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서울과 교토의 1만년 (2017.7.28)

클리오56 2017. 7. 26. 21:55



읽은 소감 및 정리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칭하는데, 사실 일본에 대하여 특히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막부와 천황의 이상한 관계가 장기간 유지되었고, 두차례 우리를 크게 침략하였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일본은 권력을 지닌 막부가 짧은 기간 즉 100-200년 사이로 바뀌는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런 잦은 정권 교체가 발전의 원동력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 분야에 파고드는 장인 혹은 전문가 정신, 난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데, 이 정신이 일본을 일류선진국가로 만들었다고 단언하고 싶고. 침략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게, 지구 역사를 보면 나라가 부강해지면 침략으로 나아갔으니 굳이 일본만 가지고 탓할수는 없다. 약하기 때문에 당한 우리 스스로가 채찍질하여 강해져야 한다. 약육강식, 모두가 아는 얘기지 않는가? 모두가 평화를 기원하는 그런 사회, 세상이 되어야겠지만, 그런 이상적 사회는 아직 요원하고, 우리 스스로는 강해져서 다른 국가가 엿보지 않아야 한다.    


- 교토의 수도 시기: 794년 ~ 1869년 

  . 794년: 간무천황이 나가오카쿄(長岡京, 교토부 남서부에 있는 도시)에서 헤이안쿄(平安京, 교토의 옛이름)로 천도

  . 1869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천도

  . 옛 헤이안쿄 내에는 헤이안시대(794년~1185년) 건물이 하나도 없고, 가마쿠라 시대(1185년~1333년), 혹은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의 건물도 찾기 어려운데, 수차례의 내란과 대화재 탓

  . 그럼에도 교토에서 헤이안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교토의 상징인 바둑판 거리 모습이 당시의 구획정리에서 유래

    => 헤이안쿄는 당의 장안과 북위의 낙양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으며, 일본 고대 궁도의 완성된 모습

- 한일 문명 교류 파악을 위한 세 가지 차원: 인간의 이동, 전쟁의 충격, 물자의 교역


1부 고대: 교토의 시작과 도래인의 역할

- 구석기 시대: 일본열도가 아시아 대률과 육지로 연결, 동해는 호수 +. 이후 기후 변화로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분리

- 도래문화: 고래문명과는 다르게 한반도 일대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왜래문명 전파.

  . 민속과 의례, 한자와 한문, 유학과 불교 등

  . 야마토 정권은 도래인의 기술과 지식에 상응하는 지위와 직업을 주어 사회발전에 힘껏 활용 

- 하타 씨의 가쓰라 지역 개척: 하타 씨는 가야계 신라 도래인 집단으로, 야마토노 아야 씨와 함께 도래계 씨족의 최대 세력

  . 토목 기술이 뛰어나 가쓰라가와에 제방을 쌓고 물을 끌어들여 가도노의 황무지를 개간. 지금의 도게쓰교 주변

  . 고류지(廣隆寺):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622년 창건. 하타 씨의 원찰. 603년 쇼토쿠 태자가 백제로 부터 받아

   하타 씨에게 준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 국보 1호)과 616년 신라로 부터 받은 보관미륵반가상을 보관.  

  . 독일찰학자 칼 야스퍼스: 고류지의 불상에는 정말 극도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완벽하게 표현

   =>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현이다. 

- 설사문화, 변비문화: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문화이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두고 우려먹는      변비문화로 비유.

- 히라노 신사(平野神社): 간무 천황이 교토로 천도할 때 창건 지시.  제신은 모두 넷인데, 백제 성왕, 성왕의 선조,

  백제 비류왕/근초고왕, 도래인 후손인 간무천황 모친을 모시고 있음. 황실의 수호신으로서 숭앙

- 세키잔젠인(赤山禪院): 천태종 계열의 자각대사 엔닌이 중국 유학을 오갈때 항로를 수호해준 적산대명신을 모심.

  . 적산대명신은 신라방에 있는 적산법화원이 모시는 신.

  . 엔닌은 일본 불교사의 대승려인데 세계3대 여행기로 불리는 입당구법순례행기 저자.

  . 적산선원 경내의 곤 신사(金神社)에서 신라계 도래인을 여럿 모시는데 하타 씨와 연관

- 미이데라(三井寺): 별원 다이운지(大雲寺) 에 신라명신 모심. 신라명신 이폭 화상은 국보로 지정

  . 신라선신당: 신라명신을 모시는데 장보고 유력. 건물 및 신라명신 신상이 국보 지정. 신라사부로의 무덤은 봉분식.


