받고 민간선박을 보호, 후일엔 심지어 관의 의뢰까지 받음. => 중국 강소성 남경에서 연희집단의 조창량과 만났던 기록이 남아있다. => 결국 한중일 아이돌의 만남?? => 어느 섬에서 살아가던 중 조선 조정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무리라며 토벌의 학살 속에서 은열은 죽었다. 당시 섬에 없었던 창량이 시로의 유해를 대마도에 인도.  

- 선배 건우의 알다시피라는 이름의 밴드 조직: 한국, 일본, 대만, 호주의 이른바 환태평양 밴드  => 한일, 중-대만, 호주 인종차별 등 민감한 이슈가 거론되면 각자 생각에 잠겨 침묵

-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거야.   

 

* 솔거노비[ ]: 사노비의 한 형태로 소유주와 동거하거나, 혹은 근처에 살면서 직접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의 유형. 노비에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다. 사노비는 사는 거주 형태와 신역()의 부담형태에 따라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별거하는 노비를 말하며, 솔거노비는 주인이 노비를 직접 거주지에 함께 데리고 산다는 뜻에서 나왔다. 간혹은 주인집 가까운 근처에 거주하면서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는 노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솔거노비 [率居奴婢] (두산백과)

* 가왜[  ]: 왜구()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도적을 말함. 혹은 열무() 때 왜적의 형상을 가장하여 만든 군졸. [네이버 지식백과] 가왜 [假倭]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열무 (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함.

 

4. 옥상에서 만나요

- 스포츠신문의 광고사업부에 근무중인 주인공은 룸살롱 접대라는 더러운 관행 속에서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만, 아빠는 혈액투석, 엄마는 류마티스 관절염, 오빠는 우울증이고 자신은 유일한 경제인이었으니, 의료보험이 달렸던 상황이라, 이직이고 재취직이고 엄두가 나지않았다.

-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던 직장 언니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막아주었다. ... 이 언니들이 가죽점퍼 사내, 당구돌이, 장구돌이와 연이어 결혼하고 회사를 이직한 후 얼굴에 윤기가 돌아 부러웠다.

- 언니들이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규중조녀비서'라는 비급서가 결혼의 비결이었고, 주인공은 이를 물려받았다. 비급서의 혼인상대 소환 방법에 따라 두달에 걸쳐 주문에 필요한 준비물을 갖추어 북쪽 산이 보이는 강 건너 언덕을 대신하여 회사 옥상에서 주말에 철문을 잠그고 변화, 탈출, 계급상승을 기대하며 주술을 시행하였다. 소환된 남편은 허공에 뜨있는 멸망의 사도, 집에 데리고와 함께 지냈지만 너무 좌절했고, 더 나빠질게 없다고 생각해도 더 나빠지는게 인생이란걸 알면서도 기가 막혔다..... 어느 날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고 생각된 남편이 고개를 숙여, 입술이라고 생각되는 축축한 구명을 내 정수리에 밀착시켰어, 돌기인지, 이빨인지, 빨판인지 알 수 없는 작은 기관들이 일제히 뭔가를 빨아올리기 시작했지. 나는 쇼크 속에 기절했어. ..... 다음날, 놀랍게도 몸이 가뿐했지. 몸의 독소가, 노폐물이, 중금속 성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어. ... 남편은 나에게서 멸망이 아닌 절망을 빨아갔던 것. 

- 남편의 고픈 배를 채워주기 위하여, 주변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해고 당한 동기, 모친상 당한 동료, 이혼 한 친척 등등)을 매일 같이 집에 데려와 절망을 빼주었고 결과는 좋았다.... 박수무당이랑 동거중이냐, 살풀이해준다며, 이런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모교로 돌아가 상담심리학을 공부한 후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 이후 변두리로 이사하여 망한 공단이 있는 지역의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심리상담하였다. 점점 장승처럼 목질화되어가는 남편이 그들의 절망을 빨아들여 치유하였다.

