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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덕수궁 광복 80주년 기념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 (2025.12.19)

클리오56 2025. 12. 20. 17:4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관람을 마치고 덕수궁으로 이동하였다.
현재 전시중인 광복 80주년 기념 <<향수, 고향을 그리다>>를 관람하기 위해서이다. 

 

이 블로그에서의 해설은 모두 미술관 사이트에서 인용하였으며, 개인적 감상의 평은 없다.

광복 80년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국토의 상실과 재발견,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이산,
폐허에서의 생존, 재건의 희망이 새겨진 이 땅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 노스탤지어)는 한국 근현대 문학과 미술에서 시대의 질곡을 짙게 머금은 주제이다.
고향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이자 마음의 세계로서, 문학과 미술에서 향토이자 조국, 낙원, 또는 영원한 그리움의 세계로 표출된다.
이 전시는 근대 산수에서 풍경화로 변모하는 근현대미술의 양식적 흐름을 중심으로
노스탤지어를 표상하는 작품들을 향토
, 애향, 실향, 망향이라는 고향을 향한 네 개의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부 : 향토 – 빼앗긴 땅

이번 전시는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 일제강점기에서 출발합니다.
서양화의 도입과 함께 한국의 근대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시기, 조선미술전람회는 수많은 화가의 등용문이었습니다.

1922년 처음 개최된 공모전 성격의 이 전람회에서 출품작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르는 풍경화였는데요,
조선미전에서 인기를 끈 당시의 풍경화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유럽식 인상주의의 영향과
식민지를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선이 뒤얽혀 있었습니다.
전람회의 심사를 맡은 일본 화가들은 이 땅을, 문명에 때 묻지 않은 향토, 순수하고 원시적인 고향의 이미지로 바라봤습니다.
자신들이 잃어가는 향토에 대한 이상향을 식민지 조선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시기의 화가들이 그린 향토 풍경이 이상향으로서의 고향만을 담아낸 것은 아닙니다.
민족의 정서를 고취하고 정체성을 일깨우는 공간으로서의 향토,
진정한 조선을 표현하기 위한 예술적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복잡하게 얽혀있었습니다.

 
이인성 <사과나무> 1942

이인성은 1930년대 한국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당대에는 ‘조선 양화계의 거벽’이라고 불릴 만큼 큰 명성을 얻었는데요,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탁월한 재능으로 25살에 조선미전 추천작가가 될 만큼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당시 주류였던 향토색 짙은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도시적인 미감과 취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942년 작 ‹사과나무›는 안동에 있는 처가의 과수원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대구의 향토 특산물인 사과나무가 마치 초상화의 주인공처럼 화면 가득 채워져 있죠.
자연의 형태를 충실히 재현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조선미전에서 인기 있었던 정물 풍경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무 밑의 그늘에서 쉬고 있는 닭은 향토적인 서정성을 담아내고 있죠.

하지만 구성과 색조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미의식과 조형의식을 드러내는데요,
내리쬐는 햇볕과 그림자는 황토색 계열의 색채에 변화를 줌으로써 표현돼 있습니다.
특히, 탐스럽게 열린 사과 열매는 하나하나 세심한 관찰력으로 단단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세잔이 정물화로 그린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죠.
일본화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조선의 색감과 정서를 재해석하고 탐구했던 이인성은,
대구 수채화를 한국 근대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우신출 <영가대> 1929

우신출은 부산 초기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히고 부산의 자연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제19회, 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교직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평생 부산의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영가대는 우신출의 최초 유화 작품으로 석축 위 전차와 전신주를 담고 있다.
이런 투박하지만 현장을 충실히 묘사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며 현재는 사라진 장소의 과거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2부 애향 – 되찾은 땅
광복을 맞으며 우리 화단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커다란 과제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풍토와 기후, 지형의 생생한 기운을 전하려는 실험과 모색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소재와 색채, 미의식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 역사적 전통을 지닌 지역의 산수 풍경화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민족의 문화와 백두대간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조형성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비극적 현실을 떠나 서구로 유학을 가는 화가들이 생겨났고, 국제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이들에게 조형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바로 각자의 고향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이 사랑하고 그리워한 고향의 풍경이,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예술적 배경이자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종여 <지리산 조운도> 1948

정종여가 1948년에 완성한 ‹지리산조운도›는 광활하게 늘어선 지리산 봉우리들이
아침 구름에 싸여있는 광경을 넓게 펼쳐진 화면 위에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정종여는 산과 바위의 질감을 붓으로 표현하는 전통적인 준법을 탈피해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먹을 흩뿌리는 발묵 기법과 서양화의 표현 기법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을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 화가들은 일본회화의 영향을 극복하는 동시에 중국의 전통적 화풍이 가진 관념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시대의 회화 형식과 내용을 모색했는데요, 정종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그린 풍광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웅혼한 기상으로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국토였습니다.

