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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 (2017.8.18)

클리오56 2017. 8. 17. 22:49




읽은 소감 및 내용

신이 허락해야만 오르고 또 내려올 수 있다는 히말라야 8000미터 고봉, 엄대장은 14봉에 2봉 추가하여 16봉을 완등하였다. 그 와중에 숱한 실패와 동료들의 희생이 따랐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하였다. 삶에서 그만큼 치열한 경우도 많지 않겠지만, 우리같은 범인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마 2009년, 회사 사보에 싣기 위하여 회사 산악회장으로서 엄 대장을 뵌 적이 있다. 간단한 인터뷰를 하면서 대면과 육성의 기회를 가진 셈이다. 강인, 단호, 그러면서도 온화한 면모가 더 기억에 남는다.   




프롤로그 山은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 
제1장 히말라야, 내 영혼 속에 잠들지 않는 산 

- 라인홀트 메스너: 나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

- 고소와 악천후,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얼음덩어리들 속에서 엄습해오는 죽음에 대한 지독한 공포를 체험했다. 에베레스트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 두 번(1985년, 1986년)의 에베레스트 등정 실패를 통해서 나는 조금씩 그 한계의 실체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해내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 1988년 가을 에베레스트 8848 등정

  
제2장 참을 수 없는 도전과 모험

- 1889년부터 1993년까지 나는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에 6번 도전했다가 모두 정상을 밟지 못했다. 단 한번도 8000미터를 넘어서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나는 번번이 깨져서 돌아왔다.

- 1989년 겨울 안나푸르나 8091미터, 7800미터 도달: 등정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정보부족. 캐러밴을 시작하고 마지막 마을인 레테에서 원정대는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나를 포터를 구하지 못해 일주일가량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그 사이 등반하기 좋았던 날씨는 지나가버리고, 루트 개척 초반부터 날씨와 싸우는 이중고를 치러야했다.

- 산다는게 모험이라면 내게 있어서 도전과 모험은 오직 8000미터를 오르는 것이었다.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나는 살아있는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섯번 실패하고 여섯번째로 8000미터를 오르기위해 떠난 낭가파르바트에서, 나는 또다시 실패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섯번째 실패의 결과는 참담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살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맛봤다. 동상에 걸린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잘라낸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됐다.  


제3장 불가능한 꿈을 향하여 

- 후아니토의 바스크팀은 무슨 일이든 성공하면 목표를 이뤘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실패하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만족해했다. 어떤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를 즐겼고, 결과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성공 이상으로 중요시했다.  

- 국제캠프(International Camp): 고산 등반을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가이드일을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 배승렬, 박영석 등과 함께 추진

- 인생의 커다란 목표가 세워졌다. 숙취로 피곤한 새벽까지 숙소에서 뒤척이며, 나는 내 마음속에 솟아오른 14좌 완등의 꿈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았다.

 
제4장 안나푸르나를 향한 긴 여정 

- 안나푸르나에서 나는 4번이나 정상 도전에 실패했고, 5번째 도전 끝에 비로소 정상을 밟았다. 히말라야 8000미터 등반에서 그토록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안나푸르나 등반에는 최초로 이산을 올랐던 프랑스 원정대와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등반 도중 3명의 동료를 잃었고, 나 역시 죽음의 고비를 넘어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 그렇게 생사의 마지막 경계선을 넘고, 나는 마침내 초주검이 되어 가까스로 베이스캠프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72시간에 걸친 죽음으로부터의 대탈출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마저 보이지 않았던 7700미터 지대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정말로 기적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버렸다면 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제5장 14번째 하늘로 가는 길 

- 비록 칸첸중가 등정에는 성공을 못했지만, 생중계는 실패가 아닌 미완성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무모한 도전보다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용기. 1999년의 칸첸중가가 원정대에게 던졌던 메시지를 나는 그렇게 기록하고 싶다.

- 삶과 죽음을 로프 하나에 걸고 수직의 설빙을 오르내리던 히말라야 도전 16년의 세월들... 8명 희생, 동료 대원 4명, 셰르파 4명




교보문고 책소개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한 엄홍길 대장의 도전을 담았다. 히말라야의 탱크라 불리는 저자가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도도한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들의 정상을 밟아가며 2000년 7월 K2 등정으로 히말라야 8000미커급 14화를 완등하기까지, 그 고난과 극한의 상황, 감동적인 정상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저자소개

엄홍길엄홍길 
1960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 1040번지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서울로 상경하여 지금의 도봉산 망월사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도봉산을 제집 드나들 듯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도봉산에서 바위타기를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는 권투 선수의 꿈을 키운 적도 있으나,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등반에 온 마음을 쏟았다. 

