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마운틴 오디세이 (2017.8.20)

클리오56 2017. 8. 20. 08:18




읽은 소감 및 내용

등산을 시작한게 2005년, 이후 어느 날 등산학교에 가볼까하여 교과내용을 보니 온통 암벽 등반이라 깨끗이 포기한 적이 있다. 이후 등반은 나의 몫이 아니었고 오로지 등산. 그래도 백두대간을 마쳤고 9정맥은 반쯤 진행하였으니, 아마도 캐나다 근무가 없었더라면 9정맥도 벌써 마쳤겠지하는 생각. 하지만 캐나다에서 록키를 만났음은 일생의 행운이었고 록키 트레킹 200회가 넘는 진정한 매니어였다. 여기 본 서에 기록된 산악인들은 모두 제 길을 개척하고 한계를 밀어내는 진정한 산꾼이다. 그리고 그들은 휴머니즘을 갖추었고 존경의 대상이다. 힐러리, 메스너, 이 위대한 이름들은 히말라야를 등정했기에 혹은 14봉을 인류 최초로 등정했기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 이들이 보여준 올곧은 삶이 있기에 가능하다. 

마터호른을 초등한 에드워드 윔퍼가 반가웠는데, 그의 이름을 캐나다 록키에서 발견했으니 2011년 걸었던 Iceline 트레일이 그의 역작이었고 당시 10시간에 걸쳐 30Km를 원없이 한없이 걸었고 아내와 아이의 원망을 듣기도.


서문: 길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 내가 어떤 이의 삶에서 매력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정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개척등반하듯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01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 -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
- 근대등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미신(알프스에는 악마가 산다)들이 타파되어야 했다. 알프스  초기 등반사에서 그토록 많은 과학자들이 거론되는 이유였다. 종교적 광신과 불합리한 미신으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울수 있었던 그들이 알프스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학문적 연구였는데, 빙하, 지질, 기압 등이 대상이었다.
- 소쉬르는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미터) 초등자에게 상금 제공 공언(1760년), 이후 26년뒤 1786년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미셸 파카르 초등 => 1786년 근대등반의 시점, 소쉬르 과학적 근대등반의 아버지, 1787년 몽블랑 등정
- 훗날 발마는 자기 혼자만이 등정했다며 떠들고 다녔는데, 돈과 명예가 걸려있으면 이런 이전투구가 벌어지는지, 더구나 등반가들에게도.    

02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 - 레슬리 스티븐(1832~1904) 
-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등반기'는 소설적 서술로 산악문학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다음으로 레슬리 스티븐의 '유럽의 놀이터'로 차분한 에세이 스타일로 평가. 
- 하루 64Km 걷기를 생활화했던 산악인. 전직 대학교수이자 영국국교회 목사였지만 정통신학에 의문을 품고 모두 사퇴,
- 몽블랑 정상에서: 수많은 암봉과 빙하가 석양빛을 받아 불바다를 이루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25년이 지난 지금. 몽블랑의 일몰에는 변화가 없으나 그 산에 오르던 인간은 늙어 버렸구나.
-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부친. 그녀는 59세에 정신분열로 우즈 강에서 자살

03 영원불멸의 마터호른맨 - 에드워드 윔퍼(1840~1911) 
-1865년 마터호른 초등, 25살. 알프스 최고봉은 아니었지만 당시 인간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으로 인식.
윔퍼는 그 이후 5년 동안 마터호른에만 여덟 번의 도전장을 내민다. 말 그대로 청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이 산에 쏟아부은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풍찬노숙과 끝없는 좌절의 나날들. 그럼에도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욕망과 열정. 어쩌면 청춘은 무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 결국 그는 1865년 7월 14일, 기어코 마터호른의 정상에 올라서고야 만다. 세계등반사는 물론이거니와 윔퍼 자신도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윔퍼는 그러나 생애 최고의 영광과 가장 쓰라린 비극을 이날 하루에 모두 맛본다.
 . 당일 정상을 두고 이탈리아팀의 카렐 일행에 비하여 간발의 차로 정상 도착. 카렐은 발길을 되돌려버리고.
 . 하산 도중 로프가 낙석에 의하여 끊어져 4명이 1200미터 아래의 빙하까지 추락하여 사망
   => 결국 방랑자로 남미 안데스 산맥과 캐나다 록키산맥, 그린란드 탐험
- 산악문학 최고의 작품: '알프스 등반기' (한국어 절판)

04 신神은 죽었지만 산은 영원하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 20세기 초반의 알피니즘을 풍미했던 사조는 이른바 단독등반. 가이드나 로프 조차 사용하지 않고 바위 절벽을 기어올랐는데, 그만큼 사망자도 속출하였고, 이들 시체 곁의 배낭 속에는 니체의 책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
- 니체는 실제로 등산 매니아 수준. 스위스 알프스 엥가딘 지역의 작은 마을에 8년간 머물면서 요양, 집필, 등산. 

