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과 정맥/백두대간 (완료)

백두대간 26구간: 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조령관(2007.09.22)

클리오56 2007. 9. 2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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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자: 2007.09.22

** 산행지: 백두대간 26구간: 이화령 – 조령산 - 신선암봉 - 조령제3관문 - 고사리

** 산행로: 이화령(548M) - 조령산(1,026M) – 신선암봉(937M) – 깃대봉입구 갈림길 - 조령제3관문 - 고사리

** 산행거리: 약 12.97Km (마루금 8.97Km + 연장 4Km)

** 산행시간: 총318분 (산행 293분 + 중식 25분)

** 산정산악회 (김) 

 

07:20 양재출발 (이화령 도착)

10:40 산행들머리 이화령

11:36 조령샘

11:47 헬기장

11:55 조령산

12:53 신선암봉 (중식 25분)

15:06 821.5봉

15:26 조령 제3관문

15:58 산행날머리 고사리

17:40 고사리 출발 (20:00 양재 도착)

 

 

지난 주 불참하여 2주만의 대간산행인데도 상당기간 빠진 양 서먹하다. 조령산 구간은 위험구간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신선암봉을 전후하여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서울에선 내리지 않던 비가, 경기도를 벗어나면서 계속 내린다. 다행히 일회용 우의를 준비하였으니 산행에 지장은 없지만 조망이 가려지니 아쉬웁고, 위험구간이라 맑게 갠 날씨를 기대했는데...

 

조령산은 작년에 동네 산악회에서 시도하였지만, 정상을 앞두고 선두가 길을 잘못들어 모두가 제1관문으로 빠져버린 경험이 있다. 덕분에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 문경새재 전 구간을 답사할 찬스를 가졌었다. 조령산만 탐방하는 일반 산행객들과 혼합되어 있고, 이화령 도착하니 모두들 재빠르게 움직인다. 김 선배랑 민첩하게 움직여 4분만에 산행준비를 완료했건만 그래도 후미이다. 이화령 고개에서 문경과 연풍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솔솔할텐데 그저 바쁘기만 하다. 영남의 관문 이화령이라며 여기는 문경시라는 큰 표시석이 산행들머리이다.    

 

작년 산행에선 8부 능선을 둘러가는 코스였는데, 대간코스는 바로 치고 오르는 듯하며, 군사지역인지 참호여러 군데와 헬기장 4곳 정도를 지나는 듯하다. 초반 가풀막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대원들이 밀집형태를 이루며,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대열이 멋져 보기에도 좋다. 비는 좀 더 세어지고 그칠비가 아닌 듯하여 산행 도중 우의를 입었다. 4번째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급하게 꺽는 길이 대간인데 직진한 몇분이 있어 초반부터 알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나중 확인 되었지만 세분이 왕복 20여분 알바를 겪었다.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조령샘까지 거의 1시간을 쉼없이 올라 시원한 샘물 한 바가지 삼키곤 다시 헬기장을 거쳐 정상에 도착하였다. 헬기장은 조망이 탁월하여 동으로 주흘산이, 남으로는 백화산의 대간이 펼쳐진다는데, 오늘은 비가오는지라 역시 조망도 없고 사진도 많지 않으니 오로지 행군이다. 정상에서도 쉬지 않고 좌측으로 급경사 길을 내려가면서 오늘의 위험구간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령산 정상엔 지현옥이란 여성분에 대한 추모비가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반 여성이고 당시 전세계적으로도 3번째라고 한다. 안나푸르나 산행중 조난당하여 사망하였다고 한다.  

 

조령산 정상석

 

밧줄구간을 지나기도 하였지만, 바로 앞에 펼쳐지는 신선암봉의 멋진 모습을 상상하면서 암봉과 암릉지대를 연이어 지나간다. 오늘 산행구간의 반 정도가 이러한 암릉지대라 항상 조심해야하고, 특히 오늘처럼 우중산행에선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낭떠러지 길도 있겠지만, 오히려 운무가 자욱하여 볼수도 없고, 알아차리지도 못하니 겁없이 진행하기엔 오히려 나을지 모르겠다. 