2003년 도봉산 입구에 의정부 시가 <산악인 엄홍길 전시관>을 개관했다. 현재 파고다 아카데미 홍보이사로 재직중이며, 한국외국어 대학교 중국어과에 재학중이다.

목차

프롤로그 山은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 
제1장 히말라야, 내 영혼 속에 잠들지 않는 산 
제2장 참을 수 없는 도전과 모험 
제3장 불가능한 꿈을 향하여 
제4장 안나푸르나를 향한 긴 여정 
제5장 14번째 하늘로 가는 길 
도봉산과 안나푸르나 - 김훈 

부록 
엄홍길 연보 
14좌 완등까지 함께한 사람들 
등반 기록 
등반 용어 

출판사 서평

▶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에 바친 뜨거운 젊음의 기록 
2003년, 올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인류가 발을 들여놓은 지 꼭 5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5월에는 이를 기념하여 내로라하는 전 세계의 산악인들이 모이는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 기념 등반>이 있었고,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그곳에 초청받아 참가하였다. 엄홍길 대장은 2000년 7월 31일 K2에 오르며, 한국 최초,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신화적인 산악인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이레가 출간한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히말라야의 탱크라고 불리는 의지의 산악인 엄홍길이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도도한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들의 정상을 밟아가며, 마침내 2000년 7월 K2 등정으로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를 완등하기까지, 그 고난과 극한의 상황, 감동적인 정상의 순간들을 담은 책이다. 

2000년 7월 31일 오전 6시 30분, (43일간의 긴 원정 끝에) 등반대장 엄홍길은 K2 정상에서 무전기를 통해 베이스캠프에 등정 소식을 알렸다. “여기는 정상이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산이 없다.” 16년간의 긴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 등정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원정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K2 정상에서 보니 다른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발아래로 펼쳐져 보였다. 엄홍길은 그렇게 30분 동안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그동안 히말라야에 도전하면서 가슴에 묻어야 했던 8명의 동료들 사진을 K2 정상 눈 속에 묻었다. “너희들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젠 마음 놓고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1962년 히말라야에 첫 원정대를 보낸 이래, 한국 산악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 완등을 이루어낸 순간이었다. 
엄홍길이 1985년부터 16년 동안 오른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 그 영광의 기록 뒤에는 꼭 14번의 실패가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을 따지자면 셀 수도 없다. 이틀 동안 눈 속에 갇혀 비부아크를 해보기도 했고,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야 했다. 강풍에 몸이 날아가 죽을 뻔한 일은 부지기수.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셰르파들의 죽음, 같이 원정을 떠났던 대원들의 실종, 사고사. 히말라야의 고봉들은 그에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련들을 안겨주었다. 1998년 네번째 시도한 안나푸르나 등정길에서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미끄러진 셰르파를 구하려다 같이 추락하며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사고를 당해 제 발로 걷기만 해도 기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끔찍한 고통이 따랐던 부상을 딛고 일어나 다시 안나푸르나에 올랐고, 이후 낭가파르바트, 칸첸중가, 그리고 K2를 올라, 마침내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 완등을 이루었다.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히말라야 등정의 날들을 담은 책이다.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우정을 쌓아갔던 친구들을 설산에 묻어야 했던 슬픔들, 어떤 고통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도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히말라야의 어마어마한 거봉들 그 자체와 그들을 오르며 겪어야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 강인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인도에서는 50세의 나이를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본래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빛을 찾아내 비출 수 있는 나이를 산에 빗댄 표현이다. 이는 산이라는 것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콩깍지에 들어 있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엄홍길 대장의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그 진리에 다가가는 길 위에서 쓰여진 책이다. 