05 더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올라라 - 앨버트 머메리(1855~1895) 
- 머메리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좀 더 어려운 방식으로 오르는 것이야말로 등반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
- 등반사에서 1854년부터 1865년까지 10여 년의 세월은 149개의 봉우리가 초등된 알프스의 황금시대였다. 눈에 띄는 봉우리에는 모두 사람이 올라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등반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 머메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어려운 루트로 오르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등반이라고. 
- 지도를 보거나 가이드를 따라 오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 누구도 도전해 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굳이 가장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여 오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 이따금씩 너무 타성에 젖어 남들이 닦아 놓은 길, 빤해 보이는 쉬운 길만을 따라가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머메리는 예의 그 매서운 눈길을 부라리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는다. 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다
- 1895년 낭가파르트 도전. 히말라야 8000미터급 산에 도전장을 내민 최초의 산악인, 그리고 최초의 희생자
-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

06 알프스 가이드의 독립 선언 - 마티아스 추르브리겐(1856~1917) 
- 현재 히말라야 곳곳을 누비는 베테랑급 고산 셰르파들은 모두 다 비즈니스맨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다. 너희들의 등반기록에는 왜 우리들이 한 줄도 기록되지 않는 거지?
- 스위스-이탈리아 접경지역 몬테로사에 활동한 가이드 출신 산악인. 남미 안데스 아콩카과 초등(6,960미터)

07 알프스의 소박한 일상을 그리다 - 지오바니 세간티니(1858~1899) 
- 알프스 화가. 3부작 생명, 자연, 죽음
 
08 왕족으로 태어나 산악인으로 살다 - 아브루치 공(1873~1933) 
- 이탈리아 사부아 왕가의 자손. 청년 아브루치는 머메리를 졸라 함께 마터호른 츠무트 리지 재등. 
- 이후 알래스카 세인트 엘리아스(5,489미터) 초등, 북극점 및 K2 도전, 원시 아프리카 여러 산 등반
   
09 외다리로 알프스의 시를 쓰다 - 제프리 윈스럽 영(1876~1958) 
- 글 잘 쓰는 산악인이었지만 1차세계대전중 오른쪽 다리 잘려지고 의족  => 내가 현세에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산에 다시 오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7년간의 재활훈련 끝에 몬데로사, 바이스 호른, 마터호른 등정 성공
- 다리 하나를 잃는 것은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꿈과 용기를 잃는다면 세상 전부를 잃는 것이다.
- 시, 소설, 에세이 등 문학의 모든 장르에 등반을 담아낸 최고의 산악문학 작가

10 에베레스트의 유령이 된 사나이 - 조지 리 맬로리(1886~1924) 
- 그는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했고, 진이 다 빠져버려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들은 단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 에베레스트 북측 8,220미터 6 캠프에서 결국 텐트를 박차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향년 38세. 그가 그렇게 살다 간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부와 명예 혹은 국가적 숙원사업 따위는 유치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단지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실종 75주년을 맞아 BBC 다큐멘터리팀이 수색 원정대 편성, 1995년 8,520미터 지점에서 시신 발견

11 친구를 위하여 정상을 버리다 - 프리츠 비스너(1900~1988) 
- 1939년 미국의 K2원정. 원정대장 프리츠 비스너와 셰르파 파상 다와라마가 8,400미터 지점 도달. 정상 8,611미터 까지 두 시간이면 도달 가능. 하지만 포기하고 되돌아감. 훗날 코멘트: 당시의 나는 파상과 연결된 로프를 풀고 단독 등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파상은 어두울 때 정상에 오르면 신이 분노한다며 만류했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다. 나는 그런 친구와 연결된 로프를 풀어 버릴 수가 없었다. => 자신의 친구였던 셰르파를 위하여 세계등반사에 길이 남을 대업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 명예 보다는 우정을 더욱 높은 가치로 받아들임
- 철수 중 캠프는 철수해버렸고, 9캠프에서 베이스캠프까지 기적적으로 하산. 중간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 보낸 3명의 셰르파와 함께 모두 사망. 왜 캠프는 철수? 아마도 독일계 출신인 비스너에 대한 악감정, 당시 독일과 전쟁.

12 나는 고상한 영국 신사들이 싫다 - 에릭 십턴(1907~1977) 
- 자유와 용기, 그리고 천형같은 외로운 삶을 살았던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영국의 산악인 겸 탐험가
-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중 등반기가 격찬을 받으면서 에베레스트 원정대 일원으로 선택되며 초기 개척에 공헌
 
13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오를 뿐이다 - 주스토 제르바수티(1909~1946) 
- 영국의 최고봉은 스코틀랜드의 벤 네비스 1,344미터, 그럼에도 알피니즘의 종주국, 왜?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부 => 개인 역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별개의 전문직을 지닌 아마추어 산악인
- 프랑스 산악인과의 파트너십을 끊어라는 이탈리아 산악회에 대하여: 나는 국가의 위신을 위하여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반할 뿐이다. => 획일화된 국가주의와 폭력적인 도그마에 맞서서 개인주의를 옹호한 자유주의 사상가의 풍모  
- 등반은 속박과 한계에 저항하여 영혼의 자유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그것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에너지, 우아한 행동 스타일, 계산된 무모함이 주는 쾌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강렬한 탐미적 경험, 미묘한 감성,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려는 인간의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대한 탐구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그 욕망의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것이다.

