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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2025.12.19)

클리오56 2025. 12. 20. 11:26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 덕수궁관 그리고 과천관을 차례로 탐방하며
여기에는 서울관에서 전시중인 작품들이다. 
덕수궁관과 과천관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게시할 예정이다.
 
2021년 이건희 컬렉션이 기증되어 소장품이 1만점이 넘어서면서
서울관에서는 개관 이래 처음으로 상설전을 선보일 수 있게되어
196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현대미술 대표작가 83명의 86점이 전시되었다. 
 
그중 일부를 업로드하는데 미미상인 블로그의 소개을 많이 참조하여 현장 감상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여러 설명들은 미미상인 블로그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이트를 인용한 것으로
예술 무뢰한인 나의 주장이나 소감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안국역에서 미술관으로 가는 도중 거치는 열린송현녹지광장에 세워진 휴머나이즈 월의 대단한 위용.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전에 예매하였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예매하는게 마음 편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사이트에서의 소개 글

이번 전시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이래 처음으로 선보이는 상설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후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50년 이상,
미술사와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중요한 작품과 아카이브를 수집, 연구해 왔다.
이번 전시는, 11,800여 점에 이르는 미술관 소장품 중 196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 9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져 온 추상, 실험, 형상, 혼성, 개념, 다큐멘터리와 같은 소주제를 중심으로
선별된 대표 소장품들을 통해, 국내외 관객들에게 시대에 따른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다층적으로 소개한다.


한국 현대미술은 한국의 특수한 사회 상황과 문화 변동,
그리고 매체 변화 및 당대 국제 미술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1전시실에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품들이 전시된다.
현대성과 전위의 이름으로 전개되었던 한국 추상미술을 시작으로, 사물성과 행위를 중심으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했던 실험미술,
그리고 예술을 삶의 문맥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형상미술과 민중미술 등을 살펴볼 수 있다.

2전시실은 1990년대에서 2010년대에 이르는 한국 동시대미술의 주요 작품들을 소개한다.
다원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동시대 국제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던 한국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을 비롯하여,
사물과 언어를 중심으로 한 개념적 작품들,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맥락 속에서 현실을 재인식하고자 했던 일련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복잡한 지형도 속에서 엄선된 주요 소장품들을 감상하며 관객들은
한국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변화하고 전개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번 전시는 국제 미술의 흐름 속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전개해 온
한국 현대미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숙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김환기 ‹산울림 19-II-73#307›(1973), 박생광 ‹무속 3›(1980)는 «이건희컬렉션 국외 순회전»
(미국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미국 시카고박물관, 영국 영국박물관) 출품으로
2025년 9월 7일후에는 김환기 ‹여름 달밤›(1961), 박생광의 ‹무속 16›(1985) 로 교체될 예정입니다.

조성묵 <메신저> 1996년

입구로 들어서면서 좌측에 조성묵 작가의 의자가 전시되어 있다.
의자이지만 앉을 수 없는게 특징인 작품, 벽을 뚫고 나온다.
작가는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하였던 선구자적인 개념미술가이다.
한국이 처음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진출한게 1995년이니까.  

 

조성묵(1940-2016)은 '메신저(Messenger)'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의자들을 제작하였다.
<메신저>(1996)는 일상적인 주제가 갖는 현실성과 실재성을 이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러한 방법은 작가의 의도를 쉽게 전달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인 매스(Mass)와 볼륨감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선조구조(線條構造)의 방식에 의존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의자에 인간의 신체적 잔재들인 살과 뼈의 이미지를 포함시켰다.
또한 의자의 형태를 대형화함으로써 의자가 상징하는 기념비성(Monumentality)을 보여주고 있으며,
20세기라는 시대적 특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화의 빈곤이나 소통의 차단 등 온갖 상황의 모순과 부조리를 표현하고 있다.

1960년대 추상미술의 경향

 

유영국 <작품> 1965년

유영국은 한평생 우리나라의 산과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분인데
삼각형이나 일반적인 산의 표현이 아닌 유영국 특유의 산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볼때 형태미 보다는 색감을 보는게 재밌다고 한다.
일찌기 일본 유학에서 추상미술을 섭렵한 뒤에 한국 자연의 추상적 표현에 고민하여 산과 추상의 그림을 계속 그린다.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은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으며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에게서 처음 유화를 접했다.
강압적인 학교 교육에 불만을 품고 중퇴하여,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가장 진보적인 미술학교 중 하나였던 도쿄 분카학원(文化学院)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재학시절 일본인 학우들과 함께 N.B.G. 그룹(Neo Beaux-Arts Group)을 결성하여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고,
독립미술협회(独立美術協会),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会) 등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는 최고상을 받았다.
귀국 후 1947년 김환기와 함께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新寫實派)를 결성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상경하여,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을 주도하며 한국화단의 중추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64년 6월 《제3회 신상회전》에 참여한 후 대부분의 그룹 활동을 그만두고 작업에 몰두했으며 이후에는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유영국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하였으며, 기하학적 추상이 주를 이룬다.
1960년대 작품에서는 견고한 구조와 역동성이 강하게 드러나며, 1967년부터 약 10년간은 화면이 밝아지면서,
기하학적 도형이 중첩과 병렬로 반복해 등장하는 서정적 기하 추상이 등장했다.
1980년대부터 작고하기 전까지의 작품은 부드럽게 순화된 색채 속에서, 추상성과 구상성이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작품>은 원색의 색채와 마티에르에 의한 표현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960년대 유영국의 작품은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견고한 구조와 작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발현하는 표현성이 공존한다.