2부 중세: 무가의 득세와 선종의 융성

- 무로마치 막부와 선종문화

 . 무가의 권력 다툼에 멍든 교토: 100여년의 전국시대

 .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사계급이 선종 신봉하여 많은 사원 설립

 . 쇼코쿠지(相國寺): 무로마치 막부 3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설립. 남북조 통합. 조선통신사 숙박

 . 긴카쿠지와 난젠지의 일본식 정원: 가레산스이(枯山水: 마른 산수)

- 나라와 시대를 뛰어넘은 고승의 존경과 공감

 . 가즈노 산의 고잔지(高山寺): 묘에 스님(1173-1232년)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위해 젠묘니지(선묘니사)를 지음

   => 왜 선묘? => 절에는 원효와 의상의 일화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이 전해짐 => 선묘의 연모를 뿌리친 의상을 본받는다는 결의  


3부 근세: 교토의 개조와 교류의 확대

- 통일전쟁의 중심이 된 교토

 . 오다 노부나가의 사라진 꿈: 통일의 선구자, 하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

 . 교토를 개조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노부나가가 죽은 후 실권 장악, 이후 전국 통일달성, 교토 개조사업

  => 일본인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자수성가형 모델,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불구대천의 원수

- 교토에 배어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사의 영욕

 . 사치를 탐한 히데요시의 호화찬란한 저택, 주라쿠다이: 황금다실 등 식기와 용기도 금칠 => 나중 파괴명령

 . 임진왜란을 예고한 조선통신사와 도요토미의 만남

 .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부른 호코지(方廣寺) 동종의 명문: 교토 개조의 마지막 걸작으로 추진한 호코지는 동종만 잔존

   => 동종의 명문 "국가안강 군신풍락"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몰락과 도요토미의 번영을 의미한다고 도쿠가와 반란

 . 한때 정치와 외교의 무대였던 후시미성: 도요토미는 조카에게 관백 양보 후 후시미 성 확장하여 은거 => 메이지 무덤

 . 히데요시가 벚꽃놀이 즐긴 다이고지(醍醐寺): 874년 건립, 진언종 제호파 총본산, 세계문화유산, 일본 벚꽃놀이의 기원

 . 히데요시와 센노 리큐의 비극적 교유: 다이토쿠지는 일본 다도의 한 양식인 와비 차를 완성시킨 센노 리큐의 거처

   => 도요토미는 문화적 열등감에서 센노 리큐의 고상한 취미를 고깝게 여겨 자결을 명한 것으로 평가

- 임진왜란과 교토

 . 최악의 침략전쟁, 임진왜란의 발원지 교토: 교토에서 군대 출발하여 규슈 최북단 나고야성에서 집결

 . 조선인의 원혼이 떠도는 이총: 교국립박물관과 호코지 사이의 탁 트인 야마토 대로, 4만여 코와 귀

 . 조선인 사망자 100-150만명, 피로인 9-14만명, 코와 귀를 베인 조선인 최소 10만명  

 . 노예로 팔리거나 학대당한 조선인들: 일본 국내, 중국, 포르투갈 등지로 노예로 팔아먹음

 . 교토에서 유학을 가르친 조선의 학자들: 강학은 주자학을 가르침, 도쿠가와 막부에게 주자학을 정치이념으로 주입

 . 계획적인 조선 문물 약탈과 보전: 조선 침략시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 특수부대 편성하여 서적, 공예, 보물 등 조직적 약탈

 . 메이지 정부, 도요토미를 영웅으로 부활시킴: 메이지 정부는 훼손되어 있던 도요토미의 무덤을 새롭게 꾸밈 => 침략전쟁

- 지략과 간계가 뒤엉킨 임진왜란 강화회담: 사명대사의 활약

- 실리를 위해 대결 구도를 피한 사절외교

 . 조선과 ㅇ리본의 사이에서 쓰시마 번은 양국 국서를 위조하는 희대의 사기 사건 

 . 에도 막부는 장군의 대외적인 칭호를 일본 국왕에서 일본국 대군으로 변경

 .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신청(한일합동추진)