14 대장장이의 육신과 시인의 정신 - 리카르도 카신(1909~2009) 
- 직설적이고 과감하며 불퇴전의 결의로 특징. 자연적인 등반선을 존중하되 거의 직등에 가까운 루트를 개척.
- 65세에 로체 남벽에 도전. 30건에 달하는 대암벽 세계 초등 기록. 이토록 강한 힘이 어디에서? 산은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강력한 원천이다. 그런 뜻에서 산과 나의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15 산악문학의 빌리언셀러 작가 - 하인리히 하러(1912~2006) 
-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선발되어 정찰을 마치고 오던 중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영국군에 체포되어 포로수용소 수감되었고 이를 탈출하여 히말라야를 넘는 초인적인 대장정 끝에 티베트 도착. 당시 신비한 소년이었던 달라이 라마와 함께 보낸 신비한 세월을 기록한 책이 바로 '티베트에서의 7년'(1953년), 이후 1958년 아이거 북벽 초등기록 '하얀 거미'(1958년)
- 1997년 나치 부역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남. 당시 26살의 나이에 냉철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맇지도 모른다. 
-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역량까지 쏟아붓는 것이다! 

16 마차푸차레의 정상에는 여신이 산다 - 윌프리드 노이스(1917~1962) 
- 안나푸르나 트레킹 도중 완벽한 예각 삼각형의 형태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날카로운 설산, 어쩌다 방향을 틀어 다른 앵글로 올려다보면 마치 물고기의 꼬리처럼 희한한 대칭을 이루며 빛을 발하는 신비로운 산: 마차푸차레 6,993미터  
- 성산으로 등반 불허. 그러나 1957년 단 한차례 허가. 마차푸차레 등반기(1958년)
- 정상 30미터를 앞두고 청빙 기둥과 마주쳐 포기. '다행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도 있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현지인들의 믿음을 받아들이다. 마차푸차레의 정상에는 여신이 산다.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곳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17 겸손과 헌신의 정상에 서다 - 에드문드 힐러리(1919~2008) 
- 1953년 5월 29일. 에베레스트가 초등되었다. 등반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 저자는 에베레스트 초등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힐러리의 인품이라고 말한다. 그때까지 등반계의 관행상, 등반을 도와준 셰르파나 가이드는 함께 정상에 있었더라도 그곳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 이름을 등반사에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초등자의 이름으로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와 자신의 이름을 함께 올리고 정상 사진으로는 노르가이의 사진만을 제시했다.
- 또 에베레스트 초등 후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히말라야의 원주민들에게 돌렸다.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모금 활동을 펼쳐 그 수익을 히말라야 원주민들의 교육과 복지, 히말라야 자연환경 보호 등에 사용했다. 힐러리의 인품에 거듭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까지 높아지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18 무상의 정복자는 새처럼 날아오른다 - 리오넬 테레이(1921~1965) 
-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혹하며 신중한 도전이다. => 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독창적인 인간 활동
- 인류 최초의 8000미터급 산의 정상에 오름, 안나푸르나

19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 - 헤르만 불(1924~1957) 
-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 대기업 임원교육에서 왜? 지독한 준비, 과감한 결단,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 1953년 낭가파르바트 세계초등 41시간 동안의 기록. 배낭과 산소통 모두 집어던지고 혈혈단신 정상 도달
 . 23세가 되기전 134개 봉우리 등정. 여름철 대신 눈과 얼음이 뒤덮인 겨울철에, 고난도 봉우리 25개를 33시간만에 주파 => 왜? 
 => 나는 준비했습니다.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내가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 준비였습니다.
- 원정대장이 귀환을 명령하고 동반자 마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비를 다 집어던지고 저 홀로 정상을 향하여 나아간 것이다. 최후의 모험. => 8000미터와 같은 거봉은 사람이 최후의 모험을 다하지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 정상 도달 오후 7시. 돌아오기 너무 늦은 시간. 세계 등반 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비바크, 꼿꼿이 선 채로 맞이.

20 현대 등반의 메피스토펠레스 - 워렌 하딩(1924~2002) 
- 요세미티 공원의 엘 캐피턴의 순수 표고차 1,086미터: 엘캡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바위사면이 노즈, 워렌 하딩이 초등
- 등반가의 제1요건요? 어리석음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고통에 처하게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리석어야만 하지요.
21 단독 거벽등반의 일인자 - 발터 보나티(1930~2011) 
- 1954년 이탈리아팀이 K2 초등, 당시 보나티는 9캠프 아래 8100미터 지점에서 포터와 함께 죽음의 비바크. 시기한 동료들이 캠프에 머물는 것을 허락 않음. 이 진실은 50여년 후 당시 초등자에 의하여 밝혀짐
- 마터호른 등정 100주년 기념 동계 단독 직등(세계 초등)을 홀로 감행, 곧 35세에 은퇴  