이상범 <효천귀로> 1945

청전 이상범의 작품, ‹효천귀로›가 보여주는 국토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명이 싹트는 새벽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산맥과 힘차게 솟은 나무는 광복의 기운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처럼, 해방 이후의 풍경화와 역사화는 전통적인 기법과 사실적인 묘사를 융합해
우리 국토의 모습을 스펙타클한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이 같은 흐름은, 해방 이후 우리 산수를 그린 풍경화에 민족적인 자각과 정신이 담기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작가가 광복 당일에 제작했다는 화기를 남긴 효천귀로는
농부가 새벽 안개 자욱한 들판 언덕을 넘어 소를 몰고 귀가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1937년 작 귀로와 유사하게 목가적 유현함과 황량한 적요미가 혼재되어 있으나, 화풍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바위와 봉우리는 묵면과 반점 모양의 먹으로 표현되고,
전봇대 같은 수직적 나무와 세필로 그린 갈대 등에서 청전양식으로의 전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응노 <덕숭산전경> 1950년대

이응노는 해방 전후 한국 화단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은 예술가입니다.
1930년대 일본 유학 중에도 고향 홍성과 충청도 지역을 여행하며 많은 스케치를 남겼는데요,
이응노는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풍경을 그리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가 그리는 풍경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1940년대에 즐겨 그린 것은, 고향 주변의 실경을 향토적 정서에 담아 그린 산수 풍경화였습니다.
‹공주산성›, ‹공주풍경›, ‹고향집›, ‹홍성월산하›,‹수덕사› 같은 그림들이 여기에 속하는데요,
이응노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경치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수간 구도’로 풍경을 구성하고,
붓질은 경쾌하게, 색감은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청명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로 들어오면, 이응노의 그림은 다시 변합니다.
1950년대 전반에 그린 ‹고향집› 1, 2을 보시면, 먹을 과감하게 뿌리듯 사용하고,
거침없이 힘차게 붓을 놀리고 있습니다.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거칠고 분방한 표현을 엿볼 수 있죠.
수덕사 인근의 넓은 논밭과 장대한 산세를 화면에 담은 ‹덕숭산 전경›에서는,
먹의 번짐과 투명한 색채가 자아내는 운치와 장식적인 점묘를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양화를 시도합니다.
이후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응노는 현실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새로운 동양화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과정은 해방 이후 한국 미술의 현대화 흐름, 특히 한국적 모더니즘을 이끈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환기

 

김환기 작품은 블로그에 올리지 못합니다. 재단에서 강력한 규제가 있나봅니다.

작품가가 한국 최고인데 사진 하나 못올리는게 이해가 되질않네요.

이런 행태도 가격 상승을 위한 상술인가요??? 

 

1913년 전라남도 기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유년시절을 보낸 섬을 평생 기억하고 그리워했습니다.

고향은 그에게 그리움의 장소이자, 창조성을 이끌어내는 예술의 근원이었습니다.

고향의 집을 주제로 그는 원초적인 바다와 구름, 산과 달, 별 같은 자연의 형태를 감성적인 조형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후 서울과 도쿄, 파리, 뉴욕을 거치며 국제적인 미술가로 활동하지만,

김환기의 작품은 고향에서 시작해 고향에서 마무리되었다고 할 정도로 유년의 섬에 뿌리를 두고 있었죠.

 

1940년에 그린 섬 스케치는 바로 이 고향 섬을 그린 작품입니다.

섬을 나타내는 원형 구조는 항아리의 둥근 형태를 양식화한 것인데요, 섬 안에는 항아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이 배치돼 있죠.