- 비단, 인삼, 은화의 3국 교역과 교토의 번영

 . 조일 무역의 창구, 왜관: 1678년 부산 초량에 왜관: 중국-조선-일본의 동아시아 무역 활발

 . 교토의 젖줄이 된 다카세가와 운하: 오사카와 교토 사이에 조일 무역품 실어날름

 . 일본은 조선의 인삼 종자를 몰래 들여와 국내 생산에 성공 => 은화 유출 줄임


4부 근대 1: 메이지 유신과 재생을 위한 교토의 노력

- 혁명의 도시가 된 교토

 . 메이지 유신: 권력의 주체를 장군에서 천황으로 바꾸는 왕정복고

  =>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인 막부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및 근대천황제국가를 수립하려는 혁명운동

 . 청일전쟁은 중일 양국의 근대화 운동의 성과를 겨루는 결전장. 중국은 패배하여 반식민지로 전락

 . 메이지 유신은 세계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 프랑스 혁명 100만명 희생후 반동으로 회귀

 . 조슈 군과 사쓰마 군의 전투, 불타 버린 교토

 . 사카모토 료마: 전을 뛰어 넘는 일본이라는 통일국가를 구상하고 실현을 위하여 매진, 마루야마 공원에 동상

  =>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료마가 간다": 료마를 일본 근대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표현,

 . 메이지 유신 단행과 국가 개조

 . 일본 애국의 성지, 료젠 묘역: 료젠 역사관은 메이지 유신에 촛점, 일본 근대화 공부를 위한 필수 코스

   => 인도인 펄 박사 비문: 전범 재판에서 일본 무죄를 주장 , 아베 인도 방문시 유족 방문 (일본의 이중성) 

- 위기를 기회로 바꾼 교토의 저력: 수도 이전이 가져온 교토의 위기

 . 교토 부활의 바탕이 된 소수사업: 동해 - 비와호 - 교토 - 오사카 연결, 산업발전, 수력발전

- 교토의 저력을 과시한 정도 1,100년 기념사업: 간무 천황을 주신으로 하는 헤이안 신궁 창설, 내국권업박람회


4부 근대 2: 일본의 한국 지배와 한국인의 고투

- 1904년 일본 육군 인천 상륙, 해군 중국 뤼순 항 공격 및 인천연안 러시아 함대 습격, 이후 대러시아 선전포고

- 1904.2.23일 한일의정서 체결, 강제로 철도용지, 군용용지 수용, 사람, 말, 식량 징발

- 1905.11월, 1907.7월 2차 및 3차 한일협정서 체결, 외교 및 내정 장악

- 1909.10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 1910.8.22 대한제국 폐멸

- 교토에 건재한 한국침략의 유적

 . 근대일본 상징 메이지 천황의 무덤: 교토 동남쪽 후시미에 모모야마 어릉, 간무천황 무덤 옆, 한국식 봉분

 . 충신의 아이콘이 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러일전쟁 제3군 사령관, 메이지 사망 때 아내 죽이고 할복

   => 왜? 분위기만 띄워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시골 사무라이 출신의 특별한 의리, 임란때 끌려간 피로인의 자손  

   => 후시미에 乃木神社

 . 한국 강점을 정당화한 한국합병봉고제비 비문: 진구 황후와 오진 천황 신사 미야케하치만 궁(三宅八幡宮)

   => 궁에는 러일전쟁의 유물인 포탄 껍데기를 비석에 박아 세워둠 => 전쟁과 침략의 일본 민족주의

 . 무리안(無隣菴): 한국 침략과 지배 앞잡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 일본의 대러정책을 결정한 곳   

 .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별장, 간코다카세가와니조엔(칸코 高瀕川二条苑) 지금은 요정

 .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황제의 영욕을 품은 조라쿠칸(長樂칸) 별장: 지금은 호텔겸 식당 (네네거리 시작점)

- 도일한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

 . 민족차별 속 생존투쟁과 민족운동: 공사현장에 많이 투입, 재일 유학생의 다양한 단체 및 민족운동 전개

 . 간토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을 부른 유언비어. 한국인 동화사업과 전시동원,

- 교토에서 고난을 헤쳐 나간 한국인의 자취

 . 기모노 만드는 교토 서부 니시진의 영세공장의 염색공 등에서 중노동과 저임금 혹사

 . 비와호 소수 공사에 참여한 한국인 노동자 날품팔이 생활

 . 돼지우리라고 불렸던 한국인 노동자의 집단 거주지: 교토 동남부 히가시쿠조(東九條)