 

이성자 <천년의 고가> 1961년

 

제목이 천년의 고가, 오래된 옛날 집을 그리는데 1961년 작품이다.
작가가 처음에 회화, 조각, 도자를 배워가다가 60년대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추상 미술의 기법을 만들게 됩니다.
반듯반듯 집을 그린게 아니라 붓질을 반복적으로 하여, 작가가 말하기로는
마치 이국 땅 남의 나라 프랑스에서 씨를 심고 농사 짓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색깔들을 반복적으로 했다.
그런 반복된 붓질로 오히려 형태를 무너뜨려서 추상 미술로 만든 작품이다.

 

일무(一無) 이성자(李聖子, 1918-2009)는 일본 도쿄짓센여자대학(東京実践女子大学) 가정과를 졸업하고,
1951년 파리로 건너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서 수학했다.
이성자는 스승 앙리 고에츠(Henri Goetz)의 영향으로,
구상적인 묘사보다 자유롭고 개성적인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추상에 심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는 주로 인물이나 정물, 풍경 등을 그린 구상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점차 추상 작업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에는 고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며 ‘여성과 대지’ 연작을 선보였다.
이후, 15년 만에 귀국하여 첫 개인전을 가진 이성자는 가족들에 대한 그동안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중복’, ‘도시’, ‘음양’, ‘초월’ 등의 연작을 통해 재료와 기법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자연’,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우주’ 연작 등으로 보다 확장된 시각을 보여주었다.
60여 년의 화업에서 작가는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자연과 기계 등 대립적인 요소들의 조화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천년의 고가>는 ‘여성과 대지’ 연작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작가는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된 화면에 마치 땅을 파고 곡식을 심듯 붓 터치를 해나가며 정교하게 마티에르를 살리고 있다.
이성자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수용하고 자신이 세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다.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는 작업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나는 여자이고, 여자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대지이다.”라고 언급하였듯이,
작가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 여성의 삶을 대지에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윤명로 <문신 64-1> 1964년 

뭔지 이런 고민 같은 걸 다 담아내서 이런 앵포르멜적인 끈적끈적하고 형체는 없지만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만 남아있는 것 같은 이런 추상 미술들을 하다가 나중에 정제된 단색화로 넘어가게 됩니다.

 

윤명로(1936- )는 1950년대 후반 한국 화단을 풍미하였던 유럽 앵포르멜(Informel)에 영향 받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전후 유럽의 정신적 공황 속에서 탄생한 서정적 추상회화인 앵포르멜은
당시 한국의 민족상잔의 비극적 상황과 맞아 떨어져 윤명로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작가도 자신의 유사 앵포르멜적 작품을 “젊은 혈기와 항거의식에 근거한 자연 발생적 결과물”이라 말한바 있다.
대칭적인 구도의 <문신 64- I>(1964)은 두꺼운 물감 위를 손가락으로 자유롭게 휘저은 듯한 굵은 흔적을 드러내며,
어두운 색조와 거친 물질감은 실존적 의식의 응집을 보여준다.

김종학 <작품 603> 1963년

김종학 작가가 예전에는 이런 작품을 하다가 꽃 그림으로 넘어갔다.
이 작품은 그냥 보면 꼭 해골처럼 보이고 뭔가 뼈들이 맞닿아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정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냥 실존의 고민을 보여주는 듯한 이런 작품을 하다가 야생화의 생명성을 느끼면서 설악산의 화가가 되었다.
 
김종학(金宗學, 1937‒ )은 산, 꽃, 나비 등과 같은 자연을 즐겨 그린 작가이다.
현대미술에서 다소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이러한 소재를 독특한 조형의식으로 구체화하여 '원시적 건강성'을 제시하고 있다.
60년미술협회 멤버로서 1960년 국가 주도 전시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반대하여
덕수궁 담벽에 가두전 형식으로 전시를 한 바 있으며 이후 박서보, 김창열과 함께 악뛰엘 그룹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팽배해있던 사회적 갈등과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한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작품 603›은 김종학이 파리로 떠나기 전의 작품으로,
심리적 억압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한 인간의 실존적인 몸부림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근원적인 형상을 연상시키는 형태와 어두우면서도 격정적인 붓 터치를 이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성우 <색동 만다라> 1967년

전성우 작가는 예전에 인터뷰를 했을 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수집하신 한국의 유물을 지키는 창고지기였다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쪽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작가로서의 전성우는 색채와 그 색채의 추상성을 한국적 주제로 은은하게 표현하는 그런 작가셨습니다.

 

전성우(1934- )의 <색동 만다라>(1967) 작품은 작가가 1960년대의 많은 동료작가들과 제작하였던

앵포르멜(Informel) 경향의 작품들에서 동양적인 소재를 사용한 안정된 화면으로 작품의 경향이 변모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완벽한 기하학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삼각형의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형태들로 미루어 보아

한국 초기 추상미술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였던 기하학적 추상의 조형적 특성에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인두 <만다라> 1977년

하인두(河麟斗, 1930-1989)는 1948년 남관의 창림미술연구소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 홍익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졸업하지 못했고, 서울대학교에 편입하여 1954년 졸업했다.
1956년 부산에서 미술동호회 청맥을 결성하며 초기에는 후기 인상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작품을 제작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앵포르멜 형식의 작업을 하던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기하학적 색면 추상의 옵티컬 아트 계열의 작품을 제작했다.
1960년대 말부터는 불교의 선(禪) 사상을 심화해 파상적으로 물결치는 형상과 확산하는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여
1974년부터 그의 대표작인 ‘만다라’ 연작을 발표했다. 

