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독서, 영상

천천히 다정하게 (4): 박웅현 (2025.12.6)

클리오56 2025. 12. 6. 12:35

 

4. 인생을 담다
인생의 풍경 / 사랑의 풍경 / 삶을 대하는 자세 /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시를 감상하는 법을 배우겠다며 본서를 읽는 중 등장 시들을 거의 대부분 옮겨보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들이 작은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어쩌면 글 장난, 말장난 같기도 하여 심지어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소설에 비하여 가슴 깊이 느껴지는 울림이 빈약하다. 아니면 응축된 글귀를 파악하지 못하는 나의 우둔함 때문일수도. 아마도 후자가 더 맞을지도.   

 

174쪽: 인생을 미시적으로 보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열심히 살죠. 물론 결혼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89쪽: 곤줄박이

 

205쪽: 임화의 작품 한 편이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카프 멤버로 활동하였는데 훗날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북에서 처형당했다. 

222쪽: 사랑의 힘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되어 볼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합니다.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100 퍼센트 그 사람 입장이 되어 보고 그 사람을 배려하고 그 사람이 뭐가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의 힘인 것 같아요.

 

233쪽: 누가 힘들다고 할 때는 힘내라, 괜찮다, 잘될거다, 파이팅, 이런 말 보다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영화 보러 갈까? 그런 말이 오히려 진정성 있는 위로였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생각해보면 힘내라고 하는 건 해야 할 몫을 힘든 당사자에게 돌리는 거잖아요. 밥 먹을까, 영화 볼까, 하는 말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힘내라는 말보다 그런 말이 상대를 동굴에서 한 발짝 나오게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훨씬 진정성있는 위로라는 거죠. 

 

236쪽: 버트런트 러셀이 이야기했어요.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라고요. 우리는 그저 생명일 뿐입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풀은 삶의 의미를 따지지 않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삶은 분명 축제입니다. 무의미의 축제. 쿤데라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죠. 지금 이 순간이 축제입니다.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이 눈으로 저 풍경을 바라보고 있고 걷고 웃고 손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여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요. 이것이 축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 외에는 의미 없습니다.

 

244쪽: 임화 <적> 일부 => 이런 허접한 것도 시라고?? 그리고 책에 옮겨둔다는 것도 부끄럽지 않나.  

 

247쪽: Better sorry than safe. 안전한 것보다 미안한 게 낫습니다. 실패해서 미안해질 수도 있지만 그 길을 가는게 낫다, 그러니 미안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어요. 

 

252쪽: 관찰, 통찰, 성찰. 관찰은 시인들이 보듯이 깊이 보는 겁니다. 통찰은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제일 중요해지는 것이 성찰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윗사람이 될수록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죠. 

 

258쪽: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겠다고 작정하면 모든 곳에서 참될 수 있다는 뜻. 내 눈 앞에 보이는 것,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계절 변화도 마찬가지 같아요. 여름이 오면 온전히 여름을 살고 가을이 오면 온전히 가을을 살면 된다. 눈이 올땐 눈이 오는 것에 집중하고,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에 집중한다. 결국 같은 이야기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 (신영호 대표님 블로그에서 옮김) 이 말은 당나라 禪僧 임제의현(臨濟義玄)臨濟錄(임제록)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네가)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 곳이 곧 진리의 자리이다" => 어느 곳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주관을 잃지 말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얘기다. 여기서 주인이라는 말은 '깨어 있는 자'를 말하고 서 있는 그 곳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그 순간, 바로 지금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 선종에게 3번의 손찌검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제윤회를 끊게 했다고 하여 단제(斷際)라는 법호를 받은 황벽스님의 시자였던 낙포원안(834~898)스님은 立處皆眞 대신에 立處卽眞이라 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 바로 지금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감 가지고 살라는 말이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부모형제를 탓하고, 자식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고, 신을 탓하고.... 모든 환경을 탓하여 비관하고 화내고 그러다가 우울에 빠지고, 결국엔 외로움에 고독에 싸여 무너지게 된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다.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이요? 예수님, 부처님이요? 절대로 아니다. 절대 그분들이 당신을 바꿀 수 없다.

 

274쪽: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순간 이건 나와는 닿지 않던 무엇이구나, 이 인연은 나와는 안되는 인연이구나, 이 프로젝트는 나에게는 닿지 않는 거구나, 하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고 털고 일어나야 번아웃이 오지 않는다.