 

암릉지대

 

신선암봉에 도착하니 대원 몇분이 식사중이고 우리도 합류하였다. 정상은 널찍한 암반이라 자리잡기가 좋았으며, 자그마한 정상석이 위치를 확인해 준다. 아래 사진은 멋진 신선암봉의 모습을 진혁진님의 백두대간 사이트에서 뽑아왔다. 암봉을 보지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나마 달래본다. 

 

신선암봉

 

신선암봉에서

 

신선암봉에서 조령3관문까지는 높고 낮은 예닐곱개의 봉우리를 넘어야하고 거친 암릉이 많아 거리는 짧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체력 소모 또한 많다. 끝없이 이어지는 밧줄타기에 긴장도 많이하고, 암벽 오르내리기도 거듭되었다. 수통 2개로 1.5 리터, 그리고 조령샘에서 보충하였지만,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많이 생겼다. 포도나 토마토, 배 등으로 에너지 보충도 계속되었다. 전망바위도 자주 나타나며 멋진 소나무와 항상 자리를 함께 하는듯하다.  

 

바위를 깨고 나오는 노송

 

전망바위에서

 

험로는 795봉 갈림길까지 계속되는 듯하였다. 그 직전에 상당한 높이의 슬랩과 직벽이 나타나 긴장의 도를 높이고 밧줄로 스릴있게 하강하였다. 두사람이 동시에 이용가능하도록 밧줄이 두개 매달려있으며, 마지막 직벽 부분에서는 발을 딛기가 거북하여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였다. 오후 3시 조금넘어 깃대봉 갈림길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대간길은 제3관문 방향으로 휘어진다. 깃대봉은 대간로가 아니었다. 

 

험로의 슬랩과 직벽 

 

갈림길에서 조령관까지는 불과 20분. 조령약수로 지친 몸에 또 한차례 생기를 불어 넣는다. 영남제3관이란 조령관의 현판을 바라보며 한 포즈 취하기도 하였다. 문경새재에 대한 아미산님의 설명을 옮겨본다.

 

'새재'라는 말에서 '새'의 원래 뜻은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억새'란 뜻이어서 「고려사」에는 새재를 '초점(草岾)'이라 기록하였고,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는 '초재'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이후 '나는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전이되어 '조령(鳥嶺)'이라 일컫게 되어 새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을 영남이라 하는 것도 바로 조령 이남이란 뜻이다. 
  새재의 세 관문 중 제1관문 쪽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에 문경의 진산(鎭山)인 주흘산(1,075m)이 있고, 그 맞은 편인 왼쪽에 조령산이 있으며, 이 두산 사이의 긴 회랑이 새재(조령)로 이어져서 영남과 중부지방을 관통하는 관문 역할을 해왔다. 조령관문은 이처럼 주흘산과 조령산의 긴 회랑이라는 천혜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것이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통찰력의 뛰어남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이 이런 천험의 장소에서 왜군을 저지하지 않고, 충주 달천까지 물러나서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에 대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는 이 부근에서 백두대간을 넘는 통로는 하늘재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하늘재 북서쪽, 월악산 자락의 길목에 있었던 덕주산성이 국방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조령산 부근과 하늘재는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기에 지리적 이점을 선점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고, 후삼국시대에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조령산을 사이에 두고 큰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령, 곧 문경새재가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통로가 되었고, 그 흔적은 지금까지도 새재의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으로 남아 있다. 

 

이후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고사리 마을로 향한다. 주차장에선 선두가 이미 식사중이고 우리 역시 합류하였다. 산행시간이 5시간 조금 넝었으니 빠른 편이지만, 조망이 좋았다면 풍광에 취하여 7시간 코스였을텐데 하는 아쉼움이 크다. 최선두는 1시간도 더 전에 이미 도착하였다니 대단한 주력이다. 귀경도중에 나를 운영위원으로 선임한다고 인사말도 하였는데, 여러 차례 고사하였지만 할 수 없었다. 산행 경력도 일천하고 재력도 없어 결코 적임이 아닌데....

 

조령3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