 . 한국인 유학생의 활동과 민족운동: 민족운동, 공산주의 운동

 . 학도병 소집과 대일협력: 저항, 일부는 협조

 . 도시샤대학: 기독교계 사립대학, 윤동주 시비, 정지용 시비

 . 교토제국대학의 송몽규와 독립운동: 송몽규가 기소되자 대학은 지체없이 무기정학 처리, 이후 퇴학처분


5부 현대: 한일의 문명전환과 평화공영모색

- 한일 연대와 공생을 일깨우는 교토의 사적

 . 한국인 유공 안치 만주지(萬壽寺): 강제 징용 한국인 유골 천여기 안치

 .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비: 마이즈루항에서 한국인 귀국자 실은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폭발 침몰

   => 조선인 524명 일본인 25명 사망, 마이즈루 항구의 끄트머리 산록에 추도비

 . 우지 시 우토로의 한국인 거주지: 교토비행장 건설에 한국인 1300명 동원, 일부 미귀국자 어려운 생활

 . 한국 문화의 멋을 보여주는 고려미술관: 교토 부동쪽 가모가와 근처, 재일동포 정조문 기증한 건물과 유물91988년)

- 새로운 관계

 . 일본은 여전히 맞짱 뜨기 어려운 강국: 남한 대비 면적 4배, 해양면적 몇십배, 인구 3배, 국내총생산 5배, 선진일류국가

 . 장기적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현실 파악이 필요





교보문고 책소개

교토를 통해서 본 일본과 한국

천 년 넘게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한 도래인(이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단행했던 곳이며, 윤동주와 정지용 등 우리 유학생들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로 동원된 뒤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한일관계사의 권위자인 정재정 교수가 교토의 곳곳을 다니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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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도서 상세이미지

저자소개

저자 : 정재정

저자 정재정은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수사 학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를 거처,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한일미래포럼 운영자문위원장,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일본방송교육개발센터,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도호쿠대학의 외국인 연구원, 홋카이도대학, 도쿄대학 특임 교수 등을 겸임했다. 주요 저서로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일본의 논리: 전환기의 역사교육과 한국인식』, 『한국의 논리: 전환기의 역사교육과 일본인식』,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 『그 후의 한일관계: 한일회담, 한일협정』 등이 있고, 번역서로 『한국병합사의 연구』,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일본의 문화내셔널리즘』, 『러일전쟁의 세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등이 있다.

목차

저자의 말
한국과 일본의 시대구분

들어가기 전에 | 교토의 역사와 한일 교류
역사의 켜가 쌓인 교토 | 교토의 풍수지리 | 교토 문명의 탄생 | 헤이안쿄의 공간 구조와 시설 배치 | 무가의 도시가 된 교토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토 개조 | 도쿠가와 막부가 이끈 교토 부흥 | 번영을 되찾은 교토 | 교토에서 찾는 한일 교류의 궤적

1 고대 | 교토의 시작과 도래인의 역할
1. 한국 문화의 일본 전파
문명의 교류와 인간의 이동 | 교류의 기원과 한국의 역할 | 빗살무늬토기와 조몬토기 | 벼농사의 전파와 야요이 문화 | 국가의 형성, ‘왜, 야마토, 일본’ |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 일본을 바꾼 도래 문화 | 통일 신라·발해와 일본의 교류 | 일본과 중국의 교류 | 일본 고대 문명에 대한 바른 시각 | 한일의 문명 전환과 교토
2. 교토를 개척한 도래인 집단
도래인의 물결과 그들의 활약 | 하타 씨의 가쓰라 지역 개척 | 고류지의 쌍둥이 미륵반가사유상 | 가쓰라 본궁에 깃든 하타노 가와카쓰와 쇼토쿠 태자의 일화 | 백제계 도래인이 창건한 기요미즈데라 | 일본 신앙의 원조가 된 도래인
3. 교토에 살아 있는 백제와 신라의 숨결
백제 왕실의 인척, 천황가 | 무역 제국 신라의 위대한 흔적 | 고승 엔닌과 무역왕 장보고 | 신라선신당과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