 

 

김사인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고교졸업 30주년> 

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

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

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야 할 시간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갈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날 명에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저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대요' 마누라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아 벌써 그렇게나 됐나' 마음 아득해지는 꿈

30년, 하고 중얼거리며 차가운 거울 앞에 서면

헐거워진 머리칼 너머 주름살 너머 먼 저곳

수1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를 우겨넣은 가방을 끼고

발갛게 상기된 까까머리 앳된 그가 달려간다

30년, 하고 다시 가만히 말해보면

명치끝 어디선가 화아한 박하냄새가 올라오는 듯하다

삭은 젓국냄새도 도는 듯하다

굿은 저녁의 쓰디쓴 소주 한 잔과 뉘우침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마른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도는 듯하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고 교실로 뛰어가는

거울 속 까까머리

그의 새벽 꿈자리가

기뻤는지 슬폈는지

알 길은 없다

===========================================================================================
김사인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
변칠환 <원시와 근시>
 
어린애는 주먹에 쥔 빵 한 조각을 보고
노인은 제가 온 먼 곳을 본다
=======================================================================================

박준 <잠들지 않는 숲> 중에서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

김사인 <꽃>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전남진 <그 사내>

 

저편 유리창 밖에 선 저 사내는 누구인가
나와 같은 옷을 입고
건너편을 노려보는 저편 사내는 누구인가
이쪽보다는 조금 더 어둡고
이쪽보다는 조금 덜 선명한
저편에 서 있는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저기에
저토록 쓸쓸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단 말인가
거긴 춥다고
거긴 위험하다고
이리로 건너오라고
이편 밝은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불러도
지하철만 타면 만나는 그 사내
언제나 저편에 서 있기만 하는
나와 똑같이 생긴 그 사내

========================================================================================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밥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內藏寺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

황지우 <망년>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뒤편 미루나무 숲으로

가시에 긁히며 들어가는 저녁 해;

누가 세상에서 자기 이외의 것을 위해 울고 있을까

해질녘 방바닥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는 자도 있으나

이제 얼마나 남았을꼬

아마 숨이 꼴깍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좀더 남았을 텐데, 생각하겠지만

망년회라고 나가보면 이제 이곳에 주소가 없는 사람이 있다

동창 수첩엔, 벌써 정말로 졸업해버린 놈들이 꽤 된다

배 나오고 머리 빠진 자들이

소싯적같이 용개치던 일로 깔깔대고 있는 것도

아슬아슬한 요행일 터이지만

그 속된 웃음이 떠 있는 더운 허공이 삶의 특권이리라

의사 하는 놈이, 너 담배 안 끊으면 죽는다이, 해도

줄창 피우듯이 또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 잊는다

=====================================================================================

김사인 <뉴욕행>

딸년은 제 사촌들과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슬슬 이 땅 떠나 이륙하고
손바닥만 한 창으로 엄마! 아빠!
소리치며 빠이빠이 하고
새끼들 얼굴 창에 비칠 때마다
'오냐 잘 댕겨온나' '편지해라'
같이 소리지르며 손 흔들어대는데

한 바퀴 돌 때마다
열심히 고개 내밀고 에미 애비 찾아쌓는
그것들 보니
하이고야, 제법 그럴듯하게
코 찡하고 가슴 써늘하더라
그러나 슬며시 겁나더라야
부산행 서울행보다
뉴욕행 빠리행 타겠다고 떼쓰는 저것들
나중에 정말 뉴욕행 빠리행 해가지고
오도 가도 안하면
그때 심정 어쩔까나

어디다 말도 못하고 걱정되더라
부산 금강공원
500원짜리 뺑뺑이 비행기에
딸년은 실어놓고

===============================================================================

전남진 <눈물 젖은 테이프>                                                

 

 강남 뒷골목
 리어카 노인에게서 삼천원짜리 가요 테이프를 샀다
 스물한 곡이 들어 있는 '장터 경음악2' 표지엔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은 가수의 그림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정지되어 있다
 그래도 노인은 정품 테이프만 판다며 깎을 마음이 없는 내게 깎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울긴 왜 울어'
 '홍도야 울지 마라'
 '목포의 눈물'
 '백마야 울지 마라'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한 곡에 백사십이원짜리 눈물을 정품으로 흘리며
 리어카는 노인을 데리고 술집 붐비는 곳으로 간다
 나이 든 취객들을 울리러 간다.