22 우울한 히피의 노래 - 개리 헤밍(1933~1969) 
- 알프스의 조난자 구조 활동을 위해 자신의 등반을 포기. 동료들의 만류에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음: 그 벽은 내가 알아. 이곳의 가이드들은 절대 구조할 수 없어. 나마저 외면하면 그들은 죽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 초인적인 등반으로 구조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기를. "내 이름은 개리 헤밍, 미국에서 왔소. 피곤해, 길 좀 터줘. 가서 쉬어야겠어" 
- 네가 오른 길에 아무것도 남기지 마라. 너는 그냥 그곳을 스쳐 지나간 사람일 뿐이야. 네 뒤에 오르는 사람도 마치 그곳을 초등하듯. => 대부분 단독 등반이었고, 루트 개념도 따위를 남기지도 않았다. 흔적을 남기지 말것, 그가 집착한 등반철학

23 20세기 최고의 원정대장 - 크리스 보닝턴(1934~) 
- 1960년, 군인 등산가로서 영국-인도-네필군 원정대로서 안나푸르나 II에 최초등정
- 직업산악인 결심. 원정대 기획, 조직, 기업협찬, 원정 결과를 저술, 사진 판매 등 => 20세기 최고의 원정대장

24 이 놀이에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 로열 로빈스(1935~) 
- 세계 암벽등반가들의 교과서 기초암벽기술, 진보된 암벽기술
- 목표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거죠. 중요한 것은 잘할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겁니다. 업적이란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25 동중선을 추구하는 바위 위의 곡예사 - 존 길(1938~) 
- 볼더링(Bouldering): 추락해도 크게 다치지 않을만한 작은 바위에서 하는 문제풀이식 등반. 로프나 안전벨트는 없다.
 => 좀 더 발전시킨 개념이 빌더링(Buildering): 고층건물 외벽 타고 오르는 등반
- 그는 볼더링을 동중선으로 파악한다. 즉 완벽한 몰입을 통하여 명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일종의 수행으로 생각

26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하라 - 이본 취나드(1938~) 
- 1963년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며 인수봉에 취나드 길 개척, 단 하루만에. 파타고니아 창립자
- 부탄 히말라야의 6000미터급 산을 초등후, 루트 개념도를 찢어버렸는데, 다음에 오는 사람도 초등자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배려

27 성차별의 산에 맞서다 - 반다 루트키에비치(1943~1992)
- 1978년 히말라야 단독등정. 원래는 국제합동대였고 그녀가 부대장으로 임명되자 남성대원들이 치욕스럽다며 문제 발생.
 => 하여, 그녀는 단독등반 실행하였고 성공. 이후 14좌 추진했으나 9번째 칸첸중가 8,300미터 부근에서 마지막 모습 


28 인류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 - 라인홀트 메스너(1944~) 
- 그는 스폰서로부터 지원을 받고 올라가 정상에서 국기를 뒤흔드는 행위 따위를 경멸했다. 그는 순전히 '나만의 즐거움'을 위하여 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여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것은 매스너가 극한의 상황 속으로 자신의 육체를 밀어 넣어 마침내 쟁취해낸 위대한 정신의 기록이다.  
-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산악인은 당연히 라인홀트 메스너다.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개인을 한 명만 꼽으라고 해도 역시 메스너를 지목할 것이다.” 메스너는 현대의학계가 모두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등반’에 성공했다. 그리고 인류 사상 최초로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에 모두 올랐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얼마나 빠르게 올랐느냐보다 왜, 어떻게 올랐느냐에 주목했다.
- 세계의 지붕에 모두 오르고 난 후에는 티베트의 무인지구, 남극과 그린란드를 탐사하고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등 모험을 계속했다. 그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위대한 정신의 기록을 60여 권의 책으로 남겼다. 메스너는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산악인이다. 
- 저술: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8000미터봉 14개를 모두 오르고' (절판),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벌거벗은 산' '검은 고독 흰 고독' '자유로운 영혼'

29 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 없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1947~) 
- 저는 등반에도 어떤 ‘도(道)’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등반 역정은 곧 그것을 찾는 과정이겠지요. 
- 1985년 가셔브룸 IV 서벽 도전, 수직 빙설벽 고도차 2,500미터. 성공이후 정상까지는 평탄한 설릉이었지만 곧장 하산.
 => 우리의 목표는 서벽이었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30 히말라야의 거벽에 오른 히피들 - 피터 보드맨(1950~1982) & 조 태스커(1948~1982) 
- 1975년 돈키호테 같은 원정대 출현, 단 두명의 두나기리 원정대. 비행기 삯이 없어 고물 자동차타고 유라시아 대륙넘어 옴
 => 앞서 초등자가 어려워 포기했던 창가방 서벽 등정. 
- 당시 미답이었던 에베레스트 북동릉 도전했다가 살아서 내려오지 못함 => 평생 극한 등반을 추구