1970년대부터 하인두는 본격적으로 전통 예술에 눈을 뜨며 정신의 계승을 강조했다.
이 시기에 그는 불교 조형물에 내재한 전통미와 자아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시작하며 작품 세계의 전환을 맞게 된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중후반 파리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한국미와 전통의 탐구에 더욱 집중했다.
<만다라(曼茶羅)>는 하인두의 ‘만다라’* 시리즈 중 한 점으로,
전체적으로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이용하여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다.
이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전통 건축물의 단청에서 보이는 문양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만다라(曼茶羅)는 밀교(密敎)에서 발달한 그림으로,
부처가 경험한 것과 우주의 깨달음과 진리를 도식화하여 표현한 불화(佛畫)이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1974년

미미상인님은 이 작품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표현하였다.
이우환 작가는 김환기의 뒤를 잇는 한국 미술 시장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작가이다. 이 작품은 50억도 가능하다고 언급.
작품을 꼭 그림값으로만 얘기하지 않더라도 한국이면 한국, 일본 현대 미술사,
미국이나 프랑스의 활동 모두가 다 인정받는 정말 세계적인 작가이다. 

 
이우환 작품에 중요한 건 관계성인데 이것을 그냥 쭉쭉 그려서 일필휘지 힘 있다, 이런 차원을 조금 넘어서서
선 하나가 여기에 그어짐으로써 그다음 선의 위치가 그려지니까 각각의 선들이 위치하고 있는 관계성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작품 위에 파란색이 시작되는 지점을 보는데, 저 지점에서 나는 작가의 힘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찍을 것인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탁탁.
 
모노하(物派)의 이론과 작업의 선구자인 이우환(1936- )의 <선으로부터>(1974)
흰 캔버스 바탕에 파란색 선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길게 내려 그어가면서 그 흔적을 담은 것이다.
단조로운 화면구성과 단색의 색채는 담백한 동양적 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선들은 하나로 완성된 개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그 관계는 운율적이다.
굵기와 형태가 거의 동일한 선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선명한 푸른색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차 그 자취가 사라지면서 희미해진다.
이러한 선은 결과보다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내재된 본질적인 의미를 부각시킨다.
이 작품의 근본적 요소인 선은 동양적인 기(氣)와 생명력의 근본이자 출발점이 되고,
따라서 작품은 마음을 비우고 선을 긋는 일회적인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무위자연(無爲自然)’ 상태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울분의 60년대를 지나서 그리고 한국성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를 넘어서 
70년대가 되면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실험적인 전위적인 그런 것에 대한 고민들이 많아진게 70년대거든요.
70년대 추상 미술 단색화들이 이제 시작됩니다.
 

하종현 <무제 73-1> 1973년

우리가 전시장에서 많이 본 작품들은 배압법이라고 해서
그림 뒷면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내서 앞으로 베어나온 물감을 그려내는 그런 작품들이 유명한 작가이신데
그의 70년대 초 작업들 중에는 이렇게 용수철 철조망을 활용한 작업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영롱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는데 철조망 작업을 했을 때는 분단된 나라에서 철조망이 상징하는 것,
그 고통스러움이 떠올랐고 철조망과 비슷하게 철제 소재의 용수철을 이용한 이 작품은 
용수철이 멀리서 보면 되게 일렁일렁하는 효과로 인하여, 너무나도 찬란한 그래서 찬란한 슬픔 같은 참으로 예쁜 작품입니다.

 
하종현(1935-)은 앵포르메(Informel) 경향의 작품으로 화단에 등장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과감하게 새로운 화풍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구성적 추상작품을 창작하며 물질성에 강한 집착과 '손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후 젊은 작가들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70년대에는 전위 미술단체였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출범시키고
리더로 활동하면서 대범하고 다양한 실험미술을 선보였다.
작품활동의 주요 개념이었던 물질성과 손 작업의 중요성은 1970년대 오브제(Object)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긴 패널에 스프링을 부착한 (1973)은 당시 선보인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흰 패널 바탕에 부착된 스프링의 일정한 배열은 기존에 그가 탐닉했던 기하학적 추상의 배열을 떠올리게 해주나
중간 중간 튀어나온 고르지 않은 스프링의 존재는 용수철의 물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물질과 동화되어 어떠한 서술적, 구상적 표현도 거부한 채
화면의 표면 그 자체가 만들어 내느 질감과 그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박서보 <묘법 No.43-78-79-81> 1981년

1970년대 후반의 작품이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 중에서도 초기 묘법이라고 불리는데
표면에 이렇게 뿌연 칠한 다음에 마르기 전에 연필로 빠르게 그린 박서보의 대표적인 연필 묘법 작업
마르기 전에 빨리 그리려면 한 번에 다 그려야지, 그리다가 여기까지 중간 왔는데 말라버리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작가가 움직이는 그 행위가 실제 작품 앞에서만 느껴진다.
 
박서보(朴栖甫, 1931- 2023)의 <묘법>연작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1982년 이전까지 작가는 특정한 색채와 테크닉을 고수했다.
 
그는 크림색에 가까운 유채를 캔버스 전체에 칠한 다음, 그 바탕색이 마르기 전에 위에서 아래로 선을 그었다.
아무런 색채도 없는 그 선들은 움푹 패인 자국만 남기는데,
이는 캔버스에 작가 자신만의 '침묵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형근 <다색> 1989년

방탄소년단의 RM이 좋아하는 작가라는데
윤형근 작가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앨범 커버까지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윤형근은 김환기의 사위로 알려져있다.
70년대 추상 미술을 한참 모색하던 작가들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뭔가 나만의 표현법에 대해서 되게 고민을 했었고, 그 시절 작가는 노자, 장자 뭔가 한국적 사상에 많이 연구를 했었고
그래서 만들어 낸게 하늘의 색을 닮은 블루, 땅의 색을 닮은 앰버,
그 두 색을 섞어서 만든 천지문이라는 이런 검은 기둥을 작품에 사용했습니다.
이 검은 기둥들의 배합이 서양 미술에서는 오히려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게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고 감동적이지. 서양에 마크 로스코가 있다면 한국엔 윤형근이 있다.