======================================================================================
전남진 <월요일은 슬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전 열 시 이십칠분의 햇살은 오전만큼의 기울어진 그림자를 만들고

내 그림자도 그 기울기로 천천히 기울다 어느 기울기에서 사라지면

그 때서야 나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그런 나는 화장실에 앉아 오늘이 월요일이란 사실에 놀라며

내가 앉아있는 이 곳에서 내 생은 짧게 혹은 느리게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꿈꾸지 않은 모습으로 쉴새없이 진행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저항도 소용없는 이 지독한 시간의 레일 위를 달려

지하철에서 쏟아져나와 다시 되돌아갈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지독히 짧은 하루 동안의 휴식에도 나는 일주일만큼의 자유를 느끼려 했던 것일까

일주일을 보상받으려 내 휴식은 그렇게 발버둥쳤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 생의 월요일은 내 생의 일요일만큼의 숫자로

일요일의 자유를 무참하게 부셔내는 그 모진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인데

같은 숫자의 자유로도 나는 월요일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또, 오늘이 월요일이란 사실에, 나는

지난 날 애인을 잊듯, 싱싱했던 그 연애를 잊듯, 매정했던 결별을 잊듯

그렇게 일요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시 월요일에 감금되어 슬픈 현재를 감내하고 있는 것인데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내 일생이 이렇듯 일요일에 마약처럼 취했다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약을 구하기 위해 월요일에게 손을 내밀어

가련한 얼굴로 또한 며칠을 버티게 되더라도, 일요일은 내게 위대하였다고

 
================================================================================
임화 <지상의 詩>


태초에 말이 있느니라……

인간은 고약한 전통을 가진 동물이다.

행위하지 않는 말,

말을 말하는 말,

이브가 아담에게 따 준 무화과의 비밀은,

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

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

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그러나 지상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가?

신성한 지혜여! 광영이 있으라.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을 가진 것이,

침묵한 행위자인 도야지보다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

그것이 시의 최고의 원리.

지상의 시는

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

지혜의 비극을 구(救)한다.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

김주대 <슬픈 속도 - 도둑고양이3>

 

새벽

아버지의 칼을 피해 도망치던 어머니처럼

고주망태 아버지의 잠든 틈을 타 잽싸게 칼을 숨기던 형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녀석의 그림자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

전남진 <어떤 장례>

 

걸음 앞에서

비둘기는 보폭만큼씩 피해 날았다

불안한 거리의 식사

붉고 작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보도블록에 부리를 찍는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부리에 찍혀 나오는 부서진 양식들

 

사람들의 걸음을 피하던 비둘기가

뛰어가는 아이를 피해 차도로 날아올랐다

순간 자동차가 비둘기를 퉁 튕겼다

날개 없는 비행

마지막 비행을 마친 비둘기 위로

자동차 바퀴가 지나갔다

너무 빠른 불행은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비둘기를 몇 개의 흔적으로 해체시켰다

뒤따라오던 자동차들

바퀴에 비둘기를 묻히며 사라졌다

살을 거칠게 떼어내며

비둘기는 빠르게 생략되었다

비둘기의 살점을 운구하는 자동차 소리만 윙윙거릴 뿐

사람들 잠깐 멈춰 선 거리에 조금 전 비둘기는 없다

 

얼마 전,

바람에 떨어진 물건을 줍던 노점상이 차에 치여 죽었다

 

========================================================================================

반칠환 <결석>

 

흙 속에,

얼음 속에,

바람 속에,

살아 있던 것들 모두 다 꼼지락거린다만

 

가으내 약숫물 뜨러 다니던 그 할머니,

봄날이 저물도록 보이지 않는구나

 

=======================================================================================  

전남진 <늙지 않는 강아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기르던 개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냥 자랐어도 벌써 죽었을 강아지

아직 내 속에 산다​

눈망울 하나 늙지 않는다

아직 어릴 적 그 강아지로 산다​

한밤 갑자기 열이 오른 나를 업은

어머니를 따라 산길을 왔다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이웃 마을 어미 개에도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살기 시작한 강아지​

그날 밤 어둔 산길

어머니 가쁜 숨소리 가슴 뛰는 소리

등 가득 맺힌 땀 냄새 흔들리던 별빛

가물거리던 의식 속으로

그렇게 가버린 강아지

그 강아지 내 속에 산다​

나는 늙어도 그 강아지 늙지 않는다.