31 산 위에서 펼치는 극한의 퍼포먼스 - 장 마르크 부아뱅(1951~1990) 
- 과연 K2의 7,600미터 지점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베이스캠프(5,000미터 지점)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구도 답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부아뱅이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행글라이더가 위태롭게 펄럭였다. 부아뱅은 지체 없이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절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 산악인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천만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설맹, 동상,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산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을 향하거나 목표로 한 암벽을 오른다. 그런데 거기에 위험을 더하는 사람이 있다. 장 마르크 부아뱅은 특이한 산악인이다. 그는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단 하루 만에 모두 올랐다. 4시간 10분 만에 마터호른 북벽에 올랐다가 행글라이더로 하강한 다름 다시 다른 루트로 정상에 올라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날아서 하산한 적도 있다. 그는 대담한 상상력과 지독한 훈련을 통해 극한 스포츠(Extreme Sports)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그 경계선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나갔던 놀라운 산악인이다.
- 혹자들은 부아뱅이 지나치게 매스컴을 의식하는 연예인 같다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등반가라기보다 행위예술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부아뱅이 자신의 인생을 즐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내 등반, 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32 학교를 때려치우고 등반 부랑아가 되다 - 그렉 차일드(1957~) 
- Climbing Bum: 건달 산악인, 등반 부랑아. 가난한 히피 스타일의 전업 등반가 그룹
- 십대 후반의 삶을 호주의 블루마운틴에서 송두리째 바침. 이후 요세미티 진출. 퍼시픽 오션 월을 일주일만에 돌파 
- 이후 세계 암장순례를 하였고 영국의 히말라야 등반가 더그 스코트와 조우. 인도 히말라야의 쉬블링 등정
- 산악문학 저서들: 학교 자퇴했음에도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문장, 풍부한 감수성, '희박한 공기' '복잡한 감정'

33 산은 경기장이 아니라 교회당이다 - 아나톨리 부크레에프(1958~1997) 
- 1996년 해발 8600미터의 힐러리 스텝에서의 대참사를 기록: '희박한 공기 속으로' => 이때 상업 등반대의 가이드 부크레에프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조사결과는 책의 내용과는 다른것으로 결론
- 초경량 속도등반의 달인: 마칼루 46시간, 다울라기리 17시간, 8000미터급 총 21회 등정(이중 2회 제외하고는 무산소등정)
- 산은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경기장이 아니라 신앙을 실천하는 교회당이다. 

34 실패할 수 있는 꿈을 꾸어라 - 제프 태빈(1958~)
- 에베레스트에 오른 최초의 유태인이자 안과의사, 히말라야 백내장 프로젝트를 출범시켜 의료지원 봉사 
- 유쾌한 모험기 '블라인드 코너'
- 산을 정복하다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잠시 동안 그 산의 일부가 되었던 것뿐이고, 무엇보다도 운이 좋았지요.

35 나는 등반계의 바비인형이 아니다 - 카트린 데스티벨(1960~) 
- 보나티가 윔퍼에게 경의를 표했고, 데스티벨은 보나티가 개척한 루트를 따라 마터호른 북벽을 재등.
- 1991년 세계등반사의 하나의 사건, 프티 드뤼 개척등반. 홀로 9일동안 벽에 매달려 성공

36 더 높은 난이도의 바위를 찾아서 - 볼프강 귈리히(1960~1992) 
- 암벽 등급 5.10: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
- 그는 평생동안 보다 더 난이도가 높은 바위들을 찾아다녔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바위들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바위를 오르는 그의 동작이 너무도 아름다워 '크랙의 발레리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 영화 클리프 행어의 스턴트맨 역할
- 독일 아우토반에서 한껏 엑셀을 밟아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 

37 여자가 아니라 인간일 뿐 - 린 힐(1961~) 
- 린힐은 지독한 노력형, 데스티벨은 천부적 재능. 여성 최초로 5.14급의 난이도를 통과
- 실내암벽대회를 공정하고 인기있는 스포츠로 정착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한 여성 클라이머
- 엘 캐피턴의 노즈 루트를 단 하루만에 자유등반으로 돌파, 최초 기록. 세계등반사 100대 사건에 포함

부록 세계등반사 100대 사건
633년 일본의 승려 엔노 쇼샤쿠 후지산 등반, 최초의 고산등반 기록

교보문고 책소개

[마운틴 오디세이]는 산에 오르는 작가 심산이 말하는 알피니스트들의 이야기이다.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계기를 마련해준 소쉬르부터 등반의 개념을 바꾼 머메리, 에베레스트 초등자 힐러리, 인류 사상 처음으로 8,000미터 봉 14좌를 모두 오른 메스너를 거쳐 암벽등반의 여제 린 힐까지. 역사 속 알피니스트의 산과 인생 이야기가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공연예술인 > 영화인>시나리오작가

심산저자 심산沈山은 산에 즐겨 오르는 작가. 연세대 불문학과 재학시절부터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서 먹고 살았다.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과 암벽반을 수료했고, 현재 같은 학교의 강사이며, 한국산서회 회원이다. 북한산을 자신의 모산(母山)이라 여기고, 매주 산에 오르며, 매년 해외로 원정 혹은 트레킹을 떠난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식민지 밤노래》, 장편소설 《하이힐을 신은 남자》 《사흘낮 사흘밤》, 에세이 《심산의 와인예찬》 《첫 비행기 타고 훌쩍 떠난 제주올레 트레킹》, 작법서《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등이 있다. 《시나리오 가이드》《시나리오 마스터》 《대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비트》 《태양은 없다》 등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었다. 산악문학 저서로는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엄홍길의 약속》 등이 있다. 현재 자신이 설립한 심산스쿨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치고 전각을 배운다.