 
윤형근(1928-2007)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역사적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연이어 유신체제에서도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연후인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시작했다.
마대 위에 자연스럽게 우뚝 선 검은 형상을 그린 초기작품 이후
스스로‘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던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나아갔다.
면포나 마포 그대로의 화면 위에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와 땅의 색인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작품들이다.
이후 2007년 작고할 때까지 단순하고 소박하며 푸근하고 듬직한
한국 전통의 미학을 세계적으로 통용될만한 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내었다.

<다색>(1989)은 그의 화력이 최고의 수준에 다다랐을 때 제작된 것이다.
그는 1970년대‘천지문’이라고 할만한 구도의 작품들을 여러 점 제작하였으나,
1980년대 중후반에는 새로운 조형실험들이 다양하게 나오게 된다.
그 중에는 이 작품처럼 듬성한 마포의 천 위에 주로 (청색의 제외하고) 다색만을 써서
엷게 전면적으로 화면을 가득 메운 작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감을 엷게 한번 바른 후 거의 말랐을 때 또 덧바르는 형식으로 반복하여 제작되었는데,
물성은 옅게 깔리면서도 화면에는 놀랍도록 무한한 깊이감이 창출된다.
물감과 오일의 비율, 천의 탄성과 흡수력에 대한 이해가 절정에 달하였고, 이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화가의 경지를 보여준다.
어떤 ‘크기’에 대한 생각, 오래된‘시간’에 대한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정상화 <무제 74-F6-B> 1974년

정상화 작가도 하종현, 박서보, 윤형근과 함께 단색화의 대가로 불리우는 작가인데
이 작가의 작업 특징은 물감을 많이 바르고 나서 이것을 격자로 나눠서 마른 물감이 이렇게 접어서 격자를 만들면 떨어지거든,
그 물감이 떨어진 자리를 그대로 놓고 또 그 위에 덧칠을 하고 그러면서 생기는 특유의 공간감~
실제 현장에서 봐야지만 작가의 흔적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정상화(1932- )는 두터운 물감을 바른 화면을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 작은 네모꼴로 구획지게 하고
그 네모꼴 하나하나를 해체했다가 다시 붙여 가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네모꼴은 화면을 균열시키며 평면이면서도 '촉감적'인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전통창의 격자형태, 담벽의 벽돌무늬를 연상시키는 화면의 균열은 은은한 백색의 색감과 함께 한국적인 미감을 드러낸다.

 

김기린 <안과밖 > 1983

이건 아무리 사진 찍어도 용을 써도 안 나와. 그냥 빨강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와야지만 이 안에 색의 점이 깔려 있다는게 보여.
이 작가는 같은 색을 이용해서 색깔로 이렇게 다 점을 찍어 놓은 다음에 그 위에 덧칠을 하니까
이 앞에 찍었던 물감의 흔적이 이제 도드러지면서 보이는 색 그 자체를 보여준다. 진짜 가까이서만 봐야한다.
 
김기린(金麒麟, 1936-2021)은 1970년대에 검은색을 화면에 첩첩이 쌓아 올리는 작업을 했는데, 이것은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그의 작품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변화는 원색의 등장이다. 김기린은 단순히 색채를 평면적으로 발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색채를 화면에 올린 후 가로와 세로로 선을 긋고 그렇게 해서 생긴 작은 사각형 속에 하나하나 점을 찍었다. 이렇게 되면 화면 위에 또 다시 색채가 입혀지는데 이런 제작 방식은 외부에 보이는 것과 그 내부에 숨어있는 것 사이에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이는 작품의 제목인 <안과 밖>에서 암시되어 있으며, 김기린이 '음-양'이라 부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와 같이 주황색이 화면에 등장할 때 그는 색채가 검게 침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순색(純色)을 사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검은 회화에서 평면이 작품의 주제가 되었던 것처럼 색채를 작품의 중심으로 등장시킨다.

 

김창열 <물방울> 1978

한국인들이 무척 사랑하는 김창열 작가는 가난해서 캔버스를 새로 살 돈이 없어 가지고
전날 그린 작품이 망쳤다 싶으면 그 작품을 물로 씻어서 말려서 다음날 새로 쓰곤 했는데
어느 날 물로 씻어서 말려둔 그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와 저걸 한번 그려 봐야겠다.
그래서 1974년부터 물방울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 물방울이 처음에 그렸던 거는 커다란 물방울 하나였는데 나중에는 이 영롱한 물방울을 많이 붙여넣는데
이 붓질이 물방울에 가장 반짝이는 부분 그리고 물방울의 테두리, 그리고 물방울의 테두리가 형성하면 노랗게 생기는 빛의 그림자
그리고 물방울 자체가 만드는 또 어둑한 그림자.
그 환영의 표현, 즉 일루전, 약간 눈의 착시같은 현상으로 만들어내는 생생한 물방울이다.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김창열(金昌烈, 1929-2021)은 1948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며
1956년부터 현대미술가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였고,
1965년부터 뉴욕에 4년간 머물며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69년 뉴욕에서 열린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한 후 미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였다.
1973년에 첫 파리 개인전을 통해 ‘물방울’ 연작을 본격적으로 발표했으며
이후 2021년 타계하기 전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했다.
1993년 국립현대미술관, 2004년 쥬드폼국립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 등
국내외 각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16년에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김창열은 1970년대 초반에 캔버스를 재사용하기 위해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을 제거하던 중
캔버스에 맺혀 반짝이는 물방울을 보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1972년에 크고 투명한 물방울을 하나 그려 넣은 〈밤에 일어난 일(Événement de la nuit)〉을 시작으로
화면의 부분 혹은 전면에 수많은 물방울을 배치하는 등 다양하게 연출해 왔다.
작가는 초기에 빨리 마르는 성질을 가진 스프레이 래커로 물방울을 나타냈지만 쉽게 풍화되어
이후 작업에서는 유화 물감과 붓을 사용해 물방울을 그렸다.
〈물방울〉은 바탕을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사용해 화면 가득 물방울을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물방울들은 화면 전체에 균일하게 퍼져있던 이전의 전면 회화(all-over painting) 형식의 작품들과 달리
부분적으로 무리를 이루기도 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실제 물방울보다 더욱 실제처럼 보이도록 하는 표현으로
물방울의 환영과 마포(麻布)의 물질성이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어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서세옥 <사람들> 1989