*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란?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 네팔과 파키스탄을 잇는 이 산맥은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 雪) 덮인 곳(alayas)’이라는 뜻이다. 사철 흰 눈이 내려앉아 있는 이곳은 남극, 북극에 이어 제3의 극지라 불린다. 동서로 2500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히말라야는 해발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 14개를 비롯하여 7000미터급 산 350여 개를 거느리고 있다. 지구상에서 7000미터 이상 솟아 있는 산은 모두 히말라야에 모여 있는 셈이다. 
우주선이 달나라를 왕복하는 지금도 히말라야의 설산에는 인간 문명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다. 특히 8000미터급 14개 봉우리는 인간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각각 네팔(칸첸중가, 마칼루, 로체, 에베레스트, 초오유,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중국의 국경(시샤팡마)과 파키스탄(가셔브룸 1, 가셔브룸 2, 브로드피크, K2, 낭가파르바트) 지역에서 하늘로 솟구쳐 있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이 14개의 봉우리들을 가리켜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라고 한다.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제10위 봉인 안나푸르나를 초등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중국 원정대가 제14위 봉인 시샤팡마를 등정하기까지 이 산들은 오랫동안 인간이 감히 넘보지 못할 신들의 영역이었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높고 험준한 14개 봉을 완등한 사람은 엄홍길 대장(여덟번째)을 포함해 11명, 아시아에서는 그가 최초이다. 처음으로 14개 봉 완등의 신화를 이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1986년)이다. 이어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1987년),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1995년), 멕시코의 카를로스 카르솔리오(1996년), 폴란드의 비엘리키(1996년), 스페인의 후아니토 오아르사발(1999)이 차례로 인간 한계에 도전해 성공을 이루었다. 

▶ 엄홍길 대장에게 보낸 7가지 질문과 그의 대답 

―이번에 첫번째 책을 출간하셨는데요, 책을 출간하신 이유, 혹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나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고 등반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열정과 투지, 그리고 산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를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잘 아시겠지만, 책을 참 많이 썼어요. 그가 쓴 책 가운데《검은 고독 흰 고독》 같은 책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메스너의 책들뿐만 아니라,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 우에무라 나오미의 《내 청춘 산에 걸고》 등, 산악인들이 남긴 명저들을 읽을 때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산악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를 완등하고 나서, 글쓰는 재주는 없더라도 그 이야기를 꼭 책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소망과 사회적인 책임감이 함께 어우러진 감정이었습니다.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은 제 이야기를 그저 진솔하게 쓴 책입니다. 이 책은 다른 누구보다도,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산을 향한 열정과 사랑에 몸살을 앓고 있을,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기억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여러모로 어려운데, 이런 때 저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어떤 힘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목표, 희망을 일깨워주는 책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표로 삼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지키고 이루어온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는 데 힘을 얻게 된다면 무척 기쁠 것입니다. 

―너무나 뻔한 질문입니다만, 산에 왜 오르십니까? 
산이 좋아서 오르죠. 세 살 때부터 도봉산 기슭에서 살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산을 좋아했고, 자연을 좋아했습니다. ‘산에 왜 오르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흔히들 에베레스트에서 희생된 산악인 조지 멜러리의 말을 인용하곤 합니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는 유명한 말이죠.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산에 오르려 하면 그곳에는 산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산에 오르는 순간 산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죠. 산에 오르는 것은 산이나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하나가 되는 작업입니다. 산이 제 마음을 받아줘야 잠시 정상에 설 수 있는 거죠. 산은 그저 좋은 곳이고 저는 그 산에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조건 산이 좋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산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고, 산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무작정 산을 찾아가게 되지요. 히말라야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서도 서울에 오면 히말라야의 흰 봉우리가 눈앞에 아른거리니 솔직히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정상에 서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거예요. 아마 나는 전생에 산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에워싼 숲이었거나 바위였거나 아니면 돌멩이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그렇게 산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에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항상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 있죠. 저는 도전을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만들어가는 것과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 하지만 뭐, 어쨌거나 제가 산에 오르는 이유를 모험심, 개척 정신, 탐험 의욕,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런 거창한 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산에 오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거죠. 

