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및 소감
시는 가장 응축된 글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저자는 시는 가장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마침 저자는 시를 강독하는 책을 세상에 보냈기에, 시를 좀 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손에 잡았다. 언급되는 시 한편 한편 천천히 음미하겠다. 시간이 다소 걸리고 길어지기에 4편으로 나눠 업로드한다.
5쪽: "행인들이 무신경하게 못보고 지나치는 순간, 세계는 참을성 많은 관찰자에게 그 놀라운 모습을 드러낸다" - 칼 폰 프리시
13쪽: "시를 읽는 데에도, 살아가는 데에도 느림과 다정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천천히 다정하게 다가서 보면 좋겠습니다."
18쪽: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아 삶의 즐거움을 하나 더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일이다. 잘 익어가자. => 시선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전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것들을 주목해서 그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즐거움이 자꾸 많아진다. 이것이 제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
21쪽: 시인과 같은 시선이 우리 내부에 쌓이기 시작하면 우리도 매일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예술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32쪽: 毋不敬. 경건하게 보지 않을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36쪽: 칼 세이건 코스모스 "나무는 햇빛을 생존의 동력으로 삼는 위대한 기계이다. 땅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물을 합성할 줄 안다."
다음 시들은 본서에서 언급된다. 어떤 시는 전문이 아니고 일부이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이 향하였던 부분들을 내포한 시들이다.
| 1. 시인의 시선을 만나다 자연과 사물을 향한 시선 |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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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별빛 <천상병>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갓 한낮의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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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풀의 노래 <이철수>
대승사 산신각 아래 마른 풀 열매가 부르는 겨울 노래를 나는 이렇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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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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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압정 <이문재>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은 날려 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 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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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근황 <함민복>
나무를 기억한다, 사람들 가슴에 늘 푸른 붓이 되던
나무를 사랑한다, 어디서 보나 등은 없고 가슴만 가진
나무를 추억한다, 바람 불 때마다 여린 식물의 뿌리를 잡아주던
나무를 애도한다, 꿈의 하늘을 향해서 서서히 솟아오르던 녹색 분수
나무가 산다 사람들 마을에 사람들처럼
줄을 맞추고 그 길 그 공원의 격조에 맞춰
나무가 산다 아황산가스가 질주하는, 쾍 쾍, 나무가 산다
기름진 시멘트 산에 잡초처럼 나무가 산다 성장력 왕성한
시멘트국에 볼모로 잡혀온 자연국의 사신처럼 나무가 산다
시멘트가 더러 나무로 프룬 문신을 새긴다 시멘트가
나무 반지 나무 목걸이를 하고 뽐낸다 시멘트가 나무를 다스린다
가로수 혹은 담장, 그 푸른 시멘트의 넥타이
철커덕
가로수 혹은 담장, 시멘트가 자신의 목을 처단하는 푸른 오랏줄
지구의 사지가 빳빳이 굳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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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도종환>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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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페르난두 페소와>
내 접시 위에 이 자연의 뒤섞임이란!
나의 형제들인 풀들,
나의 동료들인 샘물들, 아무도
기도를 올리지 않은 성인들....
사람들은 그걸 꺾어서
우리 식탁으로 가져오고
호텔에선 시끄러운 숙박객들이
돌돌 묶인 담요를 메고 도착해서는
별 생각 없이, "샐러드"라고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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廢井 <반칠환>
마른 우물에 마른 샘물만 그득하다
없는 소금쟁이와 없는 미꾸리가 헤엄치니
빈 집 사는 없는 아낙들이
없는 동이 이고 나와 없는 샘물을 긷는다
시멘트 젖무덤에 마른 이끼 희검고
마을 사람들의 젖병이던 타래박이 뒹군다
달님도 제 얼굴 비추던 손거울 하나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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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송종찬>
간밤 폭풍우에 뿌리째 뽑힌
오동나무의 흙 묻은 맨발을 보았다
우리가 잠든 밤에도 물길을 찾아
불빛 들지 않는 골짜기
끝까지 헤매 다녔을 부르튼 발길
가지마다 이파리들을 달고
일평생 걸어왔을 오동나무를 생각하니
비단을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던
어머니가 눈에 밟혀왔다
============================================================================================실이 바늘을 그리워하며 <함민복>
당신을 따라 뜯어진 천을 기울 땐
철없이 즐겁기만 했었지요
이제 당신은 떠나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만 한 땀 한 땀 남았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그에 내 몸이 다 해지면
당신은 또 다른 실을 데리고
저와 같이 지났던 이 길을 가겠지요
그때 당신이 저를 그리워만 해주신다면
그때 당신이 저를 그리워만 해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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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쟁기 <전남진>
쟁기는 녹슬어 몇 년을 세워져 있다.
소용없는 것도 한곳에 오래 있으면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힘을 가지는 것일까
철기 시대 마지막 전사 같은 쟁기
고물장수도 오지 않는다
골동품을 닥치는 대로 사가던 그 사람도
저것은 가져가지 않았다
새벽 들길 나설 때부터 몸 누일 때까지
해가 다르게 늙어가시는 할아버지 곁에서
할아버지의 일생을 지켜보았다
명절이면 유물처럼
아이들의 호기심과 함께 사진을 찍고
소 없는 빈 외양간 흙벽에 낡은 흑백사진처럼 기대어
발아래 떨어지는 녹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할아버지의 젊은 팔이 쟁기를 끌던 그때
그 당당했던 세월은 이제
아이를 보는 할머니처럼
명예퇴직한 가장처럼
한쪽 귀퉁이를 얻어 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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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향한 시선 |
늦가을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앉아
그여자 머리를 감네
울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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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이 <김사인>
57번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나 잘하자'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아가야 <천상병>
해 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어, 사직공원 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 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바람의 앳
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 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왠일일까? 개와 큰 집 대문 밖에서 유리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
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
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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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흙 <전남진>
3호선에서 2호선으로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탈 전철을 향해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
자갈처럼 물살을 가르며 늙은 여인이 앉아 있다
검은 흙이 묻은 더덕을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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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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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향한 시선 |
사랑이 나가다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때1 <반칠환>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고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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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게 말걸기 <이문재>
마음이 통 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요추 3번 4번 5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앞으로 잘할 테니 믿어달라.
부부싸움한 뒤 아내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와 똑같았다
(…)
그러고 보니 산다는 것은 척추를 곧추세우는 것이었다.
중력을 이겨내며 땅을 딛고 일어나 두 발로 서는 것
삶은 다리 허리 머리가 수직해 있는 만큼 삶이었다.
수직이 수평으로 돌아가 있는 만큼 죽음이었다.
(…)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신 메시지를 확인하지만
집 나간 허리는 도무지 연락이 없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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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차 <조향미>
찬 가을 한 자락이
여기 환한 유리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푼다
인적 드믄 산길에 짧은 햇살
청아한 풀벌레 소리도 함께 녹아든다
언젠가 어느 별에서 만나
정결하고 선한 영혼이
오랜 세월 제 마음을 여며두었다가
고적한 밤 등불 아래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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