수묵을 어떻게 현대화로 바꿔 놓을까를 고민했던 작가 서세옥 화백입니다.
요즘은 서도호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수묵추상의 선구자이십니다.
사람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형상. 근데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고 지탱해주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머리와 쭉 뻗은 팔이 집처럼도 보이더라.
나는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쉽게 그린 듯하게 보이지만 고도의 정신성이 보이는 작품.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 1929‒ )은 한국의 수묵 추상을 이끈 작가이다.
1960년에는 한국화 단체인 묵림회(墨林會)를 조직해 기성 동양 화단에 반발하는 전위적인 움직임을 주도했으며
이후 수묵 추상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부터 점, 선 등의 추상으로 수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줄곧 인간의 형상을 탐구하는데 몰두하여
간결하고 함축적인 사람의 모습 또는 군상을 그리는 ‘인간’ 시리즈 작업을 해 왔다.

‹사람들›은 극도로 압축된 선만으로 군중의 움직임과 형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의 이미지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이라기보다는
묵선의 흔적으로 추상화되어 나타나는 관념적 이미지가 묵점으로 표현된 것이다.
생략과 강조 그리고 단순한 붓 한 획의 절묘한 필치로 간략하게 표현된 인물들과 화면에 여백을 남기는
독특한 그의 화풍은 점차 서체적인 세계로 귀결되고 있다.

 

이응노 <군상> 1986년

이응로의 군상. 너무 멋있지? 이게 멀리서 보면 무슨 개미떼인가 싶은데 잘 보면은 사람.
사람들의 몸놀림. 뛰고, 춤추고, 노래하고, 달려가는 듯한 사람의 이미지를 먹의 붓질로만 그리고 머리 하나 탁 찍고.
 1904년생인 이응노 화백은 지금 여기서 제일 앞선 세대의 작가인데
원래는 이분이 동양화를 배웠고 해강 김규진이라는 조선 후기 화가에게서 묵죽을 배웠어.
먹으로 대나무 그리는 법을 배워서 원래는 묵을 참 잘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대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하다 보니까
그게 꼭 사람이 뛰는 모습처럼 보이던 그 장면을 포착해서 군상을 만들었다.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1922년에 동양화가인 김규진에게 전통 회화를 사사했으며,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1924)에서 입선한 후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했다.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画学校) 동양화과에서 수학하고,
혼고회화연구소(本郷絵画硏究所)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1945년 귀국 후에는 반추상적인 묵화(墨畫)를 제작했고, 한국의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1948년부터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8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앵포르멜 등의 국제적인 사조를 접하면서 콜라주(collage) 및 추상적인 묵화를 제작했다.
그러던 중 1967년 동백림(東伯林)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수감 중에도 간장, 밥알, 화장지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사용하여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1969년에 석방된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1970년대에는 문자추상을, 1980년대에는 인물화 연작인 <군상(群像)>을 그렸다.
 
<군상>은 <군상> 연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응노의 후기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대단위의 군상이 200호가 넘는 대형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응노는 1980년대 초반에는 소수의 형상이 춤을 추는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다가
중반 이후부터 대형 화면에 군상이 등장하는 형태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대단위의 군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의 특징을 대표한다.
각기 다른 동작의 인간 형상이 다양한 형태로 군집하며 형성된 화면은 역동적인 운동감을 나타낸다.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화가 이응노, 작곡가 윤이상 등 예술인과 대학교수, 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해왔다며 처벌한 사건이다. 이응노는 한국전쟁 때 소식이 끊긴 아들의 소식을 들으러 동베를린에 간 것으로 인하여 의심을 받아서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년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1969년 3월에 석방되었다. 2006년에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을 조사한 결과, 이 사건은 확대·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곽인식 <작품> 1962년

곽인식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와서 말년까지 일본에서 이제 주로 활동을 하셨는데

이분은 뭔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빚고 이런게 아니라

손대지 않고 만드는 의도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작업, 이런 것에 대해서 고민했고

한편으로는 자연 그 자체를 어떻게 작품으로 끌어들일까도 모색하던 터에 유리라는 재료를 아주 흥미롭게 봤지.

작가님이 이거 하나 만들기 위해서 유리장을 수십장을 깼었대. 작가와 그 물리력의 협업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곽인식(郭仁植, 1919-1988)은 1937년에 일본으로 가서 1941년에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学校)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도쿠리쓰미술협회전(独立美術協会展)에 참여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42년에 귀국했다가 1949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카텐(二果展), 요미우리 앙데팡당(読売アンデパンダン) 등의 단체전에 출품하였으며,

1960년대부터는 거의 매해 1~2회 이상 개인전을 개최하며 독자적인 작품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제2회 시드니 비엔날레(1976) 등 국제전에도 참여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인물을 소재로 구상 작업을 했으며

1950년대에는 신체 이미지를 과장되게 묘사하여 초현실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화면의 마티에르를 살리는 앵포르멜 기법과 모노크롬적 요소를 적용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 위에 오브제를 붙이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는 유리 작품을 시작으로 놋쇠, 철, 종이 등 단일한 오브제를 작품으로 제시하여 사물의 물질성에 주목했다.