목차

서문?길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01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 -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 
02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 - 레슬리 스티븐(1832~1904) 
03 영원불멸의 마터호른맨 - 에드워드 윔퍼(1840~1911) 
04 신神은 죽었지만 산은 영원하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05 더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올라라 - 앨버트 머메리(1855~1895) 
06 알프스 가이드의 독립 선언 - 마티아스 추르브리겐(1856~1917) 
07 알프스의 소박한 일상을 그리다 - 지오바니 세간티니(1858~1899) 
08 왕족으로 태어나 산악인으로 살다 - 아브루치 공(1873~1933) 
09 외다리로 알프스의 시를 쓰다 - 제프리 윈스럽 영(1876~1958) 
10 에베레스트의 유령이 된 사나이 - 조지 리 맬로리(1886~1924) 
11 친구를 위하여 정상을 버리다 - 프리츠 비스너(1900~1988) 
12 나는 고상한 영국 신사들이 싫다 - 에릭 십턴(1907~1977) 
13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오를 뿐이다 - 주스토 제르바수티(1909~1946) 
14 대장장이의 육신과 시인의 정신 - 리카르도 카신(1909~2009) 
15 산악문학의 빌리언셀러 작가 - 하인리히 하러(1912~2006) 
16 마차푸차레의 정상에는 여신이 산다 - 윌프리드 노이스(1917~1962) 
17 겸손과 헌신의 정상에 서다 - 에드문드 힐러리(1919~2008) 
18 무상의 정복자는 새처럼 날아오른다 - 리오넬 테레이(1921~1965) 
19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 - 헤르만 불(1924~1957) 
20 현대 등반의 메피스토펠레스 - 워렌 하딩(1924~2002) 
21 단독 거벽등반의 일인자 - 발터 보나티(1930~2011) 
22 우울한 히피의 노래 - 개리 헤밍(1933~1969) 
23 20세기 최고의 원정대장 - 크리스 보닝턴(1934~) 
24 이 놀이에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 로열 로빈스(1935~) 
25 동중선을 추구하는 바위 위의 곡예사 - 존 길(1938~) 
26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하라 - 이본 취나드(1938~) 
27 성차별의 산에 맞서다 - 반다 루트키에비치(1943~1992) 
28 인류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 - 라인홀트 메스너(1944~) 
29 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 없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1947~) 
30 히말라야의 거벽에 오른 히피들 - 피터 보드맨(1950~1982) & 조 태스커(1948~1982) 
31 산 위에서 펼치는 극한의 퍼포먼스 - 장 마르크 부아뱅(1951~1990) 
32 학교를 때려치우고 등반 부랑아가 되다 - 그렉 차일드(1957~) 
33 산은 경기장이 아니라 교회당이다 - 아나톨리 부크레에프(1958~1997) 
34 실패할 수 있는 꿈을 꾸어라 - 제프 태빈(1958~) 
35 나는 등반계의 바비인형이 아니다 - 카트린 데스티벨(1960~) 
36 더 높은 난이도의 바위를 찾아서 - 볼프강 귈리히(1960~1992) 
37 여자가 아니라 인간일 뿐 - 린 힐(1961~) 
부록?세계등반사 100대 사건

책 속으로

윔퍼는 그 이후 5년 동안 마터호른에만 여덟 번의 도전장을 내민다. 말 그대로 청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이 산에 쏟아부은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풍찬노숙과 끝없는 좌절의 나날들. 그럼에도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욕망과 열정. 어쩌면 청춘은 무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1865년 7월 14일, 기어코 마터호른의 정상에 올라서고야 만다. 세계등반사는 물론이거니와 윔퍼 자신도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윔퍼는 그러나 생애 최고의 영광과 가장 쓰라린 비극을 이날 하루에 모두 맛본다. _03 영원불멸의 마터호른맨(36쪽) 

그는 다리를 잃은 지 7년 만에 피나는 재활 훈련을 거쳐 기어코 몬테로사에 올랐다. 오버행(암벽의 일부가 돌출되어 머리 위를 덮은 형태의 바위)과 침니(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바위 틈)로 가득한 돌로미티의 침봉들 위로 올라선 다음에는 ‘꿈에 그리던’ 바이스호른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청년 시절, 여섯 개의 루트로 도합 여덟 번을 등정했고, 이때 남벽과 북벽에 낸 네 개의 루트는 그 자신이 개척한 초등 루트였다. 한마디로 그의 청춘을 다 바쳤던 산이다. 윈스럽 영은 한쪽 발로 암탑과 눈처마를 통과하고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기어코 바이스호른의 정상에 다시 올라선 다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 ‘영국 신사’ 윈스럽 영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알프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_09 외다리로 알프스의 시를 쓰다(86쪽)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에 선 것은 1953년 7월 3일 오후 7시였다. 간단히 말해서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캄캄한 밤에 저 홀로 하산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등정보다 힘든 것이 하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젠 한 짝이 등산화에서 벗겨져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 남은 장비라고는 이제 등산용 스틱 두 개와 아이젠 한 짝뿐이다. 정상 부근에는 잠시 궁둥이를 대고 앉아서 쉴 만한 공간도 없다. 
그는 이 상태에서 꼿꼿이 선 채로 비바크에 돌입한다. 세계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비바크이다. 헤르만 불의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에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그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 버린 초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추위를 막을 비바크색도, 
추락을 예방해 주는 확보용 자일도 없었으나,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_19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174~176쪽) 