- 나를 구한 언니들 처럼, 나도 내 후임을 구한다. 너는 ,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는, 아마도 그 옥상에 자주 가겠지. 내가 너에 대해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는 게 왜인지는 모르겠어. 연민은 아냐. 연민은 재수없잖아. 그저 규중조녀비서를 받을 사람이 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야.

 

5. 보늬

-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구들과 ‘돌연사맵’을 만들며, 다른 여러 사유로 돌연사한 사람들의 사례를 맵에 표시하며 나름 원인을 알아보려 하였다. 종이박스 공장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노동자 뿐만 아니라 미술감독, 모델, 제빵사, 기자 등등 육체적으로 부하가 걸리지 않을듯한 사람들까지도 많이 등록되었다. 아마도 과로, 스트레스, 인격모독, 열악한 작업환경, 경쟁에 따른 착취, 운동부족, 폭음문화 등등이 요인으로 거론

- 사회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제기... 아픔을 같이하기에 가능한 문제의식... 해결은 끊임없는 관심이 필요할듯~~  

* 보늬: 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

 

6. 영원히 77 사이즈

- 서울역앞 지하도에서 '그것'에 물려 뱀파이어가 된 여자의 이야기, 다만 곶감을 먹으면 죽는다고... 사슴피, 토끼피도 시도하였지만 부작용이 있었고, 결국 헌헐 피에서 구한 사람의 피는 극소량만 섭취해도 장기와 피부를 촉촉히 적셔주었고, 퍼져나가는 온기와 습기가 너무나 짜릿했다고. 분쟁지역에서 돌아온 다큐사진작가 남자 친구와 섹스를 하던 중 뱀파이어 본능이 발작, 실수로 뚫어버린 구멍을 물고 빨아 죽이게된다.

- 전직동학군이었다는 그를 불러 처리를 부탁한다. 남자 친구를 화장한 후 뼈가루를 작은 필름통 여럿에 담아 여행하는데, 행선지는 여행사진을 찍어 보내오던 곳을 따라 나섰고 남자가 셔터를 눌렀으리라 짐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남자의 가루를 한통씩 비웠다.... 여행 도중 접근하는 멍청이들이 끝없이 줄이어서 배가 고플 일은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 새로 직장도 구했고.... 죽은 것이 무사귀환 선물로 오래된 칼을 주는데, 언젠가는 함께 죽어 있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쓰라고... 매년 겨울이 되면 코트 안쪽에 칼을 넣고 을지로의 지하도를 어슬렁거린다. 남자를 닮은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여자는 아직 곶감을 먹지 않았다.

 

7. 해피 쿠키 이어

- 한국으로 유학을 온 이스마일이 과자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과자 귀를 갖게 된 이야기. 이스마일은 아랍계로 대학병원에서 실습중, 계형이란 친구와 그의 고향인 속초로 여행갔다가 경북에 소재한 삼촌 과자공장에서 며칠 알바를 한다. HACCP 인증의 16년 무사고 공장.... 큰 사고가 아니라도 작은 사고는 얼마나 흔한지, 희고 반짝거리는 방진복 아래 숨겨진 자잘한 부상들은 얼마나 많은지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공장에서 사고가 있었고 한쪽 귓바퀴를 잃었다.  

- 다쳤던 귀가 자라고 있었다. 조직검사를 거쳐 외주실험을 거쳐 그것은 전병이라고, 즉 귀에서 과자가 자란다고 했다.

- 두 방사이의 벽은 정말로 얇았고 사람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바로 알았다. .... 결국 여자는 여자친구가 되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입술을 닦어주고 체온을 나누었다. .... 절정의 순간에 여자친구가 내 귀를 깨물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여자친구도 좀 당황해서 어머 내가 왜 그랬지, 하며 꿀꺽 내 귓바퀴를 삼켰다. 

- 여자친구는 계속 귓바퀴를 삼겼고 성분은 감자전분, 투잉젤리 등등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실습기간이 끝나 모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에서 귀를 잃었고 과자 귀가 자랐고 귀를 깨무는 여자의 알레르기를 반쯤 고쳐주고 왔다.  