그는 1976년부터 돌, 점토, 나무, 종이 등의 표면에 흔적을 남겨 각 사물이 가진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

 

곽인식은 1960년대 도쿄 거리에서 커다란 쇼윈도 유리를 보고

“섬뜩하지만 불가사의한 유리. 투명감이 있고 밉살스러운 만큼 예쁘다. 그러한 유리에 나는 끌린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유리의 물질성에 주목하여 유리 자체를 작품화했다.

우선 그는 깨야 할 유리판의 크기만큼 마당에 땅을 판 후 그 속에 유리를 넣었다.

그 후 쇳덩이를 이용해 유리를 깬 다음에 유리 조각을 주워 패널에 본래의 상태로 세밀하게 붙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균열이 나올 때까지 유리를 깨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작품>은 천이 덮인 패널 위에 원 형태로 금을 낸 유리를 부착하고 철 그물로 고정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곽인식의 유리 작업 중에서 작가의 의도와 가장 잘 맞는 균열의 형태를 보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단일한 소재에 주목하여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곽인식 작품 전체의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그의 물질에 관한 본질적 탐구는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이승택  <고드레 돌> 1956 - 1960

이승택 작가의 고드레 돌, 옛날 사람들은 돌을 매달아서 이렇게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승택 작가가 돌아다니다가 저 고드레 돌이 참 좋아 보여 집에다 매달아 놓으셨대.

돌은 단단한건데 돌을 묶어 놓은 이것을 계속 보다보니까 어느새 돌이 꼭 물컹한 것처럼 보였다는

그 지점에서 착안을 해서 만들어 놓은 개념 설치 작품이다.

멋있지, 근데 이거 잘 보면 하트 같다. 자연물을 가지고 철학적인 개념을 보여주는 작가.

 

이승택(李升澤, 1932-)은 조각과를 졸업한 후 1964년에 기존의 관념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예술을 표방하는 조각 단체인 원형회(原形會) 조각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9년에 한국현대조각회 창립에 참여했고, 1970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와 목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1989년부터는 한국미술협회의 고문을 맡았다.
이승택은 전통적인 조각과 조형 원리를 거부하고 ‘비(非)조각’ 또는 ‘형체 없는 조각’ 작업을 추구했다.

작가는 물질과 개념의 경계마저 해체시키려는 전위적인 정신으로 고정된 소재를 대신해 바람, 불, 물 등

가변적이거나 보이지 않는 비조각적인 요소를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였다.
‘고드레 돌’ 연작은 작가가 대학 시절인 1956년경부터 시작한 작업이다.

고드랫돌은 옛날 한국의 농촌에서 발이나 돗자리를 칠 때 날을 감아 매어 늘어뜨리는 돌이다.

작가는 하천 등에 있는 자연스럽게 생긴 자갈돌들을 모아 홈을 파고 노끈을 묶어 <고드레 돌>을 완성하였다.

작가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오브제(고드랫돌)를 장식 삼아 걸어 놓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딱딱한 돌이 시각적으로 물렁한 전혀 다른 물체로 변환되는 듯한 느낌을 발견하고 이를 작품화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오브제, 개념미술 등의 조형 어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이며

또한 한국의 민속적인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현대미술로 재탄생시킨 작업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박현기 <무제> 1979년

 우리가 보통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를 백남준만 알고 있는데 백남준이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라면

백남준의 작품을 일찍이 보고 우와 저런 걸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했던 한국의 토종파 미디어 아티스트 박현기 작가입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는게 실제하지 않는 걸 마치 있는 것처럼 2차원의 평면에

마치 3차원의 어떤 입체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런 걸 그림의 환영이라고 하는데

이 작가는 그걸 미디어 아트로 보여 줍니다.

돌을 쌓아 놓고 그 돌 사이에 모니터에다가 또 돌을 보여줌으로써요.

모니터가 보여주는 이 돌은 지금 여기 없는 건데 마치 우리는 이 자리에 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거지.

이 작가가 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많이들 알지는 못하시는 거 같은데 꼭 기억해 둬야 될 작가인데

대구에 활동 거점을 뒀을 뿐이지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서 정말 그 시기에 가장 전위적이고 실험적이었던 재밌는 작가예요.

 

박현기(朴炫基, 1942‒2000)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1964년 건축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회화와 건축을 두루 전공한 그는 1970년대 초 대구에서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벌어들인 수입을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유지하는 데에 쏟아부었다.

1973년 대구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백남준의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비디오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74년 이후 당시 가장 전위적인 현대미술 축제라고 할 수 있는 대구현대미술제를 이강소와 함께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이미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를 야외 자연 공간에서 실험하는 작업을 했다.

19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1980년 파리청년비엔날레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이때 발표된 그의 작품은 모니터와 오브제, 그리고 작가의 신체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비디오’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전통적인 동양 정신의 바탕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제(TV 돌탑)›와 같은 그의 비디오 작업은, 한국인이 소망을 비는 의미로

서낭당이나 사찰 근처에 쌓아두곤 하는 돌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실재하는 돌들과 모니터의 영상으로 멈춰 있는 돌 사이에서,

관객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의 구별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이강소 <무제 75031> 1975년 (2016 인화, 오브제: 2016 재제작)  

50년 전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이강소의 작품도 여기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드디어 우리가 이 작품을 실제로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다니~

여기 이렇게 닭 모이통을 놓고 가운데 줄을 매달아서 저기다가 닭을 매달아 놨던거야.

그럼 그 닭과 함께 여기 밀가루와 분필 가루들로 이렇게 뿌려 놓으니까

닭이 물도 먹고, 밥도 먹고, 돌아다니고 그럼 이렇게 막 발자국이 생기잖아.