그것은 끔찍한 사투였다. 일찍이 그 벽에 직등 루트를 뚫었던 헤밍조차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손발이 얼어 갔고 기력은 쇠진해 갔다. 조난자와 구조자들이 내지르는 절망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알프스 전역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들의 비극적인 조난 상황과 헌신적인 구조 활동은 당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됐다. 
이를테면 실시간 생중계되는 ‘핫 이슈’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침내 헤밍은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거의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과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헤밍은 쉬어 버린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아직 죽지 않았어.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내려갈게! _22 우울한 히피의 노래(198~199쪽)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등반이란 ‘블라인드 코너를 통과하는 일’이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현재의 지위를 버리고 그곳에 달라붙을 때의 그 과감한 결단, 그리고 그 너머에서 숨겨져 있던 새로운 길을 찾아냈을 때의 그 자랑스러운 성취감. 블라인드 코너에 도전할 때 성공의 가능성을 점쳐 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은 ‘진인사 대천명’이라 말했다. 유대인들의 속담은 보다 문학적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 _34 실패할 수 있는 꿈을 꾸어라(315쪽) 

끝내 자신만의 새로운 루트로 프티 드뤼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녀는 한없이 울었다. 그 고운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의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나왔으며, 그 아름다웠던 육체는 뒤틀린 장작개비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그녀의 이름 앞에 ‘여성’이나 ‘예쁜’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못한다. 데스티벨은 일그러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클라이머? 

출판사 서평

산은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강력한 원천이다. 
그런 뜻에서 산과 나의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_리카르도 카신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역량까지 쏟아붓는 것이다! 
_하인리히 하러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혹하며 신중한 도전이다. 
_ 리오넬 테레이 

저는 등반에도 어떤 ‘도(道)’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등반 역정은 곧 그것을 찾는 과정이겠지요. 
_보이테크 쿠르티카 

산은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경기장이 아니라 신앙을 실천하는 교회당이다. 
_아나톨리 부크레에프 

“길은 내가 만든다” 
알피니즘의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산악인들의 이야기 

인생길은 산행길과 닮았다
 
이 책은 산에 오르는 작가 심산이 말하는 알피니스트들의 이야기이다.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계기를 마련해준 소쉬르부터 등반의 개념을 바꾼 머메리, 에베레스트 초등자 힐러리, 인류 사상 처음으로 8,000미터 봉 14좌를 모두 오른 메스너를 거쳐 암벽등반의 여제 린 힐까지. 역사 속 알피니스트의 산과 인생 이야기가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에 실린 산악인들의 삶과 등반이 꼭 산악인들에게만 어떤 울림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을 대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인생길은 산행길과 닮았다. 그들이 보여 준 용기와 도전, 전혀 새로운 생각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 내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대세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나아가는 독창적인 삶의 태도는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를 살았고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졌지만 그들의 삶과 등반을 통하여 이렇게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_서문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대로, ‘알피니스트들의 등반길은 인생길과 닮았다.’ 무상(無償)의 가치를 추구했던 리오넬 테레이는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순간에도 양보의 미덕을 발휘했다. 최고의 등반가가 되려고 했던 자신의 목표가 잘못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했던 로열 로빈스는 새로운 사업으로 성공하고 나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목표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 소개된 38명의 알피니스트들은 그렇게 저마다 자신의 등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특히 삶을 산에 맡긴 알피니스트의 도전과 희생정신, 그들이 추구하려 했던 궁극의 희망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희열과 감동을 그들의 산행을 따라가다 보면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 _조지 리 맬로리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결국 내려올 거면서 왜 산에 오르는 건가요?” 
이에 대한 현답은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이 유명한 말은 조지 리 맬로리의 대답이 조금 와전된 것이다. 
맬로리는 같은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몇 번이고 도전했다. 등산 원정에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직접 강연을 다니며 비용을 마련하면서까지 말이다. 맬로리가 오르고자 했던 산은 에베레스트였다. 왜 그렇게까지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는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했고, 진이 다 빠져버려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들은 단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텐트를 박차고 나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향년 38세. 그가 그렇게 살다 간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부와 명예 혹은 국가적 숙원사업 따위는 유치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단지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_96쪽 

누가 먼저 그 산에 올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_에드문드 힐러리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란다. 알피니스트들은 더 높은 산, 더 어려운 산에 오르고 싶어 한다. 알다시피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다. 1953년 5월 29일. 에베레스트가 초등되었다. 등반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에드문드 힐러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에베레스트의 초등 기록이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그는 지구 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이튿날 전 세계의 모든 일간지 1면은 그의 차지였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작스러운 스타 탄생의 순간이다.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전 그의 등반경력은 일천했다. 기껏해야 조국인 뉴질랜드에서 마운트쿡 남릉을 초등했다거나 알프스 몬테로사의 다소 어려운 루트를 올랐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의 직업은 양봉업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봉업을 하는 부친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무명의 백수였던 것이다. _152~153쪽 