섬의 주민이자 물을 길어 생명을 지키는 존재인 여성은 어머니이자 고향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왼쪽 윗부분에서 날고 있는 새는 그리운 고향을 향해 날아가는 존재일 수도, 혹은 고향을 떠나온 작가 자신일 수도 있을 겁니다.

육지와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의 이 작은 섬은,

이렇듯 김환기의 세계를 이루는 중심축으로써 고향의 기억과 정서를 응축합니다.

 

운월1963년 국제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된 그림으로, 푸른 밤과 하늘, 바다를 하나의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결 모양의 구름 사이로 두 개의 달이 떠 있는데요, 하나는 하늘에, 하나는 바다에 떠 있습니다.

이렇게 중첩된 이미지는 현실 세계를 넘어 인간을 초월한 시공간을 보여줍니다.

 

새벽별은 뉴욕으로 이주한 후 제작한 작품입니다. 어둠을 헤치고 새벽이 밝아 오는 순간의 고요하고 시적인 풍경을 표현하고 있죠. 그리운 고향 하늘에 떠오른 새벽별, 밤바다에 비친 달그림자가 섬마을을 순회하듯 적막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유영국 <산> 1962

유영국은 자연의 형태를 회화로 실험하며 독특한 추상 조형의 세계를 개척한 화가입니다.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그는 특히 ‘산’을 모티프로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유난히 산이 많은 고장에서 자란 그에게,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스며든 심상의 풍경이자 마음에서 떠오르는 감정으로 빚어낸 조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을 제작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산의 형태는 점점 더 단순화된 색면으로 변화하며 추상의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먼저 1962년작 ‘산’을 보시면, 물감의 물성을 강조하는 앵포르멜 양식이 엿보입니다.
반면 1972년작 ‘산’에서는 산의 형태가 색면으로 분할돼 표현됩니다.
68년작은 ‘산’의 형태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평면화시키면서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죠.
1984년작에서는 ‘산’을 마치 전통 산수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옆으로 병렬시켜 펼쳐놓았습니다.
전경과 중경, 원경의 공간감은 극도로 단순화된 조형 언어를 통해 표현됩니다.

 

 전혁림 <통영풍경> 1992

통영 출신의 화가, 전혁림은 그림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유학을 가기 힘들게 되자, 혼자 미술잡지나 서적을 들여다보며 회화의 기본을 익히게 되죠.
광복 후 처음 열린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두 해 연이어 수상하며 작가로 역량을 인정받았지만,
그는 중앙 화단에서 활약하는 대신 고향인 통영과 부산, 마산 등에서 작업하며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조선 민화의 소재와 구성, 색채를 가져오고 민예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했는데요,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청색들녘’에서도 전혁림의 이런 조형의식이 엿보입니다.
화면 위에는 청색과 초록색, 황토색의 색면이 겹쳐져서 모호하고 다층적인 풍경이 만들어집니다.

반면,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광주리를 머리에 인 소녀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험난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구상과 추상을 뒤섞은 화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전혁림은 특히 고향 인근의 자연환경과 전통문화에 기반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요,
1956년 작 ‘달과 돛배’에서부터 2001년 작 ‘바다와 나비’까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통영과 부산 일대의 바다와 항구를 배경으로, 바다와 삶이 어우러진 풍경을 담아냅니다.
이 가운데 ‘항구풍경’과 ‘통영풍경’은 작가의 고향인 통영 항구의 전경을 담아냅니다.

그런데 1970년에 그려진 항구풍경에서는, 하늘과 산, 바다가 채도 낮은 청색과 남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반면, 1992년작 ‘통영풍경’에서는 맑고 선명한 청색을 널찍하게 칠해 하늘빛과 다도해의 푸른 물빛을 표현합니다.
통영 바다의 색이며, 고향의 물빛인 이 코발트블루는 이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자 상징이 됩니다.

 

문신 <고기잡이> 1948

 
제3부 : 실향 – 폐허의 땅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은 또다시 이 땅을 비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피난민들 사이에서, 화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황급히 피난을 내려온 화가들은 그동안 그려온 그림과 재산, 심지어 가족까지 잃은 채
타향에서 예술 활동을 지속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죠.
전쟁을 겪은 화가들은 폐허가 된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했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거친 붓질 속에 쏟아냈습니다.