―엄 대장님의 특별한 등반 철학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결과 위주는 과정을 묻어버리는 오류를 낳습니다. 실패해도 성공 이상의 의미를 지닌 실패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결과만을 중시하며 일부 대원들만 정상 공격조로 나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원 공격이 원칙이죠. 실패해도 기분 좋게 합니다. ‘정상 등극자만의 축제’는 싫습니다. 제 등반 방식 중 또 하나 독특한 것은 소규모 원정대를 통한 스피드 공격입니다. 대규모 원정 대원이 아니라 이른바 ‘알파인 스타일’이라고 해서 10명 미만이 원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속도는 그만큼 빨라지고 경비는 절감됩니다. 보통의 경우 캠프 3이나 캠프 4까지 설치한 뒤 정상 공격에 나서지만 이 단계를 과감히 생략하고 바로 공격에 나서기도 합니다. 저는 산에 오를 때마다 항상 긴장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상정합니다. 한 보 후퇴를 염두에 두되 이를 바탕으로 두 보 전진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려합니다. ‘그래,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도 많았다. 현재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돌파구를 찾다 보면 산은 어김없이 정상을 열어줬습니다. 

―히말라야의 8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은 그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오는 위험한 공간인데요, 그런 험준한 봉우리들을 오를 때 무섭지 않으세요? 
왜 무섭지 않겠습니까? 저도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작은 뒷산에서도 어려움을 느끼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 동안 산에서 8명의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저도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겼죠. 산에 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오를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에 익숙해지는 거죠.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해져요. 삶에 대한 애착도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해집니다. 등반하는 순간에 저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처음 히말라야를 등반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저 올라가고 또 성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산에서 여러 가지 사고와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순리에 따를 때만 산은 우리를 받아줍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언제나 왜소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자연은 너무 위대하고, 인간은 너무나 작은 존재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함이 필요한 거죠. 저는 산에 오를 때 완전하게 산에 자신을 맡깁니다. 물론 불안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죠. 대신 산은 제게 많은 것을 줍니다.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삶에 대한 겸손한 성찰의 기회를 주죠. 

―고산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히말라야의 흰 산들을 무척 좋아하지만 등반 횟수가 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들을 많이 목격하고 자연과의 싸움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산에는 눈사태, 크레바스, 낙석의 위험이 항상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어 긴장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긴장 상태는 하산해도 한동안 계속돼 피로가 잘 안 풀리고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지 않는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게다가 등반 중 소모된 체력을 원상으로 회복하자면 6개월 이상의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고산 무산소 등정의 부작용으로 잘 아는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등 기억력이 급격하게 감퇴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중요한 일은 일일이 메모를 합니다. 산소가 부족한 고산지대에 오래 있다 보면 사람이 무기력에 빠지며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혈액 순환이 안 되다 보니 폐나 뇌에 물이 차는 폐수종, 뇌수종에 걸릴 수도 있고요, 뇌에서 지시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손발이 시려워 동상에 걸릴 것 같아도 배낭 안에 있는 장갑도 꺼낼 수가 없습니다.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의 고산 증세는 예민한 사람이면 3000미터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고 하니 8000미터의 고봉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의 추위보다 무서운 것임에 틀림없죠. 저는 지금도 산에 오르기 전에 ‘살기 위해서’ 매일 아침 도봉산을 속보로 등반하고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전투적’으로 합니다. 8000미터 높이에서는 지상의 30퍼센트밖에 산소가 없으므로 이에 대비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데, 정상에 서면 어떤 느낌인가요? 
정상에 서면 가장 먼저 폐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옵니다. 기쁨은 순간이고 맥이 풀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탈감을 느낍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관이 눈에 들어오면, 정상에 오르기까지 위험했던 순간순간이 떠오르고, 그러면 잠시 동안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오싹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곧 다시 긴장하게 되지요. 하산 때 사고가 많은데 살아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동료 대원들과 셰르파의 축하를 받아야 진짜 등정의 실감과 기쁨을 느낍니다. 위험한 지대를 벗어나 ‘살았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 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산은 어떤 산입니까? 
저는 거의 20년 가까이 산을 찾아다녔습니다. 세계의 높다는 산을 마다 않고 찾아가 등반을 하는 데 저의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지금도 아찔한 기억으로는 1998년 안나푸르나를 오늘 때 7700미터 지점에서 추락했던 사고입니다. 이때 추락하는 2명의 셰르파를 구하려다가 같이 추락했는데, 줄이 제 몸에 걸리면서 천행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발목이 뒤로 돌아가 있더군요. 주변의 대나무를 6토막으로 잘라 부목 대용으로 묶고 한발로 절뚝이며 2박 3일간 사투를 벌이면서 3000여 미터를 내려왔습니다. 아마도 의지가 약했다면 이미 저는 그때 죽었을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