그러면 그 닭이 그린 발자국의 흔적, 이 흔적 자체를 작업으로 보여줬던게 이강소 작가의 1975년 제목은 없습니다. 무제.

다만 우리가 그 흔적을 통해서 실제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러니까 뭐가 실제이고 뭐가 허상인지에 대해서

한 번씩 고민해 보라는 얘기였던 거고, 이제 파리 비엔날래 초청받은 이강소 작가가 이 작품을 선보이는데

미리 구상했던 이 장면들에 대해서 사진은 박서보가 찍어 주셨다고.

그리고 프랑스 현지에서 닭을 구하는 건 김창열 선생님이 도와주셨다고. 아주 역사적인 작업입니다.

 

1970년대에 설치, 퍼포먼스, 판화,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로 전위미술운동을 전개했던 이강소(李康昭, 1943- )는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무제 75031>을 선보였다.
작가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는 큰 시장이 있었는데 사슴의 뼈를 추려서 약재로 팔거나 닭을 생체로 잡아서 팔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광경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 사슴의 뼈를 이용한 <무제 75032>와 닭을 이용한 <무제 75031>을 출품한 것이라고 한다.
파리 전시에서는 닭의 흔적과 사진 작업만 전시되었는데, 사실 사진은 파리 전시 직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촬영한 것이다.(박서보 촬영) 이강소는 먹이통에 닭을 줄로 묶어 놓고, 먹이통 주변에 석고가루를 뿌려놓았다.

그리고 닭이 돌아다니는 모습과 닭의 흔적을 사진으로 촬영하였다.

 

박석원 <적-응력> 1972년 (나무: 2016 재제작)

실제로 이 작품은 전시되었다가 나의 관람 당일에는 철거되어 없었다. 

 

잘 보면 이게 캔버스 천을 놓고, 네 개의 모서리에 나무를 놓은 거 같이 보이는데

여기서 이게 나무의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이고, 이건 그림자처럼 보이게끔 그려 놓은 것이 실제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만약에 그림자가 여기 생긴다 친다면 이런 그림자는 생길 수가 없지.

빛이 여기 여기 네 군데가 있어야지 요렇게 생기는데.

그러니까 실제할 수 없는 장면 이런 것을 구상해서 설치 작업으로 보여줬던게 이 시대 실험적인 작가들의 모습이었다.

<적-응력(積-應力)>은 1974년 《제1회 서울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업이다.

박석원(朴石元, 1942- )은 캔버스 천에 그림자를 그리고, 4개의 나무토막을 캔버스 천 모서리에 세워놓거나 눕혀 놓았다.

따라서 그림자는 나무토막의 그림자로 보이는데, 그림자들이 모두 천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풍경이다.
제목에는 ‘응력(應力)’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응력’은 물체에 압축, 인장, 굽힘, 비틀림 등 외력을 가했을 때, 그

크기에 대응하여 (원형을 지키기 위해) 재료 내에서 생기는 저항력을 말한다.

즉 작가에 따르면, 공간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곽덕준  <계량기와 돌> 1970(2003 재제작)

 무거운 돌이 얹어져 있는데 이 저울은 0kg면 이건 부조리하다는 거잖아.

우리가 저울은 절대적으로 진리를 말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 저울마저도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는 부조리의 상황.

이런 부조리함을 기사를 쓸 경우 그런 결정은 잘못됐습니다, 틀렸습니다, 

이렇게 지적하기보다 예술가답게 시대적 부조리를 이렇게 지적한 거지.

 

곽덕준(郭德俊, 1937-2025)은 일본태생의 한국작가로서

이전의 <계량기와 돌>에서 계량 도구들에 대해 역설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계량기와 돌>에서 기하학적 사고의 산물인 측정과 계측은 명확하고 자명한 것이지만

곽덕준은 이것이 결국은 관념이 만든 허구이며 무의미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공업제품의 저울 자체를 오브제(Object)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하(物派)의 물성 자체를 작품화하는 특성과 연관 지울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즉물과는 관계가 없는 난센스(Nonsense)의 세계를 통해 그의 냉소적인 세계관을 선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건용 <신체 드로잉 76-2(화면을 뒤에 놓고) / 신체 드로잉 76-6(양팔로)> 1976년

이건용 작가는 1976년에 조건부 예술을 해. 여기서 조건부는 내가 내 몸에 제약을 주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건데, 그냥 이 작품을 딱 봤을 때 뭐라 그러겠어? , 저거 뭐 우리 애도 그리겠는데 이러겠지. 노노. 이건 얼마나 잘 그리고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개념을 그렸느냐가 중요한 건데. 그림은 캔버스를 마주보고 그리는게 보통인데 작가가 거꾸로 생각한 거지. 화판 앞에 서서 거꾸로 선채로 이렇게 그러면서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그린 거지. 왜 굳이 그렇게 했다는 거는 작가들이 이 무렵 실험 미술의 시기를 보냈던 이 작가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모색했었고 그리고 그 모색의 와중에는 어떤 것까지 담겼냐면은 70년대 군부 시대에 제약이 많았지. 할 말 못하고, 하고 싶은 거 다 못하던 시절.

내 몸에 제약을 두고 그리게끔 조건부 그림을 하게 한 거죠.

 

이건용(1942- )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생하여 1967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 전공으로 졸업하였으며,

1982년에 계명대학교 미술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국립 군산대학교 교수로 지냈으며, 현재 군산에서 거주하면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건용은 1969년에 결성되어 현대미술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실제 미술작업의 실천을 긴밀히 연결시키고자 했던

ST집단을 이끌었으며, 또 다른 중요 집단이었던 AG에 주요 성원으로 참여하여 한국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개념미술, 행위미술, 설치작업 등등 새롭고 색다른 여러 가지 시도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견지해온 작가의 행보는

한국 현대미술의 생태계에서 그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에도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며 열정적으로 새로운 작업에 임하고 있는 작가이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그리는 이가 화면을 마주 대하면서 그려낸 결과로 나오지만,

이건용은 왜 화면을 마주보면서 그려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화면 뒤에서, 옆에서, 화면을 등지며, 또 화면을 뉘어놓은 채 이러한 제한조건 속에서 남겨지는 신체의 흔적을 그림 속에 담아낸다.