어두운 색채와 거친 붓질, 해체된 형태로 전쟁의 공포와 충격을 응축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전후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도,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다시 일어서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혹은 변해버린 고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폐허의 미학
한국전쟁 이후 ‘폐허’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가들의 시선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사진이 폐허의 현장을 가장 먼저 재현하기 시작했죠.
화가들은 잡지나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을 통해, 혹은 직접 목격한 현장을 통해 폐허의 광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들이 그린 폐허는, 단순히 무너진 건물이나 파괴된 풍경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겹겹이 쌓인 폐허의 흔적만큼이나 다층적인 경험과 기억, 감정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자 매개체였죠.

한강 다리가 폭파돼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이응노는,
과감하고 빠르고 거친 수묵의 필치와 진한 먹으로 자신이 목격한 서울의 폐허와 폭격장면, 전쟁의 아픔을 그렸습니다.
이종무와 도상봉 역시 전쟁이 지나간 서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작가는 도시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담담한 분위기로 묘사하는데요,
쓸쓸하고 고즈넉한 화면 속에는 잃어버린 일상과 암담한 현실이 담겨 있죠.
 
월남작가 신영헌이 그린 ‘평양 대동교의 비극’은
부서진 대동강철교를 목숨 걸고 건너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반추상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파편으로 조각난 철교의 잔해와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의 형태를 통해 화가는 당시의 비극과 공포를 초현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종무 <전쟁이 지나간 도시> 1950

 

남관 <피난민> 1957

 

신영헌 <평양 대동교의 비극(원제: 대동강의 피격)> 1958

월남작가 신영헌이 그린 ‘평양 대동교의 비극’은
부서진 대동강철교를 목숨 걸고 건너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반추상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파편으로 조각난 철교의 잔해와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의 형태를 통해 화가는 당시의 비극과 공포를 초현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만익 <종점> 1965-1966

한국전쟁은 미술가들에게 고통의 기록자이자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피란의 여정, 그리고 가족과 고향의 상실이라는 주제는
수많은 미술가들의 붓끝에서 시대의 진실로 승화되었다.
이만익은 이 시기 비교적 드물게 리얼리즘적 시선으로 피폐한 현실을 내면의 감성으로 포착한 작가다.
종점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인물은 캔버스 전면에서 저 멀리 판자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은 청계천의 판잣집으로 연결된다.

 

제2의 고향, 피난지의 풍경

한국전쟁은 민족의 절반 이상이 피난을 떠나야 했던 대이동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단한 피난민들의 행렬과 그들이 모여 살던 피난촌과 판잣집,
궁핍과 절망의 시대에도 살아남은 이 시대의 사람들의 풍경을 화가들은 화폭 속에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이수억의 ‘6.25 동란’은 고단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장중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석우의 ‘피난길’ 역시 강한 붓질과 단순화된 인물 묘사를 통해, 힘겨운 피난의 현실을 생생히 전합니다.
남관은 프랑스 유학 이후 제작한 ‘피난민’에서, 어두운 색조와 해체된 형상으로 피난의 공포를 표현했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 활동한 백락종은 철조망을 붙잡고 있는 한 가족을 통해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냅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고단한 삶의 풍경은 판잣집과 피난촌의 풍경으로 형상화됐습니다.
이만익의 ‘청계천’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판잣집만으로 전후 서울의 현실과 도시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한묵과 박수근, 서석규, 박성환 등의 작가들 역시 전쟁 이후의 삶의 자리를 위태롭고 빽빽한 피난촌의 모습을 통해 묘사했습니다.
강운섭의 ‘유성이 있는 밤하늘’은 판자촌 위로 보이는 별빛을 통해 어둠의 시대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올 것을 갈망합니다.

재일교포 전화황이 그린 판자촌에는 한국전쟁 중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작가의 고통이 담겨 있는데요,
빽빽한 판자촌을 배경으로, 사발을 든 고단한 노인과 그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일상은,
평범한 가족의 삶에 스며든 전쟁의 그림자와 상처를 보여줍니다.
한편, 평양에서 국군과 함께 남하한 최영림, 그리고 그와 함께 종군화가로 활동한 장리석은
피난민의 시선으로 제주의 풍경을 어둡게, 혹은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이만익 <청계천> 1964

청계천은 개천 위에 위태롭게 쌓아 올린 판잣집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가난의 고통 속 삶의 의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대의 기록이다.
제13회 대한민국 전람회에서 입상한 이 작품은 전후 리얼리즘을 예고하였다.

