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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마주한 뒤섞인 문명: 김종천, 김태균 (2022.10.24)

클리오56 2022. 10. 24. 23:27

내용 및 소감

저자가 기술한 두 지역,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터키의 이스탄불은 이슬람과 기독교 두 문명이 만나 혼합을 이룬 공통적 특색을 지녔다. 다만 안달루시아는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이스탄불은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문명의 변천이 이루어졌지만 전 문명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최근 다녀왔기에 다음 기회에 또 방문한다면 챙겨볼 사항들을 이곳에 간단히 남겨두었다. 또한 스페인 역시 조만간 여행할 강한 열망을 지녔기에 본서의 추려본 내용들은 '스페인, 마음에 닿다'라는 독서 소감에 함께 묶어 정리해두겠다. 

 

제 1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 10월3일자 정리한 다른 스페인 여행 서적 '스페인, 마음에 닿다'에 함께 추려넣었다. 

 

제 2부 터키 이스탄불

- 콘스탄티누스 기둥: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리키니우스와 통합황제 자리를 두고 324년 전쟁 시에 비잔티움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신의 군대가 진을 쳤던 구시가지의 언덕에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광장에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인 자주색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자신의 청동상을 세웠다. 그 청동상은 없어지고 화재로 그을린 50m 높이의 둥근 기둥만 남아있다.  

 

- 카리예 자미: 지금은 박물관. 금색의 모자이크로 가장 유명, 비잔틴 예술의 극치. 12세기 건설된 성당이었지만 1321년 재건축되어 코라 수도원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박물관

- 성소피아 대성당 모자이크화: 콘스탄티누스 10세와 조에 => 황제는 많은 돈을 기부하고 황후는 그 봉납을 기록한 두루마리 책을 들고 있음. 중앙 옥좌에 앉은 예수는 축복의 기도를 하며 한 손에는 성서를 들고 있다. 

- 발렌스 수도교: 발렌스 황제(재위 364~378)는 도시의 배후에 있는 트라키아의 외진 지역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총길이 640km의 수로를 건설. 이를 위해 수도교 60개가 4~6세기에 건설되었는데, 현재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수도교는 2층의 아치 형태로서 높이 26m, 길이 약 800m. 이곳을 통해 들어온 물은 지하 저수조에 저장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궁전(출처: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처음 건축하였고, 330~108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의 거처로 쓰였으며, 800년 이상에 걸쳐 동로마 제국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극히 일부인 옛 건물의 흔적이나 기초 부분만 존재한다. 제4차 십자군에게 약탈당했으며,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을 때, 대궁전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성으로 입성했을 때, 대궁전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대궁전의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 초기 콘스탄티노플 전체의 재건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두에 화재로 대궁전의 엣 터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무렵 독립주택이나, 많은 수의 큰 방과 무덤으로 보이는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대궁전의 발굴 조사는 현재까지도 행하고 있지만,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대궁전 부지의 1/4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대궁전 부지 위에 블루 모스크와 그에 딸린 각종 건물이 세워져 있어 대대적인 발굴은 불가능하다. 발굴된 모자이크화 대부분은 이스탄불의 모자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궁전의 바닥에 있었던 모자이크
짙게 칠한 부분이 대궁전의 터
 
 
- 브콜리온 궁전의 옛 터: 대궁전 남쪽에는 주요 건축물들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브콜레온 궁전이 있다. 바닷가 성벽의 일부로써 테오필로스가 지은 것으로 13세기까지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라틴제국(1204년 - 1261년)의 황제들은 바닷가가 보이는 이 궁전을 좋아하였다.
브콜레온 궁전의 옛 터
 
- 모자이크 박물관: 궁전의 복도 바닥을 장식했던 모자이크를 전시중. 비잔틴 예술의 높은 수준, 그리고 평민들의 삶의 모습도 표현하여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  
 
- 이레네(재위기간 797~802년) :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통틀어 유일한 여자 황제. 고아였던 그녀는 17세에 병약한 레오 4세 황제와 결혼.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가 다섯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면서 통치 능력을 발휘. 아들이 성인이 된 후 권력투쟁을 하다가 끝내 아들의 두 눈알을 뽑아 죽인 후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잔혹한 어머니였다.  