* 유탕기: 튀김기

* 후무스(houmous): 병아리콩을 으깬 것에 오일과 마늘을 섞어서 만든 중동 지역의 음식

 

8. 이혼 세일

- 이재는 이혼한 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이혼 세일’을 열었다. 크고 작은 살림들을 처분하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이재의 결정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 내가 내친구라서 너무 후하게 생각하는 걸까? 경윤이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말없이 장아찌 병에 남은 양을 가늠하고 있었다.....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 우리 업계는 특히 더 심해.....세살 첫째, 막 돌 지난 둘째를 키우면서 지원은 한쪽 얼굴에 마비가 왔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기분

-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캠핑 카라반)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친구들은 카라반 앞에서 수면 바지, 실을 감은 북어, 떡을 차리고 작은 고사를 지냈다.... 완성된 뇌가 내린 판단을 믿어. 믿고 가

 

9. 이마와 모래

- 대식국과 소식국 사이의 평화가 위기를 맞았는데, 휴전 30주년 기념 행사에서였다. 두나라는 서로 다른 식생활, 언어를 사용하며, 전쟁 중 왕래한 화살편지의 번역 오류로 오해를 쌓아간다. => 그럼에도 국가의 갈등을 이마와 모래가 중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들이 본인이 태어난 나라에서만 살지 않아서이다. 트랜스 내셔널리즘의 상징

 

 해설: 소소한 것들의 커다란 속삭임 (허희)

- 1997년 부커상 수상작 '작은 것들의 신':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첫소설, 인도 여성의 이중 구속상태를 제기, 즉 불가촉천민 등 계층화된 신분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카스트 제도의 잔혹성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하 젠더폭력성

- 한국 여성의 이중구속 상태: 자본을 가진자, 못가진자로 신분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속물성, 여성에게 적용되는 가부장제하 젠더억압성.   

 

교보문고 책소개

정세랑 월드의 시작점이자 정수!
신선한 상상력과 다정한 문장으로 정확한 위로를 건네는 작가 정세랑의 첫 번째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장편소설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고 있는 저자가 2010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8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결혼과 이혼, 뱀파이어, 돌연사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신선하고도 경쾌한 상상력을 펼쳐놓는다.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서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 한 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4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담아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웨딩드레스 44》 등의 작품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함께 견디는 이들에게 따듯한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저자 특유의 명랑한 필치로 그려낸 보이지 않는 폭력과 부조리에 맞서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이번 소설집은 저자의 손을 거치면 어떤 이야기도 반짝거리게 되어 있다는 걸 여실히 증명해낸다. 동시대성을 독특한 감수성으로 보여주는 저자의 소설집의 표지 일러스트는 《며느라기》로 수많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수신지 작가가 맡아 독자들의 기대를 한층 높여준다

저자 : 정세랑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이 있다.
 

목차

웨딩드레스 44 / 효진 / 알다시피, 은열 / 옥상에서 만나요 / 보늬 / 영원히 77 사이즈 / 해피 쿠키 이어 / 이혼 세일 / 이마와 모래 / 해설|허희 / 작가의 말 / 수록작품 발표지면

추천사

이언희(영화감독(미씽,탐정:리턴즈 ))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며 처음에는 아끼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으려 했지만 어느새 정신없이 다음 페이지를,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벌써 다 읽어버렸다니, 아쉬움에 마지막 페이지를 놓지 못하며 이번에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도대체 작가의 어느 곳에서 이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그에게서 다정한 위로를 받게 된다. 시니컬한 시선이 멋짐으로 포장되는 세계에서 정세랑의 다정함은 너무나 고맙고 소중하다. 옥상에서 만나자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세랑이 만나자는 옥상은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사방이 탁 트여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을 수 있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그런 곳이다. 그곳이라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 서평

“이럴 수가, 내가 문학에 ‘입덕’하는 날이 올 줄이야.”(vol***)
“대체 어떻게 이런 재미난 상상을 하시는 거죠?”(bky***)
“아 역시 정세랑 작가님이다. 이 말을 몇번이나 뱉었는지 모른다.”(sowo****)
“우리에겐 이런 작가가 필요하다.”(filli****)