========================================================================================

박준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자크 프레베르 <고엽>

 

오,기억해주오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날들을

그 시절 삶은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뜨겁게 타올랐다네

죽은 잎들은 하염없이 쌓이고

너도 알리라.내가 잊지 못하는 걸

죽은 잎들은 하염없이 쌓이고

추억도 회한도 그렇게 쌓여만 가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모든 것을 싣고 가느니

망각의 춥고 추운 밤의 저편으로

너도 알리라 내가 잊지 못하는 걸

그 노래.네가 내게 불러주던 그 노래를

그 노래는 우리를 닮은 노래였네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지

우리 둘은 언제나 함께인 둘로 살았었다

나를 사랑했던 너,너를 사랑했던 나

하지만 인생은 사랑했던 두 사람을 갈라 놓는 법

너무나 부드럽게 아무 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를 지우지

하나였던 연인들의 발자국들을.

 

Jacques Prévert  by  The Dead Leaves
Oh I wish so much you would remember
those happy days when we were friends.
Life in those times was so much brighter
and the sun was hotter than today.
Dead leaves picked up by the shovelful.
You see, I have not forgotten.

Dead leaves picked up by the shovelful,
memories and regrets also,
and the North wind carries them away
into the cold night of oblivion.
You see, I have not forgotten
the song that you sang for me:

It is a song resembling us.
We lived together, the both of us,
you who loved me
and I who loved you.

But life drives apart those who love
ever so softly
without a noise
and the sea erases from the sand
the steps of lovers gone their ways.

 

============================================================================================

도종환 <가을비>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피었던 꽃들이 오늘 이울고 있습니다

 

===========================================================================================

송종찬 <마중>

 

기별도 없이 소낙비 쏟아져 내릴 때

군내 버스 정거장 부근에

토란 잎처럼 피어나던 누나의 비닐우산

들판 가득 마른 연기 번지던 가을

짐수레가 힘겹게 고개를 올라가고 있을 때

산 아래 흔들리던 아내의 작은 등불

입시 끝난 텅 빈 학교 운동장

아랫목에 묻어둔 공깃밥이 식어갈 때

가로등 아래 서리던 어머니의 입김

===========================================================================================
송종찬 <그대의 공화국>

 

사랑이 깊으면 독재가 되더라

아서라 아서라

골백번 다짐해보지만

그대 안의 공화국에

오늘은 삼엄하게 눈이 내린다

건너지 못할 강

미루니무 앙상한 가지에

걸려 있는 녹슨 철조망

잊으라 잊으라

수만 번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북방의 바람에 펄럭이는

그대라는 깃발

============================================================================================

스키터 데이비스 <The End of the World>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more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Why do the stars glow abov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I wonder
why everythings the same as it was
I can't understand no I can't understand
How life goes on the way it does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you said good bye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you said good bye

 

'태양은 왜 저렇게 계속 빛나고 있나요?/ 어째서 파도는 계속해서 해변으로 밀려오는 걸까요?/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세상은 끝났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르는 걸까요?

새들은 왜 계속 노래하고 있나요?/ 왜 저 별들은 아직도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나요? 내가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이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걸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세상이 이전과 변함없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세상이 이전과 똑같을 수가 있나요?

왜 아직도 내 가슴이 뛰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걸까요?/ 당신이 내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 세상은 끝나버렸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르는 걸까요?'

====================================================================================

기형도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이문재 <국수 생각>

툇마루 깊숙이 들어와 안방 천장에서

어룽거리는 오뉴월 햇볕은 모른 척해도 괜찮고

멀리 바다 쪽으로 나아가다 제 발로 멈추는

준평원 게으른 산등성이 위로 스르르 풀어지는

미주항로 비행운의 앞쪽은 짐짓 바라보지 않기로 하고

멸치국물 우려낼 때는 멸치한테 미안하고

애호박 송송 썰 때는 윙윙 대던 벌떼들이 다 고맙고

너무 밝아서 성냥 불꽃이 잘 안 보여도 뭐 괜찮고

정오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것들은

모두 제 그림자에 집중하고 있어서 다들 말끔하고

화덕 한 입 가득 집어넣은 보릿단 타닥타닥

 

늘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음악방송 볼륨은

낮추는 게 좋겠다 몇 번 겪어봐서 알겠지만

아픈 사람이 듣기에는 너무 아픈 좋은 소리들이므로

신갈나무 숲에서 오리나무가 있는 저수지에서

뻐꾸기 뻐꾸기 울 때가 되었는데

뻐꾸기 소리쯤은 버들피리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로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바지락은 바지락바지락 씻어놓았겠다