 

귀로

귀로, 즉 어딘가로 돌아가는 길은, 단순한 여정을 넘어 집이라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혹은 본질로의 회귀를 상징합니다.
1950년대 이후, 전쟁을 겪은 화가들의 그림 속에도 ‘귀로’가 자주 등장합니다.
서석규의 ‘귀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지치고 병든 사람들을 웅크린 군상으로 표현합니다.
남관과 이달주의 귀로에서는, 생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죠.

천병근의 귀향은 작가가 직접 목격한 귀향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긴 작품인데요,
흰옷을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어둡고 무거워 보입니다.
물에 비친 그림자는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처럼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슬픔,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옅은 희망이 선명한 원색과 검은 윤곽선 속에 녹아있는 듯합니다.
반면, 이만익의 ‘서울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생계를 위해 서울로 향하는 사람들의 북적이는 풍경을 메마른 붓질과 거친 색조로 그려냅니다.

이처럼, 전쟁으로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귀로의 여정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자연과 인간,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며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의지와 그리움, 구원과 성찰을 담아냅니다.

서석규 <귀로> 1950

 

이만익 <서울역> 1962

 

 고향의 봄

한국전쟁은 수많은 목숨을 빼앗고 온 도시와 마을을 폐허로 만든 채 끝났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됐죠.
이 시대의 그림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와 그리움의 정서를 품은 채, 새로운 봄을 염원하며 다가올 미래를 조망합니다.
평소 자연을 즐겨 그린 이상범의 작품 세계에서 ‘복구 (피난에서 돌아와)’는 드물게 현실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황폐해진 농촌의 풍경은 전쟁이 파괴한 것이 도시만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김원의 낙동강 풍경화에는 서서히 빛이 스며들고 향토에는 봄이 찾아옵니다.

이동훈의 ‘농촌의 봄’과 변관식의 ‘무창춘색’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진 향토를 영원한 유토피아처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인승, 송혜수, 임호의 그림들에도 밝고 따뜻한 색채로 그려진 평화로운 산과 들, 강과 바다가 돌아옵니다.

고향의 봄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은, 한강변 일대의 풍경을 포착한 화가들의 그림에도 드러납니다.
박득순은 전쟁 때 폭파된 한강 인도교가 임시로 복구된 모습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풍경화로 기록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봄을 맞았지만, 돌아가지 못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예술은, 이렇듯 과거의 비극을 품은 채 그리움의 정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해 나갑니다.

변관식 <무창춘색> 1955

변관식의 무창 춘색은 전라남도 무창의 봄 풍경을 6폭 병풍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다만 작품 왼쪽 6번째 폭 상단에 1955년 가을 완산을 여행하며 그리다라는 글귀가 있어
실제 현장에서 사생한 경치라기보다는 여행중 떠올린 풍경을 이상향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자리한 돌로 된 아치형 다리 너머로 활짝 핀 복사꽃이 펼쳐져 있는데
이 풍경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변관식은 전주지역을 돌며 떠올린 이상향적 이미지에 전라남도 무창이라는 실제 지명을 붙여 완성했다.

 

제4부 : 망향 – 그리움의 땅

분단이 고착되고 이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향은 점차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향토의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모티프들이었습니다.
이제, 고향의 모습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속의 풍경이자 원형적인 이미지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특히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분단의 현실은 고향의 이미지를 신화나 낙원 같은 이상향으로 변화시킵니다.

가족과 고향을 잃은 채 실향민이 된 월남 화가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원초적 낙원으로 묘사하며 죄의식과 상처에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 합니다.
동시에, 다양한 조형적 시도를 통해 고향의 향토색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며 새로운 예술적 방향을 모색해 나갑니다.
 