2 중세 | 무가의 득세와 선종의 융성
1. 무사의 시대, 교토의 변신
헤이안쿄에서 교토로 | 율령제를 대신한 장원공령제 | 전국적 무가 정권, 가마쿠라 막부 설치
2. 무로마치 막부와 선종 문화
무가의 권력 다툼에 멍든 교토 | 선종의 유행과 쇼코쿠지 | 긴카쿠지와 난젠지의 일본식 정원
3. 나라와 시대를 뛰어넘은 고승의 존경과 공감
고잔지와 묘에 스님 | 의상과 원효대사가 주인공인 두루마리 그림 |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 낭자의 연정 | 의상대사를 본받으려 한 묘에 스님

3 근세 | 교토의 개조와 교류의 확대
1. 통일 전쟁의 중심이 된 교토
오다 노부나가의 사라진 꿈 | 교토를 개조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2. 교토에 배어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욕
사치를 탐한 히데요시의 호화찬란한 저택, 주라쿠다이 | 임진왜란을 예고한 조선 통신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남 | 도요토미 가의 멸망을 부른, 호코지 동종의 명문 | 한때 정치와 외교의 무대였던 후시미 성 | 히데요시가 벚꽃놀이를 즐긴 다이고지 | 히데요시와 센노 리큐의 비극적 교유
3. 임진왜란과 교토
최악의 침략 전쟁, 임진왜란의 발원지 교토 | 조선인의 원혼이 떠도는 이총 | 노예로 팔리거나 학대당한 조선인들 | 교토에서 유학을 가르친 조선의 학자들 | 계획적인 조선 문물 약탈과 보전 | 조선의 꽃나무까지 파 간 일본군 | 메이지 정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으로 부활시키다
4. 지략과 간계가 뒤엉킨 임진왜란 강화 회담
험난한 임진왜란 전후 처리 | 강화회담의 물꼬를 튼 송운대사 | 쓰시마 번의 조일 강화 중개 | 일본의 전문 외교관, 조선수문직 | 송운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 성 담판 | 서로를 알아 가는 한일 역사 기행
5. 실리를 위해 대결 구도를 피한 사절 외교
조선의 강화 조건과 쓰시마 번의 책략 | 궁리 끝에 보낸 외교 사절, 회답겸쇄환사 | 임진왜란의 전후 처리가 주는 교훈 | 지쇼인에 남은 조선 통신사의 흔적 | 장군은 일본 국왕인가, 일본국 대군인가 | 통신사 외교, 신의 속의 자존심 대결 | 통신사의 여정과 교유 | 통신사 외교의 변질과 종말 | 통신사 부활이 만든 지역 간 교류의 촉진과 세계기록유산 등록
6. 비단·인삼·은화의 3국 교역과 교토의 번영
조일 무역의 창구, 왜관 | 교토의 젖줄이 된 다카세가와 운하 | 무역의 결제 수단이 된 일본의 은화 | 교토의 비단과 염색 | 3국 무역의 최고 인기 상품, 조선 인삼 | 중계무역의 쇠퇴와 갈림길에 놓인 조선 | 외교 방식의 개편으로 궁지에 몰린 쓰시마 번

4 근대 1 | 메이지 유신과 재생을 위한 교토의 노력
1. 혁명의 도시가 된 교토
교토, 혁명의 도가니에 빠지다 | 조슈 군과 사쓰마 군의 전투, 불타 버린 교토 | 모반과 암살의 무대, 교토에 남은 유신의 사적들 | 메이지 유신 단행과 국가 개조 | 일본 애국의 성지, 료젠 묘역
2. 위기를 기회로 바꾼 교토의 저력
수도 이전이 가져온 교토의 위기 | 교토 부활의 바탕이 된 소수사업 | 교토의 저력을 과시한 정도(定都) 1,100년 기념사업 | 교토에 활력을 불어넣은 교토의 기발한 기획 - 영화, 춤, 벚꽃, 시장, 교육