성난 놈으로만 골라낸 청양고추는 꼬리까지 빳빳하고

보름에 다 와 갈 때 캤다는 바지락 속살하고

이틀 남짓 숙성시킨 반죽하고 고루 탱탱하니

이제 나무젓가락 들고 이마 맞대고 후루룩 후루룩

맑으면서도 맵싸하고 칼칼하면서도 그윽한 국물에다

 

식으면 조금 서글퍼지는 밀가루 내음이 어우러질 것인데

그러할 참인데 이렇게 오뉴월 백주대낮에

혼자 중얼대며 혼자서 바지락 칼국수 끓여먹는

이 중년은 누구인가 이 중년인 것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내와 아들딸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아내와 아들딸 이름 불러보다가 미국 주소 외워보다가

이마에 송글송글한 땀방울 훔쳐대다가 콧물을 훌쩍거리다가

제국항로 비행운 사라진 하늘 한가운데를

올려다보는 회복기 기러기아빠의 한낮―

너무 환해서 캄캄한 한낮의 바깥에서 뻐꾸기 뻐꾸기 운다

 

========================================================================================

천상병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이문재 <생일>

생일 아침

미역국 받아놓고 생각느니

1959년 이래 쉰세 해

쉰세번째 가을

그러고 보니

오늘 나와 함께 태어난

내 죽음의 쉰세 살

내 죽음도 쉰세번째 가을

어서 드시게

오늘은

꾹 참고 나를 보살펴준

내 죽음과

오붓하게 겸상하는 날

일 년 내내 잊고 지내

미안해하는 날

고마워하는 날.

=========================================================================================

송종찬 <바람의 발자국>

성당은 바람을 빚는 공장

두 손을 모으는 기도는 바람이 되어

견고한 벽들을 무너뜨리기도 하지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 찍혀 있는

바람의 발자국을 보았다

누군가의 바람으로 바람이 불고

바람은 태풍이 되어 장벽을 뒤흔들고

벽을 무러뜨린 것은 바람만이 아니었다

동에서 서로 꽃씨가 날리고

녹슨 철조망 위에 빗물이 맺히고

몸은 바람을 만드는 공장

두 손을 모으는 기도는 바람이 되어

겨울 궁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

누군가 꽂아둔 촛불에 얼비치는

바람의 발자국을 보았다

 

============================================================================================

전남진 <뒤돌아보면 아프다> 중에서

 

전단 한장 받아줄 마음 한 장 없이

나는 살았구나

가난보다 가난하게

나는 살았구나

 

============================================================================================전남진 <갑자기 짚은 점자> 중에서

 

무심코 계단 난간에 붙은 점자를 건드렸다

끼어서는 안 될 대화를 엿들은 사람처럼

모르는 여자의 가슴에 손이 스친 것처럼

 

============================================================================================

한승원 <시계 - 열애 일기 1>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먼지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그리고 우리

한 천년의 강물이 흘러간 뒤에

열두 점 머리 한가운데서

너와 나 얼싸안고 숨을 멈추어버린

그 시계

다음 생에는 우리

이 세상 한복판에서 너의

영원을 함께 부둥켜안은 미라가 되자

박새들의 아프고 슬픈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
이문재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3>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허파에 집중하며

가슴에 있는 풍선을 분다고 

생각해보라

 

밥을 넘길 때마다

소화기관을 떠올리며

처음 봄소풍 가는 딸아이

도시락을 싸주는 거라고

 

무엇인가 볼 때마다

다음 생을 위해

사진을 찍어두는 거라고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저 별빛 중 하나가

천 년 전에 출발해

이제 막 도착하는 거라고

이제 막 지구를 스쳐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라. 

 

내 몸과 나는

얼마나 멀고 가까운가.

너놔 나는

얼마나 신비롭고

거룩한 것인가. 

 

========================================================================================

이문재 <산세베리아> 중에서

 

텔레비전을 켜고

나는 나를 껐다.

 

==========================================================================================

도종환 <세월> 중에서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한다

 

============================================================================================

도종환 <종례 시간> 중에서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 주며 가거라

 

============================================================================================

도종환 <책꽂이를 치우며>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이문재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동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어 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2>중에서

 

문은 벽에다 내는 것이다

 

=========================================================================================

송종찬 <겨울을 건너는 법> 중에서

 

긴 어둠의 봉쇄가 끝나고 닫혔던 수문이 열리기 시작할 때 살아 있다고 나도 살아 있다고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던 풀꽃들

 

==========================================================================================

정현종 <아침>

 

아침에는 

운명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른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같은 건 없다

 

=====================================================================================

김사인 <춘곤>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 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

도종환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