저자는 에베레스트 초등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힐러리의 인품이라고 말한다. 그때까지 등반계의 관행상, 등반을 도와준 셰르파나 가이드는 함께 정상에 있었더라도 그곳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 이름을 등반사에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초등자의 이름으로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와 자신의 이름을 함께 올리고 정상 사진으로는 노르가이의 사진만을 제시했다. 또 에베레스트 초등 후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히말라야의 원주민들에게 돌렸다.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모금 활동을 펼쳐 그 수익을 히말라야 원주민들의 교육과 복지, 히말라야 자연환경 보호 등에 사용했다. 힐러리의 인품에 거듭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까지 높아지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남들과는 다른 길로 올라라 _앨버트 머메리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같더라도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제각각 다르다. 사람은 누구도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등반에서도 그렇다. 산 하나를 오를 때에도 다양한 루트가 있다. 등반사에서 1854년부터 1865년까지 10여 년의 세월은 149개의 봉우리가 초등된 알프스의 황금시대였다. 눈에 띄는 봉우리에는 모두 사람이 올라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등반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 머메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어려운 루트로 오르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등반이라고. 

지도를 보거나 가이드를 따라 오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 누구도 도전해 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굳이 가장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여 오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_53쪽 

그의 말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살다보면 조금은 쉬워 보이는 길이나 남들도 다들 하는 길을 따라갈 때가 있다. 남들이 다들 하니까 영어공부를 하고, 남들이 다들 그러니까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하고, 남들이 다들 하니까 결혼을 하고…. 그런 이들에게 머메리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 인생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따금씩 너무 타성에 젖어 남들이 닦아 놓은 길, 빤해 보이는 쉬운 길만을 따라가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머메리는 예의 그 매서운 눈길을 부라리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는다. 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다. _56쪽 

8,000미터 고봉 14좌를 모두 완등하다 _라인홀트 메스너 
이 자리를 빌려 고백건대 나는 메스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인류를 대표할 만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강인한 의지, 창의적인 생각, 철저한 등반윤리, 한계를 넘어선 체력, 놀라운 인문학적 교양, 묵직한 철학적 사유, 자본에의 불복, 왕성한 집필 활동. 도무지 흠 잡을 데가 없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재수 없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청년 시절의 내게 있어서 그는 일종의 ‘초인’처럼 느껴졌었다. 너무 높이 올라가 있어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너무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감당할 수 없는 화두처럼 던져 놓아 나 자신을 한없이 왜소하게 만드는. 그래서 어깨 너머로 곁눈질은 하되 결코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_262쪽 

저자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은 메스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산악인은 당연히 라인홀트 메스너다. 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개인을 한 명만 꼽으라고 해도 역시 메스너를 지목할 것이다.” 메스너는 현대의학계가 모두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등반’에 성공했다. 그리고 인류 사상 최초로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에 모두 올랐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얼마나 빠르게 올랐느냐보다 왜, 어떻게 올랐느냐에 주목했다. 세계의 지붕에 모두 오르고 난 후에는 티베트의 무인지구, 남극과 그린란드를 탐사하고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등 모험을 계속했다. 저자의 시샘이 십분 이해된다. 그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위대한 정신의 기록을 60여 권의 책으로 남겼다. 메스너는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산악인이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른 산악인_장 마르크 부아뱅 
과연 K2의 7,600미터 지점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구도 답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부아뱅이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행글라이더가 위태롭게 펄럭였다. 부아뱅은 지체 없이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절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_289~290쪽 

산악인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천만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설맹, 동상,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산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을 향하거나 목표로 한 암벽을 오른다. 그런데 거기에 위험을 더하는 사람이 있다. 장 마르크 부아뱅은 특이한 산악인이다. 그는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단 하루 만에 모두 올랐다. 4시간 10분 만에 마터호른 북벽에 올랐다가 행글라이더로 하강한 다름 다시 다른 루트로 정상에 올라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베이스캠프까지 날아서 하산한 적도 있다. 혹자들은 부아뱅이 지나치게 매스컴을 의식하는 연예인 같다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등반가라기보다 행위예술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부아뱅이 자신의 인생을 즐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내 등반, 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요? 
당신도 해보세요. 
정말 짜릿해요. 
온몸의 세포와 신경들이 곤두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고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책에 소개된 알피니스트의 삶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등반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과 많이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과 하산이라는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른다는 것, 부분의 사람들이 보다 높은 곳을 추구한다는 것, 하지만 다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과 그렇게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명망을 얻는다는 것도. 

이 책에 실려 있는 산악인들을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원고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에 걸쳐 읽어 보면서 깨달았다. 그들은 ‘길을 만든 사람들’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의 산행이 그랬고 그들의 삶이 그랬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등반이 나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_서문 

자신만의 길을 찾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어간 사람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알피니스트들의 역사는 지금 ‘넘어야 할 산’이 많은 우리 삶에 셰르파가 되어준다. 그들은 온 삶을 통해 지금 현대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만의 삶의 방향을 찾아 그 길로 걸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