 

윤중식 <평화> 1980

평앙 출신의 화가 윤중식에게 한국전쟁은 크나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1951년에 그린 ‘전쟁 드로잉’에서 그는 직접 마주했던 고통의 순간과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듯 남깁니다.
그림에서 윤중식은 젖먹이 딸을 등에 업고 어린 아들의 손을 잡은 채 공습을 피해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때 숨을 곳을 찾아 다른 쪽으로 뛰어간 아내와 큰딸을 그는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다.
더욱이 피난길에서 젖먹이 어린 딸마저 영양실조로 떠나보내고 맙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어린 아들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었죠.
이후 윤중식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화폭 위에 고스란히 쏟아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섬’은 어둡고 차분한 색을 사용해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한층 한층 쌓듯이 그린 나무와 사람들, 마을과 해변, 바다 풍경 속에는
갈 수 없는 고향과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겹겹이 쌓인 채 묻어있습니다.
‘고목’에서는 강렬한 붉은색으로 그려진 거대한 나무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수호신처럼 자리를 지켜온 고목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생명의 기운을 상징합니다.
 
윤중식의 작품에는 비둘기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유년시절 고향집 처마 밑에서 비둘기를 길렀던 작가에게 고향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매개체였을 겁니다.
전시된 그림 중에는 ‘봄’과 ‘무제’, ‘환희’, ‘평화’에서 비둘기를 볼 수 있는데요,
‘봄’에서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한다면,
‘환희’에서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는 비둘기는 평화를 향한 희망과 생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석양빛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 ‘평화’에도 비둘기 두 마리가 등장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와 그를 기다리는 또 다른 새는, 부부의 애정을 상징하며 화면에 온기를 더해줍니다.

 

윤중식 <전쟁드로잉> 1951


전화황 <두개의 태양> 1968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전화황은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서양화가입니다.

그의 이력은 좀 독특한데요, 유년시절 평양에서 회화를 익힌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뒤 화가의 길을 모색하던 중,

무소유 사상을 접하고 불교에 귀의하기 위해 출가합니다.

 

그러다 1939년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향수는 전화황이 그림을 다시 시작한 직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기억 속의 고향 풍경을 담아낸 이 그림을 시작으로, 그는 고향이나 타향의 풍경을 몽환적인 분위기와 색채로 담아냈습니다.

 

1957년에 그린 나의 생가를 보시면, 시골집의 모습이 마치 꿈속처럼 온난한 색조로 아련하게 표현돼 있죠.

격자무늬 창살은 오래된 가옥을 상징하고, 흰색과 회색 저고리는 가족을표현한 듯한데요,

전화황은 이들을 모두 추상적으로 간략히 묘사함으로써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은 생가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조국 분단의 현실과 통일에 대한 염원 역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합니다.

 

만남을 주제로 한 그림, ‘두 개의 태양춘향의 재회조국 분단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특히 춘향의 재회는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듯,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몽환적인 묘사에 담아냅니다.

 

최영림 <낙원> 1970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최영림은 한국전쟁이 터진 뒤, 고향과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950년대 그의 작품 속에는 실향과 이산의 아픔, 가난 속에서 파생된 처절한 고통이 몸부림치듯 절절하게 투영돼 있습니다.

작품 ‘1950.6.25.’에는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여인을 중심으로, 하늘을 향해 몸부림치는 여인,

폭격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 넋이 나간 표정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휴전된 지 20년이 지난 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강렬한 몸짓과 표정 속에 전쟁이 남긴 상흔을 응축시킴으로써 한국 사회에 깊게 남은 트라우마를 보여줍니다.

 

1960년대 들어서면 최영림의 그림 스타일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재혼을 통해 안정을 되찾은 그는, 흙과 모래를 캔버스에 입힌 뒤 그림을 그리는 독자적인 기법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요,

황토색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화면에는 흙과 땅의 질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거칠고 견고한 표면에는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으며,

화면 중간중간 박혀있는 초록, 파랑, 주황의 색점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생동감을 느끼게 합니다.

1970년작, ‘낙원은 옷을 입지 않은 인물을 통해 흙의 질감을 표현함으로써,

우리 모두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소와 아이들에서는 배경에 사용된 흙의 빛깔이 아이들과 소를 한 덩어리로 감싸 안음으로써,

모든 생명체를 대지의 일부인 듯 느끼게 합니다.

 

변시지 <고향> 1980년대

변시지 <귀로> 2012

이중섭 <통영풍경> 1950년대

이중섭 <가족> 1950년대 전반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이중섭 <현해탄> 1954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

문신 <뒷산과 하늘(언덕-구름B)>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