이와 같은 퍼포먼스의 결과로 빚어진 이미지들은, 독특한 회화언어를 개발하게 된다.

<신체드로잉> 연작은 바로 이러한 방법론을 구사한 회화언어를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다.


<신체드로잉 76-2(화면을 뒤에 놓고)>는 화판을 등지고 팔을 뒤로 한 채 그린다.

베니어판에 등을 대고 뒤로 드로잉하는 작업이다.

오른팔을 최대한 뻗어 위 아래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나가는 과정에서

화면은 작가의 신체 실루엣만 남겨둔 채 오른손의 빠른 행위의 결과물인 선의 궤적들로 채워진다.

화면을 몸 뒤에 세워두고 팔을 몸 뒤쪽으로 뻗어 선을 그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몸의 궤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신학철 <한국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9년

 여기서부터는 이제 80년대 형상 미술의 틀 안에서 민중 미술이라고 해서

사회적 현상, 사회적 부조리, 정치적 억압 이런 것들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메시지를 가진 작품들이 펼쳐집니다.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인데 말 그대로 우리 한국 근대사에 실제했던 사건들과 인물들을 골라주 방식으로 그려서

동학 농민운동이나 625나 정부에 의한 민중에 대한 학살 이런 것들을 다 담은 작품들 무섭지만 이게 우리의 진짜 역사였어.

 

신학철(1943- )은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해온 작가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통하여 다양한 실험미술을 시도했고,

1970년대에는 사진 몽타주(Montage)나 콜라주(Collage)를 사용하여 일상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산업사회와 대량소비사회가 가져오는 물신성을 형상화했다.

한편, 1980년대 이후에는 캔버스로 돌아가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역사를 화면에 담고 있다.

신학철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방식을 기본으로 포토 리얼리즘(Hyperrealism)을 구사한다.

또한 그는 1980년대 후반 <한국 근현대사> 연작의 대상이 되었던

노동자, 중산층,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려낸다.
<한국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9)는 한국 근대사의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저력과 역사적 대세에 대한 낙관성을 명시하는 통일과 화합의 이미지로 낙착된다. 

 

주재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1986년

주재환 작가도 80년대 민중민술의 작가인데 일단 민중 미술은 사회적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엘리트 미술 특유의 완결성 높은 이런 작품보다도 좀 더 투박한 듯하며 일상 용품 등 좀 다양한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라는 작품인데, 요거 노란 거, 오줌 누는 사람으로 보이지.

근데 이게 내려오면 합쳐져서 점점 커져. 계단의 높이는 똑같은데 노란 물줄기는 점점 점점 커져서 폭포가 되는데

뭔가 사회 계층의 구조에서 아래로 올수록 오줌 배설물의 양이 좀 더 많아지는

또 우리가 짊어져야 될 고통이 점점 더 커가는 아랫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

 

주재환(1941- )은 한국 사회의 부패성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작가이다.

그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 잡지, 광고, 사진, 인쇄물, 못쓰는 장난감, 인형, 조화, 테이프, 끈, 버린 액자, 거울 등

소비사회에서 생산되어 넘쳐나는 폐품들을 소재로 작업활동을 한다.

이로 인해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는 예술을 한다는 의미에서 ‘1000원짜리 예술’, ‘가난한 예술’을 하는 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가지각색의 혼합매체로 제작한 작품들은 그 유희성과 사회적인 풍자정신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소비사회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 작가들 가운데에는 미술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행위,

그 결과에서 나타나는 유희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주재환은 이러한 작가군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1986)는 뒤샹(Marcel Duchamp)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2)를 패러디(Parody)한 작품으로,

계단 위에서 떨어지는 오줌 줄기를 통해서 현대 모더니즘 미술의 과도한 신화화를 풍자하고 있다.

 

강익중  <삼라만상> 1984 - 2014

 

이곳 층고가 14m인데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풀샷입니다. 만 개의 그림들이 붙어 있습니다.

설치한게 좀 용하다. 강익중 작가의 작품입니다. 서양에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있었던 그 80년대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86년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을 거치고 난 뒤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제는 어느덧 세계 속의 도시로 도약하면서 작가들의 인식도 좀 더 확장이 되는 거지.

 


강익중
(姜益中, 1960- )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프랫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후
뉴욕을 배경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유학생활 초기에 그는 작업할 시간조차 없는 빡빡한 스케줄 탓에
작은 캔버스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작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3인치 작품(7.6×7.6cm)의 시작이다.
그는 열차 안에서 군상들, 일상의 단편, 영어단어 노트 등을 초소형 캔버스에 문자나 기호, 그림으로 기록하였고,
달항아리, 한글 등 한국적인 소재 또한 즐겨 그렸다.
 
‹삼라만상›은 1만여 점에 이르는 작은 캔버스들이 단위별로 모여 완성된 설치작품이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과 함께한 2인전 «삼라만상: 멀티플/다이얼로그 »에 출품되기도 했다.
3인치의 작은 이미지들은 서로 더해지고 연결되고 화합하면서 거대한 우주, 삼라만상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서로 연결된 모든 세상의 소리를 보는 존재, 즉 ‘관음’으로서 설치된 반가사유상은 크롬 도금된 표면에
벽면에 설치된 작품들이 투영되면서 결과적으로 ‘있으면서도 없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