 

- 테오도시우스 성벽: 구시가지의 외곽과 마르마라 해변에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옛날의 명성에 부합하는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음. 일부 복원된 성루는 가짜이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천도후 처음 성벽을 쌓았다. 북방 야만족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5세기 초 더욱 크고 견고한 성벽을 쌓았는데 약 6km. 447년 지진으로 성벽이 무너지자 더욱 강화된 3중 성벽을 구축. 폭 18m의 해자 + 외성(높이 8m, 폭 2m) + 내성(높이 12m, 폭 5m, 요새탑 96개). 석회 콘크리트를 벽돌로 쌓은 두 겹의 벽 사이에 넣어서 성벽의 탄력성을 높였는데, 지진 자주 발생 지역에서 견고하게 버티는 요인이 되었음. 성벽은 육지에서 6km, 바다 쪽에서 14km, 총 20km. 단 바다쪽은 강력한 비잔틴 해군이 지킨다는 생각으로 육지만큼 견고하지 못하여 오늘날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 우르만 거포: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할 당시 사용한 거포. 길이 8m, 500kg이 넘는 포탄을 발사, 하지만 하루 7번 발사 가능. 그외에도 오스만 포병대가 보유한 14문의 대포를 사용. 현재 2문이 남아 전시.  

 

- 1402년 오스만 제국과 티무르 제국이 앙카라에서 일전을 겨루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술탄이 포로가 되는 대패를 당했다. 술탄 바예지드는 짐승처럼 철제우리에 갇혀서 지내다가 9개월만에 사망.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와의 성전에서 일선에서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고, 그 덕분에 훗날 위기를 극복하고 부활하였다. 즉,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며 진정한 대제국이 되었다. 그의 손자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는 시리아, 이집트 및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하여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자가 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정치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마호메트의 후계자, 즉 칼리프로서 이슬람교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래서 술탄의 즉위식에서는 술탄의 혁대와 함께 칼리프의 검을 차고 있었다. 

 

- 1571년 해상에서 기독교 동맹군과 이슬람 연합군이 레판토 해전이라는 한판 승부를 벌였고, 기독교 동맹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따라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상 공세는 한 풀 꺽였다. 또한 육상에서는 1683년 오스만의 30만 대군이 오스트리아 빈을 두달간 포위 공격했지만 오히려 최악의 참패를 기록하였다. 17세기 후반이후 오스만 제국은 줄곧 침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23년 터키 공화국 선포, 수도 앙카라, 이로써 이스탄불은 수도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 베이올루: 갈라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재로 서유럽 국가들의 외교 공관, 대형 호텔, 은행들이 밀집. 기독교 지역으로 쇼핑가로도 인기가 높아 인파로 붐빔. 

 

교보문고 책소개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두 거대한 문명의 만남
『유럽에서 마주한 뒤섞인 문명』
『유럽에서 마주한 뒤섞인 문명』은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두 거대한 문명의 만남을 이룬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터키의 이스탄불을 탐방한다. 안달루시아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으로 지중해와 접하여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이며,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세워진 도시로서 동서양의 교차로이고 교역의 중심지이다. 해외여행을 기약하며 문명의 갈등과 융합을 이룬 매력적인 두 문명을 공부해 두는 것이 어떨까.

작가정보

저자(글) 김종천

문명평론가

독일 괴팅겐대학교(Uni. G?ttingen) 경제학 학사, 석사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Uni. Duisburg-Essen) 경제학 박사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탐방』
『순리가 세상을 바꾼다』
외 다수

저자(글) 김태균

목차

  • 머리말

    제1부 스페인 안달루시아
    1┃태양과 다양성의 땅
    2┃코르도바 탐방
    1 메스키타(Mezquita 대모스크)
    2 메디나 아사하라(Medina Azahara) 궁전
    3 코르도바 궁전과 뒷골목
    3┃세비야 탐방
    1 알카사르(Alc?zar)
    2 세비야 대성당(Sevilla Cathedral)
    3 히랄다 탑
    4 유대인 거리(산타크루스)
    5 황금의 탑
    4┃그라나다 탐방
    1 나사르 왕국의 자취
    2 알람브라(Alhambra)
    5┃안달루시아를 떠나며

    제2부 터키 이스탄불
    1┃세계인의 도시 이스탄불
    2┃비잔틴 문명의 콘스탄티노플
    1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
    2 수도교와 바실리카 저수조
    3 히포드롬(Hippodrome 전차 경기장)
    4 콘스탄티누스 대궁전
    5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an Walls)
    3┃오스만 제국
    4┃오스만 문명의 이스탄불
    1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
    2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
    3 카팔르 차르시(Kapalı?ar?ı)
    4 갈라타(Galata) 지역
    5┃이스탄불을 떠나며