4 근대 2 | 일본의 한국 지배와 한국인의 고투
1.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한국 강점
러일의 대립과 광무개혁의 좌절 | 강요된 협약 체결에 의한 대한제국 폐멸 | 합법을 가장한 병합 조약
2. 교토에 건재한 한국 침략의 유적
근대 일본의 상징 메이지 천황의 무덤 | 충신의 아이콘이 된 노기 마레스케 | 한국 강점을 정당화한 한국합병봉고제비 비문 | 일본의 대러정책을 결정한 곳, 무린안 |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별장, 간코다카세가와니조엔 |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황제의 영욕을 품은 조라쿠칸
3. 도일한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
늘어난 재일 한국인 | 재일 한국인의 민족차별 속 생존 투쟁과 민족운동 | 간토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을 부른 유언비어 | 한국인 동화 사업과 전시 동원 | 일본의 항복과 한국인의 귀환
4. 교토에서 고난을 헤쳐 나간 한국인의 자취
한국인 노동자와 니시진 | 비와 호 소수 공사에 참여한 한국인 노동자 | 돼지우리라고 불렸던 한국인 노동자의 집단 거주지 | 가파르게 늘어난 한국인 유학생 | 한국인 유학생의 활동과 민족운동 | 학도병 소집과 대일 협력 | 교토제국대학의 한국인 교수 | 윤동주의 시비를 세운 도시샤대학 | 교토제국대학의 송몽규와 독립운동 | 정지용과 교토의 시상(詩想)

5 현대 | 한일의 문명 전환과 평화 공영 모색
1. 일제의 패망과 남북에 남은 일제 유산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 미 · 소의 점령과 분단국가의 수립 | 일제의 유산 ⑴: 인적 자원의 활용과 처벌 | 일제의 유산 ⑵: 물적 자원의 분포와 대체 | 일제의 유산 ⑶: 법령 · 제도, 이념 · 체제의 계승과 개혁 | 남북한과 일본의 문명 전환
2. 일본의 체제 변혁과 경제 발전
연합군이 주입한 자유와 민주 | 동아시아의 냉전과 미일 안보조약 | 6·25 전쟁과 일본의 경제 부흥
3. 한일의 국교 재개와 교류 확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 | ‘평화선’의 철폐와 어업 지원 |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영주권 확보 | 문화재 반환과 문화 교류 | 독도 영유권 문제의 처리 | 남겨진 과제, 북일 수교 | 눈부시게 증가한 한일의 물적·인적 교류 | 서로에게 이익이 된 교류와 협력 | 자라나는 연대와 공감 의식
4. 한일 연대와 공생을 일깨우는 교토의 사적
일본인과 한국인을 함께 새긴 해방전사비 | 한국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만주지 | 우키시마 호 순난자 추도비 | 우토로의 한국인 거주지 | 한국 문화의 멋을 보여 주는 고려미술관
5. 한일 관계의 새로운 이해와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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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이야기할 때 조심할 사항이 하나 있다. 흔히 아시아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한반도 일대가 문화 교류에서 교량의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교량은 인간이 건너다니는 연결고리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한반도 일대는 옛날부터 한국인이 살아왔고,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켜 온 역사 전개의 무대이다. 따라서 한반도 일대가 아시아 대륙 문명을 일본열도에 전달하는 교량의 구실을 해 왔다는 표현은 자칫하면 한반도 일대에 살아온 한국인의 존재와 그 역할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역사 인식의 왜곡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 문명이 한반도 일대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일본열도에 전달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 대륙 문명은 한반도 일대에 수용된 후, 이곳의 주인공인 한국인에 의해 한국식으로 소화되고 변형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시아 대륙의 문명만이 아니라, 한반도 일대에 산 한국인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 형성된 개성적인 한국 문명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P59

일본에는 800만 이상의 신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 이렇게 신이 많은 것은 일본의 문화 풍토와 신앙 세계가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평생 한 구멍만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전공 집착 의식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들은 신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부, 싸움, 양조, 직조, 연애 등 영역에 따라 효험을 베풀 수 있는 전공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분야나 영역을 나누어 주관하는 신이 따로 존재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유일신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전공에 맞는 신사를 찾아가 빌어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에는 돈벌이를 잘하게 해 주거나 교통안전을 지켜 주는 신 등을 찾아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참배객 무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자기의 전공에 부합하는 소원만 들어 주는 일본의 신은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어야 하는 한국의 신보다 훨씬 덜 바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일본 신들의 원조를 따져 올라가면 대개 도래인에게 귀착하니, 정말 야릇하고 미묘하다. 유교화 또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버린 것들이 일본에 침전되어 새끼를 치고 번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이가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의식과 소비 양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 문화’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 문화’라고. 비유가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정곡을 찌른 한일 비교 문화론이라고 생각한다. - P103

메이지 유신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그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을 넣으면 메이지 유신의 무게는 더욱 묵직해진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철저하게 단행하여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중국은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뜨뜻미지근하게 전개하여 근대국가로 변신하는 데 실패했다. 청일전쟁(1894~1895년)은 30여 년 동안 두 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운동의 성과를 겨루는 결전장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반면에 중국은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열강에게 갉아 먹히는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런 점을 주목하면 메이지 유신은 한국·중국·일본이 각각 처지가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삼극분해(三極分解)의 기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34 닫기

출판사 서평

“여행에서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다.”