창비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 정세랑 8년 만의 첫번째 소설집!
신선하고 경쾌한 상상력, 다정한 문장이 주는 ‘정확한’ 위로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정세랑이 작품활동 8년 만에 첫번째 소설집을 선보인다. 발표 당시 파격적인 형식과 지금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SNS상에서 화제를 모았던 「웨딩드레스 44」를 비롯해 총 아홉편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은 “강력한 가독성과 흡인력으로 이 사회의 연대 의지를 되살리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던 전작 『피프티 피플』의 묵직한 메시지와,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고 작가가 밝혔던 『보건교사 안은영』의 경쾌한 상상력 등 정세랑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기를 모두 만날 수 있는 ‘정세랑 월드’의 시작점이자 정수라 할 수 있다. 정세랑을 통과하면 어떤 이야기도 반짝거리게 되어 있다는 걸 이번 책에서 또한 여실히 증명해낸다.
신선한 상상력과 다정한 문장으로 정확한 위로를 건네는 작가 정세랑의 이번 소설집은 또한 화제의 웹툰 『며느라기』로 수많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수신지 작가가 표지 일러스트를 맡아 더욱더 눈길을 끈다.

내가 남긴 자리에 앉은 당신에 대한 염려,
그런 마음이 만들어낸 단단한 연대의 이야기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서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 표면에는 주술비급서가 있지만 ‘나’를 버티게 한 힘은 사실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던 사람들,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막아준 언니들인 셈이다. 해서 ‘나’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를 염려하며 ‘너’가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남긴 자리에 앉은 누군가에 대한 염려는 그 마음만으로 단단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낸다.
같은 드레스로 연결된 44명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 「웨딩드레스 44」는 한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여성들의 이야기를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담아냈다.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데, 특히 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입은 여성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쯤에는, 혹은 하지 않을 때쯤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그려질 것인가. 정세랑은 이처럼 다양한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러한 동시대성을 정세랑만큼 독특한 감수성으로 보여주는 작가는 단연코 없을 것이다.
이혼한 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이혼 세일’을 열게 된 ‘이재’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혼 세일」에는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 물으며 여성으로서 느끼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기분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목소리도 있다.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쳐온 인물이다. 효도 효, 다할 진이라는 이름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가난해서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하는 열등감 가득한 전 애인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예고된 불행에 맞서는 인물이 아니라 도망치라고 말할 뿐인 효진의 목소리는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상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62면)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64면)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친구들과 ‘돌연사맵’을 만드는 「보늬」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이스마일이 과자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과자 귀를 갖게 된 이야기 「해키 쿠키 이어」는 전작 『피프티 피플』을 떠오르게 한다. 단지 일을 했을 뿐인데 사망한 사람들,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해고된 사람들, 이들이 불행을 딛고 다음 세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해오고 있었다.
한편 곶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뱀파이어가 되고 만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77 사이즈」, ‘은열’이라는 여성 인물을 상상하여 전근대 한일관계사 속에 놓아둔 「알다시피, 은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가 화살편지로 인해 오해를 쌓아가는 「이마와 모래」는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옥상에서 만나요」에는 절망을 빨아들이는 ‘남편’이 나온다. 그는 절망을 밥처럼 먹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그의 앞에 데려다놓는다. 그 면면도 다양하다. “뇌종양 수술 후 후각을 잃은 요리사” “험악한 이웃과 마찰을 겪은 캣맘” “텔레마케터” “20년 넘게 키운 앵무새가 죽은 사람” “극우 국회의원의 딸” 등, 작가는 직업과 상황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상상하게 만든다.
정세랑은 한 인터뷰에서 “선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던바, 평범한 사람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얼굴을 가진 우리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는 작업을 이처럼 계속해나가고 있다. 정세랑만의 각도와 빛깔을 가진 새로운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살아 있는 것들을 보듬는 그 애정 어린 손길을 믿고 싶어진다. 그 애정이 바로 정세랑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명랑’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작가가 필요하다. 그만의 애정과 강인함이 모두에게 전염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