    맺는 말
    출처
책 속으로

51쪽
알 라흐만 3세는 이 궁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당대에 최고 기술을 보유한 조각가들과 건축가들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초빙하였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든 1,200개의 기둥은 건물의 내부를 한층 호화롭게 치장했으며, 알현실의 벽면은 황금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건물들 사이에 있던 거대한 연못 주위는 동물과 새의 진기하고 값비싼 조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78쪽
1248년에 카스티야 왕국이 세비야를 무슬림으로부터 되찾은 후에 카스티야의 국왕들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궁전을 짓거나 기존의 궁전을 변경하였다. 특히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는 1364년부터 이슬람 건축의 잔해 위에 새로운 페드로 궁전을 건축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도 지배하에 출현했지만 이슬람 양식의 영향을 받은 무데하르 건축의 최고 모범이 되었다.

114쪽
알람브라는 성벽과 궁전 및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왕족 이외에도 관리, 군인, 하인, 상인 및 중요한 수공업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 약 5천 명이 거주하여 작은 도시의 형태를 이루었다. 성벽 안쪽의 면적은 대략 길이가 740m 그리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220m이다. 알람브라는 요새와 호화로운 궁전을 결합한 특별한 형태의 건축물이었다. 이런 유형의 건축물은 이슬람 건축 전부를 뒤져봐도 이곳에서 유일하다.

185-186쪽
지하 저수조에 저장된 물은 콘스탄티노플이 수 개월간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에도 물 부족 없이 버틸 수 있게 하여 비잔틴 제국이 숱하게 많은 이민족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천년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였다. 지하에 있는 이 저수조는 고대인이 건설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공학적으로도 완벽한 건축물이다. 게다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아치는 예술성도 겸비했으니 지하의 공간은 한마디로 신비 그 자체였다.

195쪽
전차 경주트랙은 U자형이었으며, 황제 특별 좌석이 트랙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특별 좌석은 대궁전과 인접해 있어 황제 일가는 전용 통로를 통해 곧장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트랙 북서쪽 끝에 입구가 있고 입구의 문 위에 금박을 입힌 말 4마리의 청동상이 있었는데, 1204년에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을 때 그들에게 약탈되어 베네치아로 옮겨졌고 이후 산마르코 대성당에 설치되어 있다.

205쪽
마르마라 해변에 거의 닿아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브콜레온 궁전은 그리 크지 않은 낡은 건물이다. 비잔틴 제국 대궁전의 유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 초라한 건물에서 그나마 대궁전의 흔적이라도 보았음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브콜레온 궁전은 본시 궁전의 주요 건물들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지어졌다. 황제들은 바닷가가 보이는 이 궁전을 좋아하여 바닷가 쪽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출판사 서평

『유럽에서 마주한 뒤섞인 문명』은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두 거대한 문명의 만남을 이룬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터키의 이스탄불을 탐방한다. 두 종교는 유혈이 낭자했던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거대한 문명의 결합을 이룩했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융합은 지중해 연안인 두 지역인 안달루시아와 이스탄불에 매력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이 두 곳은 문명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융합의 길을 걸어간 매력적인 문명을 세운 장소이다.

안달루시아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에서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지중해와 접하고 있기에 농경민과 해양인의 교역을 중심으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활발한 문명의 교류만큼이나 복잡한 역사를 지닌 지역으로 대략 600년 동안 로마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어서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서고트족의 지배 이후 무슬림의 정복으로 이슬람 문명이 출현하였다. 안달루시아에서 800년간 번영했던 이슬람 문명은 기독교도의 재정복으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뒤섞인 독특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세워졌다. 이스탄불은 두 대륙에 걸친 도시로서 동서양의 교차로이고 동시에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는 교역의 중심지이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비잔티움에서 출발하여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영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어 이스탄불로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융합을 이루었다.

이 책에서는 뒤섞인 두 문명을 탐방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는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를 탐방하며,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 콘스탄티누스 대궁전,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등을 탐방한다. 저자는 외국 문명을 제대로 알고 탐방해야 이국적인 문명을 감상하는 참맛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 해외여행을 기약하며 문명의 갈등과 융합을 이룬 두 문명을 공부해 두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