한 권으로 읽는 한일 관계사 & 일본사


교토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일 관계사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본 책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 1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교토는 일본의 문화 중심지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 책 한 권이면 일본의 역사와 한일 관계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훑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
서울과 교토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한일 관계사 전문가가 들려주는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야기가 당신의 시야를 넓혀 준다. 일본, 이제 알고 떠나자!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 개성이 풍부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은 일본의 고대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은 한국의 근대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명의 교류는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침략을 통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과 일본은 지구상에서 인종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저명한 문명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라는 명저에서 이런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로 비유했다.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게 한일 관계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라고 촉구하는 그의 경구(警句)에 백 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지만 교토의 유적·유물에는 그런 충고를 뒷받침해 주는 사연이 너무나 많이 깃들어 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도서 소개

일본인의 마음의 도시이자 1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문화 중심지 교토를 통해서 본 일본과 한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두 나라가 육지로 연결돼 있던 약 6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해가 호수였던 시절부터 이어진 사이니 보통 관계는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일전만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앙숙 같은 사이가 돼 버렸을까.
곧바로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가 떠오른다. 임진왜란은 역사상 최악의 침략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런 명분 없이 쳐들어와 조선의 문물을 마구 약탈했는데, 여섯 개의 특수 부대까지 편성한 조직적인 약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승리의 증거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일제강점기는 그 깊은 상처와 갈등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해결되지 않고 있기에 더 말하지는 않겠다. 그런 일본이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가난에 쪼들릴 때 한국 전쟁 특수로 경제 회복을 넘어 경제 부흥을 이루게 됐으니 관계가 꽤나 복잡 미묘하긴 하다. 문명 전달의 관계 전환, 침략전쟁, 그럼에도 다시 시작한 교역…….

이러한 관계 변화의 한가운데에 교토가 있었다. 천 년 넘게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한 도래인(이주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단행했던 곳이며, 윤동주와 정지용 등 우리 유학생들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노동자로 동원된 뒤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한일관계사의 권위자인 정재정 교수가 교토의 곳곳을 다니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그곳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은 받아들인 것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설사 문화’고,
일본은 받아들인 것을 꼭꼭 쌓아 두고 우려먹는 ‘변비 문화’다?!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두 나라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어떻게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됐는지 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교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을까?

- 교토는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 등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그들이 일본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 무가와 천황 간 정권 교체의 중심에 있었기에 이 정권 교체가 일본과 이웃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보여 준다. 또한 교토는 수도의 지위를 잃고도 거듭 변신을 꾀하며 발전해 왔는데, 이를 위한 교토시민의 다양한 노력을 볼 수 있다.
-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벌어졌던 곳이며, 세력가들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을 때 이곳에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이 담긴 유적·유물이 많다. ‘교토에서는 발에 차이는 게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 임진왜란의 시작점이기에 우리와는 악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과 고종황제를 황제 자리에서 쫓아낸 장본인인 메이지 천황의 묘가 있는 곳으로, 순종황제는 그 묘를 참배하는 능욕까지 겪었다. 우리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윤동주, 송몽규, 정지용 등이 유학했고,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일했던 곳이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활동과 행적을 읽을 수 있다.
- 지금도 시내에 1,600여 개의 사원과 400여 개의 신사가 성업하고 있는 곳으로, 일본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느낄 수 있다.

* 책속으로 추가
메이지 천황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따라서 ‘메이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의 잠재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무덤이 교토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도쿄에 유학했을 때 하라주쿠 역[原宿驛] 근처에 있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 그의 무덤인 줄 알고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멀고 먼 자갈길을 걸어서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메이지 천황의 무덤은 교토의 동남쪽 후시미에 있다. 메이지의 모모야마 어릉[桃山御陵] 묘역은 그 자체가 큰 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후시미 성이 그 근처에 복원되어 있고, 교토에 처음으로 수도를 정했던 간무 천황의 무덤도 그 옆에 있다. 일본 문화사의 시대구분에서 도요토미 시기를 모모야마 시기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일찍부터 일본의 역사를 대표할 만한 명당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